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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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틴가는 10세기경 등장한 독일의 귀족 가문으로, 작센, 튀링겐, 마이센 등 여러 지역을 다스리며 중세 시대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베틴 가문은 동부 변경백령을 시작으로 마이센 변경백령, 튀링겐 방백령, 작센 공국 등을 거치며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지위를 얻었다. 1485년 가문은 에르네스틴 계와 알베르틴 계로 분가되었고, 에르네스틴 계는 튀링겐 지역의 여러 공국으로, 알베르틴 계는 작센 선제후령과 작센 왕국을 통치했다. 베틴 가문은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을 통해 영국, 벨기에, 불가리아 등의 왕실과 연결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유럽 왕가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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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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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원
베틴 가문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테오도리히 1세 폰 베틴이 가장 오래된 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리스가우를 기반으로 활동했으며, 1000년경 베틴 성을 획득하여 가문의 이름을 정했다. 1030년경 베틴 가문은 동부 변경백령을 봉토로 받았다.[1]
확실하게 알려진 베틴 가문의 가장 오래된 구성원은 테오도리히 1세 폰 베틴이며, *디트리히*, *티에데리쿠스*, *티에리 1세 폰 리스가우*로도 알려져 있다(c. 982년 사망). 그는 아마도 리스가우(하르츠 산맥의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에 기반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1] 1000년경, 이 가문은 현지 슬라브족 부족(소르브족 참조)이 원래 건설한 베틴 성을 획득했고, 이후 그 이름을 따서 가문의 명칭을 정했다. 베틴 성은 자알레 강의 하세가우(또는 호스가우)에 있는 베틴에 위치해 있다. 1030년경, 베틴 가문은 동부 변경백령을 봉토로 받았다.[1]
3. 초기 베틴 가문
베틴 가문은 남계로는 822년에 작위를 받은 리크베르트 백작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가문으로, 현존하는 유럽 귀족 가문 중에서는 로베르-카페 가문 다음으로 오래되었다.
3. 1. [[베틴 성|베틴]] 백작
확실하게 알려진 베틴 가문의 가장 오래된 구성원은 테오도리히 1세 폰 베틴이며, ''디트리히'', ''티에데리쿠스'', ''티에리 1세 폰 리스가우''로도 알려져 있다(c. 982년 사망). 그는 아마도 하르츠 산맥의 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한 리스가우에 기반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000년경, 이 가문은 현지 슬라브족 부족(소르브족 참조)이 원래 건설한 베틴 성을 획득했고, 이후 그 이름을 따서 가문의 명칭을 정했다. 베틴 성은 자알레 강의 하세가우 (또는 호스가우)에 있는 베틴에 위치해 있다. 1030년경, 베틴 가문은 동부 변경백령을 봉토로 받았다.[1]
3. 2. [[란츠베르크 변경백국|란츠베르크 변경백]]
3. 3. [[마이센 변경백국|마이센 변경백]]
슬라브족이 거주하는 작센 동부 변경백령(또는 ''오스트마르크'')에서 베틴 가문의 두드러진 위상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로 하여금 1089년에 그들에게 마이센 변경백을 봉토로 수여하게 만들었다.[1] 이 가문은 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성장했다. 1263년에는 헤센을 제외한 튀링겐의 방백령을 상속받았고, 1423년에는 비텐베르크를 중심으로 하는 작센 공국을 수여받아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중 하나가 되었다.
978년에 마이센 변경백이 된 리크다크는 베틴 가문 출신이라고 전해진다. 이후 작센-오스트마르크 변경백 가문과 마이센 변경백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11세기 전반에 디트리히 2세가 오스트마르크 (라우지츠) 변경백이 되었고, 그의 손자인 하인리히 1세는 마이센 변경백위도 겸임하여, 이후 마이센 변경백위 및 라우지츠 변경백위를 베틴 가문이 세습했다.
3. 4. [[루사티아 변경백국|루사티아 변경백]]
11세기 전반 디트리히 2세가 오스트마르크 (라우지츠) 변경백이 되었고, 그의 손자인 하인리히 1세는 마이센 변경백 지위도 겸임하여, 이후 마이센 변경백위 및 라우지츠 변경백위를 베틴 가문이 세습했다.[1]
4. 분가
1485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들이 영토를 분할하면서 베틴 가문은 에르네스틴 가문과 알베르틴 가문, 두 분파로 나뉘었다. 장남 에른스트는 작센 선제후령과 튀링겐을, 동생 알브레히트는 마이센 변경백령을 받았다.
에르네스틴 계는 1547년까지 작센 선제후 지위를 유지했으나, 슈말칼덴 전쟁 이후 튀링겐 지방의 여러 에르네스틴 공국으로 분열되었다.
4. 1. 작센 공작, 튀링겐 방백
1423년 아스카니아 왕가의 비텐베르크 가문이 단절된 후, 메이센 변경백이자 튀링겐 방백이었던 베틴 가문의 프리드리히 1세가 작센 선제후 지위를 받았다. 이후 베틴 가문은 작센 공작과 튀링겐 방백 지위를 세습했다.1485년, 프리드리히 2세의 두 아들인 에른스트와 알베르트는 작센을 분할 상속하여 각각 에르네스틴 가문과 알베르틴 가문으로 나뉘었다. 에른스트는 비텐베르크, 북부 메이센, 남부 튀링겐을 차지했고, 1482년 튀링겐을 상속받았다. 에르네스틴 가문은 1547년까지 작센 선제후 지위를 유지했다.
사진 | 이름 | 시작 | 종료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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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른스트 Ernstde | 1464년 9월 7일 | 1486년 8월 26일 |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 형제 알베르트와 함께 작센을 분할. |
![]() |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IIIde | 1486년 8월 26일 | 1525년 5월 5일 | "현명한"이라는 별명(der Weisede)이 붙었다. 에른스트의 아들. 마르틴 루터의 보호자. |
![]() | 요한 Johannde | 1525년 5월 5일 | 1532년 8월 16일 | "강직한"이라는 별명(der Beständigede)이 붙었다. 프리드리히 3세의 형제. 자신의 영토에 루터교 확립. |
![]() | 요한 프리드리히 1세 Johann Friedrich Ide | 1532년 8월 16일 | 1547년 5월 19일 | "관대한"이라는 별명(der Großzügigede)이 붙었다. 요한의 아들. 슈말칼덴 전쟁에서의 역할로 인해 선제후 지위 박탈. |
에르네스틴 가문의 우세는 슈말칼덴 전쟁 (1546/7)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패배하면서 끝났다. 뮐베르크 전투 이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비텐베르크를 포함한 영토와 선제후 지위를 사촌인 모리츠에게 넘겨야 했다. 이후 에르네스틴 가문은 튀링겐 지역으로 제한되었고, 여러 작은 에르네스틴 공국으로 분열되었다.
4. 2. [[작센 선제후]] 및 [[선제후#고위직|제국 대원수]]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der Weise'')는 1502년에 설립한 비텐베르크 대학교에 마르틴 루터(1512)와 필리프 멜란히톤(1518)을 임명했다.[2]에르네스틴 분가의 우세는 프로테스탄트 슈말칼덴 동맹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대항한 슈말칼덴 전쟁(1546/7)에서 끝났다. 알베르틴 분가는 루터교임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편에 섰다. 카를 5세는 모리츠에게 선제후 지위를 약속했다. 뮐베르크 전투 이후 요한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스무티게는 비텐베르크를 포함한 영토와 선제후 지위를 사촌 모리츠에게 넘겨야 했다. 요한 프리드리히는 투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대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이 대학교는 1548년 3월 19일 그의 세 아들에 의해 예나에 ''Höhere Landesschule''로 설립되었다. 1557년 8월 15일 페르디난트 1세 황제는 이 학교에 대학교 지위를 부여했다.[2]
이후 에르네스틴 분가는 튀링겐으로 제한되었고, 왕조의 통일성은 빠르게 붕괴되어 여러 작은 국가, 즉 에르네스틴 공국으로 분열되었다.
사진 | 이름 | 시작 | 종료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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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드리히 1세 Friedrich I|프리드리히 1세de | 1423년 1월 6일 | 1428년 1월 4일 | "전쟁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아스카니아 왕가의 비텐베르크 가문이 단절된 후 선제후 지위는 메이센 변경백이자 튀링겐 영주인 베틴 가문의 프리드리히에게 주어졌다. |
![]() |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프리드리히 2세de | 1428년 1월 4일 | 1464년 9월 7일 | "온화한"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작센에서 형제들과 공동으로 통치했지만 선제후 지위는 단독으로 보유했다. 에르네스틴 (이하 계속) 및 알베르틴 작센 가문 (알베르틴 작센 공작 참조)의 창시자인 에른스트와 알베르트의 아버지. |
에르네스틴 가문 | ||||
에른스트 Ernst|에른스트de | 1464년 9월 7일 | 1486년 8월 26일 |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 형제 알베르트와 함께 작센을 분할하여 비텐베르크, 북부 메이센, 남부 튀링겐을 차지했다. 1482년 튀링겐을 상속받아 1485년까지 알베르트와 공동 통치했다. | |
프리드리히 3세 Friedrich III|프리드리히 3세de | 1486년 8월 26일 | 1525년 5월 5일 | "현명한"이라는 별명(der Weise)이 붙었다. 에른스트의 아들. 마르틴 루터의 보호자였지만 평생 가톨릭 신자였다. | |
요한 Johann|요한de | 1525년 5월 5일 | 1532년 8월 16일 | "강직한"이라는 별명(der Beständige)이 붙었다. 프리드리히 3세의 형제. 1527년 자신의 영토에 루터교를 법적으로 확립했다. | |
요한 프리드리히 1세 Johann Friedrich I|요한 프리드리히 1세de | 1532년 8월 16일 | 1547년 5월 19일 | "관대한"이라는 별명(der Großzügige)이 붙었다. 요한의 아들. 슈말칼덴 전쟁에서의 역할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 의해 선제후 지위를 박탈당했다. 1554년 사망. |
4. 3. 에르네스틴 계와 알베르틴 계
1485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들이 영토를 분할하면서 베틴 가문은 에르네스틴 계와 알베르틴 계, 두 개의 분파로 나뉘었다.[2] 장남 에른스트는 작센 선제후령과 튀링겐을, 동생 알브레히트는 마이센 변경백령을 받았다.[2]에르네스틴 계는 1547년까지 작센 선제후 지위를 유지했으나, 슈말칼덴 전쟁 이후 튀링겐 지방의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었다.[2] 알베르틴 계는 1547년부터 1918년까지 작센 선제후령 및 작센 왕국의 군주를 배출했으며, 1697년부터 1763년까지 폴란드 국왕을 겸하기도 했다.[1]
4. 3. 1. 에르네스틴 계
16세기에 베틴 가문은 알베르트 계와 에른스트 계로 분리되었다. 에른스트계는 1547년까지 작센 선제후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슈말칼덴 전쟁 이후 현재의 튀링엔 지방에서 몇 개의 공국으로 갈라졌다. 1826년에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작센마이닝겐, 작센알텐부르크, 작센코부르크고타의 4공가로 정리되었다(작센 공작령 참조). 이들은 모두 1918년에 폐위되었다.[2]1485년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들이 이전까지 공동으로 통치하던 영토를 분할하면서 가문은 두 개의 지배 분파로 나뉘었다. 선제후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장남 에른스트는 선제후에게 할당된 영토(''작센 선제후령'')와 튀링겐을 받았고, 그의 동생 알브레히트는 마이센 변경백령을 얻어 드레스덴에서 통치했다.
에르네스틴 분가는 1547년까지 우위를 유지하며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의 시작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der Weise'')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에 마르틴 루터와 필리프 멜란히톤을 임명했다.[2]
에르네스틴 분가의 우세는 슈말칼덴 전쟁 (1546/7)에서 끝났다. 뮐베르크 전투 이후 요한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스무티게는 비텐베르크를 포함한 영토와 선제후 지위를 사촌 모리츠에게 넘겨야 했다. 요한 프리드리히는 투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나에 ''Höhere Landesschule''를 설립했고, 1557년 페르디난트 1세 황제는 이 학교에 대학교 지위를 부여했다.[2]
이후 에르네스틴 분가는 튀링겐으로 제한되었고, 여러 작은 국가, 즉 에르네스틴 공국으로 분열되었다. 작센-고타 공작 에른스트 데어 프롬메(1601–1675)는 백성의 교육을 지원하고 행정을 개선하는데 시대를 앞선 통치자였다. 18세기에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공작 카를 아우구스트가 바이마르 궁정에서 바이마르 고전주의를 확립했는데, 특히 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초청하여 이루어졌다.[2]
19세기에 이르러 여러 에르네스틴 분가 중 하나인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는 결혼을 통해 중요성을 되찾았는데, 벨기에, 포르투갈, 불가리아 및 영국의 왕위를 계승하고 멕시코 황제의 배우자를 제공하였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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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1세 Friedrich I | 1423년 1월 6일 | 1428년 1월 4일 | "전쟁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 ||||||||||||||||||||||||||||||||||||||||||||||||||||||||||||||||||||||||||||||||||||||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 | 1428년 1월 4일 | 1464년 9월 7일 | "온화한"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 ||||||||||||||||||||||||||||||||||||||||||||||||||||||||||||||||||||||||||||||||||||||
에르네스틴 가문 | |||||||||||||||||||||||||||||||||||||||||||||||||||||||||||||||||||||||||||||||||||||||||
4. 3. 2. 알베르틴 계16세기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들로부터 알베르트 계와 에른스트 계가 분리되었다. 알베르트 계는 1547년부터 1918년까지 작센 선제후령 및 작센 왕국의 군주를 배출했으며, 1697년부터 1763년까지 폴란드 국왕을 겸했다.[1]알베르티네 분가는 작센의 영토 대부분을 유지하며 이 지역의 주요 세력으로 남았고, 그 분가들을 위한 작은 분봉 영지를 사용했지만, 그중 몇 개는 상당 기간 존속하지 못했다. 반면에 에르네스틴 베틴 가문은 영토를 반복적으로 분할하여 튀링겐에 작은 공작령과 백작령의 복잡한 혼합체를 만들었다.[1] 알베르티네 베틴 가문은 선제후(1547–1806)와 작센 왕(1806–1918)으로 통치했으며 폴란드 역사에도 역할을 했다. 두 명의 베틴 가문은 폴란드 왕(1697–1763년 사이)이었고, 세 번째는 나폴레옹 1세의 위성국인 바르샤바 공국을 통치했다(1807–1814).[1] 나폴레옹 전쟁 이후 알베르티네 분가는 약 40%의 영토(경제적으로 덜 발달한 옛 작센 선제후국의 북부 지역)를 프로이센에 잃었고, 현대 작센과 동일한 영토로 축소되었다(빈 회의 제4조: 프로이센과 작센 간의 조약 1815년 5월 18일 참조).[1]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3세는 1918년 독일 혁명에서 왕위를 잃었다.[1] 현재 알베르티네 "작센 가문"의 수장 역할은 그의 증손자인 작센 공작 루디거 공(1953년 12월 23일 출생), 마이스센 변경백이 주장한다.[1] 그러나 루디거 공의 수장 자격은 그의 사촌인 알렉산더(1954년 출생)와 다투고 있는데, 알렉산더는 로베르토 아피프(이후 개명하여 게사페 씨)와 작센의 마리아 안나 공주의 아들이다.[1] 마리아 안나 공주는 알베르티네의 전 수장이자 자녀가 없었던 마리아 에마누엘, 마이센 변경백(2012년 사망)의 누이였으며, 그는 조카를 양자로 삼아 살리카 법에 따른 남계 상속 규칙에 반하여 그에게 작센 공의 칭호를 부여했다.[1] 그러나 둘 다 마르부르크의 귀족 기록 보관소와 독일의 전 통치 가문 회의에서 인정받지 못했다.[1] 루디거 공은 그의 아버지 티모가 베틴 가문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이고, 알렉산더 공은 아그나트 귀족 혈통이 아니기 때문이다(그의 아버지는 레바논 출신 로베르토 아피프였다).[1] 결과적으로 베틴 가문의 알베르티네 분가는 독일 귀족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법적 상속 계통이 단절된 것으로 취급된다.[1]
4. 4. 작센코부르크고타 가작센코부르크고타 가는 베틴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분가 중 하나로, 현재의 영국, 벨기에, 과거의 포르투갈, 불가리아 왕실을 배출했다. 베틴 가문 전체에서 후손이 가장 많다.[4]베틴 가문의 장자 계열(에르네스틴 가문)은 1547년 선제후 지위를 알베르틴 가문에 넘겨주었지만, 튀링겐 지역의 영토를 유지하며 여러 소국으로 분할했다. 그 결과로 생겨난 에르네스틴 가문 중 하나가 1826년까지 작센코부르크잘펠트로 알려졌고, 이후 작센코부르크고타로 알려졌다. 이 가문은 벨기에 왕(1831년부터)과 불가리아 왕(1908~1946)을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페르디난드 왕자)과 영국(앨버트 공) 및 멕시코 황제(멕시코의 샤를로테)의 배우자들을 배출했다.[4] 따라서 영국과 포르투갈의 왕위는 한동안 베틴 가문 사람들의 소유였다. 조지 1세부터 빅토리아 여왕까지 영국 왕가는 하노버 왕가로 불렸으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의 방계였고, 귈프 왕조의 일부였다.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여왕은 잉글랜드의 문장원에 남편 앨버트 공의 정확한 성을 결정하도록 지시했다. 광범위한 조사 후 그들은 베틴으로 결론을 내렸지만, 이 이름은 여왕이나 그녀의 아들(에드워드 7세) 또는 손자(조지 5세)에 의해 사용되지 않았고, 그들은 단순히 "작센코부르크고타" 왕가의 왕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8) 중 반독일 정서로 인해, H. G. 웰스와 같은 급진 공화주의자들은 영국 왕가의 충성심에 의문을 제기했다.[5] 조지 5세 국왕의 고문들은 영국 왕가를 위한 적절한 성을 찾았지만, ''베틴''은 "부적절하게 희극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다.[6][7][8] 1917년 추밀원 명령은 영국 왕가의 이름을 "윈저"로 법적으로 변경했다. 에르네스틴 베틴 가문의 대표는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 프란츠의 후손들에게 넘어갈 것이며, 이들은 현재 작센-코부르크-고타 공 안드레아스 (1943년 3월 21일 출생)가 이끄는 윈저 왕가, 벨기에 왕가, 불가리아 왕가이다. 5. 가계도6. 문장
참조
[1]
서적
Lexikon des Mittelalters
Munich
1969-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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