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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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립은 1539년 개성 출생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이다. 1561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며, 임진왜란 시기에는 외교 문서 작성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명나라에 파견되기도 했다. 서인 윤두수, 윤근수 등과 친교를 맺었고, 이이의 문인으로 학문을 연마했다. 선조 때에는 8문장가로 꼽혔으며, 명나라 학자들에게도 문재를 인정받았다. 만년에 ≪주역≫ 교정에 참여했으나, 당쟁의 영향으로 부정적인 평가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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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립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씨명 | 최 립 |
휘갈겨 쓴 이름 | 채 립 |
출생일 | 1539년 |
사망일 | 1612년 |
직업 | 문신, 서예가 |
기본 정보 | |
한글 | 최립 |
한자 | 崔 岦 |
히라가나 | 사이 류 |
가타카나 | 체 리프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539년 5월 20일 (음력 5월 3일)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개성 |
사망일 | 1612년 8월 9일 (음력 7월 13일) |
사망 원인 | 알 수 없음 |
거주지 | 알 수 없음 |
국적 | 조선 |
별명 |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동고(東皐) |
학력 | 명종 16년 식년문과 장원 |
직업 | 정치가, 문인 |
직책 | 문인 |
종교 | 유교(성리학) |
배우자 | 예안이씨/계배 한산우씨 |
자녀 | 최동망 |
부모 | 진사 최자양/무송윤씨 |
조상 | 현조 최노(단종충신단 배향) |
2. 생애
1555년 진사가 되었고, 156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77년에는 주청사의 질정관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재령군수, 공주목사, 전주부윤 등 지방관을 역임하였으며, 1595년에는 판결사를 거쳐 형조참판에 이르렀으나 관직에서 물러나 평양에 은거하였다[1]。
최립은 기자조선을 건국한 기자에 대해 "조선에서의 기자의 존재는 주나라의 문왕이나 무왕의 존재와 같다"고 주장하며, 기자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찬미하였다[2]。
2. 1. 유년기
1539년(중종 34년) 개성에서 진사 최자양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8대조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명장 최운해이고, 세종대왕 시대에 4군 6진 개척에 공을 세운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B5%9C%EC%9C%A4%EB%8D%95(%E5%B4%94%E6%BD%A4%E5%BE%B7) 최윤덕] 장상의 후손이다. 5대조[7] 최로는 명필로 알려졌으며, 절충상호군으로서 단종 충신단에 배향된 인물이다. 최립은 붓을 잡을 수 있는 나이부터 글씨를 쓰고 시를 지었다고 전해진다.당대의 대학자 이이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1555년(명종 10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2. 2. 관직 생활
1555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61년(명종 16년)에는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뛰어난 시문과 학식으로 당대 여러 문인들의 칭송을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당대의 다른 선비들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장원급제 후 장연현감을 거쳐 1571년(선조 5년)에는 옹진현령이 되었고, 1576년(선조 10년)에는 재령군수에 임명되었다. 1577년(선조 11년)에는 종계변무를 위한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質正官) 자격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귀국 후 다시 재령군수로 복무했다. 이 시기 해주에 은거하던 이이(李珥)와 교류하며 친분을 쌓았다.
1581년(선조 14년) 재령군수로 재임하던 중, 극심한 기근으로 고통받던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힘쓴 공로로 선조로부터 옷의 겉감과 안감을 직접 하사받는 영광을 누렸다. 같은 해, 다시 주청사 김계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1584년(선조 17년)에는 첨지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초 존경하던 동료이자 절친한 벗이었던 이이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다. 1586년(선조 19년)에는 호군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관리들의 시문과 학식을 시험하는 이문정시에서 장원을 차지하여 정3품 당상관인 첨지중추부사와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하는 영예를 안았다.
1587년(선조 20년) 장례원판결사로 재직 중, 송사를 잘못 처리했다는 이유로 사헌부로부터 추고(문책)를 받았다. 같은 해 외직인 진주목사로 전임되어 약 6년간 재임하며 《십가근체》를 편찬하였다. 1591년(선조 21년)에는 일본의 침략 위협이 고조되자, 명나라에 조선의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주문(奏文)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후 공주목사, 임진왜란 중에는 전주부윤 등을 역임하였고, 1595년에는 판결사를 거쳐 형조참판에 이르렀으나 곧 사직하고 평양에 은거했다[1]。 1602년(선조 35년)에도 당상관 직책에 임명된 기록이 있으며, 1605년에는 간성군수로 있으면서 《주역본위구결부설》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연도 | 관직 | 비고 |
---|---|---|
1555년 | 진사시 합격 | |
1561년 | 식년문과 장원급제 | 관직 시작 |
? | 장연현감 | |
1571년 | 옹진현령 | |
1576년 | 재령군수 | |
1577년 | 명나라 사행 질정관 | 종계변무 주청사 수행 |
1577년 이후 | 재령군수 | 복귀, 이이와 교유 |
1581년 | 재령군수 재임 중 | 백성 구휼로 표리 하사받음 |
1581년 | 명나라 사행 질정관 | 주청사 김계희 수행 |
1584년 | 첨지 | |
1586년 | 호군 | |
1586년 | 첨지중추부사 (정3품), 가선대부 (종2품) | 이문정시 장원, 승품 |
1587년 | 장례원판결사 | 송사 처리 문제로 추고 받음 |
1587년~1593년? | 진주목사 | 약 6년간 재임, 《십가근체》 편찬 (1591년 일본 위협 관련 주문 작성) |
? | 공주목사 | |
임진왜란 중 | 전주부윤 | |
1595년 | 판결사 | |
1595년 | 형조참판 | 사직 후 평양 은거 |
1602년 | 당상관 | 구체적 직책 불명 |
1605년 | 간성군수 | 《주역본위구결부설》 편찬 |
최립의 가문이 계유정난과 사육신 사건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의 관직 기록은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있는 편이다. 선조실록에는 "재상의 반열[19]에 오른 자가 직무를 소홀히 한다"는 탄핵 상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당시 상황을 다소 과장한 측면이 있다. 최립은 조선 시대 평균 수명을 훨씬 넘긴 고령의 문관이었고, 여러 차례 관직을 사양했음에도 조정에서는 계속해서 그를 임관시켰다. 사헌부의 추고를 받을 당시 이미 환갑의 나이였으며, 이후 동지중추부사로서 영위사의 양조령에 제수되었을 때는 병으로 인해 관직 수행이 어려운 상태였다. 이때 사간원의 탄핵은 임명을 철회하기 위한 통상적인 절차로 볼 수 있다. 기록상 탄핵이나 파직이 언급된 해에도 여주목사, 종사관 등에 임명되는 등 즉각적인 재임명이 이어졌기에, 일반적인 의미의 '파직'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유실된 임관 기록에 대한 논란'''
임진왜란 초기, 최립의 관직이 낮다고 여겨 외교 문서에 실제보다 높은 직책을 기록해 보낸 일이 있었다[20]는 주장이 있다. 그의 문집인 《간이집》 4권 사행문록에는 이조참판, 예조판서 등의 직책으로 기록된 외교 문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등 공식 기록에는 그가 정2품 이상의 관직(판서급)에 올랐다는 명확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아 논란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 부재만으로 최립이 고위직에 오르지 못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병자호란 등 큰 전쟁을 겪으며 조선의 많은 기록이 소실되었고, 특히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수많은 고문서가 반출되거나 유실된 점을 고려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 역시 완벽한 기록이라고 보기 어려우며, 특히 전쟁 기간 동안의 기록은 누락되거나 부정확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최립은 1586년 이문정시 장원으로 이미 종2품 가선대부에 올랐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또한, 최립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명나라에서 유학하여 한문에 능통했으며, 뛰어난 문장력으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외교 문서를 작성하여 4만 명의 지원군 파병을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러한 능력과 역할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외교 문서상의 직책 기록이나 조선왕조실록 기록의 부재만을 근거로 그의 실제 지위를 낮게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정2품 이상 관리가 사망 시 받는 시호 기록이 없다는 점 역시, 전란으로 인한 기록 유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21]고 여겨진다.
2. 3. 임진왜란 시기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해 9월 9일 공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인 9월 13일 전주부윤으로 다시 임명되어 1593년 5월까지 재직했다. 이후 승문원 제조(提調)가 되어 전쟁 중 평양과 의주의 임시 조정에 머물면서 명나라로 보내는 외교 문서를 도맡아 작성했다. 그의 뛰어난 문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큰 명성을 얻었다.같은 해 11월에는 주청사(奏請使) 겸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외교 활동을 펼쳤으며, 그가 지은 글은 명나라 관료와 학자들에게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았다.[19] 1594년 8월에는 주청사의 부사(副使)로 다시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이후 세자 책봉 문제로 정사 윤근수와 함께 부사로서 명나라를 방문하여 여러 편의 시를 주고받으며 윤근수와 평생의 교우 관계를 맺었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직후인 1595년에는 장례원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승문원 제조를 겸직하며 세자 책봉 문서의 서문을 다시 작성했다. 승문원 제조직 사임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후 제조를 겸하면서 행호군(行護軍), 행부호군(行副護軍) 등의 관직을 맡았다. (관직 앞에 붙는 '행(行)'은 높은 품계의 관리가 낮은 직급의 벼슬을 맡을 때 붙였다.)
1597년에는 안변부사(安邊府使)로 재직하다가 다시 장례원 판결사가 되었고, 1598년에는 중국 사신 영위사(迎慰使)의 직책을 맡았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통진(通津)에 머물렀다.
임진왜란 초기, 최립의 관직이 낮다는 이유로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는 실제보다 높은 관직(예: 이조참판, 예조판서)을 적어 보낸 경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0] 이는 당시 조선의 절박한 상황에서 명나라의 지원을 얻기 위한 외교적 조치였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최립의 문집인 《간이집》(艮易集)에는 이러한 고위 관직으로 기록된 외교 문서들이 남아있다. 조선왕조실록 등 공식 기록에는 정2품 이상 재직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그의 실제 관직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극심한 혼란기에 수많은 기록이 소실되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21] 특히 종묘마저 불타버린 전쟁의 참상 속에서, 명나라와의 외교를 책임졌던 최립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그의 외교적 노력은 명나라의 파병(약 4만 명)을 이끌어내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데 기여했으며, 조선을 지켜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단순히 현존하는 공식 기록의 부재만으로 그의 실제 지위나 중요성을 평가하기는 어렵다는 시각이 있다.
2. 4. 임진왜란 이후
1598년(선조 31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모두 끝난 뒤 승문원제조에 임명되었다. 세 차례 명나라 수도 베이징의 예부에 사신으로 가 글을 올렸는데, 명나라 학자들도 그의 문장에 크게 감탄했다고 전해진다.[19]1599년(선조 32년)에는 외직인 행여주목사로 부임하였다.[1] 1600년(선조 33년)에는 용산에 머물며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였고, 1601년(선조 34년)에는 평양에 간이당(艮易堂)을 짓고 그곳에서 지냈다.[1] 1602년(선조 35년)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승문원제조 겸 교정청 당상으로 임명되어 ≪주역≫ 교정의 임무를 맡았으나, 의견 차이로 주역교정청 당상직은 사임하였다.[19]
1603년(선조 36년) ≪주역언해≫ 편찬 이후, 주역 교정에 집중하기 위해 외직을 자청하여 행간성군수가 되어 간성에 부임하였다.[19] 간성에서 3년여의 시간 동안 주역 교정을 완료하였는데, 이 기간 중인 1605년에는 <주역본위구결부설>(周易本緯句訣附說)을 편찬하기도 했다. 이 책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19] 부임 초기에는 교정 작업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고을의 행정을 소홀히 한다는 백성들의 불만이 있기도 했으나, 주역 교정을 마친 후에는 정무를 제대로 수행하였다.[19] 임기를 마친 뒤 중앙 조정으로 복귀하여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며,[1] 1606년에는 동지중추부사 겸 승문원 제조를 맡았다.[19]
1607년(선조 40년) 다시 강릉부사가 되어 외직으로 나갔다.[19] 1608년(선조 41년), 70세에 이르러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다.[19] 이후 벼슬에서 물러나 한양 자택에서 지내다가 개성으로 옮겨가 여생을 보냈다.[19] 1612년(광해군 5년) 7월 11일, 74세를 일기로 개성에서 세상을 떠났다.[19]
사후 1631년(인조 9년) 이정귀 등의 주선으로 그의 자필 문집 《간이집》(艮易集) 9권이 간행되었으나, 병자호란 등으로 유실되었다.[19] 이후 1643년(인조 21년) 문집 9권이 목판 활자본으로 다시 간행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다.[19]
최립의 관직 기록은 계유정난과 사육신 사건으로 가문이 큰 피해를 입었던 배경을 고려할 때 비교적 상세히 남아 있는 편이다.[19] 선조실록에는 "재상의 반열[19]에 오른 자가 직무를 소홀히 한다"는 탄핵 상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당시 상황을 다소 과장한 측면이 있다.[19] 조선 시대 평균 수명을 넘어선 고령의 문관이었음에도 조정에서는 계속 그를 임관시키려 했으며, 사헌부의 조사를 받을 당시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19] 동지중추부사 임명 시 병으로 직무 수행이 어려웠던 점 등을 고려하면, 사간원의 탄핵은 임명 철회를 위한 형식적 절차였을 가능성이 있다.[19] 실제로 탄핵과 파직이 언급된 해에도 여주목사, 종사관 등에 임명되었고[19], 1602년(선조 35년)에도 당상직에 임명된 기록[19]은 일반적인 의미의 파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시사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거듭된 전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기록이 소실되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20][21] 특히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최립이 맡았던 역할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외교 문서에 실제보다 높은 관직(이조참판, 예조판서 등)을 기록했을 가능성은 있으나,[20] 이를 근거로 그의 고위직 경력 자체를 단정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 외에도 다양한 사료를 교차 검토하고, 기록 유실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여 인물을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21]
2. 5. 당파 싸움 속에서의 최립
최립은 서인의 영수로 추대된 이이와 교유했으며, 서인의 중심 인물이었던 윤두수, 윤근수 형제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윤두수의 문집인 <<오음유고>>에도 최립과 교류한 기록이 10여 차례 나타난다.[8]초기에는 문장과 학식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선대가 높은 벼슬을 하지 못한 한미한 가문 배경 때문에 중용되지 못했다.[8]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좋은 가문 출신인지 여부가 중요한 관직에 오르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임진왜란 당시 젊은 나이에 재상의 반열에 오른 이항복과 이덕형의 아버지가 모두 당상관 이상의 높은 관직을 지냈다는 점[9], 그리고 최립과 친분이 있던 윤두수, 윤근수 형제를 비롯한 당시 주요 인물들의 가문 배경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비슷한 처지에서 높은 관직에 오른 예외적인 인물로는 천재로 이름 높았던 이이가 있지만, 그 역시 여러 차례 사직했던 영향 등으로 46세에 이르러서야 정2품직에 올랐다.[10]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본격적인 당쟁이 시작되면서 최립의 문장에 대한 험담과 시기가 늘어났다. 1586년(선조 19년) 관리들의 시문과 학식을 시험하는 이문정시에 장원을 하여 법규에 따라 첨지중추부사(정3품 당상)에 오르고 품계는 종2품하 가선대부로 올랐으나, 이 가선대부로의 승급이 과하다는 상소가 실록에만 5번이나 등장할 정도로 논란이 있었다. 선조가 이를 번번이 물리쳤지만[11], 오히려 이러한 이례적인 비호가 견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 한미한 가문 때문에 청요직이나 출세길의 길목에 있는 벼슬을 거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학문적 성취를 인정받는 이문정시에 장원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 관련 관청에는 한 번도 임명되지 못했다. 당시 학문 관련 관청은 중요 요직으로 나아가는 길목이자 정2품 이상 고위 관료가 되기 위한 필수 경로로 여겨졌다.[12]
임진왜란 중 동인들이 주도하던 조정에서는 최립의 가문에 대한 험담과 문장에 대한 비판이 더욱 심해졌다. 이로 인해 중앙 조정의 중요 직책에서 배제되고 학문과는 거리가 먼 관직을 받아야 했다.[13]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립은 임진왜란 이후 저술 활동을 위해 여러 차례 사직하거나 외직을 자청했지만[14], 외교 문서를 맡을 만한 뛰어난 인물이 없다는 이유로 다시 중앙 조정으로 불려오는 일이 노년까지 반복되었다.
일부에서는 최립의 관직 기록 중 정2품 이상의 고위직 임명 기록이 실록 등 공식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임진왜란과 이후 두 차례의 호란 등 격동기를 거치며 수많은 기록이 소실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21] 특히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최립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20], 외교 문서에 기록된 이조참판, 예조판서 등의 직책이나 후대 기록(숙종 때 최석정의 상소문 등)을 단순히 공식 기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있다. 조선은 임진왜란 당시 조상을 모시는 종묘조차 불탈 정도로 극심한 전란을 겪었으며[21],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기록이 온전히 보존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한편, 1584년(선조 17년) 이문정시 장원으로 종2품 가선대부로 승품되었다는 기록은 실록에도 분명히 존재한다.[11]
3. 사상과 평가
최립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선조 시대 8대 문장가 중 한 명이자 개성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꼽혔다. 글씨에도 능해 송설체를 잘 썼다. 그의 문장은 고문(古文)을 본받은 의고체(擬古體)로 알려졌으며, 초기에는 반고와 한유를, 만년에는 구양수를 존경하며 문체를 가다듬었다. 시(詩) 역시 황정견과 진사도의 영향을 받아 정교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대 명나라에까지 문장으로 이름을 알렸으나, 그의 글이 난삽하다는 비판이나[17] "가세가 한미하고 교만했다"는 실록 졸기의 기록처럼 엇갈리는 평가도 존재한다. 특히 졸기의 내용은 최립 스스로 자신을 낮춘 기록이나[16] 방대한 저술 활동[18]과는 배치되어, 당시 당쟁의 영향이나 사관의 주관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한미(寒微)'하다는 표현 역시 가문의 세력 약화를 의미할 수 있어 해석에 주의가 필요하다.
허균은 그의 글을 "뜻이 깊고 사어가 탁월하다"고 칭송했으며, 동갑내기 허준과의 교유 관계도 그의 문집 간이집(簡易集)을 통해 전해진다. 후대에도 그의 작품은 여러 문선집에 꾸준히 수록되고 고문가들의 평론 대상이 되는 등 문학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임진왜란 시기 외교 문서 작성 등 실용적인 역할도 수행했으나, 사료 유실과 해석의 문제로 그의 사상과 업적 전반에 대한 연구는 계속 진행 중이다.
3. 1. 긍정적 평가
명나라 관리 유황상(劉黃裳)은 조선의 사대부나 왕에게도 불손한 태도를 보였으나, 최립의 글을 읽을 때는 손을 씻고 향을 피운 뒤 공손하고 경건하게 대했다고 전해진다. 유황상은 최립의 글에 대해 "공의 글은 기(氣)는 김수온(괴애)보다 못하지만 법(法)은 더 뛰어나고, 이(理)는 김종직(점필재)보다 뒤지지만 사(詞)는 더 낫다.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하면 거의 정립(鼎立)의 형국이다. 나머지 서너 분들은 사달(詞達)이면 그저 좋을 따름이다"라고 높이 평가했다.[15]영조 7년(1731년) 6월 10일 자 승정원일기에는 영조와 박문수의 대화 중에 최립이 언급된다. 송인명이 "이와 같은 사람은 터무니없는 논의와 세속의 견해로 대우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자, 영조는 "무관을 삼조(호조, 형조, 공조)에 임명한 것은 옛날에도 있었다. 신분의 차이가 현격하지 않다면 오직 재능만을 보고 등용해야 할 것이다. 어찌 세속의 행태만을 따라서야 되겠는가. 옛날에 '''최립(崔岦) 또한 현달한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이에 김재로가 "중인(中人)입니다"라고 답하자, 영조는 "'''이러한 때에 최립이 있다면 쓰지 않겠는가?'''"라고 물었고, 박문수는 "'''최립과 같은 인물을 세상에서 어찌 쉽게 얻겠습니까마는'''"[15]이라고 답했다. 이 대화는 최립이 가문의 배경과 상관없이 능력만으로 중용될 만한 뛰어난 인재였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이 남긴 기록이나 일부 현대 번역에서 최립의 가문을 '미천하다'거나 '한미하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원문의 의미를 왜곡한 것일 수 있다. '한미(寒微)'는 글자 그대로 '차갑고 드물다'는 의미로, 당시 계유정난 등으로 가문의 세력이 약해진 상황을 나타낼 수 있으며, 반드시 경제적 빈곤이나 사회적 신분의 미천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통천 최씨 가문은 고려 시대부터 이어진 명문가였으며, 조선 초기에도 세종대왕의 배향공신을 배출하는 등 입지가 있었다. 영조와 박문수의 대화 맥락 역시 가문의 배경보다는 인물의 능력 자체를 높이 평가하는 내용이다.
허균은 1607년(선조 40년)에 최립의 글을 "뜻이 깊고 사어가 탁월하다"고 칭송했다. 최립은 당대 조선과 명나라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뛰어난 시적 재능과 고문을 본뜬 의고체 문장으로 유명했다. 글씨는 송설체를 잘 썼다. 한양 출신이지만 만년에 개성에서 은거했기 때문에, 개성 출신인 차천로, 한호(한석봉)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선조 시대에는 이이, 이산해, 최경창, 백광홍, 윤탁연, 송익필, 이순인과 함께 조선의 8대 문장가로 꼽혔다.
동갑내기 의학자 허준과는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1610년(광해군 3년) 허준이 동의보감을 완성하고 조정에 복귀했을 때, 최립은 그 감회를 담은 시를 지어 문집 간이집(簡易集)에 남겼다. 만년에는 구양수의 글을 존경하여 항상 지니고 다녔으며, 초기에는 반고와 한유의 글을 좋아하여 본받으려 했다고 전해진다.
생존 당시 그의 문장은 명나라와 조선 양국에서 명성을 얻었으나, 때로는 난삽하고 어렵다는 비판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편찬된 여러 중요한 문선집에 그의 작품이 꾸준히 수록되었다는 점은 그의 문학적 성취를 증명한다. 숙종 때 편찬된 관찬선본인 별본(別本) ≪동문선(東文選)≫을 비롯하여, 서유구가 편찬한 ≪동문팔가선(東文八家選)≫, 송백옥의 ≪동문집성(東文集成)≫, 남공철의 ≪사군자문초(四君子文鈔)≫, 홍길주의 ≪대동문준(大東文雋)≫ 등 여러 사가(私家)의 선집에도 그의 저작이 실렸다. 또한 김창협, 김창흡, 안석경 등 여러 고문가들의 논평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당시 중국 문장만을 주로 다루던 경향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시에 대해서도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시는 황정견과 진사도를 본받아 정교하고 세련된 시풍을 특징으로 하며, 허균과 홍만종은 그의 산문보다 시가 더 낫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광해군일기의 졸기에는 진주 목사 6년 동안 율시 1수만 지었다는 등 그의 창작 활동을 폄하하는 듯한 기록이 있으나[17], 실제로는 수많은 사대문서와 시, 산문을 남겨 후대에 9권의 문집 간이집으로 편찬되고 인쇄본으로 간행될 만큼 활발한 저술 활동을 했다. 이는 졸기의 기록이 편파적이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의 시기에 명나라와의 외교 문서 작성을 전담하며 국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설득력 있는 외교 문서 덕분에 명나라로부터 4만 명의 군사를 지원받아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에 맞서 싸우고 최종적으로 조선을 지켜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공로와 능력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그를 계속 중용했다.
1603년(선조 36년)에는 ≪주역언해≫ 교정을 위해 외직을 자청하여 간성군수로 부임했고, 3년여 만에 교정 작업을 완료했다. 이후 중앙 조정으로 복귀하여 형조참판, 동지중추부사 겸 승문원 제조 등을 역임했다. 1608년(선조 41년) 70세에 병으로 사직하고 한양 자택과 개성에서 여생을 보내다 1612년(광해군 5년) 7월 11일,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1631년(인조 9년) 이정귀 등의 주선으로 그의 자필 문집 9권이 발간되었고, 병자호란 등으로 유실되었다가 1643년(인조 21년) 목판 활자본으로 다시 간행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최립은 조선 중후기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뛰어난 관료로서, 그의 문장과 외교적 능력은 국난 극복에 기여했으며 후대에도 오랫동안 귀감이 되었다. 비록 일부 기록에서 폄훼되거나 왜곡된 평가가 존재하지만, 다양한 사료와 후대의 인정을 통해 그의 진정한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과 같은 혼란기에 많은 기록이 유실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할 때, 남은 기록만으로 그의 업적을 온전히 평가하기는 어려우며, 지속적인 연구와 재평가가 필요하다.
3. 2. 부정적 평가
최립은 서인의 주요 인물인 이이, 윤두수, 윤근수 등과 교류가 있었으나, 그의 가문이 상대적으로 한미하다는 점은 그의 관직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조선 사회는 좋은 가문 출신이 중요한 관직에 오르는 데 유리했는데, 임진왜란 당시 젊은 나이에 재상 반열에 오른 이항복과 이덕형의 아버지가 모두 당상관 이상의 고위직이었던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9] 최립과 비슷한 처지였던 이이조차 선조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46세에 이르러서야 정2품 관직에 올랐다.[10]본격적인 당쟁이 시작되면서 최립의 문장에 대한 비판과 시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586년(선조 19년) 이문정시(吏文庭試)에 장원하여 종2품하 가선대부로 품계가 올랐으나, 이것이 과하다는 상소가 여러 차례 올라왔고 선조가 이를 물리쳤다.[11] 이러한 선조의 이례적인 조치는 오히려 최립에 대한 견제를 심화시키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학문 관련 관청에서 일하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 출세의 중요한 경로를 거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12]
임진왜란 중에는 동인이 주도하던 조정에서 최립의 가문과 문장에 대한 험담이 더욱 늘어났으며, 이는 아들 최동망에게까지 이어졌다.[13] 이로 인해 중앙 조정의 중요 직책에서 배제되었고, 학문과는 거리가 먼 관직을 주로 맡게 되었다.[14]
광해군일기의 졸기(卒記, 사망 기사)에는 최립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졸기는 그의 문장이 격조는 높으나 뜻이 지나치게 깊고 기이한 말을 사용하여 협착한 느낌을 주며, 시(詩) 역시 다듬는 데만 치중하여 시인의 풍치가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진주 목사로 6년간 있으면서 율시를 단 한 수만 지었다고 언급하며 그의 창작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음을 시사했다.[17] 실록의 다른 졸기에서는 "가세가 한미하나 위인이 교만하였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 평가가 온당한지에 대해서는 여러 반론이 제기된다. 명나라 관리 유황상(劉黃裳)은 다른 조선 관료들에게는 불손한 태도를 보였으나 최립의 글을 읽을 때는 손을 씻고 향을 피울 정도로 존경심을 표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허균은 1607년(선조 40년) 최립의 글에 대해 "뜻이 깊고 사어가 탁월하다"고 칭송했다.
영조 7년(1731년) 6월 10일 자 승정원일기에는 영조와 박문수의 대화에서 최립이 언급된다. 영조는 "옛날에 최립 또한 현달한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라고 말하며 가문 배경과 상관없이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해야 함을 강조했고, 박문수는 "최립과 같은 인물을 세상에서 어찌 쉽게 얻겠습니까"라고 답하며 그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했다.[15] 이는 최립이 가문의 배경과 관계없이 국가에 필요한 인재였음을 후대에도 인정받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실록 졸기의 "교만했다"는 평가 역시, 최립 자신이 1595년 승문원 제조 사직 상소 등에서 스스로를 "미천하고 문자도 허명"이라며 낮춘 기록들과 배치된다.[16] 이는 당시 당쟁의 격화 속에서 사관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당파적 입장이 기록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특히 광해군일기 졸기에서 6년간 율시를 한 수만 지었다는 기록은, 실제로는 수많은 외교 문서와 시문을 남겨 사후 9권의 문집 《간이집》으로 편찬될 정도로 활발했던 그의 저술 활동과 크게 어긋난다.[18]
또한 "재상의 반열에 오른 자가 직무를 소홀히 한다"는 탄핵 상소[19] 역시 과장된 측면이 있다. 당시 최립은 이미 환갑을 넘긴 고령이었고 병으로 인해 관직 수행이 어려운 상황이었으며, 탄핵 이후에도 여주 목사, 종사관 등 다른 관직에 임명된 기록으로 보아 일반적인 의미의 파직으로 보기는 어렵다.
최립의 공식적인 최고 품계 기록과 외교 문서상의 직함(이조참판, 예조판서 등)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20] 그러나 이는 임진왜란과 이후 정묘호란,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료가 유실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21] 특히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명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했던 최립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외교 문서에 실제보다 높은 직함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584년(선조 17년) 이문정시에 수석 합격하여 종2품 가선대부로 승품된 기록이 존재하는 점 등을 고려하면, 현존하는 기록만으로 그의 최종 관직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최립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그의 한미한 가문 배경과 당쟁이라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며, 일부 기록은 편파적이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임진왜란 시기 외교 문서를 도맡아 명나라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문장가로서도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3. 3. 기자(箕子)에 대한 인식
최립은 중국 은나라의 정치가 기자에 대해, 그가 조선을 정복한 후 기자조선을 건국했다고 인식하였다. 그는 "조선에서의 기자의 존재는 주나라의 문왕이나 무왕의 존재와 같다"고 주장하며, 기자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거듭 칭송했다.[2]참조
[1]
뉴스
최립 崔岦,1539~1612
https://www.doopedia[...]
2022-06-29
[2]
뉴스
朝鮮儒者中華認同的新解釋 ─「天下」與「國家」的整合分析
http://www.mh.sinica[...]
中央研究院
2017-06
[3]
서적
지호집
[4]
서적
광해군일기
1612-07-11
[5]
문서
최립과 허준은 둘 다 [[1539년]]생이다. 최립, 《간이집》권8, 贈送同庚大醫許陽平君還朝. 여기서 '同庚'은 동갑, 즉 같은 나이를 말한다.
[6]
문서
최립과 한호는 인척 관계로, 한호는 직강공 최영(崔泳)의 외손자다. 최립, 《간이집》 권3, 韓景洪書帖序.
[7]
문서
그의 문집인 <<간이집>>에는 고조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통천최씨대동보에는 최로는 11세 최립은 16세로 5대조가 된다.
[8]
문서
선조실록에는 1581년 명나라 주청사의 질정관이 될 때 ,【敬命曾爲侍臣, 坐父累就散。 岦以門地寒微, 不顯用。 二人皆能辭令, 故特辟之。】 라고 적은 사관의 주석이 작은글씨로 덧붙여 달려있다. 조선왕조 실록 사이트의 사학자 해석은 이부분을 【경명은 시신(侍臣)이었는데 아버지의 죄에 연좌되어 산관(散官)이 되었었다. 최입은 문벌이 미천하였으므로 현저하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라고 달아놓았는데, 이 해석에는 상당한 오역의 문제가 있다. 일단 앞부분은 해석은, 최립과 함께 천거된 고경명(高敬命)을 단숨에 역적의 자손과 살인자로 만드는 괴상한 해석이다. 시신 侍臣즉, 가까운 신하였는데 아버지의 죄에 연좌되어 아버지 상을 당했단는 이상한 풀이는, 이치에 맞지 않다. 대한민국 정부가 운영하는 사이트가 중세의 조선왕조 기록에 대해 이렇게 까지 실력없는 사학자의 해석을 그대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역사 왜곡 적인 문제가 있다. 이 문장의 바른 해석은 "천거된 고경명이 신하로 지냈지만 부친의 죽음으로 사직을 한 상태 " 라고 해석을 해야 한다, '산관'은 상을 당하여 공무를 중지한 관료를 의미 하기 때문이다. 최립에 대해 地寒微가 "문벌이 미천하다" 라고 쓴 한글풀이 역시 오역에 불과하다. 통천 최씨는 이미 고려조와 조선의 개국을 도운 상당히 오래된 명문가고, 이때는 단종애사로 인한 신분제약을 풀어서 복권이 된지 한참 지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재산보다 명망를 더 중시하였고 양반가문, 즉 사대부에 대한 전통적 유교 대우 관념상, 유서 깊은 가문을 "미천하다"라고 승정원이 첨언 했다고는 전혀 볼 수 가 없다. 사족글 '한미'는 현대에서 오용하고 있는 가난하고 미천하다는 풀이가 아니라, "사람이 드물어 세력이 부족한 가문" 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것이 맞을 듯 하다.
[9]
문서
이항복의 아버지인 이몽량은 정2품의 의정부 참찬에 이덕형의 아버지인 이민성도 정 2품의 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10]
문서
이이는 생원,진사시 등 총 9번의 과거시험에 장원을 하였다고 한다.
[11]
서적
선조실록
1586-10-01
[12]
문서
임진왜란 당시 중요 요직을 맡았던 인물중에 이러한 관직에 몸을 담지 않는 인물이 없을 정도였다. 최립보다 20여 년이나 어리면서도 30대에 제상의 반열에 올랐던 [[이항복]]이나 [[이덕형]]도 모두 당시 선조의 신임을 받고있던 이이의 추천으로 이러한 관직을 젊은 시기에 거쳐갔다.
[13]
문서
임진왜란 이듬해인 1593년에 종2품인 전주부윤에 올랐고 사망할 때까지 약 20여 년 동안 종2품인 동지중추부사였다. 승문원제조 3번, 형조의 장례원판결사만 수차례를 하였다.
[14]
서적
선조실록,광해군일기
[15]
간행물
승정원일기 영조7년 신해 6월10일
https://db.itkc.or.k[...]
[16]
서적
선조실록
1595-10-29
[17]
서적
광해군일기
http://sillok.histor[...]
1612-07-11
[18]
서적
인조실록
1631-10-26
[19]
문서
넓은 의미의 재상의 의미는 당상관 이상의 관리를 재상이라 하였으나 , 현실적인 재상의 반열이란 의정부와 육조를 포함한 정2품직 관리들을 지칭한다.
[20]
서적
선조실록
1593-10-22
[21]
문서
보통의 실록은 왕이 사망한 이후 임시관청이 설치되고 왕의 제위동안 기록된 사초들을 정리하여 초고를 완성하여 검토한 이후 첨삭이 필요한 부분에 수정이 가해지고 최종적인 실록이 편찬되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해 당시의 많은 기록이 유실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84년에 이이가 사망한때에 보통의 실록에 나타나는 졸기가 없이 간단히 '이이가 졸하였다.'라는 기사만이 보인다. 또한 정2품 이상이 되지 않았던 인물들이 간간히 받았고, 정2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기본적으로 사후에 내려졌던 시호조차도 선조실록에는 언급이 없다가, 40년 선조실록의 곳곳에서 부실이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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