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즈겐 사르키샨
1. 개요
바즈겐 사르키샨은 아르메니아의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태어나 문학 활동을 하다 정치에 입문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아르메니아군의 주요 사령관으로 활약하며 군사적 승리를 이끌었고, 국방부 장관과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과 선거 개입 의혹으로 비판받았으며, 1999년 의회에서 무장 괴한의 총격으로 암살당했다. 사후 그는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그의 이름을 딴 기념물과 시설이 세워졌다.
| 로마자 표기 | Vɑzgɛn Zɑvɛni Sɑɾkʰəsˈjɑn |
|---|---|
| 출생일 | 1959년 3월 5일 |
| 출생지 | 아라라트,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소련 |
| 사망일 | 1999년 10월 27일 |
| 사망 장소 | 예레반, 아르메니아 |
| 사망 원인 | 총격 암살 |
| 안장지 | 예라블루르 |
| 정당 | 범아르메니아 국가운동 (1990–1998) 아르메니아 공화당 (1998–1999) |
| 가족 관계 | 아람 사르키샨 (형제) |
| 모교 | 예레반 체육대학 |
| 직업 | 정치인 군사 지휘관 교사 작가 |
| 별칭 | 스파라페트 |
| 소속 | 아르메니아군 아르메니아 민병대 |
|---|---|
| 복무 기간 | 1989–1994 |
| 최종 계급 | 대령 |
| 참전 전투 |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
| 수상 | 아르메니아 국가 영웅 아르차흐 영웅 |
| 직위 | 아르메니아의 국가영웅 |
|---|---|
| 제8대 아르메니아 총리 | 재임 기간: 1999년 6월 11일 – 1999년 10월 27일 대통령: 로베르트 코차 랸 이전: 아르멘 다르비냔 이후: 아람 사르키샨 |
| 아르메니아 국방부 장관 | 재임 기간: 1995년 7월 25일 – 1999년 6월 11일 대통령: 레본 테르-페트로샨 로베르트 코차랸 이전: 세르지 사르키샨 이후: 바가르샤크 하루튜냔 |
| 재임 기간: 1991년 12월 5일 – 1992년 10월 20일 대통령: 레본 테르-페트로샨 이전: 드라스타마트 카나얀 (1920) 이후: 바즈겐 마누캰 | |
| 아르메니아 공화당 대표 | 재임 기간: 1998년 – 1999년 이전: 아쇼트 나바사르댡 이후: 안드라니크 마르가랸 |
| 국방, 국가안보, 국내 담당 국무장관 | 재임 기간: 1993년 7월 – 1995년 7월 25일 대통령: 레본 테르-페트로샨 이전: 신설 이후: 세르지 사르키샨 |
| 국방 담당 대통령 고문 | 재임 기간: 1992년 10월 20일 – 1993년 3월 5일 대통령: 레본 테르-페트로샨 이전: 신설 이후: 바즈겐 마누캰 |
| 최고위원회 국방 및 내무위원회 위원장 | 재임 기간: 1990년 6월 – 1991년 12월 5일 대통령: 레본 테르-페트로샨 이전: 신설 이후: 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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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의 군인 -
드라스타마트 카나얀
드라스타마트 카나얀은 러시아 제국 시기 아르메니아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제1차 세계 대전과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시기에 군사 지휘관으로 활약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과 협력하기도 했고, 전후 미국으로 이민하여 정치 활동을 이어간 아르메니아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
아르메니아의 군인 -
다비트 토노얀
다비트 토노얀은 아르메니아의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2018년부터 2020년까지 국방장관을 역임하며 2020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당시 아르메니아군을 지휘했으나, 강경 발언, 무기 판매 의혹, 사기 및 횡령 혐의 등으로 논란이 되었다. -
아르메니아의 정치인 -
유리 바르다냔
아르메니아 출신 역도 선수이자 정치인인 유리 바르다냔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금메달, 세계 선수권 7회 우승 등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은퇴 후에는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
아르메니아의 정치인 -
니콜 파시냔
니콜 파시냔은 언론인 출신의 아르메니아 정치가로, 2018년 아르메니아 혁명을 이끌어 총리가 되었으며, 부정부패 척결, 경제 개혁,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했지만 2020년 전쟁 이후 휴전 협정 서명으로 논란이 되었다. -
1999년 살인 사건 -
루이스 마리아 아르가냐
콜로라도당 소속 파라과이 정치인이자 법조인인 루이스 마리아 아르가냐는 아순시온 국립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하원의원, 대법원장, 외무장관을 역임하고 1998년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99년 암살당했다. -
1999년 살인 사건 -
빅 엘
1974년 뉴욕 할렘에서 태어난 미국의 래퍼 빅 L은 DITC 크루 활동과 데뷔 앨범 발매, 그리고 사후 앨범 발매를 통해 힙합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2. 생애
1980년대 중반부터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추진하면서 소련을 구성하고 있던 공화국에서 민족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아르메니아는 정정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다.
1990년 5월 실시된 총선거를 통해 아르메니아 공화국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90년 6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국방내무위원회 수반을 역임했다. 1991년 레본 테르페트로샨 대통령에 의해 아르메니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중이던 1992년 5월 9일 아르메니아 군대가 슈샤를 점령하는데 기여하였다. 1992년 8월 30일에는 아르메니아 군대의 특수부대인 아르치브 마하파르트네르(Արծիվ մահապարտներ아르메니아어) 대대를 결성했다. 바즈겐 사르키샨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아르메니아군이 군사적 승리르 거두는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은 1994년 5월 5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 대표가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정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종식되었다.
1995년 7월, 레본 테르페트로샨 대통령에 의해 다시 아르메니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98년 아르메니아 대통령 선거에서는 로베르트 코차랸을 지지했고, 1999년 6월 11일 로베르트 코차랸 대통령에 의해 아르메니아 총리로 임명되었다.
1999년 10월 27일 예레반에 있는 아르메니아 의회의사당에 잠입한 5명의 무장 괴한들이 쏜 총탄에 맞아 암살당했다. 1999년 12월 27일 아르메니아 정부는 아르메니아 국가영웅 칭호를 추서했으며, 1999년 12월 28일에는 바즈겐 사르키샨을 기념하는 내용에 관한 대통령령이 제정되었다.
다음은 바즈겐 사르키샨의 주요 이력을 정리한 표이다.
| 날짜 | 사건 |
|---|---|
| 1959년 3월 5일 | 아라라트 지방에서 태어남. |
| 1979년 | 아르메니아 국립 체육 대학교 졸업. |
| 1979년 - 1983년 | 고향 중학교 체육 교사 |
| 1983년 - 1986년 | 아라라트 시멘트 공장 콤소몰 서기 |
| 1986년 - 1989년 | 「가룬」지 편집부 평론과 주임 |
| 1990년 - 1992년 | 의용병 부대 "예르크라파" 대장, 국방·내무 문제 담당 아르메니아 최고 회의 상임 위원회 의장 |
| 1992년 - 1993년 | 초대 아르메니아 국방 장관, 국방 문제 담당 대통령 보좌관, 접경 지역 대통령 대표 |
| 1993년 - 1995년 | 국무 대신 |
| 1995년 - 1999년 | 국방 장관 |
| 1998년 | 아르차흐(나고르노-카라바흐) 영웅 칭호, 금수훈장 수여. |
| 1999년 6월 - 10월 | 총리 |
| 1999년 10월 27일 | 국회의사당에서 암살. 예라블루르 국립 묘지에 매장. 사후 아르메니아 국민 영웅 칭호 수여. |
2.1. 초기 생애 및 교육
1959년 3월 5일 소련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아라라트 마을에서 태어났다.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예레반 체육대학교(현 아르메니아 국립체육대학교)에서 수학했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아라라트의 중등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근무했다.
2.2. 문학 활동
1980년에 자신이 집필한 최초의 소설을 발표했을 정도로 아마추어 작가로 활동했으며 1985년에는 아르메니아 작가 동맹의 회원으로 임명되었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예레반에서 문학 월간지 《Գարուն아르메니아어》(아르메니아어로 "봄"이라는 뜻)의 출판 담당자로 근무했다. 그렇지만 1980년대 말부터 문학 활동을 끝내면서 정치인으로 전향하게 된다.
2.3. 정치 입문 및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1980년대 중반부터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추진하면서 소련을 구성하고 있던 공화국에서 민족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아르메니아는 정정 불안에 시달리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사르키샨은 카라바흐 운동에 참여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1990년 5월에 실시된 총선거를 통해 아르메니아 공화국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90년 6월부터 1991년 12월까지 국방내무위원회 수반을 역임했다. 1990년 9월에는 그의 주도로 특수 연대가 창설되었는데, 이는 모스크바로부터 독립한 최초의 공식 아르메니아 군사 부대였다.
1991년 12월, 레본 테르페트로샨 대통령에 의해 아르메니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92년 5월 9일에는 아르메니아 군을 이끌고 슈샤를 점령하는 등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1991년-1994년)에서 주요 군사적 승리를 이끌었다. 1992년 8월 30일에는 아르메니아 군대의 특수부대인 아르치브 마하파르트네르(Արծիվ մահապարտներ아르메니아어, 아르메니아어로 "자살 폭탄 독수리"라는 뜻) 대대를 결성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은 1994년 5월 5일 비슈케크 의정서 체결로 종식되었다.
2.4. 전쟁 이후 정치 활동
1995년 7월, 레본 테르페트로샨 대통령은 바즈겐 사르키샨을 국방부 장관으로 다시 임명했다. 사르키샨은 아르메니아군을 실질적으로 전문화한 공로를 인정받았으며, 아르메니아군은 "처음부터 전투 가능한 군대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효율성 면에서 소련군과 필적"하는 유일한 구 소련 국가로 묘사될 정도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군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보였으며, 1997년에는 지난 2년 동안 군의 힘이 두 배로 증가했다고 밝혔다. 같은 해,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무력으로 카라바흐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되었다"고 발언하자, 사르키샨은 "그렇게 하세요. 우리는 준비가 되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전쟁 이후 아르메니아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확립된 기관인 군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사르키샨은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는 아르메니아 정치의 정계의 배후로 묘사되었으며, 많은 인사에 대한 임명 및 해임을 결정했다. 1996년 아르메니아 대통령 선거와 그 이후의 전개 과정에서 사르키샨이 테르-페트로시안 대통령직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분명해졌다. 그는 1998년 아르메니아 대통령 선거에서 로베르트 코차랸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며, 그의 당선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1999년 6월 11일, 사르키샨은 로베르트 코차랸 대통령에 의해 아르메니아 총리로 임명되었다. 많은 전문가들은 그가 총리로서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한다.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제1회 범아르메니아 게임 (1999년 8월 28일 ~ 9월 5일), 아르메니아 독립 8주년 기념 군사 퍼레이드 (1999년 9월 21일), 제1차 아르메니아-디아스포라 회의 (1999년 9월 22일 ~ 23일) 등 세 가지 주요 행사가 개최되었다.
2.5. 암살
1999년 10월 27일 오후 5시 15분경, 나이리 후나냔을 포함한 5명의 무장 괴한들이 칼라시니코프 소총으로 무장하고 예레반의 아르메니아 국회 의사당에 난입했다. 이들은 정부 질의응답 시간에 맞춰 침입하여 사르키샨 총리, 카렌 데미르치안 국회의장 등 8명을 사살하고 최소 30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총격범들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애국적"이며 "국가가 정신을 차리는 데 필요하다"고 묘사했다. 그들은 정부를 "국민의 피를 빨아먹는" 폭리꾼이라고 비난하며, 아르메니아가 "재앙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고 주장했다. 바즈겐 사르키샨은 이 그룹의 주요 표적이었으며, 다른 사망자들은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고 한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에 따르면, 괴한들은 사르키샨에게 다가가 "우리 피 그만 빨아먹어"라고 말했고, 사르키샨은 침착하게 "모든 것은 너와 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대답했다. 사르키샨은 여러 발의 총격을 받았다. 목격자 언론인 안나 이스라엘리안은 "첫 총알은 1~2미터 거리에서 바즈겐 사르키샨을 직접 겨냥하여 발사되었다"고 증언하며, 그가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경찰과 군대가 장갑차로 건물을 포위한 가운데, 로베르트 코차랸 대통령은 TV 연설을 통해 상황이 통제 하에 있다고 발표했다. 총격범들은 코차랸 대통령과의 협상 끝에 인질들을 석방하고 10월 28일 아침에 자수했다.
이 사건으로 아르메니아는 큰 충격에 빠졌으며, 사건의 배후와 동기에 대한 여러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3. 정치적 유산 및 평가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민스크 그룹이 1997년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 해결을 압박하자, 레본 테르페트로샨 대통령은 "단계별" 제안을 지지했지만, 이는 국내외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바즈겐 사르키샨은 이 제안을 즉각 비난하며 로베르트 코차랸, 세르지 사르키샨과 함께 "강경파"로 불리며 반대 세력을 이끌었다. 결국 1998년 2월, 테르페트로샨 대통령은 사임했다.
이후 바즈겐 사르키샨은 1998년 아르메니아 대통령 선거에서 로베르트 코차랸을 지지하여 당선에 기여했고, 아르메니아 공화당을 이끌며 아르메니아 국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중도진보적 입장을 견지했지만,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과 선거 개입 의혹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3.1. 군사적 업적
바즈겐 사르키샨은 1990년부터 1992년까지 국방·내무 문제 담당 아르메니아 최고 회의 상임 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 1991년 12월, 레본 테르페트로샨 대통령에 의해 아르메니아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아르메니아 군대를 지휘했다. 1992년 5월 9일에는 아르메니아 군이 슈샤를 점령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1992년 8월 30일에는 아르메니아 군 특수부대인 '아르치브 마하파르트네르'(자살 폭탄 독수리) 대대를 결성하여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아르메니아의 군사적 승리에 기여했다.
1994년 5월 5일, 비슈케크 의정서를 통해 전쟁이 종식될 때까지, 사르키샨은 아르메니아 군의 주요 지휘관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전쟁 지역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부대를 통합하고, 아제르바이잔군의 사기 저하를 틈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93년 4월, 아르메니아 군은 켈바자르를 점령하여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고, 터키는 아르메니아와의 국경을 폐쇄, 유엔은 이 행위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93년 여름, 아르메니아 군은 더 많은 영토를 확보했고, 8월에는 피줄리, 제브라이을, 장게란을 장악했다. 1994년 초, 양국은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졌다.
1995년 7월, 사르키샨은 다시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아르메니아 군을 실질적으로 전문화하는 데 기여했다. 토마스 드 발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군은 그의 지휘 하에 아르메니아에서 "가장 강력한 기관"이 되었다. 그는 러시아 및 그리스와의 군사 협력을 강화했으며, 특히 러시아 군사 엘리트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3.2. 정치적 영향력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이후, 바즈겐 사르키샨은 아르메니아 정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킹메이커'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1995년, 1996년, 1998년, 그리고 1999년에 아르메니아에서 실시된 네 번의 선거에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1997년,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 민스크 그룹은 러시아, 미국, 프랑스의 공동 의장 하에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에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최종 지위에 합의할 것을 압박했다. 당시 레본 테르페트로샨 대통령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NKAO) 경계 밖 영토 반환을 포함하는 "단계별" 제안을 지지했다. 그는 아제르바이잔과의 관계 정상화, 즉 터키와의 국경 개방이 아르메니아 경제를 크게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아르메니아 사회 내에서 강한 반대에 직면했다. 정치학자 빅켄 체테리안은 "역사적, 심리적 요인 때문에 아르메니아인들은 수 세기 동안 영토를 잃어온 경험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지금 카라바흐를 '잃는' 것을 꺼린다"고 분석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 지도부, 아르메니아 지식인, 디아스포라, 야당 역시 대통령의 제안에 반대했다. 바즈겐 사르키샨은 즉각 이 제안을 비난하며 정부 내 반대 세력의 사실상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로베르트 코차랸 총리와 세르지 사르키샨 내무 및 국가안보 장관과 함께 "강경파"로 불렸다. 1998년 1월, 바즈겐 사르키샨은 로베르트 코차랸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고, 아르메니아를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범아르메니아 국민 운동을 비난했다. 결국 1998년 2월, 테르페트로샨 대통령은 사임했다.
테르페트로샨의 사임 이후, 바즈겐 사르키샨은 1998년 대통령 선거에서 로베르트 코차랸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코차랸을 "언행일치의 사람"이라고 칭하며 그의 당선을 위해 노력했다. 코차랸은 2차 투표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1998년, 바즈겐 사르키샨은 예르크라파(Yerkrapah) 파벌을 기반으로 아르메니아 공화당을 주도하며 아르메니아 국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1999년 총선을 앞두고, 그는 1998년 대선에서 코차랸의 주요 경쟁자였던 카렌 데미르치얀과 손을 잡고 '통합 블록'(Միասնություն դաշինք아르메니아어)을 결성했다. 이 블록은 1999년 5월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바즈겐 사르키샨은 아르메니아 정계에서 중도진보적 입장을 견지하며, 사회 자유주의적 가치를 옹호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3.3. 논란과 비판
바즈겐 사르키샨은 권위주의적인 통치 스타일과 선거 개입 의혹 등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행태로 비판받기도 했다. 특히 1996년 대통령 선거 부정 의혹과 관련하여 야당과 시민 사회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1996년 아르메니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사르키샨은 레본 테르-페트로샨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그가 아르메니아를 안정적으로 이끌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테르-페트로샨의 승리로 발표되었지만, 야당 후보 바즈겐 마누키안은 선거 부정 의혹을 제기하며 시위를 벌였다. 9월 25일, 마누키안은 지지자들을 이끌고 의회 건물로 진입하여 국회의장과 부의장을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사르키샨은 "야당이 100%의 표를 얻더라도 군, 국가 안보부, 내무부는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하여 인권 단체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유럽 안보 협력 위원회(Commission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는 1999년에 사르키샨의 행적이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헌신에 대한 신뢰를 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한, 사르키샨은 경제 분야에서도 영향력을 행사하며 비판을 받았다. 그가 설립한 예르크라파흐(Yerkrapah)는 경제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으며, 사르키샨은 석유 제품 시장, 교통 요충지 수입, 빵 생산 등을 통제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4. 사후 추모 및 기념
1999년 10월 27일 아르메니아 의회 총기 난사 사건으로 암살당한 후, 1999년 12월 27일 아르메니아 정부는 바즈겐 사르키샨에게 아르메니아 국가영웅 칭호를 추서하였다. 1999년 12월 28일에는 그를 기념하는 내용에 관한 대통령령이 제정되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시설 및 장소는 다음과 같다.
2000년 10월 27일은 아르메니아 정부에 의해 추모의 날로 선포되었으며, 매년 그의 생일인 3월 5일과 기일인 10월 27일에 추모 행사가 열린다. 예레블루르 묘지에는 많은 아르메니아 군인들과 그의 동료들이 방문한다.
2002년 아르메니아 국방부는 "군사 교육 및 복무 생활 개선에 기여한 공로"를 기리기 위해 바즈겐 사르키샨 훈장을 제정했다.
그는 아르메니아 군대의 창설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998년에는 아르차흐 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는 종종 스파라페트라고 불리는데, 이는 고대 아르메니아 왕국부터 존재해 온 군사 계급이다. "Sparapet Hayots아르메니아어" (문자 그대로 '아르메니아인의 최고 사령관'을 의미)라는 문구가 예레블루르 묘지에 있는 그의 기념관에 새겨져 있다.
5. 가족
바즈겐 사르키샨에게는 아람과 아르멘,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아람은 바즈겐 사르키샨이 사망한 지 일주일 후인 1999년 11월 3일 코차랸 대통령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정치적 제스처"로 평가받았다. 아람 사르키샨은 총리직을 단 6개월만 수행하고 2000년 5월 2일 해임되었다.
아람 사르키샨은 2001년 4월, 예르크라파 회원들과 함께 하라페투티운당을 창당했다. 이 당은 2003년과 2008년에 각각 스테판 데미르치얀과 레본 테르-페트로시안을 지지했다.
바즈겐 사르키샨의 다른 형제인 아르멘은 2013년 대통령 선거에서 세르지 사르키샨을 지지했다.
6.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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