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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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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작센 공국은 5세기부터 9세기까지 존속한 작센족의 공국에서 시작하여, 1180년 하인리히 사자공의 몰락 이후 분열을 겪었다. 이후 작센은 작센라우엔부르크와 작센비텐베르크로 분할되었고, 1356년 금인칙서에 의해 작센비텐베르크 공이 선제후 자격을 얻었다. 베틴 가문이 작센 공위를 계승한 후, 16세기 종교 개혁 시기에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며 가톨릭 측과 대립했다. 1805년 신성 로마 제국 해체 이후 작센 공국은 작센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작센 공국은 오늘날 독일 니더작센, 작센안할트, 작센 자유주를 포함한 북독일 지역에 걸쳐 있었으며, 베스트팔렌, 앙그리아, 동부 작센, 노르달빙기아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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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 공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스카니아 가문의 문장
좌측: 아스카니아 가문의 문장 (1000년경), 작센 공국을 마지막으로 통치함
작센 선제후령의 문장
우측: 작센 선제후령의 문장 (공국의 남부 지역에 설립됨)
개요
공식 명칭작센 공국 (및 작센 선제후령)
일반 명칭작센
시대중세
지위공국
지위 상세카롤링거 제국의 부족 공국 (843–911)
동프랑크 왕국 (911–962)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국가 (962년부터)
제국신성 로마 제국
수도(공국) 없음
알슈테트 (작센 선제후령의 소재지)
공용어라틴어
통용어고대 작센어
중세 저지 독일어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공식)
게르만족 이교
현재 국가독일
역사
시작샤를마뉴의 정복 (804년)
벨프 가문 득세1137년
정복으로 확장1142년
벨프 가문 폐위, 아스카니아 가문에게 축소된 공국 수여1180년
요한 1세와 알브레히트 2세의 공동 통치1260년
권한 분할1269년, 1272년, 1282년
종료작센라우엔부르크와 작센비텐베르크로의 확실한 분할 (1296년)
이후 사건비텐베르크 아스카니아 가문 단절, 재통일 실패 (1422년)
선대
선대 국가고대 작센
후대
후대 국가작센비텐베르크
작센라우엔부르크
베스트팔렌 공국
올덴부르크 백국
안할트 공국
블랑켄부르크 백국
브레멘 대주교국
뮌스터 주교후국
힐데스하임 주교후국
테클렌부르크 백국
홀슈타인 백국
호야 백국
마그데부르크 대주교국
페어덴 주교후국
뤼베크 주교후국
민덴 주교후국
리페 백국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라체부르크 주교후국
지도

2. 역사

5세기경 일부 작센인(색슨인)은 유틀란트 반도의 앵글인, 주트인과 함께 브리타니아로 건너가 앵글로색슨인의 기원이 되었다.[2] 6세기 초, 작센인은 라인강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했다.[2]

10세기 연대기 작가 코르베의 비두킨트의 작센의 업적에 따르면, 작센족은 브리타니아에서 엘베-베저 삼각주의 란트 하델른 해안으로 왔는데, 이는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조 통치자들이 튀링기 왕국 정복을 지원하기 위해 불렀기 때문이다.[1] 이는 전설적인 형제 헹기스트와 호르사의 지도 아래 이 지역의 작센 부족이 로마 이후의 브리타니아를 침략한다는 영국의 기원 신화와는 반대되는 내용이다. (영국의 앵글로색슨 정착 참조).[1]

772년, 카롤링거 왕조의 피핀 3세의 아들 샤를마뉴는 작센 영토의 최종 정복을 시작했다.[1] 그의 지속적인 원정은 성공적이었지만, 베스트팔렌, 동작센, 앙그리아, 노르달빙기아 부족의 작센 영토 분열을 처리해야 했으며, 곧 다른 씨족에 의해 깨질 특정 평화 협정을 개별 부족과 체결해야 했다.[1] 작센족은 에레스부르크의 프랑크 요새를 파괴했고, 그들의 지도자(''헤르조크'') 비두킨트는 777년 파더보른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 나타나기를 거부하고 노르달빙기아로 물러났으며, 이후 점령군에 대항하여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샤를마뉴는 782년 베르덴 학살에서 복수했고,[1] 비두킨트는 785년에 충성을 맹세하고 세례를 받아 프랑크 백작이 되었다고 전해진다.[1] 작센 봉기는 804년까지 계속되었고, 이때 모든 시조 공작령이 카롤링거 제국에 병합되었다.[1] 이후 작센은 샤를 마르텔의 손자이자 황제의 사촌인 코르비의 왈라 (836년 사망)와 같은 카롤링거 관리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그는 811년에 덴마크 왕 헤밍과 아이더 강을 따라 제국의 북쪽 경계를 정의하는 하일리겐 조약을 체결했다.[1]

911년 동프랑크 카롤링거 왕조가 어린 루이의 죽음으로 멸망하자 작센, 슈바벤, 바이에른의 공작들은 포르히하임에서 만나 콘라딘 공작 프랑코니아의 콘라트 1세를 왕으로 선출했다.[1] 919년 작센 공작은 프리츠라에서 소집된 작센과 프랑코니아의 제후들에 의해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1]

936년 멤레벤에서 하인리히가 죽고 그의 아들 오토 1세가 뒤를 이었다.[2] 961년 오토 1세가 이탈리아로 떠나자 그의 부관 변경백 헤르만 빌룽이 작센의 행정관이 되었다.[2] 973년 헤르만 빌룽과 오토 1세가 사망하고,[2] 오토 2세가 황제가 되었고 헤르만의 아들 베른하르트 1세를 빌룽 가문의 초대 작센 공작으로 임명했다.[2]

1106년 빌룽 가문의 마지막 당주 마그누스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슈플린부르크 가문의 로타르 2세가 작센 공작이 되었다. 1125년 로타르 2세는 황제(로타르 3세)가 되었다. 1137년 로타르 3세가 사망했고, 후계자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사위이자 벨프 가문의 바이에른 공작하인리히 10세 (오만한 공작)가 작센 공작 하인리히 2세가 되었다.

1142년, 독일 국왕 콘라트 3세는 작센 공작 칭호를 벨프 가문의 후손인 하인리히 사자공(작센 공작 하인리히 3세)에게 수여했다.[4] 1180년에 사자 공작은 추방되었으며, 아스카니엔 가문 출신으로 알브레히트 곰 공작의 아들 베른하르트 3세가 작센 공작이 되었다. 1260년 베른하르트 3세의 아들 알브레히트 1세가 사망하고, 유산은 작센-비텐베르크와 작센-라우엔부르크로 분할되었다.

1356년, 카를 4세가 반포한 금인칙서에 의해 작센-비텐베르크 공은 선제후 자격을 부여받았다. 1422년 알브레히트 3세의 죽음으로 아스카니엔 가문이 단절되었고, 작센 공위는 베틴 가문의 마이센 변경백프리드리히 1세 (호전공)가 그 지위를 계승했다.

16세기 초부터 종교 개혁 운동의 기운이 높아지자, 에른스트 계의 프리드리히 3세 (현공)는 마르틴 루터를 보호하고 프로테스탄트를 승인했다. 1547년, 뮐베르크 전투에서 승리한 카를 5세는 자신에게 적대했던 요한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계)에게서 선제후 자격을 박탈하고, 아군이었던 모리츠 (알브레히트 계)에게 보상으로 이를 주었다.

1805년, 나폴레옹 1세신성 로마 제국을 침공하여 제국이 해체되고 라인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로 인해 작센 공국은 작센 왕국이 되었다. 당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는 작센 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되었다.

2. 1. 초기 역사 (5세기 ~ 9세기)

10세기 연대기 작가 코르베의 비두킨트의 작센의 업적에 따르면, 작센족은 브리타니아에서 엘베-베저 삼각주의 란트 하델른 해안으로 왔는데, 이는 메로빙거 왕조의 프랑크 왕조 통치자들이 튀링기 왕국 정복을 지원하기 위해 불렀기 때문이다. 이는 전설적인 형제 헹기스트와 호르사의 지도 아래 이 지역의 작센 부족이 로마 이후의 브리타니아를 침략한다는 영국의 기원 신화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영국의 앵글로색슨 정착 참조).[1]

왕립 프랑크 연대기는 743년 카롤링거 왕조의 궁재 카를로만이 작센족을 상대로 이끈 프랑크족의 원정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듬해 그의 형제 피핀 3세와 함께 두 번째 원정을 벌였다.[1] 747년에는 반역적인 그들의 형제 그리포가 작센 부족과 동맹을 맺고 바이에른의 역사의 시조 공작령을 일시적으로 정복했다.[1] 750년부터 프랑크 왕인 피핀은 다시 작센을 침략하여 758년까지 여러 베스트팔렌 부족을 제압했다.[1]

772년, 피핀의 아들 샤를마뉴는 작센 영토의 최종 정복을 시작했다.[1] 그의 지속적인 원정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는 베스트팔렌, 동작센, 앙그리아, 노르달빙기아 부족의 작센 영토 분열을 처리해야 했으며, 곧 다른 씨족에 의해 깨질 특정 평화 협정을 개별 부족과 체결해야 했다.[1] 작센족은 에레스부르크의 프랑크 요새를 파괴했고, 그들의 지도자(''헤르조크'') 비두킨트는 777년 파더보른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 나타나기를 거부하고 노르달빙기아로 물러났으며, 이후 점령군에 대항하여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켰고, 샤를마뉴는 782년 베르덴 학살에서 복수했다.[1] 비두킨트는 785년에 충성을 맹세하고 세례를 받아 프랑크 백작이 되었다고 전해진다.[1] 작센 봉기는 804년까지 계속되었고, 이때 모든 시조 공작령이 카롤링거 제국에 병합되었다.[1]

이후 작센은 샤를 마르텔의 손자이자 황제의 사촌인 코르비의 왈라 (836년 사망)와 같은 카롤링거 관리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그는 811년에 덴마크 왕 헤밍과 아이더 강을 따라 제국의 북쪽 경계를 정의하는 하일리겐 조약을 체결했다.[1] 설치된 공작들 중에는 왈라의 후임인 성 헤르츠펠트의 이다의 남편인 에크베르트 백작과 같이 작센 출신의 귀족도 있었는데, 그는 샤를마뉴의 가까운 친척이었다.[1]

원래 엘베강 북안의 홀슈타인 일대에 집락을 이루고 있던 작센인은 2세기부터 4세기에 걸쳐 서서히 생존권을 확대해 갔다.[2] 5세기에는 일부 작센인(색슨인)이 유틀란트 반도의 앵글인・주트인과 함께 영국에 상륙하여, 이른바 앵글로색슨인의 기원이 되었다.[2] 6세기 초에는 작센인은 라인강 일대까지 세력을 넓혔다.[2] 8세기부터 프랑크 왕국이 동방으로 침공을 시작했고, 작센도 저항 끝에 그 판도의 일부가 되었다.[2] 프랑크 왕 카롤루스 대제는 항복한 작센인의 지도자인 비두킨트를 개종시켜 작센 공작으로 삼았다.[2]

2. 2. 작센 공작령의 발전과 분열 (10세기 ~ 12세기)

911년, 동프랑크 카롤링거 왕조는 국왕 어린 루이의 죽음으로 멸망했고, 작센, 슈바벤, 바이에른의 공작들이 포르히하임에서 만나 콘라딘 공작 프랑코니아의 콘라트 1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919년 작센 공작은 프리츠라에서 소집된 작센과 프랑코니아의 제후들에 의해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1] 중세 연대기 작가 코르베이의 비두킨트에 따르면, 콘라트 왕은 하인리히를 자신의 상속자로 지명하여 자신의 형제 프랑코니아의 에버하르트의 계승을 부인했다고 한다.[1] 하인리히는 슈바벤, 바이에른 및 로트링겐 공작령을 제국 연방에 통합할 수 있었는데, 이는 헝가리 대공국 군대의 지속적인 공격을 처리하는 데 필수적이었다.[1]

936년 멤레벤에서 하인리히가 죽고 그의 아들 오토 1세가 뒤를 이었다.[2] 비두킨트에 따르면 그는 아헨 대성당에서 왕으로 즉위했으며, 다른 독일 공작들인 로렌의 기셀베르트, 프랑켄의 에베르하르트, 바이에른의 아르눌프와 슈바벤의 헤르만이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2] 961년 오토 1세가 이탈리아로 떠나자 그의 부관 변경백 헤르만 빌룽이 작센의 행정관이 되었다.[2] 그는 죽기 전에 거의 작센의 공작이었다.[2] 973년 헤르만 빌룽이 퀘들린부르크에서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토 1세가 멤레벤에서 사망했다.[2] 오토 2세가 황제가 되었고 헤르만의 아들 베른하르트 1세를 빌룽 가문의 초대 작센 공작으로 임명했다.[2]

1106년 빌룽 가문의 마지막 당주 마그누스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슈플린부르크 가문의 로타르 2세가 작센 공작이 되었다. 1125년 로타르 2세는 황제에 즉위하여 로타르 3세가 되었다. 1137년 로타르 3세가 사망했고, 후계자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사위이자 벨프 가문의 바이에른 공작하인리히 10세 (오만한 공작)가 작센 공작 하인리히 2세가 되었다.

하인리히 오만한 공작은 황위도 노렸지만, 바이에른과 작센을 지배하는 그에게 힘이 집중되는 것을 두려워한 제후들은 오만한 공작을 지지하지 않고 콘라트 3세를 옹립했다. 콘라트 3세 역시 제후들과 같은 경계심을 품었기 때문에, 오만한 공작을 작센 공작으로 인정하지 않고, 아스카니엔 가문의 알브레히트 1세 (곰 공작)를 작센 공작으로 삼았다.

1142년, 독일 국왕 콘라트 3세는 작센 공작 칭호를 벨프 가문의 후손인 하인리히 사자공(작센 공작 하인리히 3세)에게 수여했다.[4] 하인리히는 점차 독일 북동부로 지배력을 확장하여 이교도인 벤드족을 상대로 십자군을 이끌었다.[4] 1152년, 하인리히는 사촌 프리드리히 1세를 독일 왕(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으로 선출하는 것을 지지했는데, 이는 아마도 하인리히에게 바이에른 공작령을 다시 수여하겠다는 약속 때문이었을 것이다.[4]

1180년에 사자 공작은 추방되었으며, 아스카니엔 가문 출신으로 알브레히트 곰 공작의 아들 베른하르트 3세가 작센 공작이 되었다. 1260년 베른하르트 3세의 아들 알브레히트 1세가 사망하고, 유산은 작센-비텐베르크와 작센-라우엔부르크로 분할되었다.

2. 3. 작센 선제후국 (14세기 ~ 19세기)

1356년, 카를 4세가 반포한 금인칙서에 의해 작센-비텐베르크 공은 선제후 자격을 부여받았다. 1422년, 알브레히트 3세의 죽음으로 아스카니엔 가문이 단절되었고, 작센 공위는 베틴 가문의 마이센 변경백프리드리히 1세 (호전공)가 그 지위를 계승했다. 1464년에 튀링겐 변경백도 겸한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하자, 유산은 두 아들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장남 에른스트가 작센 선제후가 되어 북마이센, 남튀링겐, 비텐부르크를 계승했다. 다른 아들 알브레히트는 남마이센, 북튀링겐을 계승하여 작센 공을 칭했다.

16세기 초부터 종교 개혁 운동의 기운이 높아지자, 에른스트 계의 프리드리히 3세 (현공)는 마르틴 루터를 보호하고 프로테스탄트를 승인했다. 이로 인해 작센에는 많은 프로테스탄트가 유입되었다. 한편, 알브레히트 계는 가톨릭 측에 가깝게 황제를 지지했다. 양자는 대립하게 되었고, 작센은 구교와 신교 양파의 항쟁의 장이 되었다. 1547년, 뮐베르크 전투에서 승리한 카를 5세는 자신에게 적대했던 요한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계)에게서 선제후 자격을 박탈하고, 아군이었던 모리츠 (알브레히트 계)에게 보상으로 이를 주었다. 이후, 선제후 자격은 가톨릭을 지지하는 알브레히트 계가 계승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작센에는 많은 프로테스탄트가 존재했기 때문에 종종 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또한, 후에는 작센 선제후 중에서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는 자가 나타났다. 한편, 에른스트 계는 분할 상속을 반복하여 약소한 영방으로 전락하여 정치적 중요성을 잃어갔다.

2. 4. 작센 왕국 (19세기)

1805년, 나폴레옹 1세신성 로마 제국을 침공하여 제국이 해체되고 라인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로 인해 작센 공국은 작센 왕국이 되었다. 당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는 작센 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되었다.

3. 지리

오늘날 독일 내의 세 주인 니더작센, 작센안할트, 작센 자유주의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


작센 줄기 공작령은 오늘날 북독일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니더작센, 작센안할트의 상당 부분을 포함했다. 동쪽으로는 엘베강잘레강까지, 브레멘과 함부르크의 도시 국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베스트팔렌 지역, 그리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홀슈타인 지역(노르트알빙기아)을 포함했다. 12세기 말, 공작 사자공 하인리히는 인접한 메클렌부르크 지역(구 빌룽 변경백령)도 점령했다.

4. 1180년 이후 작센 공작령에서 분리된 영토

1180년 이전 작센 공국에서 분리된 많은 영토는 제국 직속 영지를 얻었거나, 주군이 변경되었다. 1180년에 이미 분리된 쾰른 대주교 소유의 베스트팔렌 공국과 비텐베르크와 라우엔부르크를 중심으로 1296년에 형성된 아스카니아 작센 공국 외에도, 이전의 간선 공작령 영토에는 다음과 같은 국가들이 존재했다.

지역국가비고
베스트팔렌 지역베스트팔렌 공국
벤트하임 백국
마르크 백국
뮌스터 주교령
오스나브뤼크 주교령
라벤스베르크 백국
테클렌부르크 백국
앙그리아 지역브레멘 대주교령
코르베 수도원
델멘호르스트 백작령
디프홀츠 백작령
에버슈타인 백작령
호야 백작령
립페 영주국1180년까지 작센 공국의 영유였으며, 분쟁 중인 제국 직속 신분을 획득
민덴 주교령
올덴부르크 백작령
파더보른 주교령
페르덴 주교령
발데크 백작령
동부 작센 지역블랑켄부르크 백작령1180년까지 작센 봉토, 이후 할버슈타트 주교령의 봉토
브라운슈바이크 백작령이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령(1235), 벨프 가문 고유 영지
간더스하임 수도원
할버슈타트 주교령
힐데스하임 주교령
호엔슈타인 백작령호엔슈타인에 위치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령
만스펠트 백작령
케델린부르크 수도원
노르달빙기아 지역베르니게로데 백작령
성 루드거 수도원
베르덴 수도원
홀슈타인 백국
노르달빙기아 지역뤼베크 주교령
라체부르크 주교령
슈베린 주교령


4. 1. 베스트팔렌 지역

베스트팔렌 공국

벤트하임 백국

마르크 백국

뮌스터 주교령

오스나브뤼크 주교령

라벤스베르크 백국

테클렌부르크 백국

4. 2. 앙그리아 지역

브레멘 대주교령

코르베 수도원

델멘호르스트 백작령

디프홀츠 백작령

에버슈타인 백작령

호야 백작령

립페 영주국은 1180년까지 작센 공국의 영유였으며, 분쟁 중인 제국 직속 신분을 획득했다.

민덴 주교령

올덴부르크 백작령

파더보른 주교령

페르덴 주교령

발데크 백작령

4. 3. 동부 작센 지역

영역설명
블랑켄부르크 백작령
1180년까지 작센 봉토, 이후 할버슈타트 주교령의 봉토
브라운슈바이크 백작령
이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령(1235), 벨프 가문 고유 영지
간더스하임 수도원
할버슈타트 주교령
힐데스하임 주교령
호엔슈타인 백작령호엔슈타인에 위치
마그데부르크 대주교령
만스펠트 백작령
케델린부르크 수도원
베르니게로데 백작령
성 루드거 수도원
베르덴 수도원


4. 4. 노르달빙기아 지역

홀슈타인 백국
홀슈타인 백국

뤼베크 주교령
뤼베크 주교령

라체부르크 주교령
라체부르크 주교령

슈베린 주교령
슈베린 주교령

참조

[1] 문서 The horse as a heraldic charge associated with Saxony first appears in the late 14th century as an "old Saxon" Motif (visual arts)|motif. The horse motif was adopted by the House of Welf in 1361 and also been used in several provinces in Duchy of Westphalia|Westphalia. Historian James Lloyd suggests that 'the Saxon Steed motif was invented in the 14th century… as a faux-ancient symbol for the Saxons'. (see the Saxon Steed#Origin and past uses|whole article)
[2] 서적 Jäger des Löwen oder Getriebener der Fürsten? Friedrich Barbarossa und die Entmachtung Heinrichs des Löwen. Regensburg 2009
[3] 간행물 Die Herzöge von Sachsen-Lauenburg Wachholtz, Neumünster 2008
[4] 간행물 Die Herzöge von Sachsen-Lauenburg Wachholtz, Neumünster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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