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부여교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부여교기는 백제 왕족으로, 642년 의자왕의 어머니가 죽자 동모매의 여자 4인, 내좌평 기미 등과 함께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일본으로 건너가 고교쿠 천황을 만났으며, 소가노 이루카로부터 말과 철을 받았다. 이후 종자와 아들의 죽음, 백제 사신의 방문 등의 사건이 있었으며, 부여교기의 정체에 대해 부여풍 동일 인물설, 무왕의 아들 왕족설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스카 시대의 외국인 - 혜자
    혜자는 고구려 출신의 승려로서 일본 아스카 시대 불교 발전에 기여하고,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으며, 621년 쇼토쿠 태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음 해 죽음을 예언하고 실제로 사망했다.
  • 아스카 시대의 외국인 - 풍왕
    풍왕은 백제의 왕족으로, 외교적 인질로 일본에 갔다가 백제 부흥 운동을 위해 귀국하여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다.
  • 백제의 왕족 - 소서노
    소서노는 졸본 부여 또는 연타발의 딸로, 북부여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으며, 고구려 동명성왕과 혼인하여 고구려 건국을 돕고 두 아들과 함께 백제를 건국한 인물이다.
  • 백제의 왕족 - 진이왕
    진이왕은 백제 왕족으로, 일본 도요타 씨와 오우치 씨 가문의 족보에 등장하며, 일본 기록에는 법왕과 무왕 사이에 즉위한 국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 도래인 - 야사카 신사
    야사카 신사는 교토 동부에 위치하며, 과거 기온샤로 불리다 메이지 시대에 개칭되었고, 스사노오노미코토 등을 주요 신으로 모시며, 기온마쓰리의 중심지이자 국보 본전을 포함한 중요문화재를 보유한 관광 명소이다.
  • 도래인 - 이삼평
    이삼평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아리타에서 일본 최초의 백자를 구워 아리타 자기의 시초를 연 조선의 도공으로, 사후에는 '도조'로 추앙받고 도잔 신사에 제신으로 모셔지지만, 역사적 사실성에 대한 논쟁도 존재한다.
부여교기
기본 정보
한자扶餘翹岐
로마자 표기Buyeo Tae
한국어부여교기
인물 정보
역할왕자
생애
시대백제
주요 활동부여풍을 왕으로 옹립하는데 관여
관련 국가왜국에 인질로 보내짐
가족 관계
아버지부여태
기타 정보
관련 인물부여풍

2. 생애

일본서기에 따르면 642년 백제 국왕의 어머니가 죽자, 왕자 교기와 그의 여자 형제 4명, 내좌평 기미, 고위 가문의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22]

부여교기는 642년(의자왕 2년) 정월에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섬으로 추방되었고, 곧 왜로 건너갔다. 같은 해 4월, 왜국 고교쿠왕을 만나고, 소가 대신에게서 좋은 말 한 필과 철 20정을 받았다. 5월에는 교기의 종자와 아들이 사망하여 상에 참례하지 않았고, 백제인 대정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 아들을 석천에 장사지냈다. 7월에는 백제에서 온 사신 좌평 지적 등을 만났다.[22]

2. 1. 백제에서의 추방 (642년)

일본서기에 따르면 642년 백제 국왕의 어머니가 죽자, 왕자 교기와 같은 어머니를 둔 여자 형제 4인, 내좌평 기미(岐味), 고위 가문의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2]

642년(의자왕 2년) 정월, 부여교기는 어머니의 자매 4인, 내좌평 기미, 명망 있는 자 40여 인과 함께 섬으로 추방되었다. 곧 왜로 건너가 아즈미(阿曇山背連)의 집에 머물렀다. 같은 해 4월, 종자들과 함께 왜국 고교쿠왕(皇極王)을 만나고, 며칠 뒤 우네비(畝傍)의 집에서 소가(蘇我) 대신을 만나 좋은 말 한 필과 철 20정을 받았다. 5월에는 교기의 종자 한 명이 죽고 바로 다음 날 아들 역시 사망하였는데, 두렵고 꺼리는 마음이 있어 상에는 참례하지 않았다. 이틀 뒤 백제인 대정(大井)의 집으로 옮긴 뒤, 사람을 보내어 죽은 아들을 석천(石川)에 장사지냈다. 7월에는 백제에서 좌평 지적(智積) 등의 사신이 와서 일본 조정에서 베푼 연회가 끝난 뒤 문안하였다.[22]

2. 2. 일본으로의 망명

일본서기에는 642년백제 국왕의 어머니가 죽자, 제왕자 교기와 동모매의 여자 4인, 내좌평 기미(岐味), 고위 가문의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22]

부여교기는 642년(의자왕 2) 정월에 어머니의 자매 4인과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그리고 명망있는 자 40여 인과 더불어 섬으로 추방되었는데, 곧 왜로 건너가 아즈미(阿曇山背連)의 집에 머물렀다. 같은 해 4월에는 종자들과 왜국 고교쿠왕(皇極王)을 만나고, 며칠 뒤 우네비(畝傍)의 집에서 소가(蘇我) 대신을 만나 좋은 말 한 필과 철 20정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교기의 종자 한 명이 죽고 바로 다음날 아들 역시 사망하였는데, 두렵고 꺼리는 마음이 있어 상에는 참례하지 않고, 이틀 뒤 백제인 대정(大井)의 집으로 옮긴 뒤에 단지 사람을 보내어 죽은 아들을 석천(石川)에 장사지냈다. 또 같은 해 7월에는 백제에서 좌평 지적(智積) 등의 사신이 와서 일본 조정에서 베푼 연회가 끝난 뒤 문안하였다.[22]

2. 3. 일본에서의 생활

642년(의자왕 2) 정월, 일본서기백제 국왕의 어머니가 죽자, 부여교기가 어머니의 자매 4인,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명망있는 자 40여 인과 함께 섬으로 추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22] 이들은 곧 왜로 건너가 아즈미(阿曇山背連)의 집에 머물렀다. 같은 해 4월, 부여교기는 종자들과 함께 왜국 고교쿠왕(皇極王)을 만났고, 며칠 뒤 우네비(畝傍)의 집에서 소가(蘇我) 대신을 만나 좋은 말 한 필과 철 20정을 받았다.[22]

같은 해 5월, 부여교기의 종자 한 명이 죽고 바로 다음날 아들 역시 사망하였다. 부여교기는 두렵고 꺼리는 마음이 있어 상에는 참례하지 않고, 이틀 뒤 백제인 대정(大井)의 집으로 옮긴 뒤, 사람을 보내어 죽은 아들을 석천(石川)에 장사지냈다.[22] 같은 해 7월에는 백제에서 좌평 지적(智積) 등의 사신이 와서 일본 조정에서 베푼 연회가 끝난 뒤 문안하였다.[22]

3. 일본서기 기록

일본서기에는 642년백제 국왕의 어머니가 죽자 제왕자 교기와 동모매의 여자 4인, 내좌평 기미(岐味), 고위 가문의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교기"에 얽힌 기록은 황극 천황 원년(642년) - 2년(643년)에 집중되어 있으며, 소가 씨의 교기에 대한 대응은 사신 등으로 내조한 백제의 왕족과 다름이 없었다.

3. 1. 642년 (황극 천황 원년)

일본서기에 따르면, 642년 백제 국왕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왕자 교기와 그의 어머니와 같은 자매 4명, 내좌평 기미(岐味), 그리고 귀족 가문 출신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22]

교기642년(의자왕 2년) 정월에 어머니의 자매 4인, 내좌평 기미, 명망있는 자 40여 인과 함께 섬으로 추방되었는데, 곧 왜로 건너가 아즈미(阿曇山背連)의 집에 머물렀다. 같은 해 4월에는 종자들과 왜국 고교쿠 천황을 만나고, 며칠 뒤 우네비의 집에서 소가 대신을 만나 좋은 말 한 필과 철 20정을 받기도 하였다. 같은 해 5월에 교기의 종자 한 명이 죽고 바로 다음날 아들 역시 사망하였는데, 두렵고 꺼리는 마음이 있어 상에는 참례하지 않고, 이틀 뒤 백제인 대정(大井)의 집으로 옮긴 뒤에 단지 사람을 보내어 죽은 아들을 석천(石川)에 장사지냈다. 같은 해 7월에는 백제에서 좌평 지적(智積) 등의 사신이 와서 일본 조정에서 베푼 연회가 끝난 뒤 문안하였다.[22]

황극 천황 원년(642년) 1월, 아즈미노 히라후가 지쿠시국에서 역마(驛馬, 하이마 = 속마)를 타고 와서 백제가 스메이 천황의 사망 소식을 듣고 조문 사신을 보냈다고 보고했다.[4] 이후 히라후 등은 조문 사신에게서 "백제 국왕은 '(왕의 동생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사이죠는 항상 심한 짓을 하니, 백제로 돌아가는 사신과 함께 귀국시키는 것을 천황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게다가 조문 사신의 수행원들에게서 '작년 11월에 대상 평의 지적이 죽었고, 백제의 사신이 곤륜의 사자를 바다에 던져 넣었습니다. 올해 정월에는 국주(코키시)의 어머니가 죽었고, 아들 왕자 교기, 어머니 자매(오모하라카라 = 동모 자매)의 여자, 내사평의 김이, 그 외 '높은 명성이 있는 사람 40여 명을 섬(세마)에 유배시켰다'는 정보를 얻었다.[5] 이 당시의 삼국사기에는 국왕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같은 달, 고구려 사신이 나니와츠에 왔으므로[6], 여러 대신(마에츠기미)들을 파견하여, 고구려에서도 연개소문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꼭두각시 왕으로서 보장왕이 세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7] (이는 구당서 고구려전에도 유사한 기재가 있다).

이러한 사태에, 야마토 정권은 고구려·백제의 객(마로토)들을 나니와의 군(코리)에서 대접한 후, 소가노 에미시에게 조칙을 내려, 고구려·백제·신라·임나에 쓰모리노 오오아마 등이 사신으로 파견되는 것이 결정되었다.[8]

이러한 조치를 취한 후, 망명해 온 왕족 교기를 아즈미노 히라후의 집에 살게 했다.[9] (공식 사신으로부터 얻을 수 없는 독자적인 정보를 얻으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날, 고구려와 백제의 사신을 대접하고[10], 이틀 후, 사신들은 함께 귀가했다.[11] 그 후, 3월에는 신라에서 온 사신이 방문했다.[12]

4월, 대사(콘츠카이) 교기는 수행원을 이끌고 조정에 배례했다.[13] 소가노 에미시우네비의 집에 (사이죠를 제외한) 교기들을 불러 직접 대담했다. 그 때 양마 한 필, 철(네리카네 = 철의 덩어리) 20정을 주었다.[14]

5월에 가와치국아미노 둔창 앞에서 교기 등을 불러 기사(말을 타면서 활쏘기)를 구경하게 했다.[15] 같은 달, 교기의 수행원과 아이가 잇따라 죽었다. 이때 교기 부부가 상중에 임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일본과 풍속이 다르다는 기술이 있다.[16] 그 후, 교기는 처자를 데리고 백제의 오이(현재의 오사카부가와치나가노시 타이)로 이주하고(이 땅은 비다쓰 천황·스메이 천황이 궁전을 지은 곳이라고도 한다), 사람을 파견하여 아들을 이시카와(후의 가와치국 이시카와군·니시키베군에 해당하며, 현재의 미나미카와치군 남부에서 도요노시·가와치나가노시 북부에 걸쳐있는 이시카와 중류역)에 장사지냈다.[17] (아즈미노 히라후의 집이 이시카와군 야마시로에 있었던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라고 도야마 미쓰오는 말하고 있다).

7월, 백제의 사신 대상평 지적(智積) 등에게 조정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힘이 센 사람에게 명하여 교기 앞에서 씨름을 하게 하였다는 기록은 스모에 관한 오래된 문헌 중 하나이다. 연회 후, 지적 등은 퇴출하고, 교기의 문 앞에서 배례했다.[18]

3. 2. 643년 (황극 천황 2년)

643년 4월, 지쿠시 다자이가 하유마(빠른 말을 달리게 하여) 보고하기를, "백제 국주의 아들 교기 왕자가 조의 사신과 함께 왔습니다"라고 하였다.[19] 같은 해 6월, 지쿠시 다자이는 "고구려가 견사하여 내조했습니다"라고 전했고,[20] 같은 달 백제의 조를 진상하는 배가 나니와츠에 정박했다.[21]

이상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교기"에 얽힌 기록의 전부이다. 위와 같이, 소가 씨의 교기에 대한 대응은 사신 등으로 내조한 백제의 왕족과 다름이 없었다.

4. 부여교기의 정체에 대한 논란

스즈키 야스미는 翹岐(규기)를 부여풍과 동일 인물로 보았다. 그는 翹岐(규기)가 '대란'으로 인해 태자 지위를 잃고 왜국으로 인질로 추방되었다고 보았다. 도야마 미쓰오는 부여풍의 다른 이름인 '糾解(규해)'가 '翹岐(규기)'와 같은 소리의 한국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 주장했다.[1]

이와 달리 翹岐(규기)를 무왕의 아들인 왕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당시 일본과 백제가 밀접하게 교류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1]

4. 1. 부여풍 동일 인물설

스즈키 야스미는 翹岐(규기) = 부여풍 동일 인물 설을 주장하며, 翹岐(규기) (부여풍)가 '대란'으로 인해 태자 지위를 이복형에게 빼앗기고, 왜국으로 인질로 국외 추방되었다고 주장한다. 도야마 미쓰오는 더 나아가, 부여풍의 다른 이름인 '糾解(규해)'는 '翹岐(규기)'와 같은 음의 한국어를 한자로 고친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그 둘 다가 아닌, 무왕의 아들인 왕족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며, 일본과 백제와의 교류가 밀접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볼 수도 있다.

4. 2. 무왕의 아들 왕족설

스즈키 야스미는 翹岐(규기) = 부여풍 동일 인물 설을 주장하며, 翹岐(규기) (부여풍)가 '대란'으로 인해 태자 지위를 이복형에게 빼앗기고, 왜국으로 인질로 국외 추방되었다고 주장한다. 도야마 미쓰오는 더 나아가, 부여풍의 다른 이름인 '糾解(규해)'는 '翹岐(규기)'와 같은 음의 한국어를 한자로 고친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이와 달리 무왕의 아들인 왕족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며, 이는 일본과 백제와의 교류가 밀접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5. 가계

참조

[1] 서적 Samguk Sagi http://www.koreandb.[...]
[2] 논문 豊璋と翹岐 『ヒストリア』107号 1985
[3] 서적 七世紀中葉の百済の政変 『日本の古代国家の形成と東アジア』吉川弘文館 2011
[4]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元年正月29日条
[5]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元年2月2日条
[6]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元年2月6条
[7]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元年2月21日条
[8]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元年2月22日条
[9]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元年2月24日条
[10]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元年2月25日条
[11]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元年2月27日条
[12]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元年3月6日条、15日条
[13]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元年4月8日条
[14]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元年4月10日条
[15]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元年5月5日条
[16]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元年5月21日条・22日条
[17]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元年5月24日条
[18]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元年7月22日条
[19]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2年4月7日条
[20]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2年6月13日条
[21] 서적 日本書紀 皇極天皇2年6月23日条
[22] 웹인용 ::::역재 전경원과 함께 고전시가를 통해 여는 세상 ::::::: http://www.gosiga.co[...] 2008-07-0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