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웅 (19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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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건웅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906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1926년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인청년동맹, 의열단에서 활동했으며, 1935년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동했다. 광복 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으로 활동하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박건웅 (19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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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906년 7월 1일 평안북도 의주군 비현면(현 평안북도 비현군)에서 태어났다. 1926년 10월 중국 황포군관학교 제4기 보병과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28년 상하이의 한인청년동맹과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준비에 참여했으며, 이후 중한민중대동맹 조직 선전부장,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정치부장 등을 지냈다. 1935년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나, 이듬해 김성숙 등과 함께 탈당하여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였다.

1937년부터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여 선전위원, 임시의정원 의원, 선전부 부주임 등을 역임하며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1946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고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했으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에는 민족자주연맹 대표단의 일원으로 남북 연석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명예연구사 칭호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1. 독립운동

1926년 중국 황포군관학교 제4기 보병과를 졸업하였다. 1928년 9월 22일, 상하이에 본부를 둔 한인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군관학교 동기인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10월, 천병림(한일래)과 함께 의열단 대표로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 준비 회의에 참가했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 중국의 항일 조직과 연합하여 중한민중대동맹을 결성하자 조직 선전부장을 맡았다. 또한 김원봉이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정치부장을 맡아 정치반 교육을 담당했다. 한때 김원봉과의 의견 대립으로 의열단을 잠시 떠나기도 했으나, 1935년 7월 5일 김원봉이 주도하여 결성한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36년에는 김성숙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나와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했다. 1937년 1월 22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선전위원으로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임시정부에서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이후 임시의정원 의원, 약헌수정위원, 한중문화협회 감사 등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운영과 발전에 기여했다. 1944년 6월에는 제5차 임시 약헌 개정으로 신설된 선전부의 부주임에 임명되어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활동했다.

귀국 후 1946년 8월,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좌우합작위원회의 위원으로서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 의원이 되었다. 1948년 4월에는 민족자주연맹 대표단의 일원으로 남북 연석 회의에 참가했다.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으며,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명예연구사 칭호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2. 해방 이후

광복 이후 1946년 8월,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좌우합작위원회의 위원으로서 좌우합작 운동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미군정 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관선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4월, 김규식, 김구 등이 주도한 민족자주연맹 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에서 열린 남북 연석 회의에 참가하여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한국 전쟁 중에 납북되었으며,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명예연구사 칭호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