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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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방 정책은 노태우 대통령 시기에 추진된 외교 정책으로, 냉전 시대에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목표로 했다. 1988년 7월 7일 발표된 6개항의 프로그램을 통해 교역 상대국 다변화, 한반도 평화와 안보 보장을 추구했으며,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소련 등 동구권 국가들의 참가를 이끌어냈다. 주요 성과로는 동유럽 국가들과의 수교, 1990년 소련과의 국교 수립, 1992년 중국과의 수교가 있으며, 북한의 고립 심화에 영향을 미쳤다. 북방 정책은 외교적 지평을 넓히고 한반도 평화에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북한의 핵 개발을 막지 못했다는 비판이 공존하며, 탈냉전 시대 실리 외교의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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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정책 | |
---|---|
개요 | |
명칭 | 북방 정책 |
로마자 표기 | Bukbang jeongchaek |
영문 표기 | Northern Policy |
독일어 표기 | Nordpolitik |
배경 | |
주요 목표 | 남한의 외교적 고립 탈피 북한을 포함한 탈냉전 시대 공산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및 수립 |
주요 추진 국가 | 소련 중국 동유럽 국가 |
역사 | |
시기 |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 |
주도 인물 | 노태우 대통령 |
주요 사건 및 결과 |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공산 국가들과의 교류 시작 1990년 소련과 국교 수립 1992년 중국과 국교 수립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 |
의의 및 영향 | |
정치적 의의 |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 강화 및 외교 다변화 |
경제적 의의 | 소련, 중국 등 거대 시장 진출 기반 마련 |
남북 관계 | 남북 관계 개선의 간접적 영향 |
2. 역사적 배경
냉전 및 탈냉전 시기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를 통해 외교적 지평을 확장하고, 이를 통해 북한과 협상하려는 것이 북방정책의 목표였다. 이는 동유럽 국가들과 당시 소련,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 수립 및 개선을 통해 북한에 대한 관여를 높이려는 시도로 귀결되었으며, 기존의 대공산권 적대정책을 획기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6][7][8]
북방 정책 시행에 따라, 우선 헝가리, 폴란드,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과 수교 논의가 이뤄졌고, 경제협정과 차관 제공이 우선적으로 이뤄졌다.[9][10]
이러한 정책 실행으로 북방 정책의 최종 목표였던 소련과의 수교가 사실상 성공하였다. 1990년 6월 대한민국과 소비에트 연방 정상회담이 열렸으며, 그해 10월 소련과의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듬해 1991년 소련이 해체된 후 러시아와 국교를 재개하였다.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은 한국 전쟁의 주요 적성국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하였으나, 이로 인해 오랜 우호 관계를 유지했던 중화민국과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대한민국이 북한의 전통적인 우방국인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게 되면서 북한은 극심한 고립을 느끼게 된다.[11]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기자 회견을 통해 냉전의 얼음이 깨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5] 또한 북방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북한을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개방하도록 유도하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2. 1. 7.7 선언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김종휘를 외교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했다.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 정책에 대한 첫 번째 공개 연설을 통해 6개항의 프로그램을 발표했다.[2] 이 선언의 목표는 대한민국의 교역 상대국을 다변화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를 보장하는 것이었다.[3] 6개항의 프로그램에는 무역 증진, 모든 수준에서의 상호 방문, 남북 간의 인도적 교류, 그리고 북한과 그 동맹국 간의 비군사적 무역에 대한 대한민국의 반대 중단이 포함되었다.같은 해 9월에 계획된 1988년 하계 올림픽은 이 연설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북방 정책은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에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의 참가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대한민국은 북한의 공동 개최 요구와 평양에서 제안한 보이콧으로 인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불참 가능성을 해소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북방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중국과 소련 팀이 참여했으며, 대한민국은 1988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4]
2. 2. 1988년 서울 올림픽
1988년 하계 올림픽은 북방정책 추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북한은 공동 개최를 요구하며 보이콧을 제안해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불참 가능성이 제기되어 대한민국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북방 정책을 통해 중국과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며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4]3. 주요 내용 및 성과
북방정책은 냉전 및 탈냉전 시기에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를 통해 외교적 지평을 확장하고, 이를 통해 북한과 협상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동유럽 국가들과 소련, 중국과의 관계 수립 및 개선을 통해 북한에 대한 관여를 높이려는 시도로 이어졌으며, 기존의 대공산권 적대 정책을 획기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6][7][8]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북방 정책에 대한 첫 번째 공개 연설을 통해 6개항의 프로그램을 발표했다.[2] 그 목표는 대한민국의 교역 상대국 다변화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를 보장하는 것이었다.[3] 여기에는 무역 증진, 모든 수준에서의 상호 방문, 남북 간의 인도적 교류, 그리고 북한과 그 동맹국 간의 비군사적 무역에 대한 서울의 반대 중단이 포함되었다.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대한민국은 북한의 공동 개최 요구와 평양에서 제안한 보이콧으로 인한 사회주의권의 불참 가능성을 해소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북방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중국과 소련 팀이 참여했으며 서울은 1988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4]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기자 회견을 열어 냉전의 얼음이 깨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5] 노태우 대통령은 또한 북방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북한을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개방하도록 유도하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3. 1. 동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북방 정책 시행에 따라, 우선 동유럽 국가들과의 수교 논의가 이루어졌다. 헝가리, 폴란드, 체코 등과의 수교 과정에서 경제협정과 차관 제공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졌다.[9][10]3. 2. 소련과의 수교
1990년 6월 대한민국과 소비에트 연방 정상회담이 열렸으며, 그해 10월 소련과 국교가 수립되었다.[6][7][8] 이는 북방정책의 최종 목표가 사실상 성공한 것이었다. 이듬해인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이후 러시아와 국교를 재개하였다. 대한민국이 북한의 전통적인 우방국인 소련과 수교하면서 북한은 극심한 고립을 느끼게 되었다.[11]3. 3. 중국과의 수교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은 한국 전쟁의 주요 적성국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하였다.[6][7][8] 이로 인해 오랜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던 중화민국과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대한민국이 북한의 전통적인 우방국인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면서 북한은 극심한 고립을 느끼게 되었다.[11]4. 영향 및 평가
북방 정책은 대한민국의 외교적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이 참가하여 성공적인 개최를 도왔고[4], 이는 북방 정책이 추구한 교역 상대국 다변화와 한반도 평화 및 안보 보장이라는 목표와도 연결된다.[3]
노태우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기자 회견에서 냉전의 해빙이 시작되었다고 언급하며, 북방 정책의 목표가 북한의 고립이 아닌 개방 유도와 군사적 긴장 완화에 있음을 강조했다.[5]
4. 1. 북한의 고립 심화
대한민국이 북한의 전통적인 우방국인 소련과 중국과 수교하게 되면서 북한은 극심한 고립을 느끼게 된다.[11]4. 2. 외교적 성과에 대한 상반된 평가
북방 정책은 냉전 및 탈냉전 시기에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를 통해 대한민국의 외교적 지평을 넓히고, 북한과의 협상을 진전시키려는 목표를 가졌다.[6][7][8] 이는 동유럽 국가들과 소비에트 연방(소련),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려는 시도로 이어졌으며, 기존의 대공산권 적대 정책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6][7][8]북방 정책에 따라 헝가리, 폴란드, 체코 등 동유럽 국가들과의 수교 과정에서 경제 협정과 차관 제공이 먼저 이루어졌다.[9][10]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90년 6월 대한민국과 소비에트 연방 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그해 10월 소련과 국교가 수립되었다.[6] 1991년 소련 해체 이후에는 러시아와 국교를 재개하였다. 1992년 8월 24일에는 한국 전쟁의 주요 적성국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과도 국교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오랜 우호 관계였던 중화민국(대만)과는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대한민국이 북한의 전통적 우방국인 소련과 중국과 수교하면서 북한은 극심한 고립감을 느끼게 되었다.[11]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대한민국은 북한의 공동 개최 요구와 보이콧으로 인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불참 가능성을 해소해야 했다. 그러나 북방 정책을 통해 중국과 소련 팀이 올림픽에 참가했고, 서울은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었다.[4]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은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기자 회견에서 냉전의 얼음이 깨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5] 또한 북방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북한을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개방하도록 유도하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5. 현대적 의의
북방 정책은 탈냉전 시대 국제 질서 변화에 대한민국이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실리 외교를 추구한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또한, 문재인 정부의 신북방정책과 같이, 북방 지역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정책의 기원이 되었다.[2] 북방 정책은 대한민국의 교역 상대국 다변화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를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3]
1988년 하계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대한민국은 북한의 공동 개최 요구와 보이콧으로 인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불참 가능성을 해소해야 했다. 그러나 북방 정책을 통해 중국과 소련 팀이 참여했으며, 서울은 1988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4]
1990년,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 노태우 대통령은 기자 회견을 통해 냉전의 얼음이 깨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5] 또한 북방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북한을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북한이 개방하도록 유도하고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참조
[1]
문서
Formally announced in June 1983 by then-[[Foreign relations of South Korea|Foreign]] Minister [[Lee Beom-seok (Foreign Minister)|Lee Beom Suk]]
[2]
서적
The Two Koreas: A Contemporary History
Basic Books
2013
[3]
논문
"KOREA'S NORDPOLITIK: ACHIEVEMENTS & PROSPECTS."
1991
[4]
논문
"SEOUL'S SEARCHING FOR" NORDPOLITIK": EVOLUTION AND PERSPECTIVE."
1989
[5]
간행물
Monthly Choson
http://monthly.chosu[...]
[6]
저널
탈냉전기 한국의 외교정책과 민주화 동인 :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을 중심으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을 중심으로
https://www.dbpia.co[...]
2015-07
[7]
저널
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과 대외전략: 네트워크 이론과 소프트파워의 이론적 적용
https://www.dbpia.co[...]
2014-09
[8]
웹인용
노태우 정부 북방정책의 현재 의미
https://imnews.imbc.[...]
2021-10-30
[9]
웹인용
"헝가리와 수교 위해 1억2500만弗 차관 줬다"
https://www.hankyung[...]
2020-03-31
[10]
웹인용
국가기록원>기록물열람>통합검색>국정분야주제별검색>분야별주제검색
https://www.archives[...]
[11]
웹인용
"[이종석 칼럼]북·중·러 관계와 북한 상황 바로 읽기"
https://www.khan.co.[...]
2024-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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