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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칼리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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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바스 칼리파국은 750년에 건국되어 1258년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한 이슬람 왕조이다. 무함마드의 삼촌인 압바스 이븐 압둘 무탈립의 후손들이 세웠으며,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았다. 수도는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겨졌으며, 이 시기는 이슬람 황금기로 불리며 과학, 철학, 문학,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다. 맘루크 군대의 등장과 지방 세력의 성장으로 9세기 이후 쇠퇴하였고,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한 뒤에는 카이로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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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칼리파국
지도 정보
850년경 아바스 칼리파국
850년경 아바스 칼리파국
기본 정보
공식 명칭아바스 칼리파국
로마자 표기al-Khilāfa al-ʿAbbāsiyya
일반 명칭아바스 왕조
국가 유형제국
정부 형태세습 칼리파제
존속 기간750년–1258년
1261년–1517년
건국아바스 혁명
멸망칼리파 직위 이양
수도쿠파 (750–762년)
바그다드 (762–836년, 892–1258년)
사마라 (836–892년)
카이로 (1261–1517년)
공용어고전 아랍어 (중앙 행정), 다양한 지역 언어
종교이슬람교
통화디나르 (금화)
디르함 (은화)
팔스 (동화)
지도자 칭호칼리파
첫 번째 지도자아스-사파흐
첫 번째 지도자 재위 기간750–754년
바그다드 마지막 칼리파알-무스타심
바그다드 마지막 칼리파 재위 기간1242–1258년
카이로 첫 번째 칼리파알-무스탄시르 2세
카이로 첫 번째 칼리파 재위 기간1261–1262년
카이로 마지막 칼리파알-무타와킬 3세
카이로 마지막 칼리파 재위 기간1508–1517년
면적12,600,000 km²
역사
주요 사건아바스 왕조 쇠퇴
주요 사건 날짜861년
주요 사건 2알-라디 사망 및 후기 아바스 시대 시작 (940–1258년)
주요 사건 2 날짜940년
주요 사건 3몽골의 바그다드 포위
주요 사건 3 날짜1258년
주요 사건 4카이로에서 재건
주요 사건 4 날짜1261년
아바스 혁명750년
탈라스 전투751년
분열8세기 - 10세기
부와이흐 왕조의 바그다드 입성945년
셀주크 왕조의 바그다드 입성1055년
몽골 제국에 의한 일시적 멸망1258년
맘루크 왕조의 보호1261년
오스만 제국에 의한 단절1517년
국기
아바스 왕조 검은 깃발
아바스 왕조 검은 깃발
이전 국가
이전 국가 1우마이야 칼리파국
이전 국가 2다부이드 왕조
후속 국가
후속 국가 1사파르 왕조
후속 국가 2사지드 왕조
후속 국가 3파티마 칼리파국
후속 국가 4지야르 왕조
후속 국가 5부와이흐 왕조
후속 국가 6몽골 제국
후속 국가 7카르마트인
후속 국가 8하바리 왕조
후속 국가 9물탄 토후국
현재 국가
현재 국가이라크
시리아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오만
예멘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레바논
튀르키예
아르메니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키프로스
그리스
이탈리아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2. 명칭

الخلافة العباسية|알킬라파툴 압바시야ar
العباسيون|알아바시윤ar페르시아어خلافت عباسیان|칼로파트 아바시온fa영어Abbasid Caliphate
Abbasid Dynasty
Abbasid Empire한자黑衣大食|흑의대식중국어한국어아바스 칼리파국/압바스 칼리파국
아바스 왕조/압바스 왕조
아바스 제국/압바스 제국


3.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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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깃발'''(الراية السوداء|ar-rāyat as-sawdāAr) 또는 '''독수리의 깃발'''(راية العقاب|rāyat al-ʿuqābAr), 혹은 단순히 '''깃발'''(‏ الراية|ar-rāyahar)은 아바스 칼리파국의 공식적인 국기였다. 본래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용하던 깃발 중 하나로, 이슬람 종말론을 대표하는 상징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바스 혁명 당시 우마이야 왕조의 차별 정책에 반발한 이들은 747년 호라산에서 검은색 깃발을 공식적인 상징물로 채택했다.[1] 파티마 칼리파국 등 아바스 칼리파국과 맞섰던 세력들은 각자 다른 색깔의 깃발을 사용했다.[1]

19세기 후반, 영국령 인도에서 발흥한 아흐마드파는 검은색을 상징물로 채택했다.[1] 오늘날 검은색은 그 역사성과 상징성 때문에 범아랍권 국가의 국기들에서 흔히 사용된다.[1]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와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들이 검은색 깃발을 사용하는 것은 아바스 칼리파국처럼 아랍권 전체를 아울러 칼리파 체제를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1]

3. 1. 기원

7세기 무렵, 아랍 군대들은 전장에서 아군을 식별하기 위해 붉은 터번이나 정사각형 깃발 등 표준적인 상징물을 사용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었다.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무함마드의 출신 부족인 쿠라이시족은 검은색의 터번과 하얀색-검은색 혼용의 정사각형 깃발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무함마드는 "훗날 종말의 날이 다가오고 마흐디가 도래할 때, 호라산에서 검은 깃발을 앞세운 군대가 몰려올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라시둔 칼리파국의 4대 칼리파였던 알리는 적의 군대와 맞서 싸우면서 흰색의 깃발을 사용했으나, 훗날 알리를 무찌른 무아위야가 창건한 우마이야 칼리파국 역시 국기로 흰색 깃발을 채택하였다.

우마이야 칼리파국 말기, 우마이야 가문에 의한 이슬람 공동체의 사유화는 코란에 기록된 알라의 뜻에 반한다고 여겨졌고, 무함마드의 일족 출신자만이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아파의 반발이 확산되었다. 이 시아파 운동은 페르시아인 등 정복당한 여러 민족에 의해 일어난 종교적 외관을 덧입은 정치 운동이며, 현재에도 중동의 큰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아랍인과 개종한 페르시아인 등 비아랍 무슬림과의 대립도 있었다. 우마이야 칼리파국에서 비아랍 무슬림은 마왈리라고 불리며, 이슬람교도임에도 불구하고 지즈야(인두세) 납부를 강요당했고, 아랍인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다. 이러한 차별 대우는 이슬람의 원리에도 반하는 것이었으며, 페르시아인 등 사이에서는 불만이 높아지고 있었다.[151]

3. 2. 사용

아바스 혁명을 일으키면서 우마이야 왕조의 차별 정책에 반발한 이들은 747년 호라산에서 검은색 깃발을 공식적인 상징물로 채택했다. 그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국기가 흰색 깃발이라 적군과 확연히 대비될 수 있었고, "종말의 날에 오는 군대"의 느낌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

아바스 칼리파국과 맞섰던 세력들은 모두 그들만의 색깔을 내세웠다. 예를 들어 우마이야의 마지막 칼리파인 마르완 2세는 자신의 군대를 붉은색으로 치장시켜 아바스 군대와 구분했고, 파티마 칼리파국은 흰색 깃발을 공식적인 상징물로 삼았다. 우마이야 칼리파국을 무너뜨린 이후, 아바스 왕조가 수니파 이슬람을 국교로 내세우면서 시아파 이슬람 세력들은 흰색 깃발을 사용했으며, 이후에는 흰색 vs 검은색의 구도가 시아파 vs 수니파의 구도를 상징하는 것처럼 되었다.[1]

시아파 세력들은 아바스 칼리파국의 검은색 깃발이 무함마드가 예언했던 그 검은 깃발이 아니라고 비난했는데, 아바스 칼리파국이 멸망한 뒤에도 멸망의 날이 도래하지 않자 수니파 세력 역시 아바스 왕조의 검은 깃발은 무함마드가 예언했던 그 깃발이 아니라고 인정했다. 그들은 무함마드가 말한 검은색 깃발은 더 클 것이며, 단순한 빛깔의 검은색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다.[1]

18세기 초, 시아파 이슬람의 12이맘파를 국교로 채택한 사파비 제국에 맞서, 미르와이스 호타크가 이끄는 수니파 아프간인들이 검은색 깃발을 상징물로 사용하여 반란을 일으켜 호타키 왕조를 건국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토후국압두르 라흐만 칸 역시 검은색 깃발을 사용했다.[1]

19세기 후반, 영국령 인도에서 발흥한 아흐마드파는 검은색을 상징물로 채택했다. 1939년에 그들의 "처음으로 게양된 국기Liwaa-i Ahmadiyy"에 검은색이 사용되었으며, 아흐마드파 제 4대 칼리파인 미르자 타히르 아흐마드는 흑백의 상징성을 계시와 예언의 개념으로 설명했다.[1]

오늘날 검은색은 역사성과 상징성이 커서 범아랍권 국가의 국기들에서 흔히 사용된다. 아랍 국가들의 국기에서 주로 등장하는 초록색, 흰색, 붉은색, 검은색을 '범아랍색'이라고 부르는데, 이 중에서 검은색이 바로 이 아바스 왕조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범아랍주의의 상징색들 중 하나가 마찬가지로 검은색이다.[1]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깃발


이슬람 극단주의를 주요 강령으로 삼는 테러단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깃발이 검은색인 것은, 아바스 칼리파국처럼 아랍권 전체를 아울러 칼리파 체제를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들 외에도 캅카스 남부의 일부 체첸 무장 투쟁 단체, 여러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도 검은색 깃발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다. 만약 대부분이 그러한 깃발을 상징물로 내세운다면, 아바스 칼리파 체제를 계승하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언급한 '종말의 군대'가 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1]

3. 3. 현대

오늘날, 검은색은 그 역사성과 상징성 덕분에 여전히 범아랍권 국가의 국기들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다. 아랍 국가들의 국기에서 주로 등장하는 초록색, 흰색, 붉은색, 검은색을 묶어서 '범아랍색'이라고 부르는데, 이 중에서 검은색이 바로 아바스 왕조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범아랍주의의 상징색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슬람 극단주의를 주요 강령으로 삼는 테러단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깃발이 검은색인 것은, 아바스 칼리파국처럼 아랍권 전체를 아울러 칼리파 체제를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들 외에도 캅카스 남부의 일부 체첸 무장 투쟁 단체, 여러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도 검은색 깃발을 내세우는 경우가 왕왕 있다. 만약 대부분이 그러한 깃발을 상징물로 내세운다면, 아바스 칼리파 체제를 계승하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언급한 '종말의 군대'가 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1]

4. 역사



아바스 칼리파들은 무함마드의 숙부 압바스 이븐 압둘 무탈립의 후손으로,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이슬람 제국을 건설했다. 이들은 우마이야 왕조와 달리 모든 무슬림에게 평등한 권리를 인정하고, 시아파의 불만을 수용하여 압바스 혁명을 일으켰다.

초기에는 시아파의 도움을 받았으나, 이후 수니파로 돌아섰다. 이는 시아파의 반발을 야기하여 이후 잦은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비아랍 무슬림에게 부과되던 지즈야(인두세)를 폐지하고 아랍인의 특권을 없애는 등 이슬람 교리에 따른 통치를 실현하여 질서 확립을 도모했다.

747년 이란 동부 호라산 지방에서 시작된 반란은 750년 자브 강 전투에서 우마이야 군대를 격파하고 압바스 왕조를 성립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살아남은 우마이야 왕족은 이베리아 반도로 도망쳐 코르도바 칼리파국을 세웠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숙부 압바스 이븐 압드 앗무탈리브의 후손을 칼리파로 삼아, 최전성기에는 그 지배 영역이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까지 미쳤다. 압바스 왕조에서는 아랍인의 특권이 부정되고 모든 무슬림에게 평등한 권리가 인정됨으로써 이슬람 황금기를 열었다.[151]

동서 교역과 농업 관개의 발전으로 압바스 왕조는 번영하였고, 수도 바그다드는 산업혁명 이전 세계 최대 도시가 되었다.[150] 또한, 바그다드와 각지의 도시를 잇는 도로와 수로는 교역로로서의 기능을 강화하여, 그때까지 세계사에서 볼 수 없었던 네트워크상의 대상 제국이 되었다.

압바스 왕조에서는 이집트, 바빌로니아의 전통 문화를 기반으로 아라비아, 페르시아, 그리스, 인도, 중국 등 여러 문명의 융합이 이루어짐으로써 학문이 현저하게 발전하여 근대 과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 문명은 후대 유럽 문명의 모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0세기 전반에 쇠퇴하여 945년 부이 왕조가 바그다드에 입성함으로써 실질적인 권력을 상실하고, 이후에는 유력 세력의 보호하에 종교적 권위로서만 존속하게 되었다. 1055년에는 부이 왕조를 멸망시킨 셀주크 왕조의 보호하에 들어가지만, 1258년 몽골 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그러나 칼리파 지위는 맘루크 왕조에 의해 보호되어 1517년 오스만 제국 술탄 셀림 1세에 의해 폐위될 때까지 존속했다.

이슬람 제국이라는 명칭은 특히 이 왕조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후 우마이야 왕조를 서칼리파 제국, 압바스 왕조를 '''동칼리파 제국'''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4. 1. 아바스 혁명 (750~751)

압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왕조와 달리 도덕성과 통치 방식을 비판하며 차별점을 강조했다. 이라 라피두스에 따르면, "압바스 반란은 주로 아랍인들, 특히 메르브의 불만을 가진 정착민들과 예멘 파벌 및 그들의 마왈리에 의해 크게 지지되었다." 또한, 아랍인들의 혈연 기반 사회 밖에 있으면서 우마이야 제국 내에서 하층민으로 여겨졌던 비아랍인 무슬림, 즉 ''마왈리''로 알려진 아잠에게도 호소했다. 무함마드 이븐 알리는 우마르 2세 통치 시기에 페르시아에서 무함마드의 가족인 하시미트에게 권력을 되돌려주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마르완 2세 통치 기간에 이러한 반대는 압바스의 4대손인 이브라힘 알-이맘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코라산(페르시아 동부) 지방과 시아파 아랍인들의 지지를 받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747년에 체포되어 암살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747년 6월 9일(AH 129년 라마단 15일), 코라산에서 아부 무슬림이 우마이야 지배에 대한 공개적인 반란을 성공적으로 시작했고, 이는 흑기의 깃발 아래에서 수행되었다. 메르브에서 적대 행위가 시작되었을 때 아부 무슬림 휘하에는 약 1만 명의 병사가 있었다. 카타바 장군은 도망치는 주지사 나스르 이븐 사야르를 서쪽으로 추격하여 고르간 전투, 나하반드 전투, 그리고 748년 카르발라 전투에서 우마이야 군을 물리쳤다.

이브라힘은 마르완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이 분쟁은 이브라힘의 형제 압달라가 이어받았는데, 그는 아부 알-압바스 아스-사파흐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750년 그레이트 자브 근처 전투에서 우마이야 군을 물리치고 칼리프로 선포되었다.[10] 이 패배 후, 마르완은 이집트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그의 가족 중 남은 사람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제거되었다.

14세기 초 발라미(10세기)의 타리크나마의 사만 시대 사본은 알사파흐(재위 750–754)가 쿠파에서 충성 서약을 받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시아파의 도움으로 칼리프가 된 아부 알-압바스 앗사파흐는 안정적인 정권을 위해 아랍인 다수파를 포섭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시아파를 배신하고 수니파로 돌아섰다. 이 배신은 시아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하여 압바스 왕조 시대에 시아파의 반란이 반복되는 원인이 되었다.

압바스 가문은 약소 부족이었기에 이라크에서 큰 세력을 가진 비아랍 무슬림, 즉 페르시아인의 지지가 필요했다. 따라서 쿠란에 따라 모든 무슬림이 평등하다는 점을 확인하고, 비아랍 무슬림에게 부과되었던 지즈야(인두세)와 아랍인의 특권이었던 연금 지급을 폐지하여 차별을 철폐했다.

압바스 왕조는 우라마(울레마)(종교지도자)를 판사로 임명하는 등 이슬람교 교리에 기반한 통치를 실현하여 질서 확립을 도모하였다. 정복 왕조였던 아랍 제국이 이슬람 제국으로 변화한 이러한 변혁을 압바스 혁명이라고 한다. 압바스 혁명은 이슬람교, 샤리아(이슬람법), 아랍어를 통해 민족이 통합되는 새로운 광대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4. 2. 권력 장악 (752~775)

아바스 왕조 지도부는 8세기 후반(750~800년) 몇몇 유능한 칼리파들과 그들의 베지어들 아래에서 광대한 제국의 성격과 제국 내 제한된 통신으로 인한 정치적 난제를 해결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행정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202] 특히 알만수르, 하룬 알라시드, 알마으문의 통치 기간 동안 왕조의 명성과 권력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에 와지르의 지위가 발전했다. 처음에는 비서관과 비슷했지만, 아바스 왕조에 가까운 이란계 가문인 바르마크가 사람들이 그 직위를 맡으면서 와지르의 지위는 강력해졌고 하룬 알라시드는 수년 동안 그들에게 국정을 위임했다.[203] 이는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비해 많은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들에게 더 의례적인 역할을 하는 결과를 낳았고, 와지르들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으며, 옛 아랍 귀족의 역할은 페르시아 관료제로 천천히 대체되었다.[203] 서쪽에서는 하룬 알라시드가 이브라힘 이븐 알아글라브에게 이프리키야(현 튀니지 중심부) 지방을 세습 토후령으로 하사하기로 합의하며 아글라브 토후국이 설립되었다.

알마흐디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재개했고, 그의 아들들은 이리니가 평화를 추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했다. 몇 년간 평화가 지속된 후, 니키포로스 1세는 조약을 파기하고 9세기의 첫 10년 동안 여러 차례의 침략을 막아냈다. 이 공격들은 타우루스산맥으로 퍼졌고, 크라소스 전투의 승리와 라시드 자신이 이끈 806년의 대규모 침공으로 절정에 달했다.[204]



또한 라시드의 해군은 키프로스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라시드는 호라산에서 일어난 라피 이븐 알라이스의 반란에 집중하기로 결정하고 그곳에서 사망했다.[206] 동로마 제국이 시리아와 아나톨리아에서 아바스 칼리파국과 싸우는 동안, 칼리파의 군사 작전은 미미했고, 주로 내부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고, 아바스 왕조의 총독들은 더 큰 자치권을 행사했고, 이렇게 증가한 권력을 이용해 그들의 지위를 세습하기 시작했다.[207]

바그다드가 공식적인 수도로 남아있는 동안, 하룬 알라시드는 796년부터 그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락까에 거주하기로 결정했다. 803년, 불명확한 이유로, 하룬 알라시드는 그를 대신하여 통치권을 행사했던 바르마크가 사람들 대부분을 투옥시키거나 죽였다.[208] 동시기에, 몇몇 파벌들은 칼리파국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거나 칼리파국의 먼 부분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라시드와 그의 아들들의 통치는 여전히 아바스 왕조의 정점이라고 여겨졌다.[209]

대내적으로 하룬은 아버지 알마흐디와 비슷한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동생 알하디가 투옥했던 우마이야와 알리가 사람들을 대거 석방하고 쿠라이시족의 모든 정치 집단에 대한 사면을 선언했다.[210] 동로마와의 대규모 적대 행위가 발생했고 그의 치하에서 아바스 칼리파국은 전성기를 맞았다.[211] 그러나 하룬의 후계 분할 결정은 칼리파국의 존속에 큰 타격을 입힌 것으로 판명되었다.[212]

4. 3. 아바스 황금기 (775~861)

하룬 알 라시드(재위 786–809)가 바그다드 궁정에서 샤를마뉴가 보낸 사절단을 맞이하는 모습. 1864년 독일 화가 율리우스 쾨케르트(1827–1918)의 그림(캔버스에 유채).


알마민(809~813) 통치 기간에 주조된 금 디나르


9세기 아바스 왕조와 기타 세계 제국 지도


사마라의 말위야 미나렛


아바스 왕조는 무함마드의 숙부 압바스 이븐 압드 앗무탈리브의 후손을 칼리파로 삼았으며, 최전성기에는 서쪽으로 이베리아 반도, 동쪽으로 중앙아시아까지 지배했다. 아바스 왕조는 아랍인 특권을 부정하고 모든 무슬림에게 평등한 권리를 인정하여 이슬람 황금기를 열었다.

동서 교역과 농업 관개 발달로 아바스 왕조는 번영했고, 수도 바그다드는 산업혁명 이전 세계 최대 도시가 되었다.[150] 바그다드와 각지 도시를 잇는 도로와 수로는 교역로 기능을 강화하여, 이전 세계사에서 볼 수 없었던 네트워크상의 대상 제국이 되었다.

아바스 왕조에서는 이집트, 바빌로니아의 전통 문화를 기반으로 아라비아, 페르시아, 그리스, 인도, 중국 등 여러 문명이 융합되어 학문이 크게 발전했고, 이는 근대 과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 문명은 후대 유럽 문명의 모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5대 칼리프 하룬 알-라시드 시대에 아바스 왕조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여 바그다드는 "전 세계에 필적할 도시"로 성장했다. 인구는 150만 명이 넘었고, 시내에는 6만 개의 모스크와 3만 개에 가까운 함맘(공중목욕탕)이 있었다고 한다. 바그다드는 산업혁명 이전 세계 최대 도시가 되어 유라시아 대상권의 중심지에 걸맞은 활황을 보였다. 한편, 지방 지배는 느슨해져, 789년 모로코 페스에 이드리시 왕조가 건국되고, 800년 튀니지 카이루완에 아미르를 자칭하며 명목상 아바스 왕조의 종주권을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독립 정권이었던 아글라브 왕조가 건국되어 마그레브가 아바스 왕조 통치에서 벗어났다.

하룬 알-라시드는 두 아들에게 제국을 분할 통치하도록 유언하고 809년에 사망했다. 동생은 제국 중추를, 형은 제국 동부를 다스리게 되었으나, 2년 후인 811년에 형이 동부 호라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813년에는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즉위했던 동생 아민(아미ーン)을 처형하고, 마아문(마아문)이라는 이름으로 칼리프에 취임했다. 그러나 마아문은 근거지인 호라산을 떠나지 않아 바그다드는 불안정해졌다. 819년 제국 통치를 위해 마아문이 바그다드로 돌아왔지만, 호라산을 맡겼던 장수 타히르는 독립하여 타히르 왕조를 열고 이란 동부를 지배하게 되었다.

제7대 칼리프 마아문(마아문)은 그리스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칼리프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바그다드에 "지혜의 집"이라는 학교, 도서관, 번역서를 갖춘 종합 연구 시설을 설립하고,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에게 그리스어 문헌의 아랍어 번역을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진행하도록 명령했다. 번역된 그리스 학문 중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이슬람 세계의 철학과 신학에 영향을 미쳤다.

이후 바그다드와 그 주변에는 유력자들에 의해 "지혜의 집"과 유사한 기능을 가진 도서관이 많이 만들어져 학문 연구와 교육의 장으로 기능했다. 바그다드는 세계 문명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문화 중심지 역할을 했다.

마아문(마아문)이 죽자, 836년에 그의 동생 무타심(무우타심)이 즉위했다. 그는 맘루크(군사 노예)를 도입하여 아바스 왕조의 군사력을 회복하려 했지만, 이 군대는 바그다드 시민과 대립했기 때문에 836년에 바그다드 북쪽에 새로운 수도 사마라(사마르라)를 건설하고 천도했다. 이 무렵부터 각지에서 반란이 빈발하여 아바스 왕조의 권위는 저하되었다. 제10대 칼리프 무타와킬(무타와킬) 사후에는 무능한 칼리프가 자주 교체되어 쇠퇴는 더욱 심해졌다.

820년 사만 왕조는 트란스옥시아나와 대호라산에서, 그 뒤를 이은 이란의 사파르 왕조는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호라산 출신 사파리 왕조는 876년 바그다드를 거의 점령했고, 툴룬 왕조는 시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중앙 권력은 약화되고 주변부의 군소 칼리파국들이 강화되는 추세가 계속되었다.[221]

4. 4. 왕조의 분열 (861~945)

분열된 압바스 왕조 제국의 지도. 압바스 왕조 중앙 정부의 직접 통제하에 있는 지역(진한 녹색)과 명목상 압바스 왕조의 종주권을 따르는 자치 통치자(연한 녹색) 하에 있는 지역을 보여줌.


아바스 왕조는 우마이야 왕조와의 전쟁을 지지해온 대부분의 시아파 무슬림들과 갈등을 겪었다. 아바스 지배층은 집권 이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추종하는 시아파의 신념을 부정하고 그들에 대한 어떠한 지지도 거부했다. 그 직후부터 카와리즈파를 추종하는 베르베르인들은 북아프리카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50년 이내에 이프리키야이드리스 토후국마그레브아글라브 토후국, 그리고 이집트의 툴룬 왕조이크시드 왕조가 사실상 독립하여 떨어져 나갔다. 그 동안 아바스 칼리파의 권위는 이미 권력 대부분을 장악한 튀르크계 노예 장군들(맘루크)에 의해, 특히 알라디의 통치 기간 동안 급격히 약화되었다. 중앙 정부의 혼란으로 지방 통제력이 현저하게 감소하자, 각 지역의 토후 및 장군들은 그곳의 정치·군사적인 실권을 장악하고 아바스 칼리파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다. 심지어 바그다드와 가까운 곳에서도 지방 왕조들의 독자적인 통치가 추구될 정도였다. 여러 반란과 지방 왕조들의 독립과 함께 재정 상황 또한 점차 악화되어, 9~10세기 사이에 아바스 왕조의 핵심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사와드 일대의 세수가 매우 감소했다.[30]

820년경 사마니드 왕조는 트란스옥시아나호라산에서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이란의 사파르 왕조가 등장했다. 호라산 출신의 사파르 왕조는 876년 바그다드를 거의 점령할 뻔했고, 툴루니드 왕조는 시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중앙 정부의 약화와 주변 지역의 소규모 칼리파트 강화 추세는 계속되었다.[30]

예외적으로 알-무타디드의 10년간의 통치(재위 892~902년) 기간에는 이집트, 시리아, 호라산의 일부 지역을 다시 압바스 왕조의 통제하에 두었다. 특히 "사마라의 무정부 상태"(861~870년) 이후 압바스 왕조 중앙 정부는 약화되었고, 칼리파트의 여러 주에서 분리 독립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10세기 초, 아바스 왕조는 여러 에미르들에게 이라크의 통제권을 거의 상실했고, 칼리프 알-라디(934~941년)는 "왕자들의 왕자"(''아미르 알-우마라'')직을 만들어 그들의 권력을 인정해야 했다.[30] 맘루크의 권력은 꾸준히 성장하여 알-라디가 비아랍인 무함마드 이븐 라익에게 대부분의 왕실 직무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을 때 정점에 달했다.[10]

알-무스타크피는 944년부터 946년까지 짧은 통치 기간을 가졌는데, 이 기간 동안 데일람 출신의 부이 왕조라는 페르시아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바그다드 관료 조직을 통제하게 되었다. 미스카와이의 역사에 따르면, 그들은 지지자들에게 이크타(세금 징수권 형태의 봉토)를 분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지역적 세속 통제 기간은 거의 100년간 지속되었다.[30]

4. 5. 부와이흐와 셀주크의 통제 (945~1118)

970년경 중동의 부와이흐 왕조


10세기 전반에 아바스 왕조가 쇠퇴하면서 945년 부와이흐 왕조바그다드에 입성함으로써 실질적인 권력을 상실하고, 이후에는 유력 세력의 보호하에 종교적 권위로서만 존속하게 되었다.[150] 부와이흐 왕조 아미르들의 권력에도 불구하고, 아바스 칼리파는 바그다드에 고도로 의례화된 궁정을 유지했으며, 부와이흐 왕조 관료 힐랄 알-사비의 묘사처럼 바그다드와 종교 생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유지했다. 바하 알 다울라의 통치 아래 부와이흐 왕조의 권력이 약해짐에 따라 칼리파는 어느 정도의 힘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칼리파 알 카디르는 『바그다드 선언』과 같은 저술을 통해 시아파에 대한 이념적 투쟁을 이끌었다.[226] 칼리프들은 바그다드 자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수도에서 피트나(fitna)의 발발을 막으려고 노력했으며, 종종 아이야룬과 대립했다.

부와이흐 왕조가 쇠퇴하면서 공백이 생겼고, 결국 오구즈 투르크의 왕조인 셀주크 왕조가 그 공백을 메웠다. 1055년까지 셀주크는 부와이흐 왕조와 아바스 왕조로부터 통제권을 빼앗고 세속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아미르이자 전 노예였던 바사시리가 1056~1057년 바그다드에서 시아파 파티마 왕조의 깃발을 들자, 칼리프 알 카임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그를 물리칠 수 없었다. 셀주크 술탄 토그릴 베그는 바그다드를 수니파 통치하에 복귀시키고 자신의 왕조를 위해 이라크를 차지했다.

다시 한번 아바스 칼리파는 감당할 수 없는 군사력을 가진 세력과 맞서야 했지만, 아바스 칼리파는 이슬람 공동체의 명목상 수장으로 남아 있었다. 후임 술탄인 알프 아르슬란말리크샤 1세 , 그리고 그들의 베지르 니잠 알물크페르시아에 거주했지만, 바그다드의 아바스 칼리파에 대한 권력을 유지했다. 12세기에 왕조가 약해지기 시작하면서 아바스 칼리파는 다시 한 번 더 큰 독립성을 얻었다.

4. 6. 군사력의 부활 (1118~1258)

11세기 말부터 셀주크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1118년 이라크 지방을 지배하던 마흐무드 2세는 이라크 셀주크 제국을 건국하였으며, 아바스 칼리파국도 그 보호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라크 셀주크 제국은 내분이 끊이지 않아 매우 약했고, 이를 기회로 본 제29대 칼리프 무스타르시드, 제31대 칼리프 무크타피 등은 군사 행동을 활발히 하여 이라크 지배 회복을 목표로 했다. 제34대 칼리프 나시르는 호라즘샤 왕조의 알라우드딘 테키쉬를 불러들여 이라크 셀주크 제국을 공격하게 하였고, 1194년 이라크 셀주크 제국은 멸망했다. 이로써 아바스 칼리파국은 반쯤 자립을 달성했지만, 호라즘샤 왕조의 알라우드딘 무함마드와 대립하게 되었다.

1244년 바그다드 아바스 칼리파의 주화


알무스타르시드 칼리파는 셀주크 군대와 맞설 수 있는 군대를 건설한 최초의 칼리파였지만, 1135년 패배하여 암살당했다. 알무크타피 칼리파는 그의 베지어인 이븐 후바이라(Ibn Hubayra)의 도움으로 칼리파의 완전한 군사적 독립을 회복한 최초의 아바스 칼리파였다. 거의 250년 동안 외국 왕조에 예속된 후, 그는 1157년 바그다드 포위전에서 셀주크족으로부터 바그다드를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아바스 왕조를 위한 이라크를 확보했다.[30] 알나시르(사망 1225년)의 통치는 칼리파가 이끄는 수피(Sufi) 후투와(futuwwa) 조직에 크게 기반하여 이라크 전역에서 칼리파의 권력을 회복시켰다. 알무스탄시르는 셀주크 시대 니잠 알 물크(Nizam al Mulk)가 건설한 니자미야를 능가하려는 시도로 무스탄시리야 학교(Mustansiriya School)를 건설했다.

4. 7. 몽골의 침략과 멸망

1206년, 칭기즈 칸중앙아시아몽골 부족들 사이에서 강력한 왕조를 건설했다. 13세기 동안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정복했는데, 동쪽의 중국과 서쪽의 이슬람 칼리파 제국(그리고 키예프 루스 포함)의 많은 지역이 포함되었다. 훌라구 칸의 1258년 바그다드 함락은 전통적으로 이슬람 황금 시대의 종말로 여겨진다.[41]

훌라구 칸이 이끄는 몽골군에 의한 1258년 바그다드 포위 공방전


당시 기록에 따르면 몽골 군인들은 모스크, 궁전, 도서관, 병원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바그다드의 36개 공공 도서관에 있던 귀중한 책들은 찢겨졌고, 약탈자들은 가죽 표지를 샌들로 사용했다.[42] 여러 세대에 걸쳐 건설된 위대한 건물들이 불타 버렸다. 의학에서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귀중한 역사적 문서와 책을 보관하고 있던 지혜의 집(바그다드 대도서관)이 파괴되었다. 티그리스 강이 살해된 과학자와 철학자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는 주장도 있다.[43][44] 시민들은 도망치려 했지만, 몽골 군인들에게 붙잡혀 어린아이조차도 예외 없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했다.

압바스 칼리프 알무스타심은 포로로 잡혀 시민들이 살해당하고 그의 재산이 약탈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몽골인들은 알-무스타심의 피가 흘러 초자연적인 재앙이 닥칠까 봐 두려워했다. 페르시아의 시아파는 카르발라 전투에서 후세인 이븐 알리가 죽은 후에도 그러한 재앙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방 조치로, 그리고 왕족의 피를 흘리는 것을 금하는 몽골의 금기 사항에 따라 훌라구는 1258년 2월 20일 알-무스타심을 카펫에 싸서 말발굽에 짓밟아 죽였다. 칼리프의 직계 가족도 처형되었는데, 몽골로 보내진 그의 막내아들과 훌라구의 후궁에서 노예가 된 딸만이 예외였다.[46]

칭기즈칸의 서정으로 호라즘이 거의 멸망하면서 잠시 압바스 왕조는 안정을 되찾았지만, 몽골의 서진은 기세를 더해 갔고, 몽골 제국의 몽케 칸은 훌레구에게 10만 명이 넘는 군대를 이끌게 하여 바그다드를 공략하게 하였다(바그다드 전투, 1258년 1월 29일 - 2월 10일). 1258년 당시 칼리프였던 무스타심은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항전하였으나 패배하였고, 장남과 차남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 후 7일간의 약탈로 바그다드는 파괴되었다. 바그다드 공략으로 80만 명에서 200만 명의 목숨이 앗아갔다고 전해진다. 이로써 국가로서의 압바스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4. 7. 1. 카이로의 아바스 칼리파국 (1261~1517)

아이유브 왕조에 의해 맘루크 군대가 만들어졌고, 이 맘루크들은 1205년에 맘루크 술탄국을 세우며 권력을 잡았다. 1261년, 몽골에 의해 바그다드가 파괴된 후, 이집트의 맘루크 통치자들은 카이로에 아바스 칼리파국을 다시 세웠다. 카이로의 첫 아바스 칼리파는 알무스탄시르 2세였다. 이집트의 아바스 칼리파국은 종교적인 문제에 국한된 권위를 유지했다. 카이로의 아바스 칼리파국은 알무타와킬 3세가 셀림 1세에게 포로로 잡히며 끝났다.

1258년 바그다드 함락 이후, 1261년 맘루크 왕조 제5대 술탄 바이바르스는 아바스 왕조 최후 칼리프의 숙부 무스타심을 카이로로 초청하여 알무스탄시르 2세로 옹립했다. 칼리프는 바이바르스에게 아바스 가문을 상징하는 검은 겉옷을 입혔고, 바이바르스는 이 옷을 입고 카이로 시내를 행진했다. 이후 250년 동안 칼리프들은 맘루크 왕조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며 술탄의 보호를 받았다.

1517년, 오스만 제국셀림 1세에 의해 맘루크 왕조가 멸망하자, 마지막 칼리프인 알무타와킬 3세는 이스탄불로 이주했다. 이때 이집트 백성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아바스 왕조 칼리프가 2세기에 걸쳐 이집트 무슬림 사회에 뿌리내렸음을 보여준다.

셀림 1세는 알무타와킬 3세 이후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고, 1543년에 알무타와킬 3세가 죽자 아바스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 역사가 이븐 이아스는 이를 "셀림 1세가 저지른 최대의 악행"이라고 평가했다.[152]

순서이름통치 기간사건
38대알무스탄시르 2세1261–1262
39대알하킴 1세1262–1302
40대알무스타크피 1세1302–1340
41대알와시크 1세1340–1341
42대알하킴 2세1341–1352
43대알무타디드 1세1352–1262
44대알무타와킬 1세1362–1377
45대알무스타심1377
복위알무타와킬 1세1377–1383
46대알와시크 2세1383–1386
복위알무스타심1386–1389
복위알무타와킬 1세1389–1406
47대알무스타인1406–1414맘루크 술탄직을 겸한 최초이자 마지막 아바스 칼리파.
48대알무타디드 2세1414–1441
49대알무스타크피 2세1441–1451
50대알카임1451–1455
51대알무스탄지드1455–1479
52대알무타와킬 2세1479–1497
53대알무스탐시크1497–1508
54대알무타와킬 3세1508–1516
복위알무스탐시크1516–1517
복위알무타와킬 3세1517마지막 아바스 칼리파.
오스만 술탄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자
그에게 칼리파직을 선양함.


5. 문화

압바스 왕조 시대에는 다양한 물품과 정보가 활발히 교류하며, 물산뿐만 아니라 문명 교류도 크게 진전되었다. 여러 지역의 문화와 문명을 차별 없이 수용한 무슬림들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 걸쳐 전례 없는 광범위한 세계 문명을 이룩했다. 이러한 세계 문명의 흔적은 아랍어의 확산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이슬람 문명의 일부는 무역과 전쟁을 통해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이는 훗날 산업혁명을 간접적으로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170]

5. 1. 이슬람 황금기

하룬 알라시드(재위: 786–809)와 그의 후계자들의 통치는 아바스 왕조에 위대한 지적 성취의 시대를 가져왔다. 이는 마왈리와 비무슬림의 지지를 확보한 결과이기도 했다. 종교와 민족을 초월한 그들의 관용 정책은, 오늘날 이슬람 세계가 수많은 인재들과 자료들을 보다 더 쉽게 확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슬람 황금기를 개막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85] 특히 아바스 칼리파들이 사산 제국의 행정과 제도 등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룬 알 라시드의 아들 알 마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 페르시아인은 1세기를 통치했고 단 하루도 우리 아랍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가 1~2세기 동안 (페르시아인을) 통치해 왔지만, 단 한 시간이라도 그들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알콰리즈미의 저서에 기록된 이차방정식의 수학적인 해법


이 시기의 이슬람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뿐만 아니라, 인도중국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의 지식을 받아들여 그들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도들은 수많은 그리스어·라틴어 서적들을 아랍어와 시리아어로 번역함으로써 서양에서 끊길 뻔 했던 학문들의 명맥을 이었다.[86][87]

아바스 시대의 가장 유명한 학자들 중 하나는 '''알콰리즈미'''이다. 그는 디오판토스 대신 '대수학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92] 그는 자신의 저서 『키타브 알자브르와 이 무카발라』에서 최초로 일차·이차방정식의 체계적인 풀이법을 제시했고, 현대 대수학의 기본적인 요소를 정립했다. 또한 인도에서 발명된 아라비아 숫자 및 선진적인 수학 체계를 이슬람 세계에 도입했다. 알고리즘대수학 등의 용어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광학의 아버지 이븐 알하이삼


'''이븐 알하이탐'''은 그의 저서 『광학의 서』에서 빛의 내향 이론을 제시했다. 기존의 이슬람 과학자들은 눈에서 빛이 방출되어 사물이 인식된다는 방출 이론을 믿었지만, 그는 외부에서 들어온 빛으로 사물이 인식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시각이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시각 자체가 뇌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했으며, 페르마의 원리로 알려질 "빛 최소 시간의 법칙"을 최초로 언급했다. 그는 '모든 진리는 확인 가능한 절차나 수학적 추론에 기초한 실험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한다'라는 현대 과학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94]

천문학의 발전도 매우 경이로웠다. 알바타니는 알마게스트를 아랍어로 번역하고 정교하게 다듬었으며, 독창적인 우주관을 창조했다. 금환일식 원리의 이해, 황도·적도와 지구 사이 각도 측정, 태양년분점 계산, 삼각함수·접선을 도입한 새로운 천체 움직임 추론법 개발은 그의 업적이다. 이븐 루시드, 나시르 앗딘 알투시, 모아예두딘 우르디, 이븐 알샤티르 등 훌륭한 천문학자들의 업적은 훗날 이탈리아를 거쳐 서유럽에까지 전해졌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이론적인 근거가 되었다.[96]

5. 2. 문학

이슬람 문학은 아바스 칼리파국 시대에 크게 발전했으며, 특히 천일야화와 같은 문학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다. 아랍 문학페르시아 문학 등 다양한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학 세계가 펼쳐졌다.

연애를 주제로 한 이슬람 시 중에는 『라이라와 마주눈』이 유명하다. 이 작품은 원래 아랍어로 쓰였으나, 이란, 아제르바이잔 등 여러 지역의 시인들에 의해 페르시아어, 아제르바이잔어, 튀르크어 등으로 번역되어 널리 퍼졌다.[54] 이 이야기는 훗날 『로미오와 줄리엣』과 비슷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랍 시는 아바스 왕조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특히 중앙 권력이 약화되고 페르시아계 왕조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절정을 이루었다. 아부 타맘이나 아부 누와스와 같은 시인들은 9세기 초 바그다드의 칼리프 궁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알 무타나비와 같은 시인들은 지방 궁정의 후원을 받았다.

하룬 알 라시드 시대에 바그다드는 서점들로 유명해졌는데, 이는 탈라스 전투 이후 제지술이 도입되면서 가능해졌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중국인 제지공들이 포로로 잡혀 사마르칸트에서 최초의 아랍 제지 공장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양피지 대신 종이가 사용되면서 책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서구에서 인쇄술 도입과 비교될 만큼 학문 및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종이는 의사소통과 기록 보존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상업, 금융, 행정에도 새로운 정교함과 복잡성을 가져왔다. 794년 자파 알-바르막은 바그다드에 최초의 제지 공장을 건설했고, 이후 이 기술은 널리 퍼져나갔다. 하룬은 종이에 기록된 내용은 쉽게 변경하거나 제거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정부 업무에 종이 사용을 의무화했고, 결국 바그다드의 상업 지구에는 종이와 책을 판매하는 거리가 조성되었다.

10세기에는 다양한 문예 작품들이 등장했다. 사알리비는 당대 뛰어난 시인들과 그들의 시풍을 『야티마 알-다フル』에 소개했다. 타누히는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좌담의 양식』에 정리했다. 풍부한 설화는 마카마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탄생시켰다. 알-하마자니는 그 재능으로 "바디 우즈-자만"(시대의 경이)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마카마를 창시했고, 알-할릴리가 이를 대성시켰다. 아부르-파라지가 쓴 아랍 음악에 관한 대작 『노래의 책』은 백과사전적인 서적으로, 당시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5. 2. 1. 천일야화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소설은 아바스 왕조 시대에 주로 편찬된 환상적인 민담, 전설 및 우화 모음집인 『천일야화』이다. 이 책은 사산 왕조 시대 페르시아 원형의 아랍어 번역에서 유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인도 문학 전통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다.[51] 이후 아랍,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및 이집트 민속과 문학의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이 서사시는 10세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14세기까지 최종 형태에 도달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야기의 수와 유형은 원고마다 달랐다.[51]

영어권에서는 『천일야화』에 실렸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아라비아 판타지 이야기가 "아라비안나이트"라고 불렸다.[51] 이 서사시는 18세기에 앙투안 갈랑에 의해 처음 번역된 이후 서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52] 특히 프랑스에서 많은 모방 작품이 쓰였다.[53] 이 서사시의 다양한 등장인물들은 알라딘, 신밧드, 알리바바와 같이 서구 문화에서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천일야화에는 유라시아 대륙의 광대한 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상인들의 이야기가 많다. 바스라에서 험한 바다로 나선 선원 신밧드의 이야기는 유명하며, 후대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 걸리버 여행기 등의 모델이 되었다. 그 이야기에는 아프리카 동해안,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으로 향하는 해로를 개척한 용감한 항해사, 상인들의 고난에 찬 항해가 반영되어 있다.

천일야화는 카이로에서 완성되었지만, 그 원형은 바그다드에서 만들어졌다고 여겨진다. 8세기부터 9세기 바그다드의 번영과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다. “하룬 알 라시드의 이름과 영광이 중앙아시아의 구릉에서 북유럽 숲 속까지, 그리고 마그레브에서 안달루시아 , 시나타타르의 변방에 이르기까지 울려 퍼졌다”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처럼, 하룬 알 라시드 시대의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라비안나이트」추가 이야기(1915)의 삽화

5. 2. 2. 다른 작품들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소설은 아바스 왕조 시대에 주로 편찬된 환상적인 민담, 전설 및 우화 모음집인 『천일야화』이다. 이 책은 사산 왕조 시대 페르시아 원형의 아랍어 번역에서 유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인도 문학 전통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51] 아랍,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및 이집트 민속과 문학의 이야기가 나중에 추가되었다. 이 서사시는 10세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14세기까지 최종 형태에 도달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야기의 수와 유형은 원고마다 달랐다.[51] 영어로 번역될 때 『천일야화』에 실렸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아라비아 판타지 이야기는 종종 "아라비안나이트"라고 불렸다.[51] 이 서사시는 18세기에 앙투안 갈랑에 의해 처음 번역된 이후 서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52] 특히 프랑스에서 많은 모방 작품이 쓰였다.[53] 이 서사시의 다양한 등장인물들은 알라딘, 신밧드, 알리바바와 같이 서구 문화에서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다.

연애에 관한 이슬람 시의 유명한 예로는 원래 아랍어 이야기였지만 이란, 아제르바이잔 및 다른 시인들에 의해 페르시아어, 아제르바이잔어 및 튀르크어로 더욱 발전된 『라이라와 마주눈』이 있다.[54] 이것은 후대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매우 흡사한 불멸의 사랑에 대한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아랍 시는 아바스 왕조 시대, 특히 중앙 권력의 상실과 페르시아 계 왕조의 부상 이전에 최고조에 달했다. 아부 타맘과 아부 누와스와 같은 작가들은 9세기 초 바그다드의 칼리프 궁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알-무타나비와 같은 다른 작가들은 지역 궁정으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하룬 알라시드 치세 동안 바그다드는 서점으로 유명했는데, 탈라스 전투를 통하여 제지 기술이 도입된 후 번성했다. 751년 탈라스 전투에서 중국 제지공들이 아랍인들에게 포로로 잡혔고, 사마르칸트로 보내져 최초의 아랍 제지 공장을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이가 양피지 대신 서면 매체로 사용되면서 책 생산이 크게 증가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서구에서 인쇄술의 도입과 광범위하게 비교할 수 있는 학문적, 사회적 영향을 미쳤다. 종이는 의사소통과 기록 보관에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업, 은행 및 공무원에게 새로운 세련됨과 복잡성을 가져왔다. 794년 자파 알-바르막은 바그다드에 최초의 제지 공장을 건설했고, 거기서부터 기술이 유통되었다. 하룬은 종이에 기록된 것은 쉽게 변경하거나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정부 업무에 종이를 사용하도록 요구했고, 결국 바그다드의 상업 지구에 종이와 책을 파는 거리가 생겼다.

천일야화는 카이로에서 완성되었지만, 그 원형은 바그다드에서 만들어졌다고 여겨진다. 8세기부터 9세기 바그다드의 번영과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다. “하룬 알-라시드의 이름과 영광이 중앙아시아의 구릉에서 북유럽 숲 속까지, 그리고 마그레브에서 안달루시아, 시나타타르의 변방에 이르기까지 울려 퍼졌다”라고 기술되어 있는 것처럼, 하룬 알-라시드 시대의 이야기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국제성은 제국 내 각지의 이야기가 모여 만들어진 데서 기인한다. 이야기꾼 셰헤라자드는 페르시아계, 알리바바는 아랍계, 신드바드는 인도계 이름이지만, 루미라는 그리스인, 파랑지라는 유럽인, 하바시라는 에티오피아인, 아프리카 흑인도 등장한다.

천일야화에는 유라시아 대륙의 광대한 네트워크에서 활동하는 상인들의 이야기가 많다. 바스라에서 험한 바다로 나선 선원 신드바드의 이야기는 유명하며, 후대의 로빈슨 크루소의 모험, 걸리버 여행기 등의 모델이 되었다. 그 이야기에는 아프리카 동해안, 인도, 동남아시아, 중국으로 향하는 해로를 개척한 용감한 항해사, 상인들의 고난에 찬 항해가 반영되어 있다.

10세기에는 많은 문예 작품이 탄생했다. 사알리비는 동시대 뛰어난 시인들과 그들의 시풍을 『야티마 알-다フル』에서 소개하고 있다. 타누히는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자신이 보고 들은 설화를 『좌담의 양식』에 정리했다. 또한 풍부한 설화는 마카마라는 문학 장르를 탄생시켰다. 그 재능으로 “바디 우즈-자만”(시대의 경이)이라고도 평가받은 알-하마자니가 마카마를 창시했고, 알-할릴리가 대성시켰다. 백과사전적인 서적으로는 아부르-파라지가 쓴 아랍 음악에 관한 대작 『노래의 책』이 있다. 이들은 당시 사회와 문화를 전하는 자료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5. 3. 철학

이슬람 철학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 중 하나는 "이슬람 문화의 틀 안에서 생산되는 철학적 스타일"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이슬람 철학은 반드시 종교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오직 무슬림들에 의해서만 생산되는 것도 아니다.[55]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그들의 연구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적 교리가 이슬람 세계와 서유럽으로 전파되는 핵심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종종 철학자를 바꾸어 이지티하드 정신에 입각한 활기차고 열띤 토론을 벌였으며, 영향력이 있는 독창적인 철학 작품들을 여럿 집필했다. 그들의 사고는 중세 시대의 유럽 철학자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마침내는 기독교 철학의 한 부분으로 융합되었다.[56]

알킨디, 알파라비, 이븐 시나 등의 사상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신플라톤주의를 이슬람을 통해 유입된 다른 사상들과 결합한다는 발상을 떠올렸는데, 이로 인해 성립된 것이 바로 아비센나주의였다. 한편 다른 영향력 있는 아바스 시대의 철학자들로는 알자히스와 이븐 알하이탐(알하센) 등이 있었다.

초기 아바스 왕조 시대에 정식 교리로 인정된 이슬람 신학에 무타질라 학파가 있다.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무타질라 학파는 합리주의적인 해석이 특징이다. 마암룬(Al-Ma'mun)은 무타질라 학파를 공인하고, 다른 종파를 탄압했지만,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이었기에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쇠퇴했다.

5. 4. 건축

우마이야 왕조에서 아바스 왕조로의 변화는 이슬람 건축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전에는 헬레니즘로마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로마 전통이 주를 이루었으나, 아바스 왕조가 들어서면서 중심지가 이라크페르시아 등 동쪽으로 이동하며 동양풍 건축 양식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아바스 건축물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전통, 특히 사산 왕조의 건축 양식에서 영감을 받았다. 또한, 구운 진흙 벽돌과 스투코를 사용하는 기독교 건축 양식도 도입되었다.[60][61][62]

아바스 왕조의 광대한 영토 덕분에 이들의 건축 양식은 마그레브중앙아시아까지 빠르게 전파되어 해당 지역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870년경 아바스 왕조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남긴 건축 유산은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독자적인 건축 양식이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도시 내 주택은 대부분 2층 구조였으며, 1층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바닥을 지면보다 낮게 만들고, 2층은 목재 천장과 평평한 지붕으로 구성되었다. 외관은 소박했지만, 내부는 화장실, 냉각 장치, 화려한 장식품으로 꾸며졌다. 주거 구역은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밀집된 형태로 설계되었다.

튀니지의 카이로완 모스크 등 우마이야 시대 모스크들은 아바스 시대에 대대적으로 보수되었다. 아글라브 왕조 통치 지역에서 주로 진행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바스 왕조가 주도했다.[67][68]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아바스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이븐 툴룬 모스크를 건설(879년 완공)했는데, 이는 현재까지 잘 보존된 아바스 시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69]

알우카이디르 궁전은 현존하는 아바스 왕조 궁전 중 보존 상태가 좋은 예시이다. 사산 제국우마이야 왕조 건축 양식 및 재료를 따랐으며, 4개의 문, 현관 홀, 중앙 안뜰, 개방된 주거 구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둥들은 두껍고 거대한 아치를 지탱하여 육중한 느낌을 준다.

5. 4. 1. 바그다드

762년, 제2대 아바스 칼리파 알만수르는 새로운 수도 건설을 추진했다. 이는 우마이야 왕조의 중심지 다마스쿠스에서 벗어나 동쪽의 쿠파바스라에서 일어나는 시아파 반란을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메소포타미아는 비옥한 토지와 잘 정비된 관개 수로, 유프라테스강티그리스강 유역, 광대한 영토의 중심부, 실크로드 및 인도양 무역로 접근성 덕분에 수도로서 이상적인 지역이었다. 우르, 바빌론, 니네베, 크테시폰 등 역사적인 고도(古都)들이 이를 증명한다.

서기 767년에서 912년 사이의 바그다드 지도. 원형 도심은 763년에 완공되었다.


약 1년 동안 10만 명의 노동자와 를 투입하여 완공된 새로운 수도 '''바그다드'''는 당시 마디나트 앗살람(مدينة السلام, 평화의 도시)이라 불렸으며, 현재보다 규모가 훨씬 작았다. 하지만 내부의 원형 도심만 해도 지름 2.4km, 둘레 10km에 달했으며 쿠파·시리아·호라산·바스라라는 이름의 4개의 문이 있는 이중 방어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도심 중앙에는 33000m2의 칼리파 궁전과 8400m2의 모스크가 있었고, 그 주위로 수로들과 다리들이 설계되어 물류 운송과 사람들의 이동을 도왔다.

5. 4. 2. 사마라

우바이드 시대의 유적지가 발견되는 등 기원전부터 존재했었으나, 이슬람의 팽창 이후 아바스 왕조 시대에 들어서야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836년, 제8대 아바스 칼리파 알무타심이 이곳을 수도로 삼으면서 사마라는 전례 없는 번영을 맞이하게 되었다. 곧 사마라에는 거대한 궁전 복합 단지가 조성되었는데, 그 내부에는 모스크와 목욕탕, 접견실, 주거 공간, 드넓은 정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848년에 제9대 칼리파 알무타와킬은 새로운 모스크 건설을 명했고, 이 사업은 851년에 완료되었다. 그 결과물인 사마라 대모스크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모스크였다. 모스크의 외벽은 구조를 지탱하는 44개의 반원형 탑들과 이를 연결해주는 진흙 벽돌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총 28개의 창과 16개의 문으로 밖과 안을 구별한다. 당대에는 아치형 기둥 열주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정원, 대리석 타일로 제작된 분수, 그리고 황금빛과 푸른빛 모자이크 타일로 덮여있는 외벽 등으로 그 위엄을 뽐냈으며, 약 464개에 달하는 내부의 기둥들은 11m의 천장을 지탱하면서 예배를 하러 찾아온 사람들에게 장대한 느낌을 선사해 주었다. 그러나 아바스 왕조가 쇠락함에 따라 모스크 또한 점차 버려지기 시작했고, 1258년의 몽골 침입 이후 완전히 파괴되어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말위야 미나렛을 아래서 바라본 모습. 이 건축물은 독특한 나선형의 외관 덕분에 '달팽이 첨탑'이라고도 불린다.


사마라의 대모스크가 유명한 이유는, 아마 모스크 자체보다는 내부에 있는 독특한 모양의 말위야 미나렛 덕분일 것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면적이 작아지는 나선형 원뿔 외관 덕분에 동시대의 다른 미나렛들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모습은, 가히 사마라의 랜드마크라고 불릴 만 하다고 평가된다. 혹자는 이 건축물이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에서 파생되었다고도 하고, 다른 사람은 사산 왕조의 고르 미나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나, 확실한 증거가 밝혀지지 않아서 아직까지도 학계의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836년, 알 무타심은 티그리스 강을 따라 새롭게 건설한 사마라로 수도를 옮겼다. 이 도시는 60년 동안 공사를 진행하여 경마장과 사냥터가 분위기를 더했다.[62] 건조하고 외딴 환경으로 인해 이 시대에 건설된 궁전 중 일부는 고립된 안식처였다. 알 우카이디르 요새는 마구간, 주거지, 모스크가 내부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 이러한 유형의 건물의 좋은 예이다.[62] 메소포타미아에는 이 시대의 기존 묘소가 사마라에 하나만 남아 있다.[64] 팔각형 돔 구조로 알려진 ''쿠바트 알 술라이비야''는 이슬람 건축에서 최초로 알려진 기념비적인 묘소이며 알 문타시르의 최종 안식처일 수 있다.[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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