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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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이소는 1957년 부산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회화를 전공한 예술가이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뉴욕에서 '박모'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대안 전시 공간인 Minor Injury를 설립, 운영했고, 1995년 귀국 후에는 '박이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삼성 아트 & 디자인 연구소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1997년 광주비엔날레, 2001년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 등 국내외 주요 전시에 참여했으며, 2002년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수상했다. 2004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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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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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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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박철호 |
다른 이름 | 모, 이소 |
출생 | 1957년 |
사망 | 2004년 |
직업 | 미술가 |
스승 | 김기창 |
대표작 | '당신의 밝은 미래' |
2. 생애
박이소(본명: 박철호, 필명: 박모)는 1957년 6월 23일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81년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1982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회화를 전공하였다. 1985년 대학원 졸업 후 뉴욕 브루클린 그린포인트 지역에서 대안 전시공간인 마이너 인저리(Minor Injury)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25] 뉴욕에서는 본명인 박철호 대신 박모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26] 1995년 SADI(Samsung Art & Design Institute)에서 교수로 일하기 위해 한국에 돌아오면서부터는 박이소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박이소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1981년에 졸업했다. 이 해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다음 해였다. 1982년, 박이소는 뉴욕으로 건너가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학업을 이어갔으며, 1985년 5월에 미술 석사 학위(MFA)를 받았다.[2]
박이소의 예술 활동은 크게 1980년대~1990년대 미국 뉴욕에서 박모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던 시기와 한국으로 귀국해 박이소로 활동했던 2000년대 이후로 나뉜다.[27] 2004년 4월 26일 서울 청담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27] 1995년 귀국 후 본명인 박철호나 뉴욕에서의 예명인 박모 대신 박이소라는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박이소로 가장 많이 소개된다.[28][29][30][31]
1997년 광주비엔날레에 출품하였고, 2001년 ‘대안공간 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01년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하였고, 2002년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을 수상했으며,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 작가로 초빙되어 자본주의를 풍자와 냉소로 표현한 작품인 <2010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 10선>을 출품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무제, 1994년>, <호모 아이덴트로푸스, 1994년>, <세잔의 무게, 1995년>, <유엔탑, 1997년>, <미확인 발광물체, 1998년> 등이 있다.[32]
박이소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여 1981년에 졸업했는데, 이 해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다음 해였다. 1982년 뉴욕으로 건너가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학업을 이어갔으며, 1985년 5월에 미술 석사 학위(MFA)를 받았다.[2]
3. 뉴욕에서의 활동 (1982-1994)
박이소는 프랫 인스티튜트 졸업 후 1985년에 브루클린 그린포인트에서 대체 예술 공간인 '마이너 인저리'를 공동 설립하여 1989년 말까지 운영했다.[9] 마이너 인저리 폐쇄 이후에는 최성호 작가, 박혜정 영화감독과 함께 SEORO Korean Cultural Network(1990–1994)를 설립했다.[16] SEORO는 한국어로 "서로" 또는 "상호간"을 의미하며, 1980년대 후반 대한민국 정부가 유학 규제를 완화한 이후 급증한 미국 출생 또는 최근 이민 온 한국계 예술가들을 연결했다.[16][17]
박이소는 뉴욕에서 마이너 인저리와 SEORO를 이끌면서, 초기 작품들은 미국 사회 내 한국적 정체성을 다루는 경향이 강했으며, 인종적 긴장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문제에 직접적으로 반응했다. 1990년 작품 《영어 말하기(Speaking English)》와 《이국적 소수-오리엔탈(Exotic-Minority-Oriental)》은 박이소가 한국 전통 서예에 대한 키치(kitsch)적 해석을 서구의 통속적인 이미지와 결합하여 언어적 코드와 사회 정치적 권력 구조를 드러낸 예시이다.[3]
박이소의 초기 작품은 다음과 같다.3. 1. 마이너 인저리 (Minor Injury)
박이소는 프랫 인스티튜트를 졸업한 후, 지역의 젠트리피케이션 이전 저렴한 임대료에 매료되어 브루클린 그린포인트로 이사했다.[7] 1985년에는 그린포인트에서 대체 예술 공간인 'Minor Injury'를 공동 설립하여 1989년 말까지 운영했다.[9] 그가 대체 전시 공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프랫 인스티튜트 마지막 학기에 아티스트 스페이스에서 인턴으로 일한 경험과 할월스의 공동 설립자인 예술가 로버트 롱고가 쓴 기사를 읽은 데서 비롯되었다.[8]
박이소는 당시 많은 대체 공간들이 "[상업 딜러의 보육원] 역할을 하면서" 자본주의 체제에 동화되었다고 보았고, 주류 미술계에서 존경받는 예술가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그들의 성과를 기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10] Minor Injury의 목표는 자본주의 미술 세계에 저항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맨해튼 애비뉴 1073번지에 위치한 Minor Injury는 주로 폴란드 이민자로 구성된 그린포인트 주민들 사이에서 관객을 찾았고, 외부 자금 지원에 대한 의존도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원 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되었다.[7][10] 또한 그 사명 선언문에는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소수자이거나, 그들의 작품이 관련 관심사를 반영하는" 예술가 또는 "문제 또는 개발 도상국에서 온 최근 이민자"와 함께 일한다는 목표가 명시되어 있었다.[11]
예술가를 잠재적인 유명인사로 취급하는 상업적 경향을 거부하고, 대신 "평범한 사람이나 옆집 거주자"로 대해야 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13] 박이소는 Minor Injury에서 《자아 쇼 (누구나의 자화상)》(1985)와 《초자아 쇼: 인류 진화의 랜드마크》(1987)와 같은 전시회를 직접 큐레이팅하여, 전통적인 선정 과정을 없애고,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작품도 전시할 수 있도록 했다.[9] Minor Injury의 소식은 뉴스레터 《Word of Mouth》를 통해 공유되었다.[14]
Minor Injury는 또한 독립 큐레이터와 예술가들의 여러 전시회를 주최했는데, 특히 민정기와 시린 네샤트가 기획한 《고향: 팔레스타인 퀘스트》(1989년 4월 30일~5월 21일)와, 엄혁과 정복수가 기획한 《민중미술: 한국의 정치 미술의 새로운 운동》(1987년 3월 14일~4월 12일)이 주목할 만하다.[7] 이 전시회는 미국 관객에게 민중미술이 처음 소개된 자리로 인식된다.[15]
3. 2. SEORO Korean Cultural Network
마이너 인저리 폐쇄 이후, 박이소는 최성호 작가, 박혜정 영화감독과 함께 SEORO Korean Cultural Network(1990–1994)를 설립했다.[16] SEORO는 한국어로 "서로" 또는 "상호간"을 의미하며, 1980년대 후반 대한민국 정부가 유학 규제를 완화한 이후 급증한 미국 출생 또는 최근 이민 온 한국계 예술가들을 연결했다.[16][17] 뉴욕에서 증가하는 한국 예술가 커뮤니티에서 박이소, 최성호와 민용순 등은 미국 내 한국계 미국 미술 또는 한국 미술의 구성 요소를 논의하는 전시회, 심포지엄 및 프로그램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6] 박이소가 SEORO를 결성하게 된 주요 선구적 행사로는 아시안 아메리칸 예술 센터에서 열린 1988년 심포지엄 "오늘날의 한국 미술", 알파인 갤러리에서의 ''이민자 쇼'', 그리고 주요 한국 미술 잡지인 월간미술이 주최한 1989년 원탁 토론 "뉴욕 한국 미술의 현실에 대한 대화" 등이 있다.[16] SEORO는 다양한 이민 역사를 가진 한국계 미국 예술가들 간의 소통과 상호 문화 학습을 촉진하기 위해 분기별 뉴스레터 SEORO Bulletin을 발행했으며, 이후 SEORO SEORO로 이름이 변경되었다.[16][18] 박이소는 SEORO의 제안을 주도했으며, 한국 문화 네트워크가 이룬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으로 여겨지는 전시회 ''태평양을 건너: 현대 한국 및 한국계 미국 미술''에 참여했다.[16] 이 전시회는 뉴욕 퀸즈 미술관 (1993년 10월 15일 – 1994년 1월 9일)에서 처음 선보였으며, 이후 한국 금호미술관 (1994년 8월 23일 – 9월 23일)으로 옮겨져 민중미술 운동에 참여한 한국 작가들과 이민과 미국 다문화주의에 의해 형성된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계 미국 작가들을 함께 소개하여 동시대적이고 다차원적인 한국 정체성과 미술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6]
3. 3. 초기 작품 경향
마이너 인저리 폐쇄 후, 박이소는 한국 미술에 대한 관심으로 최성호 작가, 박혜정 영화감독과 함께 SEORO Korean Cultural Network(1990–1994)를 설립했다.[16] SEORO는 한국어로 "서로" 또는 "상호간"을 의미하며, 1980년대 후반 대한민국 정부가 유학 규제를 완화한 이후 급증한 미국 출생 또는 최근 이민 온 한국계 예술가들을 연결했다.[16][17] 뉴욕에서 증가하는 한국 예술가 커뮤니티에서 박이소, 최성호[17], 민용순 등은 미국 내 한국계 미국 미술 또는 한국 미술의 구성 요소를 논의하는 전시회, 심포지엄, 프로그램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6]
박이소는 마이너 인저리와 서로를 이끌면서 뉴욕에서 제작한 초기 작품들은 미국 사회 내 한국적 정체성을 다루는 경향이 강했으며, 인종적 긴장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문제에 직접적으로 반응했다. 1990년 《영어 말하기(Speaking English)》와 《이국적 소수-오리엔탈(Exotic-Minority-Oriental)》은 박이소가 한국 전통 서예에 대한 키치(kitsch)적 해석을 서구의 통속적인 이미지와 결합하여 언어적 코드와 사회 정치적 권력 구조를 드러낸 예시이다.[3] 뉴욕 후기, 박이소는 더 이상 한국과 미국의 시각 및 언어적 어휘 사이의 명시적인 병치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문화적으로 함축된 의미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만들었다. 《쓰리 스타 쇼(Three Star Show)》(1994)와 《트리니티(Trinity)》(1994)에서 두 작품의 시각적 이미지나 제목은 모두 커피, 콜라, 간장과 같은 회화 재료를 암시하지 않는다.[19] 분할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인물을 묘사한 《호모 아이덴트로푸스(Homo Identropous)》(1994)는 자신의 정체성을 향한 지속적이지만 헛된 탐구를 다룬 그의 마지막 지점으로 여겨진다.[20][21]
이러한 작품들은 박이소가 뉴욕에서 보낸 시간 동안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포스트모던 이론뿐만 아니라 당시의 격렬한 정체성 정치와 다문화주의에 노출되었음을 증명한다.[3] 박이소는 마이너 인저리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지 않고, 고질라 아시안 아메리칸 예술 네트워크처럼 소외된 공동체의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 대한 논의에 참여했던 다른 대안 전시 공간, 문화 단체, 예술가 집단이 조직한 전시회에서 선보였다.[9] 박이소는 이러한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제3세계 출신 예술가인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7]
박이소의 초기 작품은 다음과 같다.
4. 한국에서의 활동 (1994-2004)
박이소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1981년에 졸업한 후, 1982년 뉴욕으로 건너가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 석사 학위(MFA)를 받았다.[2][3] 이후 삼성 아트 & 디자인 연구소(SADI)에서 교수로 초빙되었고, 큐레이터 이영철과 함께 한국 작가를 위한 뉴욕 레지던시 프로그램(New York Inter Art Program)을 준비했으나, 이 프로젝트는 해체되었다.[22] 1994년 한국으로 돌아와 '이소(異素)'라는 작가명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2][22]
박이소는 한국 미술 발전에 기여하고자 대안적인 미술 교육 모델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SADI의 교육 시스템, 커리큘럼, 교수법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1995년 초, "드로잉 개념"이라는 강좌를 통해 학생들에게 아이디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예술적 방법으로서 드로잉을 탐구하도록 했다. 이 강좌에서는 습관적인 스케치와 글쓰기를 통해 생각을 시각화하는 훈련인 일기 쓰기를 도입하여, 학생들이 입시 훈련에서 벗어나 자기 표현을 키우도록 장려했다.[22]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계원예술대학교에서도 유사한 드로잉 강좌를 가르쳤다.[2]
1990년대 중반, 뉴욕에서 서울로 이주하면서 박이소의 작업은 조각적이고 설치적인 작품으로 변화했다. 이 시기 작품들은 작업 과정에서 제작된 드로잉을 통해 개념적 틀을 정제하고 전시 공간 대신 최종적인 효과를 가늠했다.[20] 주로 시멘트, 나무, 비닐, 스티로폼과 같이 건축 현장이나 제조 현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했다.[17] 한국에서 제작된 작품들은 미국 정체성 정치에서 벗어나 제도화된 시스템에 대한 관심을 유지했다. 예를 들어, "A4를 위한 조각"(2000)과 "무제(1평)"(2001)은 작품 제목에 사용된 측정 단위와 실제 설치 작품의 측정치 사이의 간극을 지적했다. "2010년 세계 10대 고층 건물"(2003)과 "베니스 비엔날레"(2003)는 기념비적인 건물을 연약하고 평판이 좋지 않게 묘사하여 그 권위, 업적, 야망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24]
4. 1. 번역 및 저술 활동
박이소는 미국에서 활동하면서도 한국 현대 미술계와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유학 중이던 예술가 및 미술학도 중 한 명으로서 한국 언론에 미술 관련 소식을 전달했다. 당시 서구 미술은 번역되지 않거나 잘못 번역된 일본 또는 미국 자료를 통해서만 한국에 소개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기여는 한국 현대 미술계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7]1989년부터 1994년까지 박이소는 《월간미술》, 《미술세계》, 가나아트|한국어 등 한국의 주요 미술 잡지에 전시 서평과 기사를 기고했다. 그의 20여 편의 기사는 주로 다음 세 가지 주제를 다루었다.[22][23]
1. 미국의 다문화주의, 한국계 예술가 및 기타 소수 민족 집단
2. 미국 현대 미술계의 주목받는 예술가
3. 한국과 관련된 포스트모더니즘
비평적 담론뿐만 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박이소의 관심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가까운 한국인 동료들과 함께 연구 그룹을 결성하여, 프레드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 사회"(1983) 및 앨런 셰큘라의 "모더니즘 해체, 다큐멘터리의 재발명"(1976)과 같은 텍스트를 번갈아 가며 선택하고 번역하며 논의했다.[8]
한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박이소는 글쓰기와 미술 비평 번역에 대한 관심을 이어갔다. 1995년에서 1996년 사이, 그는 "눈과 문화"라는 제목의 정기간행물을 창간하려 했다. 이 간행물은 다음을 목표로 했다.[22]
- 문화 예술의 개념 확장
- 정확한 글쓰기와 창의적인 읽기 장려
- 인문학 기반 학제 간 연구의 필요성 강조
- 급속도로 발전하는 시각 문화와 대중 문화에 대한 지적 참여 촉진
- 정보와 지적 교류를 위한 국제적인 플랫폼 제공
특히, 이 정기간행물은 출판 최소 6개월 전에 주제를 정하고, 기고자들이 출판일 최소 3개월 전에 원고를 완성하여 제출해야 했다. 주제와 내용에 대해 출판사나 후원 단체의 간섭이 없었으며, 각 호는 현대 미술과 시각 문화에 동일한 분량을 할당했다. 매년 영문판도 발행할 예정이었다. 이 간행물은 자금 부족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지만, 진보적인 형식, 내용 및 편집 방향으로 주목받았다.[22]
한편, 박이소의 번역 작업은 한국 내에서 출판 및 유통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994년 존 스토리(John Storey)의 "문화 이론과 대중 문화: 입문(Cultural Theory and Popular Culture: An Introduction)"(1993) 번역본이 출판되었고, 1997년에는 메리 앤 스타니제프스키(Mary Anne Staniszewski)의 "믿는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다: 예술의 문화를 창조하다(Believing Is Seeing: Creating the Culture of Art)"(1995) 번역본이 출판되었다.[2] 이 두 권의 번역서는 문화 연구 입문서이자 일반 독자를 위한 책으로, 널리 읽히고 한국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박이소의 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일치했다.[22]
5. 주요 전시
박이소는 마이너 인저리에서 직접 큐레이팅한 주요 전시로, 《자아 쇼 (누구나의 자화상)》(1985), 《초자아 쇼: 인류 진화의 랜드마크》(1987) 등을 통해 전통적인 선정 과정을 없애고,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작품도 전시할 수 있도록 했다.[9]
마이너 인저리에서 큐레이팅한 주요 전시는 다음과 같다.
- 《에고 쇼(Ego Show) (누구나의 자화상)》, 1985년 11월 20일 – 12월 22일
- 《단순하지 않음: 인간의 정서적 복합체》, 1986년 4월 19일 – 5월 4일
- 《수퍼 에고 쇼: 인류 진화의 랜드마크》, 1987년 1월 10일 – 2월 1일
- 《트랜스 에고 쇼》, 1988년 11월 12일 – 12월 11일
마이너 인저리는 독립 큐레이터와 예술가들의 여러 전시회를 주최했는데, 특히 민정기와 시린 네샤트가 기획한 《고향: 팔레스타인 퀘스트》(1989년 4월 30일~5월 21일)와, 독립 큐레이터 엄혁과 예술가 정복수가 기획한 《민중미술: 한국의 정치 미술의 새로운 운동》(1987년 3월 14일~4월 12일)이 주목할 만하다.[7] 이 전시회는 그 해 1월 토론토의 A Space에서 처음 선보인 이후, 미국 관객에게 민중미술이 처음 소개된 자리로 인식된다.[15] 박이소는 엄혁과 미술 평론가 성완경을 도와 아티스트 스페이스에서 《민중미술: 한국의 새로운 문화적 순간》(1988년 9월 29일~11월 5일)을 큐레이팅하여 한국 미술 운동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였다.[15]
마이너 인저리 폐쇄 이후, 박이소는 한국 미술에 대한 관심으로 최성호 작가, 박혜정 영화감독과 함께 SEORO Korean Cultural Network(1990–1994)를 설립했다.[16] SEORO는 한국어로 "서로" 또는 "상호간"을 의미하며, 1980년대 후반 대한민국 정부가 유학 규제를 완화한 이후 급증한 미국 출생 또는 최근 이민 온 한국계 예술가들을 연결했다.[16][17] SEORO는 다양한 이민 역사를 가진 한국계 미국 예술가들 간의 소통과 상호 문화 학습을 촉진하기 위해 분기별 뉴스레터 SEORO Bulletin을 발행했으며, 이후 SEORO SEORO로 이름이 변경되었다.[16][18] 박이소는 SEORO의 제안을 주도했으며, 한국 문화 네트워크가 이룬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으로 여겨지는 전시회 ''태평양을 건너: 현대 한국 및 한국계 미국 미술''에 참여했다.[16] 이 전시회는 뉴욕 퀸즈 미술관(1993년 10월 15일 – 1994년 1월 9일)에서 처음 선보였으며, 이후 한국 금호미술관(1994년 8월 23일 – 9월 23일)으로 옮겨져 민중미술 운동에 참여한 한국 작가들과 이민과 미국 다문화주의에 의해 형성된 정체성을 탐구하는 한국계 미국 작가들을 함께 소개하여 동시대적이고 다차원적인 한국 정체성과 미술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6]
5. 1. 개인전
- 1990년 ''말하라 아메리카'', 브롱스 미술관, 뉴욕
- 1995년 ''박이소'', 금호미술관; 갤러리 샘터, 서울
- 2001년 12월 22일 – 2002년 1월 7일 ''40대 예술가: 박이소,'' 대안공간 풀, 서울
- 2002년 ''박이소'', 갤러리 현대, 서울
- 2005년 10월 27일 – 11월 23일 ''폴라야바다: 박이소 프로젝트와 헌정'', 캘리포니아 대학교 어바인 미술관
- 2006년 3월 10일 – 5월 14일 ''신곡: 박이소 회고전'', 로댕 갤러리, 서울[33]
- 2011년 8월 20일 – 10월 23일 ''박이소: 비상하는 선'', 아트선재센터, 서울[34]
- 2014년 4월 19일 – 6월 1일 ''박이소: 헐값의 무언가'', 아트선재센터, 서울
- 2018년 7월 26일 – 12월 16일 ''박이소: 메모와 기억'',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 과천
5. 2. 단체전
박이소는 다음과 같은 단체전에 참여했다.연도 | 전시명 | 장소 |
---|---|---|
2015년 | 쓰리스타쑈 | 인디프레스 |
1985년 | 뿌리에서 현실로: 전환기의 아시아계 미국인 | 헨리 스트리트 정착촌, 아시아계 미국 예술 문화 연합 |
1986년 | 선택 | 아티스트 스페이스, 뉴욕 |
1988년 | 차이나타운의 공공 미술 | 아시아계 미국 예술 센터, 뉴욕 |
1988년 | 이민자 쇼 | Alpine Gallery, 뉴욕 |
1988년 | 프로젝트 DMZ | 예술과 건축을 위한 스토어프론트, 뉴욕 |
1989년 | CHINA 6월 4일, 1989 | 아시아계 미국 예술 센터, 뉴욕 |
1990년 | 마켓플레이스의 10년 | 브롱스 미술관, 뉴욕 |
1990년 | 도시의 모자이크 | 베드포드-스터이베선트 예술 문화 센터, 뉴욕 |
1990년 | 커뮤니케이션: 공공 거울: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예술가 | Clocktower, 뉴욕 |
1992년 | 그리고 그는 아시아를 찾고 있었다: 오늘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야기에 대한 대안 | 아시아계 미국 예술 센터, 뉴욕 |
1994년 | 제5회 하바나 비엔날레 | 쿠바 하바나 |
1994년 | 국경을 넘어 | 브롱스 미술관, 뉴욕 |
1997년 | 제2회 광주 비엔날레, 지구의 지도 다시 그리기 | 대한민국 광주 |
1998년 | 제4회 타이페이 비엔날레, 욕망의 장소 | 대만 타이페이 |
1998년 | 회화와 글쓰기 | 한림미술관, 대전 |
동결 | 선재미술관, 경주 | |
2001년 | 제1회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 일본 요코하마 |
2003년 | 제50회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차이의 풍경 | 이탈리아 베니스 |
2009년 | 당신의 밝은 미래: 한국의 12명의 현대 미술가 |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캘리포니아 |
6. 수상
연도 | 상 이름 | 수여 기관 | 비고 |
---|---|---|---|
1983년 | 한국 정부 장학금 | 주 미국 대한민국 대사관 | 워싱턴 D.C. |
1989년 | 회화 분야 펠로우십 | 뉴욕 예술 재단 | 뉴욕 |
1990년 | 야도 예술 콜로니 레지던시 | 야도 예술 콜로니 | 사라토가 스프링스, 뉴욕 |
1991년 | 맥도웰 예술 콜로니 레지던시 | 맥도웰 예술 콜로니 | 피터버러, 뉴햄프셔 |
1991년 | 회화 분야 시각 예술가상 | 국립 예술 기금 | |
2000년 | 아트페이스 국제 예술가 레지던시 프로그램 및 전시 | 아트페이스 | 샌 안토니오, 텍사스 |
2002년 | 에르메스재단 미술상 | 에르메스 코리아 | 서울[35] |
2006년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올해의 예술상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36] |
7. 저술
박이소는 미국에서 활동하면서도 한국 현대 미술계와 지속적으로 교류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유학 중이던 예술가 및 미술학도 중 한 명으로서 한국 언론에 미술 관련 소식을 전했다. 당시 서구 미술은 번역되지 않거나 잘못 번역된 일본 또는 미국 자료를 통해서만 한국에 소개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기여는 한국 현대 미술계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7]
1989년부터 1994년까지 박이소는 《월간미술》, 《미술세계》, 가나아트와 같은 한국의 주요 미술 잡지에 전시 서평과 기사를 기고했다. 그의 20여 편의 기사는 주로 미국의 다문화주의, 한국계 예술가 및 기타 소수 민족 집단, 미국 현대 미술계의 주목받는 예술가, 한국과 관련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논했다.[22][23]
글쓰기에 대한 박이소의 관심은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가까운 한국인 동료들과 함께 연구 그룹을 결성하여, 프레드릭 제임슨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소비 사회"(1983) 및 앨런 셰큘라의 "모더니즘 해체, 다큐멘터리의 재발명"(1976)과 같은 텍스트를 번갈아 가며 선택하고 번역하며 논의했다.[8]
7. 1. 저서
- 2014년 《박이소 : 설치를 위한 드로잉》[22]
- 1994년 존 스토리(John Storey)의 "문화 이론과 대중 문화: 입문(Cultural Theory and Popular Culture: An Introduction)" 번역본[2]
- 1997년 메리 앤 스타니제프스키(Mary Anne Staniszewski)의 "믿는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다: 예술의 문화를 창조하다(Believing Is Seeing: Creating the Culture of Art)" 번역본[2]
7. 2. 역서
John Storey영어의 저서 "문화 이론과 대중 문화: 입문(Cultural Theory and Popular Culture: An Introduction)" (1993년) 번역본은 1994년에 출판되었다.[2] Mary Anne Staniszewski영어의 저서 "믿는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다: 예술의 문화를 창조하다(Believing Is Seeing: Creating the Culture of Art)" (1995년)는 1997년에 번역 출판되었다.[2]이 두 권의 번역서는 문화 연구 입문서이자 일반 독자를 위한 책으로, 널리 읽히고 한국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박이소의 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과 일치했다.[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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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소가 떠난 자리에 남은 것…10주기 기념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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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작가 박이소 10주기 전, 비디오아티스트 김순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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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읽어주는 남자> 박이소의 ‘잡초도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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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작가 박이소씨 뒤늦은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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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소 개인전: 개념의 여정 (Yiso Bahc – Lines of F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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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소 ≪Something for Nothing(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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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소씨,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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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위 ‘올해의 예술상’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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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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