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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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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하일 2세는 770년경에 태어난 비잔틴 제국의 황제이다. 그는 레오 5세와의 갈등 끝에 황위에 올랐으며, 즉위 후 성상 파괴주의를 유지하면서도 성상 숭배자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의 치세 동안 토마스 슬라브의 반란과 이슬람 세력의 침공으로 제국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군사력을 재건하고 제국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미하일 2세는 아모리아 왕조의 기반을 다졌으며, 그의 통치 체제는 후대에 비잔틴 제국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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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드리드 스킬리체스에 묘사된 미하일 2세
마드리드 스킬리체스에 묘사된 미하일 2세
칭호로마 황제
통치 기간820년 12월 25일 – 829년 10월 2일
대관식820년 12월 25일
이전 통치자레오 5세
다음 통치자테오필로스
배우자테클라
에우프로시네
자녀테오필로스
왕조아모리아 왕조
출생770년
출생지프리기아 아모리온 (현재의 히사르쾨이, 아피온카라히사르, 튀르키예)
사망829년 10월 2일 (59세)
정치
섭정테오필로스
섭정 유형공동 황제
이름
그리스어Μιχαὴλ
그리스어 (음역)Mikhaḗl
별칭ὁ ἐξ Ἀμορίου (아모리온 출신)
ὁ Τραυλός (말더듬이)
ὁ Ψελλός (말더듬이)

2. 초기 생애

미하일 2세는 프리기아의 아모리움에서 태어났다. 카파도키아인 가문 출신으로, 군 복무에 대한 대가로 정부로부터 토지를 받은 농민병 가문이었으며, 아싱가노이파 신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미하일은 장군 바르다네스 투르코스의 부하(''스파타리오스'')로 처음 이름을 알렸는데, 이때 훗날 그의 정적이 되는 레오 5세와 슬라브인 토마스도 함께였다. 미하일은 바르다네스의 딸 테클라와 결혼했다. 803년, 미하일은 레오 5세와 함께 황제 니케포로스 1세에게 반란을 일으킨 바르다네스를 배신했고, 그 공로로 황제의 진영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813년, 미하일은 레오 5세가 미하일 1세 랑가베를 폐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후 정예 부대 익스큐비토르의 지휘관이 되었다.

테클라와의 사이에서는 테오필로스라는 아들 하나를 낳았다. 헬레나라는 딸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여러 사료에서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

2. 1. 레오 5세와의 갈등 및 즉위

미하일 2세는 소아시아 반도 내륙 중심 도시 아모리온 출신으로, 젊은 시절 레오 5세와 슬라브인 토마스 등과 함께 테마 아나토리콘의 장관 바르다네스 투르코스를 섬겼기 때문에 레오와는 친한 사이였다. 그는 아나토리콘의 장관(바르다네스 투르코스인지는 불명)의 딸과 결혼했다. 레오 5세가 황제가 되자 미하일 2세는 근위대장(도메스티코스 톤 엑스쿠비톤)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점차 두 사람의 사이는 험악해져 820년 12월 미하일은 체포되었다. 하지만 마침 크리스마스 시기였고, 미하일의 처형이 하루 연기된 틈을 타 미하일의 지지자들이 레오 5세를 암살하고 미하일이 즉위했다.

3. 치세

미하일 2세는 성상 파괴주의를 지지했지만, 성상 숭배자들과의 화해를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펼쳤다. 황제 레오 5세 아르메니아에 의해 추방된 전 총대주교 니케포루스 1세와 안토니우스, 테오도로스 스투디테스 등의 귀환을 허용했다. 그러나 성상 숭배자들의 이전 지위 복귀는 허용하지 않았고, 성상 복원과 로마 주교와의 관계 재개, 그리고 로마 주교를 모든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해 달라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미하일 2세는 히에리아 공의회(754),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815)에 대한 논의를 금지하며 성상 숭배자들이 콘스탄티노플 밖에서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허용했다. 821년 총대주교 테오도토스가 사망하자, 성상 숭배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성상 파괴주의자인 안토니우스 1세를 실라이온의 주교로 임명했다.

슬라브인 토마스의 반란(821-823)과 이슬람 세력의 침공(824-827)은 미하일 2세의 치세에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3. 1. 슬라브인 토마스의 반란 (821년 ~ 823년)

슬라브인 토마스는 미하일 2세의 즉위에 반발하여 레오 5세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아나톨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부켈라리안 테마, 파플라고니아 (테마), 키비르하에오트 테마 등 테마 지역의 지지를 받았으며, 아바스 칼리파국의 알-마문과 동맹을 맺고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인 욥에게 황제로 대관받아 '콘스탄티누스'라는 황제명을 사용했다.

토마스는 8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트라키아로 진격하여 821년 12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그는 해군 테마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강화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에 의해 저지되었다. 822년 여름, 제국 함대는 그리스의 불을 사용하여 반란군 함대를 격파했다.

토마스 슬라브는 불가리아의 오무르타그의 군대에 의해 패배했다.


823년 봄, 불가리아의 오무르타그가 이끄는 불가르족 군대가 미하일 2세의 요청 또는 자체적인 판단에 따라 토마스를 공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풀게 했다. 불가르족에게 패배한 토마스는 아르카디오폴리스로 후퇴했고, 미하일 2세는 그곳을 포위하여 토마스의 항복과 처형을 이끌어냈다. 824년 봄, 아나톨리아에서 토마스 잔당의 저항이 진압되면서 반란은 완전히 종식되었다.

미하일 2세는 아르카디오폴리스를 성공적으로 점령하여 토마스 슬라브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토마스의 반란 진압 후, 미하일 2세는 콘스탄티누스 6세의 딸이자 성상 옹호론자였던 유프로시네와 결혼하여 통치의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했다.

3. 2. 대외 관계 및 이슬람 세력의 침공

슬라브인 토마스의 반란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방어력이 약화된 틈을 타, 이슬람 세력이 지중해에서 비잔티움 제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824년, 이슬람 세력이 시리아 해안을 습격하여 소조페트라를 약탈했고, 825년에는 칼리프 알-마문이 육해군 합동 습격을 감행했지만 큰 피해는 없었다.

안달루시아 해적들이 크레타 섬에 상륙하여 신속하게 정복한다.


827년경, 아글라브 왕조가 시칠리아 섬을 공격하여 점령하기 시작했고, 비슷한 시기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이슬람교도들이 크레타 섬을 침공하여 점령했다.

3. 3. 종교 정책

미하일 2세는 성상 파괴주의를 지지했지만, 성상 숭배자들과의 화해를 묵인하며 온건한 정책을 펼쳤다. 황제 레오 5세 아르메니아에 의해 추방된 니케포루스 1세, 안토니우스, 테오도로스 스투디테스 등의 귀환을 허용했다. 그러나 성상 숭배자들의 복직은 허용하지 않았고, 성상 복원과 로마 주교와의 관계 재개, 그리고 로마 주교를 모든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해달라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미하일 2세는 히에리아 공의회(754),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815)에 대한 논의를 금지하며 성상 숭배자들이 콘스탄티노플 밖에서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허용했다. 821년 총대주교 테오도토스가 사망하자, 성상 숭배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성상 파괴주의자인 안토니우스 1세를 실라이온의 주교로 임명했다.

미하일 2세는 죽을 때까지 성상 파괴주의와 성상 숭배 사이에서 타협과 중립 정책을 유지했고, 안토니오 총대주교의 지지를 받았다.

4. 평가 및 유산

미하일 2세는 성상 파괴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에 성직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고, 그들은 미하일 2세를 무지하고 교육받지 못한 농부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는 유능한 정치가이자 행정가였다. 황후 테오도라는 남편 테오필로스를 옹호하여 미하일 2세와 그의 아버지에 대한 ''단죄''를 완화시켰지만, 후대의 성상 숭배 기록들은 그들을 매우 비판했다. 헤라클리우스 반란 이후 가장 격렬했던 내전으로 인해 제국 정부는 심각하게 약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아글라브 왕조와의 시칠리아를 두고 벌이는 백 년에 걸친 투쟁이 시작되었고, 알-안달루스의 아랍 해적들에게 크레타를 잃었다. 두 섬 모두 842년 바리 정복뿐만 아니라 남부 이탈리아 해안과 에게해에서 벌어질 미래의 공격 기지가 되었다. 그러나 미하일 2세의 통치 말기에 그는 비잔티움 제국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미하일 2세가 구축한 정부 및 군사 시스템은 그의 손자 미하일 3세 치하의 제국이 아바스 왕조와의 투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비잔티움 제국 궁정 생활의 모든 변동에 견딜 수 있게 했다. 미하일 2세의 직계 후손인 아모리아 왕조는 소위 마케도니아 왕조로 이어져 9세기와 10세기의 비잔틴 르네상스를 열면서 2세기 이상 제국을 통치했다.

그는 레오 5세를 암살하도록 주선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비잔틴 성상 파괴 운동으로 알려진 형태의 성상 파괴 운동을 계속했다. 이 성상 파괴 운동은 첫 번째 운동보다 덜 완고했다. 성상 숭배자들은 우상 숭배 혐의를 받지 않았고, 높이 매달려 (따라서 숭배할 수 없는) 이미지는 교회에 남겨두는 것이 허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상 숭배 성직자들은 확고하게 반대했으며, 특히 레오 5세에 의해 폐위되었지만 미하일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황제의 권위에 맞서 논쟁에서 활동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니케포로스 1세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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