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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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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광훈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이, 송익필 등과 함께 '팔문장계'로 불렸다. 1564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형제 및 종형과 함께 시문에 능하여 '일문 사문장'으로 불렸다. 1582년에 사망했으며, 사후 아들 백진남이 유고를 모아 《옥봉유고》를 간행했다. 《청구영언》에 시조 1수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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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백광훈
원어명白光勳
군주조선 선조 이연
출생일1537년
출생지조선 전라도 기산
사망지조선 한성부
사망일1582년 (46세)
국적조선
별명자 창경(彰卿), 호 옥봉(玉峰)
학력1564년 진사시 합격
임기1582년 1월 ~ 1582년 2월
직책조선국 한성부 소격서 참봉 (朝鮮國 漢城府 昭格署 參奉)
종교유교(성리학)
본관해미
가족 관계
형제백광홍(형), 백광안(형)
배우자하동 정공 정강옥의 여식(초배), 하동 정공 정응서의 여식(계배)
자녀백진남(아들)
부모부 백세인(白世仁), 모 광산 김씨 부인(光山 金氏 夫人)
친인척백광성(종형), 백붕남(친질), 정강옥(장인), 정응서(장인)
기타
정당무소속

2. 생애

백광훈은 고조부 회(繪)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1429년 부남(府南) 기산(岐山)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태어났다. 형인 백광홍(白光弘), 백광안(光顔), 종형인 백광성(白光城)과 함께 모두 시문에 뛰어나 '일문 사문장(一門 四文章)'이라 불렸다.

1564년(명종 19)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7년(선조 10) 선릉과 전주영전(全州 影殿) 참봉(參奉), 1578년(선조 11) 정릉 참봉, 1580년(선조 13) 예빈시 참봉 겸 주자도감(鑄字都監) 감조관(監造官)을 거쳐 1582년(선조 10) 소격서 참봉을 지냈다.

같은 해 1582년(선조) 사망했다. 1608년 아들 진남(振南)이 전라 감사 윤안성(尹安性)의 도움으로 《옥봉유고》(玉峯遺稿)를 간행했다.

2. 1. 가계

백광훈은 백세인(白世仁)을 아버지로, 광산 김씨(光山金氏) 첨정(僉正) 김광통(金廣通)의 딸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형제로는 백광홍(白光弘)과 백광안(白光顔)이 있었으며, 관서별곡은 그의 형 백광홍의 저서이다.

백광훈은 하동 정씨(河東鄭氏) 현감(縣監) 정강옥(鄭崗玉)의 딸과 처음 혼인하였으나, 이후 하동 정씨(河東鄭氏) 부위(副尉) 정응서(鄭應瑞)의 딸과 재혼하였다. 아들 백진남(振南)은 난중일기에 '백진사'로 등장하며, 정유재란이순신의 진중에서 군량미 지원과 의병 모집에 협력하였다.

백광훈의 숙부로는 백세의(世義)와 백세례(世禮)가 있었다. 해미 백씨 시조인 백광성(白光城)은 그의 종형이다.

2. 1. 1.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백세인(白世仁)
어머니광산 김씨(光山金氏)김광통(金廣通)의 딸
백광홍(白光弘)〈관서별곡〉의 저자
백광안(白光顔)
첫 번째 부인하동 정씨(河東鄭氏)정강옥(鄭崗玉)의 딸
두 번째 부인하동 정씨(河東鄭氏)정응서(鄭應瑞)의 딸
숙부백세의(白世義)
숙부백세례(白世禮)


2. 2. 출생과 가문의 배경

백광훈은 1429년 부남(府南) 기산(岐山)에서 태어났으며, 고조부 회(繪)가 현감(縣監)을 지냈다. 형인 백광홍, 백광안, 종형인 백광성과 함께 모두 시문에 뛰어나 '일문 사문장(一門 四文章)'이라 불렸다.

2. 3. 관직 생활

1564년(명종 19)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77년(선조 10) 선릉과 전주영전(全州 影殿) 참봉(參奉)을 지냈다. 1578년(선조 11) 정릉 참봉을 거쳐 1580년(선조 13) 예빈시 참봉 겸 주자도감(鑄字都監) 감조관(監造官)을 지냈다. 1582년(선조 10) 소격서 참봉으로 있었다.

2. 4. 사망과 유고

1582년(선조) 사망했다. 1608년 아들 진남(振南)이 전라 감사 윤안성의 도움을 받아 백광훈의 유작을 모아 《옥봉유고》(玉峯遺稿)를 간행했다.

3. 조선 중기 팔문장계

이이, 송익필, 이달, 최경창, 최립, 이산해, 하응림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며 팔문장계로 불렸다.

4. 작품 세계

청구영언에 전하는 시조 1수는 한나라 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장량(장자방)의 고사를 인용하여, 기미를 보아 세속을 벗어나 고상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칭송한 것이다. 백광훈의 유고집인 《옥봉유고》(玉峯遺稿)는 아들 백진남이 간행했으나,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4. 1. 대표 작품: 시조

청구영언에 전하는 시조는 다음과 같다. "五世讐(오세수) 갑흔 후에 金刀의 업을 닐워. 삼만 戶 사양하고 赤松子 좃차가니. 아마도 見機高蹈(견기고도)난 子房인가 하노라."

이는 한나라 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장량(장자방)의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장량은 5대에 걸친 원수를 갚은 후 큰 공을 이루고도 삼만 호의 봉읍을 사양하고 신선 적송자를 따라갔다. 이러한 장량의 '견기고도', 즉 기미를 보아 세속을 벗어나 고상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칭송한 것이다.

4. 2. 《옥봉유고》(玉峯遺稿)

아들 백진남이 간행한 백광훈의 유고집인 《옥봉유고》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청구영언》에 시조 1수가 전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五世讐(오세수) 갑흔 후에 金刀의 업을 닐워. 삼만 戶 사양하고 赤松子 좃차가니. 아마도 見機高蹈(견기고도)난 子房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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