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세주르 요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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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세주르 요새 전투는 1755년 6월, 영국과 프랑스 간의 식민지 분쟁인 프랑스-인디언 전쟁의 일환으로 벌어진 전투이다. 영국은 보세주르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로버트 멍크턴 중령이 이끄는 병력을 투입했고, 프랑스군은 루이 뒤퐁 뒤샴봉 드 베르고르의 지휘 아래 요새를 방어했다. 전투 결과, 영국이 승리하여 요새를 점령하고 컴벌랜드 요새로 개명했으며, 이는 아카디아인들의 강제 추방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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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주르 요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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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분쟁 | 프렌치-인디언 전쟁 |
전투명 | 보세주르 요새 전투 |
날짜 | 1755년 6월 3일 ~ 1755년 6월 16일 |
장소 | 현재의 캐나다, 뉴브런즈윅주 색빌 근처 |
결과 | 영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왕국 미크마크족 민병대 아카디아 민병대 |
교전국 2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지휘관 | |
프랑스 지휘관 | 루이 뒤퐁 뒤샹봉 드 베르고 |
영국 지휘관 | 로버트 멍크턴 조지 스콧 존 루스 해군 대위 존 윈슬로 제디다 프레블 벤저민 골드스웨이트 윈크워스 통 |
병력 규모 | |
프랑스 병력 | 162명 해병대 300명 아카디아 민병대 |
영국 병력 | 270명 영국 육군 병력 2,000명 뉴잉글랜드 민병대 |
사상자 | |
프랑스 사상자 | 8명 사망, 6명 부상 |
영국 사상자 | 4명 사망, 16명 부상 |
관련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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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17세기, 프랑스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이웃하는 아카디아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긴장 관계가 시작되었다.[55][3] 특히 1710년 아카디아 정복 이후, 시그넥토 지협을 비롯한 영토 관할권 문제가 주요 갈등 요인으로 작용했다.[55][3] 미시수아시 강을 경계로 양측의 영유권 주장이 대립했으며, 아카디아인들은 강 양쪽에 정착하여 갈등을 심화시켰다.[3] 현재의 뉴브런즈윅과 북부 메인에 대한 잉글랜드의 주장은 그 지역의 소규모 프랑스 존재와 아카디아 정착과 충돌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아카디아인들이 미시수아시 강 서쪽, 보세주르 요새를 향해 이주하도록 장려했다.[5]
1750년대 뉴잉글랜드인들은 가뭄, 경제난, 높은 세금 등으로 고통받았으며,[6] 이는 청교도 및 개신교 사제들에 의해 반(反)프랑스 감정으로 이어졌다.[6] 프랑스와 미크마크 족의 긴밀한 관계는 영국인들을 더욱 자극했다.[6][8] 아카디아인들은 미크마크 족과의 결혼을 통해 민족적 화합을 이루었지만,[7] 영국은 이를 경계했다.[7]
아베 르 루트르는 보세주르 요새의 사제로, 프랑스 정부 대표로서 미크마크 족과의 동맹을 강화하고,[9] 아카디아인들에게 영국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며 긴장을 고조시켰다.[9] 영국은 르 루트르에게 현상금을 걸었다.[10]
찰스 로렌스 총독을 비롯한 영국 관리들은 아카디아인들의 중립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충성 서약을 강요하려 했다.[11] 뉴잉글랜드의 잉글랜드인들은 아카디아인들을 영국에 대한 반역자이자 "프랑스 광신자"로 여겼다.[11] 르 루트르 신부 전쟁은 총력전의 조건을 만들었으며, 영국은 아카디아 민간인들이 프랑스에 협력한다고 보았다.[13]
1753년, 캐나다에서 온 프랑스군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오하이오 계곡을 점령하고 요새화했다. 1754년 5월 28일, 프랑스-인디언 전쟁은 조몽빌 글렌 전투로 시작되었다. 프랑스 장교 앙생 드 조몽빌과 그의 호위병 3분의 1이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영국 순찰대에 의해 공격받아 살해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와 인디언들은 포트 넥세시티 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했다.
아카디아에서 영국의 주요 목표는 보세주어와 루이부르 요새를 격파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아카디아인들의 프랑스에 대한 충성과 와바나키 연맹을 군사적 위협으로 간주했다. 프랑스-인디언 전쟁의 일환으로, 매사추세츠 총독 윌리엄 셜리는 보세주르 요새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14][6]
2. 1. 17세기 ~ 18세기 초: 영-프 갈등의 시작
17세기, 프랑스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이웃하는 아카디아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영국과 프랑스 간의 긴장 관계가 시작되었다.[55][3] 특히 1710년 아카디아 정복 이후, 시그넥토 지협을 비롯한 영토 관할권 문제가 주요 갈등 요인으로 작용했다.[55][3] 미시수아시 강을 경계로 양측의 영유권 주장이 대립했으며, 아카디아인들은 강 양쪽에 정착하여 갈등을 심화시켰다.[3]1750년대에 뉴잉글랜드인들은 가뭄, 낙담, 높은 세금, 폭력에 시달렸으며, 이는 청교도와 개신교 사제들이 가톨릭 프랑스에 대한 공격 지지를 얻기 위해 더욱 조작되었다.[6] 프랑스와 이 지역의 미크마크 족 간의 밀접한 관계는 잉글랜드인들을 더욱 악화시켰다.[7] 아카디아인들은 종종 미크마크 족과 결혼하여 민족적 화합을 이루고 독특한 지역 인구를 만들었다. 잉글랜드는 특히 아카디아인들이 비옥한 토지를 소유하고 미크마크 족의 지원을 받아 개신교 정착촌 건설을 막았기 때문에 아카디아인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7]
아베 르 루트르는 보세주르 요새의 사제로, 프랑스 정부의 대표였고 미크마크 족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또 다른 긴장의 원인이 되었다.[9] 르 루트르는 프랑스에 충성했으며 아카디아인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이 잉글랜드 영토로 진출하면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위협했다.[9] 영국은 르 루트르에게 현상금을 걸었다.[10]
노바스코샤 의회의 중령 로렌스와 이전의 많은 총독들은 여러 차례 아카디아인들이 중립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뉴잉글랜드의 잉글랜드인들은 아카디아인들을 영국에 대한 반역자이자 "프랑스 광신자"로 여겼다.[11]
1753년, 캐나다에서 온 프랑스군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오하이오 계곡을 점령하고 요새화했다. 1754년 5월 28일, 프랑스-인디언 전쟁은 조몽빌 글렌 전투로 시작되었다. 프랑스 장교 앙생 드 조몽빌과 그의 호위병 3분의 1이 조지 워싱턴이 이끄는 영국 순찰대에 의해 공격받아 살해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와 인디언들은 포트 넥세시티 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파했다.
아카디아에서 영국의 주요 목표는 보세주어와 루이부르 요새를 격파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아카디아인들의 프랑스에 대한 충성과 와바나키 연맹을 군사적 위협으로 간주했다. 르 루트르 신부 전쟁은 총력전의 조건을 만들었으며, 영국 민간인들은 예외가 아니었고, 찰스 로렌스 총독과 노바스코샤 의회가 보기에 아카디아 민간인들은 정보를 제공하고, 피난처를 제공하고, 물류 지원을 제공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영국에 대항하여 싸웠다.[13]
이 모든 과정에서 영국은 프랑스와 원주민의 침략에 대해 불안해했다. 프랑스가 지원하는 원주민의 습격으로 인해 일부 영국 정착민들이 정착지를 떠났다 (다트머스 습격 (1751) 참조).[14] 프랑스-인디언 전쟁의 더 큰 조정된 노력의 일환으로 치그넥토에서 군사력이 증강된 결과, 매사추세츠 총독 윌리엄 셜리는 보세주르 요새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14]
2. 2. 18세기 중반: 긴장의 고조
17세기 프랑스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이웃하는 아카디아 식민지를 설립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아카디아 영토에 대한 긴장이 시작되었다.[55][3] 특히 1710년 아카디아 정복 이후 관할권 문제가 주요 긴장 원인이었다.[3] 노바스코샤는 영국 관할이었지만, 당시 시그넥토 지협은 양측 모두 영유권을 주장했다.[3]1750년대 뉴잉글랜드인들은 가뭄, 경제난, 높은 세금 등으로 고통받았으며,[6] 이는 청교도 및 개신교 사제들에 의해 반(反)프랑스 감정으로 이어졌다.[6] 프랑스와 미크마크 족의 긴밀한 관계는 영국인들을 더욱 자극했다.[6][8] 아카디아인들은 미크마크 족과의 결혼을 통해 민족적 화합을 이루었지만,[7] 영국은 이를 경계했다.[7]
아베 르 루트르는 프랑스 정부 대표로서 미크마크 족과의 동맹을 강화하고,[9] 아카디아인들에게 영국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며 긴장을 고조시켰다.[9] 영국은 르 루트르에게 현상금을 걸었다.[10]
찰스 로렌스 총독을 비롯한 영국 관리들은 아카디아인들의 중립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충성 서약을 강요하려 했다.[11] 르 루트르 신부 전쟁은 총력전의 조건을 만들었으며, 영국은 아카디아 민간인들이 프랑스에 협력한다고 보았다.[13] 프랑스-인디언 전쟁의 일환으로, 매사추세츠 총독 윌리엄 셜리는 포트 보세주어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다.[14][6]
3. 보세주르 요새 건설과 첩보 활동
1750년, 뉴프랑스의 총독 자크피에르 드 라 종키에르는 영국이 아카디아 지역에 로렌스 요새를 건설하는 것에 대응하여 보세주르 요새 건설을 결정했다.[15]
요새는 포격에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야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1755년에 완전히 완공되지 못했다. 요새의 사제 장루이 르 루트르는 인력을 관개 사업에 재배치하기로 결정했고,[17] 1754년 보세주르 요새의 군사 사령관 루이 뒤 샹봉 드 베르고르는 요새 방어 강화보다 돈을 챙기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16] 자코 드 피에몽은 요새의 취약성 때문에 방어 작업을 지속적으로 주장했지만, 이 작업은 결코 완료되지 않았다.
이 시기 보세주르 요새의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토마스 피숑이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보세주르 요새 사령관의 비서였다.[18] 토마스 피숑은 보세주르 요새의 프랑스군 소속 서기였으나, 영국군에게 요새의 군사 정보를 제공하는 스파이 활동을 했다.[18] 그는 보세주르 요새가 식중독 유행병의 영향을 받았을 때 영국 외과 의사와 의학 기록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로렌스 요새로 가면서 영국군과 친분을 쌓았다.[19] 피숑은 조지 스콧 대위에게 고용되어 1년 동안 지도와 전투 계획과 같은 중요한 군사 정보를 제공했다.[21] 피숑은 영국이 프랑스보다 우월하다고 믿었으며, 금전적 이득을 원했고 보세주르 요새의 상사들을 경멸했기 때문에 스파이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20] 일부 아카디아인들도 영국을 위해 스파이로 활동했다.[21]
3. 1. 요새 건설
1750년, 뉴프랑스의 총독 자크피에르 드 라 종키에르는 영국이 아카디아 지역에 로렌스 요새를 건설하는 것에 대응하여 보세주르 요새 건설을 결정했다.[15] 1751년, 군사 기술자 자코 드 피에몽이 설계를 맡아 요새 건설이 시작되었고, 그는 1752년에 중위가 되었다. 피에몽은 요새 건설과 방어 계획을 책임졌다.[16]요새는 포격에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야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1755년에 완전히 완공되지 못했다. 요새의 사제 장루이 르 루트르는 인력을 관개 사업에 재배치하기로 결정했고,[17] 1754년 보세주르 요새의 군사 사령관 루이 뒤 샹봉 드 베르고르는 요새 방어 강화보다 돈을 챙기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16] 자코 드 피에몽은 요새의 취약성 때문에 방어 작업을 지속적으로 주장했지만, 이 작업은 결코 완료되지 않았다.
이 시기 보세주르 요새의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은 토마스 피숑이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의학을 공부했으며 보세주르 요새 사령관의 비서였다.[18]
3. 2. 첩보 활동
토마스 피숑은 보세주르 요새의 프랑스군 소속 서기였으나, 영국군에게 요새의 군사 정보를 제공하는 스파이 활동을 했다.[18] 그는 보세주르 요새가 식중독 유행병의 영향을 받았을 때 영국 외과 의사와 의학 기록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로렌스 요새로 가면서 영국군과 친분을 쌓았다.[19] 피숑은 조지 스콧 대위에게 고용되어 1년 동안 지도와 전투 계획과 같은 중요한 군사 정보를 제공했다.[21] 피숑은 영국이 프랑스보다 우월하다고 믿었으며, 금전적 이득을 원했고 보세주르 요새의 상사들을 경멸했기 때문에 스파이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20] 일부 아카디아인들도 영국을 위해 스파이로 활동했다.[21]4. 전투의 전개
1755년 6월 2일, 로버트 멍크턴 중령이 이끄는 영국군(정규군 270명, 뉴잉글랜드 식민지 민병대 2,000명)은 31척의 수송선과 3척의 군함에 탑승하여 노바스코샤의 컴벌랜드 분지에 도착, 미사카슈 강 하구에 상륙했다.[23] 영국군은 로렌스 요새를 거쳐 오락 능선으로 진군했으며,[23][24] 프랑스군 지휘관 루이 뒤퐁 뒤샴봉 드 베르고는 아카디아 민병대와 원주민 부족을 소집하여 방어 태세를 갖췄다. 또한 아카디아의 건축물을 불태워 영국군의 약탈을 막고, 루이부르와 세인트존 강 요새에 지원군을 요청했다.[24] 베르고르는 기술적으로 요새를 지휘했지만, 공격에 대한 모든 방어 계획과 준비를 조율한 사람은 자코 드 피에드몽이었다.[24]
프랑스 정착민과 보세주르 요새 병사들, 그리고 영국군 사이의 첫 번째 대결은 6월 4일 미사가우시 강에서 벌어졌다. 총 400명의 프랑스, 아카디아, 인디언이 전투 대형으로 영국군과 대치했다. 영국군은 미사가우시 강 위에 베르고르가 불태운 다리를 재건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사상자는 없었다.[24]
6월 4일 밤, 베르고르는 방어 준비를 계속했으며, 주변 건물, 상점, 가옥을 모두 불태웠다.[27] 베르고르, 장 루이 르 루트르, 그리고 피에드몽은 아카디아인과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28]
6월 7일과 8일, 프랑스의 원주민 동맹국들은 영국 장교 헤이 대위를 포로로 잡아 보세주르 요새로 데려왔다.[28]
1755년 6월 2일, 영국 육군 중령 로버트 멍크턴은 영국 육군 병사 270명(제43 보병연대)과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민병대 2,000명을 실은 31척의 수송함 3척의 군함과 함께 노바스코샤의 컴벌랜드 분지에 들어갔다.[23] 미사가쉬 강 하구에 닻을 내리고, 영국 병사는 적의 방해를 전혀 받지 않고 상륙했다. 인근 (동쪽으로 3km 위치) 로렌스 요새의 교역 장소를 중간 영역으로 오락 리지(Aulac Ridge) 정상으로 진군했다.[24] 프랑스군 지휘관인 베르고르 후작은 이들을 대비하여 165명의 주둔병을 보강하기 위해 즉시 아카디아 민병대와 프랑스와 연합한 인디언 부족을 소집했다. 또한 아카디아의 건물에 불을 붙이고, 영국군의 약탈을 저지하기 위해 루이부르와 세인트존 강 요새에 지원군을 보냈다.[25]
6월 4일, 미사가쉬 강에서 양측의 첫 교전이 벌어졌다. 총 400명의 프랑스, 아카디아, 인디언이 전투 대형으로 영국군과 대치했다. 영국군은 미사가쉬 강 위의 다리를 재건하기 시작했고, 사상자는 없었다.[24][26] 6월 4일 밤, 베르고르는 방어 기제를 계속해서 마련했으며, 주변 건물, 상점, 집을 모두 불태웠다.[27]
6월 7일과 8일, 프랑스의 원주민 동맹국들은 헤이 대위라는 영국 장교를 포획하여 포로로 보세주르 요새로 데려왔으며, 영국 탈영병도 있었다.[28] 6월 12일, 바네스라는 이름의 장교가 180명의 병력을 이끌고 스콧 중령을 공격하러 갔지만, 단 한 발의 총도 쏘지 않고 그날 밤 늦게 돌아왔다.[30]
6월 13일, 영국군은 보세주르에 충분히 접근하여, 멍크턴은 프랑스가 보유한 대포보다 우수한 13인치 대포로 포격을 시작했다.[30] 주둔군 지휘관이었던 베르고르는 2주 동안 공성전에 잘 견뎌냈지만, 인원수가 월등한 영국군에게 소수의 프랑스군은 현실적으로 속수무책이었다. 프랑스인 성직자 장 루이 르 루트르도 이 전투 중에 영국과 싸우기 위해 군에 합류했다.
6월 14일, 베르고르는 루이부르 항구가 영국군에 의해 봉쇄되어 도움을 보낼 수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30]
6월 16일, 영국의 대포가 요새의 벽을 파괴하고 주둔군에게 상당한 손실을 입혔다. 이 전투에서 기록된 전사자는 영국군이 4명, 프랑스와 그 동맹군이 8명이었으며, 부상자는 영국이 16명, 프랑스와 동맹군은 6명이었다. 베르고르는 항복을 했고,[32] 그 다음날 영국군은 보세주르 요새에 이어 가스페로 요새(Fort Gaspereau)도 손에 넣었다. 이후 르 루트르는 포로로 잡혀 8년간 옥중 생활을 했다. 아카디아 군 지도자 조제프 브로사드는 여전히 싸움을 계속했다.[33]
4. 1. 영국군의 진군
1755년 6월 2일, 로버트 멍크턴 중령이 이끄는 영국군(정규군 270명, 뉴잉글랜드 식민지 민병대 2,000명)은 31척의 수송선과 3척의 군함에 탑승하여 노바스코샤의 컴벌랜드 분지에 도착, 미사카슈 강 하구에 상륙했다.[23] 영국군은 로렌스 요새를 거쳐 오락 능선으로 진군했으며,[23][24] 프랑스군 지휘관 루이 뒤퐁 뒤샴봉 드 베르고는 아카디아 민병대와 원주민 부족을 소집하여 방어 태세를 갖췄다. 또한 아카디아의 건축물을 불태워 영국군의 약탈을 막고, 루이부르와 세인트존 강 요새에 지원군을 요청했다.[24] 베르고르는 기술적으로 요새를 지휘했지만, 공격에 대한 모든 방어 계획과 준비를 조율한 사람은 자코 드 피에드몽이었다.[24]프랑스 정착민과 보세주르 요새 병사들, 그리고 영국군 사이의 첫 번째 대결은 6월 4일 미사가우시 강에서 벌어졌다. 총 400명의 프랑스, 아카디아, 인디언이 전투 대형으로 영국군과 대치했다. 영국군은 미사가우시 강 위에 베르고르가 불태운 다리를 재건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사상자는 없었다.[24]
6월 4일 밤, 베르고르는 방어 준비를 계속했으며, 주변 건물, 상점, 가옥을 모두 불태웠다.[27] 베르고르, 장 루이 르 루트르, 그리고 피에드몽은 아카디아인과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28]
6월 7일과 8일, 프랑스의 원주민 동맹국들은 영국 장교 헤이 대위를 포로로 잡아 보세주르 요새로 데려왔다.[28]
4. 2. 공방전
1755년 6월 2일, 영국 육군 중령 로버트 멍크턴은 영국 육군 병사 270명(제43 보병연대)과 뉴잉글랜드 식민지의 민병대 2,000명을 실은 31척의 수송함 3척의 군함과 함께 노바스코샤의 컴벌랜드 분지에 들어갔다.[23] 미사가쉬 강 하구에 닻을 내리고, 영국 병사는 적의 방해를 전혀 받지 않고 상륙했다. 인근 (동쪽으로 3km 위치) 로렌스 요새의 교역 장소를 중간 영역으로 오락 리지(Aulac Ridge) 정상으로 진군했다.[24] 프랑스군 지휘관인 베르고르 후작은 이들을 대비하여 165명의 주둔병을 보강하기 위해 즉시 아카디아 민병대와 프랑스와 연합한 인디언 부족을 소집했다. 또한 아카디아의 건물에 불을 붙이고, 영국군의 약탈을 저지하기 위해 루이부르와 세인트존 강 요새에 지원군을 보냈다.[25]
6월 4일, 미사가쉬 강에서 양측의 첫 교전이 벌어졌다. 총 400명의 프랑스, 아카디아, 인디언이 전투 대형으로 영국군과 대치했다. 영국군은 미사가쉬 강 위의 다리를 재건하기 시작했고, 사상자는 없었다.[24][26] 6월 4일 밤, 베르고르는 방어 기제를 계속해서 마련했으며, 주변 건물, 상점, 집을 모두 불태웠다.[27]
6월 7일과 8일, 프랑스의 원주민 동맹국들은 헤이 대위라는 영국 장교를 포획하여 포로로 보세주르 요새로 데려왔으며, 영국 탈영병도 있었다.[28] 6월 12일, 바네스라는 이름의 장교가 180명의 병력을 이끌고 스콧 중령을 공격하러 갔지만, 단 한 발의 총도 쏘지 않고 그날 밤 늦게 돌아왔다.[30]
6월 13일, 영국군은 보세주르에 충분히 접근하여, 멍크턴은 프랑스가 보유한 대포보다 우수한 13인치 대포로 포격을 시작했다.[30] 주둔군 지휘관이었던 베르고르는 2주 동안 공성전에 잘 견뎌냈지만, 인원수가 월등한 영국군에게 소수의 프랑스군은 현실적으로 속수무책이었다. 프랑스인 성직자 장 루이 르 루트르도 이 전투 중에 영국과 싸우기 위해 군에 합류했다.
6월 14일, 베르고르는 루이부르 항구가 영국군에 의해 봉쇄되어 도움을 보낼 수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30]
6월 16일, 영국의 대포가 요새의 벽을 파괴하고 주둔군에게 상당한 손실을 입혔다. 이 전투에서 기록된 전사자는 영국군이 4명, 프랑스와 그 동맹군이 8명이었으며, 부상자는 영국이 16명, 프랑스와 동맹군은 6명이었다. 베르고르는 항복을 했고,[32] 그 다음날 영국군은 보세주르 요새에 이어 가스페로 요새(Fort Gaspereau)도 손에 넣었다. 이후 르 루트르는 포로로 잡혀 8년간 옥중 생활을 했다. 아카디아 군 지도자 조제프 브로사드는 여전히 싸움을 계속했다.[33]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보세주르 요새의 함락은 대영 제국과 노바스코샤의 아카디아 주민들 사이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수십 년 동안 영국은 아카디아 주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카디아 주민들은 ‘1730년 협약’으로 모든 영국 - 프랑스 충돌로부터 중립성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56][35] 그러나 프랑스 식민지 주민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동료 주민들 사이에서 반란을 선동하려는 반복된 시도가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찰스 로렌스 주지사와 같은 영국 관리들에게 내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경계를 강화시켰다.[57][36]
보세주르 요새 전투는 군사적, 정치적으로 아카디아 주민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요새의 함락으로 프랑스계 가톨릭 교도들은 본토로 가는 유일한 육상 탈출로를 상실했고, 무장도 해제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영국 권력자들의 자비에 맡겨져야 했다. 영국군들은 일부 아카디아 주민들이 보세주르 방어전에 참여한 것을 알게 되었고, 로렌스는 중립성을 위반한 아카디아 주민들에 대한 증거가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아카디아 주민들을 강제로 퇴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57][36]
역사학자들은 보세주르 점령 이전 제국의 아카디아에 대한 계획에 대해 논쟁을 벌여왔다. 아카디아 주민들은 충성 맹세를 거부하며 영국의 개신교 주류에 동화되는 것을 오랫동안 저항해 왔으며,[57][36] 로렌스의 편지에는 1754년경 아카디아 주민들에 대한 적대감이 드러나 있다.[58][37] 그는 매사추세츠 주지사 윌리엄 숴레이와 함께 영국군 대대를 노바스코샤에 투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59][38] 1755년 이전에는 그러한 조치를 위한 수단이 없었다. 에드워드 브래독 장군의 굴욕적인 패배가 아니었다면, 로렌스는 아카디아를 넘어서서 영국 통제를 확장시켜 대량 추방의 필요성을 제기했을 수도 있었다.[60][39]
영국군은 보세주르 요새를 '''컴벌랜드 요새'''로 개명했다. 컴벌랜드 요새는 아카디아 주민을 신속하게 추방하는 주요 허브가 되었지만, 7년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거의 군사 활동을 하지 못했다. 요새는 미국 독립 전쟁 동안인 1776년 컴벌랜드 요새 전투에서 다른 포위 공격을 당했다.[40]
토지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된 아카디아 주민들은 현재 캐나다 동부에서 미국까지 지역에 아카디아 정착촌을 세웠다. 아카디아 주민들은 13개 식민지와 누벨프랑스에 흩어졌으며,[50] 아카디안/Acadien프랑스어이라는 주민이라는 단어는 후에 루이지애나에서 사투리, 케이준이라는 단어가 되었다.[51]
5. 1. 영국의 승리와 아카디아 장악
보세주르 요새의 함락은 대영 제국과 노바스코샤의 아카디아 주민들 사이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수십 년 동안 영국은 아카디아 주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카디아 주민들은 ‘1730년 협약’으로 모든 영국 - 프랑스 충돌로부터 중립성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56][35] 그러나 프랑스 식민지 주민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동료 주민들 사이에서 반란을 선동하려는 반복된 시도가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찰스 로렌스 주지사와 같은 영국 관리들에게 내부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경계를 강화시켰다.[57][36]보세주르 요새 전투는 군사적, 정치적으로 아카디아 주민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요새의 함락으로 프랑스계 가톨릭 교도들은 본토로 가는 유일한 육상 탈출로를 상실했고, 무장도 해제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영국 권력자들의 자비에 맡겨져야 했다. 영국군들은 일부 아카디아 주민들이 보세주르 방어전에 참여한 것을 알게 되었고, 로렌스는 중립성을 위반한 아카디아 주민들에 대한 증거가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아카디아 주민들을 강제로 퇴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57][36]
역사학자들은 보세주르 점령 이전 제국의 아카디아에 대한 계획에 대해 논쟁을 벌여왔다. 아카디아 주민들은 충성 맹세를 거부하며 영국의 개신교 주류에 동화되는 것을 오랫동안 저항해 왔으며,[57][36] 로렌스의 편지에는 1754년경 아카디아 주민들에 대한 적대감이 드러나 있다.[58][37] 그는 매사추세츠 주지사 윌리엄 숴레이와 함께 영국군 대대를 노바스코샤에 투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59][38] 1755년 이전에는 그러한 조치를 위한 수단이 없었다. 에드워드 브래독 장군의 굴욕적인 패배가 아니었다면, 로렌스는 아카디아를 넘어서서 영국 통제를 확장시켜 대량 추방의 필요성을 제기했을 수도 있었다.[60][39]
영국군은 보세주르 요새를 '''컴벌랜드 요새'''로 개명했다. 컴벌랜드 요새는 아카디아 주민을 신속하게 추방하는 주요 허브가 되었지만, 7년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거의 군사 활동을 하지 못했다. 요새는 미국 독립 전쟁 동안인 1776년 컴벌랜드 요새 전투에서 다른 포위 공격을 당했다.[40]
토지와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된 아카디아 주민들은 현재 캐나다 동부에서 미국까지 지역에 아카디아 정착촌을 세웠다. 아카디아 주민들은 13개 식민지와 누벨프랑스에 흩어졌으며,[50] 아카디안이라는 주민이라는 단어는 후에 루이지애나에서 사투리, 케이준이라는 단어가 되었다.[51]
5. 2. 아카디아인 추방
보세주르 요새의 함락은 대영 제국과 노바스코샤의 아카디아 주민들 사이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수십 년 동안 영국은 아카디아 주민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카디아인들은 ‘1730년 협약’으로 이후 벌어질 모든 영국 - 프랑스 충돌로부터 중립성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56]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동료 주민들 중에서 반란을 선동하는 프랑스인 식민지 주민의 반복된 시도와 결합된 이런 식의 거부는 찰스 로렌스 주지사와 같은 영국 관리들에게 점점 내부로부터의 공격을 경계하게 했다.[57]
보세주르 요새 전투는 군사적, 정치적으로 모두 아카디아 주민들의 운명을 봉인했다. 요새의 함락으로 프랑스계 가톨릭 교도들은 본토로 가는 유일한 육상 탈출로를 상실했다. 로렌스에게 무장도 해제를 당했기 때문에, 식민지 주민들은 영국인 권력자들의 자비에 맡겨져야 했다. 영국군들은 몇몇 아카디아 주민들이 보세주르 방어전에 참여한 것을 알게 되었고, 로렌스는 중립성을 위반한 아카디아 주민들에 대한 증거가 충분했기 때문에 그와 위원회는 ‘곪아터진 아카디아 문제’를 단호하게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1755년 7월 31일, 그는 식민지에서 아카디아 주민들을 강제로 퇴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57]
역사가들은 보세주르를 취하기 이전의 아카디아에 대한 제국의 계획에 대해 논쟁을 이어왔다. 아카디아 주민들은 충성 맹세를 거부하면서 영국의 개신교 주류에 동화되는 것을 오랫동안 저항해 온 것이었다.[57] 로렌스의 편지는 1754년 경의 아카디아 주민들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으며,[58] 그는 매사추세츠 주지사 윌리엄 숴레이와 함께 영국군 대대를 노바스코샤에 투입할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59] 이전의 많은 주지사들과 마찬가지로 로렌스와 숴레이는 아카디아 주민을 퇴거시킬 가능성에 대해 종종 논의했지만 1755년 이전에는 그러한 조치를 위한 수단이 없었다. 같은 해 에드워드 브래독 장군의 굴욕적인 패배가 아니었다면, 로렌스는 아카디아를 넘어서서 영국 통제를 확장시켜 대량 추방의 필요성을 제기했을 것이었다.[60]
영국군은 보세주르 요새를 '''컴벌랜드 요새'''로 개명했다. 그곳은 아카디아 주민을 신속하게 추방하는 주요 허브가 되었지만, 7년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거의 군사 활동을 하지 못했다. 요새는 미국 독립 전쟁 동안인 1776년 컴벌랜드 요새 전투에서 다른 포위 공격을 당했다.
영국의 승리와 프랑스 주둔군의 항복으로, 아카디아에서 많은 프랑스 병사들이 이동했고, 내륙 지역을 영국에 넘겨주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아카디아인 일부는 요새를 둘러싼 프랑스와 영국의 항쟁에 중립을 맹세했지만, 아카디아인이 이 맹세를 깨고 참전한 것은 핼리팩스의 영국 장교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고, 노바스코샤 총독 찰스 로렌스는 보세주르에서의 아카디아인의 규칙 위반을 이유로 아카디아인의 추방을 명령했다. 몽크턴과 원정군에 의해 이 명령이 실행되었고, 많은 아카디아인이 토지와 재산을 몰수당했다.[50] 추방으로 현재 캐나다 대서양 연안에서 미국까지 지역의 아카디아인 정착지가 같은 방침을 따랐다. 아카디아인들은 13개 식민지와 누벨 프랑스로 흩어졌고[50], 아카디안(아카디아인)이라는 단어는 후에 루이지애나에서 변형되어 케이준이라는 단어가 되었다.[51]
5. 3. 군사적, 정치적 영향
보세주르 요새의 함락은 군사적, 정치적으로 모두 아카디아 주민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군사적으로 프랑스는 북미에서의 중요한 거점을 잃었고, 영국은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요새의 함락으로 프랑스계 가톨릭 교도들은 본토로 가는 유일한 육상 탈출로를 상실했다.[57] 또한, 영국군들은 몇몇 아카디아 주민들이 보세주르 방어전에 참여한 것을 알게 되었다.[57]정치적으로, 찰스 로렌스 총독은 중립성을 위반한 아카디아 주민들에 대한 증거를 확보하고, 1755년 7월 31일, 식민지에서 아카디아 주민들을 강제로 퇴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57] 이는 아카디아인들의 강제 이주로 이어졌고,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아카디아인들은 13개 식민지와 누벨프랑스에 흩어졌으며, 아카디안이라는 주민이라는 단어는 후에 루이지애나에서 사투리, 케이준이라는 단어가 되었다.[50][51]
역사학자들은 보세주르 점령 이전 제국의 아카디아에 대한 계획에 대해 논쟁을 이어왔다. 아카디아 주민들은 충성 맹세를 거부하면서 영국의 개신교 주류에 동화되는 것을 오랫동안 저항해 왔다.[57] 로렌스의 편지는 1754년 경의 아카디아 주민들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으며,[58] 매사추세츠 주지사 윌리엄 숴레이와 함께 영국군 대대를 노바스코샤에 투입할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59]
영국군은 보세주르 요새를 '''컴벌랜드 요새'''로 개명했다. 그곳은 아카디아 주민을 신속하게 추방하는 주요 허브가 되었지만, 7년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거의 군사 활동을 하지 못했다.[40] 요새는 미국 독립 전쟁 동안인 1776년 컴벌랜드 요새 전투에서 다른 포위 공격을 당했다.
6. 추가 정보 (선택 사항)
6. 1. 관련 인물
6. 2. 기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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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Letter from Loudon to Fox
https://archiv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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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nial Wars and Aboriginal Peop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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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数字は、参考文献の著者ハンドの記録の数字を、表にしたものによる。pages 62, 79,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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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of Fort Beausejour - Québ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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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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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各国史 23 カナダ史
山川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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