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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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자왕은 백제 무왕의 아들로, 632년 태자로 책봉되어 641년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기에는 신라를 공격하고 고구려와 연합하는 등 대외적으로 팽창 정책을 펼쳤으나, 말년에 이르러서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정을 소홀히 했다. 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웅진성으로 피신했다가 항복하고, 당나라로 끌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는 초기에는 '해동증자'로 불릴 만큼 효심이 깊고 어진 군주로 칭송받았으나, 말년의 실정으로 인해 '타락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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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 | |
---|---|
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의자왕 |
한자 이름 | 義慈王 |
로마자 표기 | Uija-wang |
기타 표기 | Ŭija-wang |
출생년도 | 599년 |
사망년도 | 660년 |
재위 기간 | 641년 - 660년 9월 21일 |
국왕 호칭 | 어라하 |
별칭 | 해동증자 (海東曾子) |
가계 | |
아버지 | 무왕 |
어머니 | 사택왕후 혹은 선화공주 |
왕후 | 은고 |
자녀 | 부여태 (扶餘泰) 부여효 (扶餘孝) 부여연 (扶餘演) 부여풍 (扶餘豊) 부여용 (扶餘勇) 부여충승 (扶餘忠勝) 부여충지 (扶餘忠志) 부여선광 (扶餘禪廣, 扶餘善光) |
통치 | |
즉위년도 | 641년 |
섭정 | 성충 (647~648) |
백제 정보 | |
국가 | 백제 |
왕조 | 부여씨 |
종교 | 불교 |
수도 | 미상 |
묘지 | |
묘소 위치 | 미상 |
기타 정보 | |
사망 장소 | 당나라 낙양 |
선대 국왕 | 무왕 |
후대 국왕 | 풍왕 |
백제 역대 국왕 | |
목록 | 제31대 백제 국왕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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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무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632년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21] 641년 무왕이 죽자 뒤를 이었고, 당으로부터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으로 책봉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우애가 깊어서 중앙귀족에게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렸다 하고, 그의 아들 부여융의 묘에도 의자왕을 가리켜 “과단성이 있고 사려 깊어서 그 명성이 있었다.”[21]라고 적혀져 있다. 그러나 즉위 전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즉위 후에는 실정을 거듭하면서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의자왕을 ‘타락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
642년[23], 의자왕이 즉위한 직후에 대규모의 정치적 숙청을 단행하여 동생인 부여교기를 비롯해 교기의 동복 여동생까지 모조리 추방한 사실을 《일본서기》가 수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선화공주가 죽자마자 의자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동생을 포함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고, 이것은 의자왕이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된 이유와 선화공주와의 갈등을 암시한다는 주장도 있다.[24] 그러나, 《일본서기》 같은 해 4월에 앞서 백제에서 바닷섬으로 추방되었다던 왕자 교기가 불과 2~3달 만에 백제의 대사(大使)로서 왜국에 파견되었다고[22] 적고 있어, 두 기록 사이에 다소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654년 말에서 655년 초에 벌어진 일로 해석해야 합리적이라는 주장이 있다. 655년은 고토쿠 천황의 죽음과 함께, 앞서 퇴위했던 고교쿠 천황이 사이메이 천황으로 즉위한 원년이기도 한데, 고교쿠 천황과 사이메이 천황은 사실 동일인물이라는 점에서 사서 편찬시 착오가 발생할 소지가 있었고, 실제로는 사이메이 원년에 있었던 일을 고교쿠 원년의 일로 기록하는 실수가 생길 수도 있다.[25] 앞의 기록에서 천황의 상(喪)이라고 한 것도 실은 조메이 천황이 아니라 고토쿠 천황의 상을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26]
의자왕은 즉위하자마자 귀족들의 권력을 통제하기 위한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 기간은 귀족들 간의 내분과 궁정 내의 부패와 퇴폐로 어려움을 겪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매우 공경하고 형제들과 친하게 지냈기에 백성들이 그를 “해동 증자(海東曾子)”라 부르며 칭송했다. 또한 태자의 이름을 ‘효(孝)’라 지을 정도로 효성을 강조했다.
의자왕은 642년부터 모든 군사를 총동원하여 신라의 미후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빼앗았다.[2] 장군 윤충이 신라의 옛 가야 지역에 두었던 거점인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주민 1천여 명을 약탈하여 백제의 서부 지역 고을에 나누어 살도록 했는데, 이때 대야성 성주로서 성이 함락되자 처자와 더불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품석과 그 아내 고타소는 신라의 유력자였던 김춘추(훗날의 태종무열왕)의 사위와 딸이었다. 이후 의자왕은 신라의 대당 교통로였던 당항성을 공격하여 당이 신라에 개입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당의 항의를 받고 철수, 당에 대역죄를 반성하는 사죄문을 보냈다.
643년에 고구려와 화친하였는데,[27]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말갈을 동원해 강국이었던 신라를 양쪽에서 압박하였다. 신라는 백제에 대한 반격을 단행해 백제의 7성을 공취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듬해(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고자 신라에서 3만의 원군을 징발한 틈을 노려 의자왕은 다시 7성을 빼앗았다. 647년에는 장군 의직이 지휘하는 3천의 보기(步騎)가 무산성 아래에 주둔하면서 감물성·동잠성을 비롯한 지금의 김천·구미 등지를 기습했으나 크게 패하였다. 649년에는 은상이 노병 7천으로 신라의 석토산성을 비롯한 7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648년 겨울, 신라의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신임을 얻고, 649년 당 고종이 즉위했을 때 진덕여왕이 치당태평송을 써서 보내는 등 당과의 외교를 긴밀히 하였다. 651년 백제도 조공 사절을 보냈으나, 당이 신라로부터 빼앗은 땅을 반환하라고 하자 652년 이후로는 당과의 교섭을 중단했고, 이후 백제와 당의 외교 관계는 멸망시까지 단절되었다. 대신 왜국과의 관계는 완화되어, 653년에는 왜국과 동맹을 맺게 되었고, 656년과 657년에는 왜국에 앵무새·낙타·당나귀 등의 희귀품을 선물하였다.
신라에 대한 백제의 공격이 계속되어 655년에는 말갈과 고구려의 도움으로 신라의 북쪽 변경지대를 침략하고, 659년 4월에는 다시 신라의 독산성과 동잠성을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 1. 즉위 초: 개혁 정치와 대외 팽창
무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632년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21] 641년 무왕이 죽자 뒤를 이었고, 당으로부터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으로 책봉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우애가 깊어서 중앙귀족에게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렸다 하고, 그의 아들 부여융의 묘에도 의자왕을 가리켜 “과단성이 있고 사려 깊어서 그 명성이 있었다.”[21]라고 적혀져 있다. 그러나 즉위 전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즉위 후에는 실정을 거듭하면서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의자왕을 ‘타락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642년[23], 의자왕이 즉위한 직후에 대규모의 정치적 숙청을 단행하여 동생인 부여교기를 비롯해 교기의 동복 여동생까지 모조리 추방한 사실을 《일본서기》가 수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선화공주가 죽자마자 의자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동생을 포함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고, 이것은 의자왕이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된 이유와 선화공주와의 갈등을 암시한다는 주장도 있다.[24] 그러나, 《일본서기》 같은 해 4월에 앞서 백제에서 바닷섬으로 추방되었다던 왕자 교기가 불과 2~3달 만에 백제의 대사(大使)로서 왜국에 파견되었다고[22] 적고 있어, 두 기록 사이에 다소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654년 말에서 655년 초에 벌어진 일로 해석해야 합리적이라는 주장이 있다. 655년은 고토쿠 천황의 죽음과 함께, 앞서 퇴위했던 고교쿠 천황이 사이메이 천황으로 즉위한 원년이기도 한데, 고교쿠 천황과 사이메이 천황은 사실 동일인물이라는 점에서 사서 편찬시 착오가 발생할 소지가 있었고, 실제로는 사이메이 원년에 있었던 일을 고교쿠 원년의 일로 기록하는 실수가 생길 수도 있다.[25] 앞의 기록에서 천황의 상(喪)이라고 한 것도 실은 조메이 천황이 아니라 고토쿠 천황의 상을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26]
의자왕은 즉위하자마자 귀족들의 권력을 통제하기 위한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 기간은 귀족들 간의 내분과 궁정 내의 부패와 퇴폐로 어려움을 겪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를 매우 공경하고 형제들과 친하게 지냈기에 백성들이 그를 “해동 증자(海東曾子)”라 부르며 칭송했다. 또한 태자의 이름을 ‘효(孝)’라 지을 정도로 효성을 강조했다.
의자왕은 642년부터 모든 군사를 총동원하여 신라의 미후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빼앗았다.[2] 장군 윤충이 신라의 옛 가야 지역에 두었던 거점인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주민 1천여 명을 약탈하여 백제의 서부 지역 고을에 나누어 살도록 했는데, 이때 대야성 성주로서 성이 함락되자 처자와 더불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품석과 그 아내 고타소는 신라의 유력자였던 김춘추(훗날의 태종무열왕)의 사위와 딸이었다. 이후 의자왕은 신라의 대당 교통로였던 당항성을 공격하여 당이 신라에 개입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당의 항의를 받고 철수, 당에 대역죄를 반성하는 사죄문을 보냈다.
643년에 고구려와 화친하였는데,[27]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말갈을 동원해 강국이었던 신라를 양쪽에서 압박하였다. 신라는 백제에 대한 반격을 단행해 백제의 7성을 공취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듬해(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고자 신라에서 3만의 원군을 징발한 틈을 노려 의자왕은 다시 7성을 빼앗았다. 647년에는 장군 의직이 지휘하는 3천의 보기(步騎)가 무산성 아래에 주둔하면서 감물성·동잠성을 비롯한 지금의 김천·구미 등지를 기습했으나 크게 패하였다. 649년에는 은상이 노병 7천으로 신라의 석토산성을 비롯한 7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648년 겨울, 신라의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당 태종의 신임을 얻고, 649년 당 고종이 즉위했을 때 진덕여왕이 치당태평송을 써서 보내는 등 당과의 외교를 긴밀히 하였다. 651년 백제도 조공 사절을 보냈으나, 당이 신라로부터 빼앗은 땅을 반환하라고 하자 652년 이후로는 당과의 교섭을 중단했고, 이후 백제와 당의 외교 관계는 멸망시까지 단절되었다. 대신 왜국과의 관계는 완화되어, 653년에는 왜국과 동맹을 맺게 되었고, 656년과 657년에는 왜국에 앵무새·낙타·당나귀 등의 희귀품을 선물하였다.
신라에 대한 백제의 공격이 계속되어 655년에는 말갈과 고구려의 도움으로 신라의 북쪽 변경지대를 침략하고, 659년 4월에는 다시 신라의 독산성과 동잠성을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2. 2. 실정과 백제 멸망
655년(의자왕 15년)부터 의자왕의 정치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태자궁을 사치스럽게 짓고, 656년 3월에는 궁인과 밤낮으로 음란한 잔치를 벌이다 성충을 옥에 가두었다. 성충은 옥사 직전 전쟁에 대비해 “육로는 탄현, 수로는 기벌포”를 막으라고 했으나 의자왕은 듣지 않았다.[19] 657년에는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식읍을 내렸는데, 이는 귀족 토지를 몰수해 왕자 중심 독재 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로 분석된다.659년부터 백제에 괴변이 잇따랐다. 신라는 김춘추 집권 이후 친당정책을 추진하여 당의 지원을 얻었다. 655년 백제가 당의 경고를 무시하고 신라를 압박하자 당은 백제 공격을 결정, 659년 준비를 마쳤다.[19]
660년(의자왕 20년), 당 태종은 김춘추와 협상하여 18만 연합군으로 백제를 협공했다. 당 고종은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태종무열왕을 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합쳤다. 소정방은 백제 서쪽 덕물도에 이르렀고, 태종무열왕은 김유신에게 5만 군사를 주어 백제로 향하게 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나·당 연합군 침공 당시 백제 조정의 논의를 기록했는데, 이는 《구당서》, 《신당서》를 참조한 것이다. 의자왕은 대신들과 회의를 열었으나, 당병을 먼저 칠지, 신라군을 먼저 칠지 의견이 갈렸다. 이는 국론 분열을 보여주며, 패배 원인이 되었다.
의직은 지친 당병을 먼저 치자고 했으나, 당병은 백제군 방어선을 우회해 기벌포에 상륙해[19] 한계가 있었다. 상영은 사비성을 지키며 신라군을 차단해 당군 보급을 끊자고 했다. 흥수는 성충과 같은 계책을 냈으나, 시기하던 대신들 때문에 채택되지 못했다. 의자왕은 백강과 탄현에서 연합군을 기습하자고 했으나, 연합군이 우회하면 수도가 위험해지는 한계가 있었다.
660년 나당연합군 공격을 알게 된 의자왕은 충상과 계백에게 5천 군사로 김유신의 5만 군사를 막게 했으나, 계백을 포함한 4980명이 사망하는등 대패했다. 백강에서 당군 상륙을 저지하려던 백제군도 패배, 의직 등 2만 명이 전멸했다. 8월 22일(음력 7월 11일) 신라군과 합류한 당군은 8월 23일(음력 7월 12일) 사비성을 포위했다.[19]
사비성 부근 결전에서 백제군 1만이 전사하며 패배하고 포위되자, 백제는 전쟁을 포기하고 연합군에 소와 음식을 보내거나 태자가 소정방에게 철군을 요청하는 굴욕 외교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의자왕은 8월 24일(음력 7월 13일) 웅진성으로 도주했고, 사비에 남은 부여태는 항복했다. 8월 29일(음력 7월 18일) 의자왕도 항복했고, 9월(음력 8월 2일) 항복식이 거행되었다.[19]
의자왕의 굴욕적인 항복은 패배한 전쟁 지속 시 죄가 커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당은 부여융을 웅진도독, 신라 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는 의식을 웅진 취리산에서 강제로 행했다. 이는 당이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회복하려 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29] 당은 백제 지역에 친당정권을 세워 고구려 정벌 전초기지로 활용하려 했다. 이후 당은 의자왕에게 전승 축하연에서 술을 따르게 하고, 사비성을 약탈하며 웅진도독부를 통해 백제를 직접 지배하려 했다.
《삼국사기》는 의자왕이 사비성 함락 직전 군대를 보내 싸웠다고 기록했지만, 낙화암과 삼천궁녀 이야기는 없다. 낙화암에 대한 최초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로, “궁녀들이 왕포암(타사암)에서 뛰어내렸다”고 쓰여 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여러 비빈"이라고 표현되었다.[33] 삼천 궁녀를 처음 언급한 글은 윤승한의 소설 《김유신》이고, 최초 공식 기록은 이홍직의 《국사대사전》이다.[33]
2. 3. 항복과 최후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알게 된 의자왕은 충상과 계백에게 5천의 병사로 김유신이 이끄는 5만명의 신라 정예군을 막게 했지만, 계백을 포함한 4980명이 사망하는 등 대패하였다.[19] 백강에서 당군의 상륙을 저지하려던 백제군도 완패하여, 의직을 비롯한 정예병 2만명이 전멸하였다.[19] 마침내 8월 22일(음력 7월 11일)에 신라군과 합류한 당군은 백제 수도 사비성을 향해 진군하여, 이튿날 8월 23일(음력 7월 12일) 사비성을 포위했다.[19]사비성 부근에서도 결전이 벌어졌으나 백제군 1만이 전사하며 참패했고, 백제는 전쟁을 포기하고 제사에 쓰는 소와 많은 음식들을 연합군 진영에 보내거나, 태자가 직접 소정방을 찾아 철군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의 굴욕 외교를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결국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8월 24일(음력 7월 13일)에 웅진성으로 도주했으며, 사비에는 부여태가 남아 왕을 자처하며 투쟁하다가 곧 항복했다. 곧 8월 29일(음력 7월 18일)에 의자왕도 항복했다. 항복식은 9월(음력 8월 2일)에 거행되었다.[19]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본기는 중앙군의 전멸과 수도가 무너지며 왕족과 의자왕의 측근 최고 지배층들이 포로가 되자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령군을 거느리고 스스로 웅진성을 나와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예식진묘지명》(禰寔進墓誌銘)에 근거하여 웅진방령 예식(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고 사로잡아 강제로 항복이 진행되었다는 견해도 있다.[19]
의자왕이 너무 굴욕적으로 항복한 것에 대해서는 오늘날 여러 분석이 시도되었는데, 의자왕의 성격상 이미 패배한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죄가 커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한편, 급진적인 의자왕 정권의 붕괴는 전쟁이 사비도성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만 국한된 관계로 지방세력이 온존하여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19]
당은 이후 부여융을 웅진도독, 신라의 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삼아 동맹을 맺게 하는 의식을 웅진의 취리산에서 강제로 행하였다. 이에 대해 당이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29] 당은 옛 백제 지역에 친당정권을 세워서 고구려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서 활용하고자 했다. 이후 당나라는 의자왕에게 전승 축하연에서 술을 치게 하기도 하고, 군사를 풀어 사비성을 약탈하면서 웅진도독부를 통해 백제 영토를 당의 치하에 두고 직접 지배하려고도 하였다.
곧 왕자들과 대신 88명을 포함하여 백성 1만 2천 명이 당의 낙양으로 압송되었고, 11월 1일에 낙양의 조당에 포로로서 바쳐져 당 고종 앞에서 문책을 들어야 했다. 측천무후 앞에서 이루어진 이 자리에서 고종은 의자왕과 태자, 백제의 여러 신료들을 꾸짖은 뒤 용서했는데, 이것은 그들의 죄를 사함으로써 당의 신민으로 받아들이는 의례 절차이기도 했다. 의자왕은 그 해에 노망으로 죽었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위위경(衛尉卿)[30]의 벼슬을 추증받고, 낙양의 북망산에 손호·진숙보 옆에 묻혔다. 당 고종은 그의 장례에 백제에서 끌려온 옛 부하들이 참석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전한다.[32] 손호는 손권의 손자로서 오의 마지막 왕이고, 진숙보는 남조 진의 마지막 왕으로, 둘 다 주색과 폭정으로 나라를 잃었다. 당나라가 의자왕을 이들 옆에 묻은 것은 의자왕을 격하하면서 동시에 후세에 경계를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31]
최근에 증손녀인 부여태비(扶餘太妃) 묘지명이 발견되어, 의자왕의 후손들이 중국에서 백제 유민의 명맥을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19]
3. 가족 관계
무왕의 아들로, 왕비는 은고이다. 일본서기에는 은고가 백제 멸망의 큰 원인 중 하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남은 부여융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부여효라는 기록도 있어 확실하지 않다. 부여태를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의 순서도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
아들 |
부여융 (615~682) - 644년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아버지와 함께 당나라로 유배되었다. 낙양에서 사망하였다. |
부여태 - 차남으로, 아버지와 함께 당나라로 유배되었다. |
부여효 - 아버지와 함께 당나라로 유배되었다. |
부여연 - 아버지와 함께 당나라로 유배되었다. |
풍 (623~668) - 643년 동생 선광과 함께 일본에 인질로 보내졌다가 백제 부흥 운동을 위해 귀국, 귀실복신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실패하고 당나라로 유배되었다. |
부여용 - 풍과 함께 백제 부흥 운동을 이끌었으나 실패하고 유배되었다. |
부여충승 - 백제 부흥 운동에 참여했으나 이후 행방은 묘연하다. |
부여충지 - 백제 부흥 운동에 참여했으나 이후 행방은 묘연하다. |
선광 (621~687) - 643년 형 풍과 함께 일본에 인질로 보내졌으나 일본에 남아 쿠다라노 코니키시 씨족의 시조가 되었다. |
}
풍의 아들 부여사는 일본으로 망명하여 여러 일본 씨족의 시조가 되었다. 선광의 자손은 백제왕(百濟王)이라는 성씨를 받아 일본 귀족 가문으로 이어졌다. 효, 태, 융, 연, 풍장, 용의 자손은 왕(王) 또는 래주왕씨(萊州王氏)라는 성씨를 이어갔다.
4. 의자왕에 대한 평가
5. 대중문화 속 의자왕
- 1962년 장일호 감독의 영화 《화랑도》에서 배우 주선태가 의자왕 역을 연기하였다.
- 1992년부터 1993년까지 방영된 KBS 드라마 《삼국기》에서 배우 길용우가 연기하였다.
- 2003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에서 배우 오지명이 연기하였다.
- 2005년부터 2006년까지 방영된 SBS 드라마 《서동요》에서는 배우 미상이다.
- 2006년부터 2007년까지 방영된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배우 문회원이 연기하였다.
- 2011년 MBC 드라마 《계백》에서 배우 최원홍, 노영학, 조재현이 연기하였다.
-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방영된 KBS 1TV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배우 이진우가 연기하였다.
- 2017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 등장하였다.
참조
[1]
서적
Samguk Yusa: Legends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of Ancient Korea, Book One
Silk Pagoda
2006
[2]
웹사이트
Imperial Chinese Military History: 8000 BC-1912 AD
https://books.google[...]
iUniverse
2016-11-02
[3]
서적
《舊唐書‧卷四‧本紀第四‧高宗上》
[4]
서적
旧唐書
[5]
서적
삼국사기
[6]
서적
豊璋と翹岐--大化改新前夜の倭国と百済
大阪歴史学会
1985-06
[7]
서적
삼국사기,旧唐書
[8]
서적
삼국사기
[9]
서적
삼국사기,旧唐書,日本書紀
[10]
서적
戦争の日本古代史 好太王碑、白村江から刀伊の入寇まで
講談社
2017-05-17
[11]
서적
唐朝における朝鮮半島系遺民 : 特に唐朝からの官職授与を中心に
関西学院大学人文学会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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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戦争の日本古代史 好太王碑、白村江から刀伊の入寇ま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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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이 된 의자왕의 묘… 한민족 비운의 古代史 묻힌 땅, 낙양(洛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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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풀빛
200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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