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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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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태우는 일제강점기 대구 출생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으로 복무하며 12·12 군사 반란과 5·18 민주화 운동 진압에 관여했다. 이후 대통령을 역임하며 6·29 선언을 통해 민주화를 수용하고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으며, 북방 외교를 추진하여 사회주의 국가들과 수교를 맺었다. 퇴임 후 비자금 수수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2021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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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존칭각하
한국어 이름노태우
한자 이름盧泰愚
로마자 표기No Taeu
출생1932년 12월 4일
출생지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동 (현재의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
사망2021년 10월 26일
사망지서울특별시
묘소파주 통일동산 파주
본관교하
별칭용당(庸堂)
서명
종교불교 → 천주교(세례명: 사도 요한)
경력
대한민국 대통령재임 기간: 1988년 2월 25일 ~ 1993년 2월 24일
전임: 전두환
후임: 김영삼
민주자유당 총재재임 기간: 1990년 5월 9일 ~ 1992년 8월 28일
전임: 직책 신설
후임: 김영삼
민주정의당 총재재임 기간: 1987년 8월 5일 ~ 1990년 2월 2일
권한대행: 1987년 7월 10일 ~ 1987년 8월 5일
전임: 전두환
후임: 직책 폐지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회 위원장재임 기간: 1984년 8월 12일 ~ 1986년 5월 7일
전임: 피터 위버로스
후임: 박세직
국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서울 올림픽 조직 위원회 의장재임 기간: 1983년 7월 11일 ~ 1986년 5월 7일
전임: 김용식
후임: 박세직
내무부 장관재임 기간: 1982년 4월 28일 ~ 1983년 7월 6일
대통령: 전두환
전임: 서종화
후임: 주영복
체육부 장관재임 기간: 1982년 3월 20일 ~ 1982년 4월 28일
대통령: 전두환
전임: 직책 신설
후임: 이원경
개인 정보
배우자김옥숙(1959년 결혼)
자녀노소영(딸)
노재헌 (아들)
모교육군사관학교 (BS)
군사 정보
소속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1950년 ~ 1981년
최종 계급대장
참전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주요 지휘 경력제9보병사단 사단장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
1951년 육사생도 시절의 노태우
정치 경력
소속 정당무소속
이전 소속 정당민주정의당(1980년~1990년)
민주자유당(1990년~1992년)
수상
총리
국무총리이현재
강영훈
노재봉
정원식
현승종

2. 생애

1932년 12월 4일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 재학 중 전두환과 교우 관계를 맺었으며, 한국 전쟁 발발 후 육군사관학교에 11기로 입교하여 전두환과 동기가 되었다.[42] 졸업 후 군 복무 중 전두환 등과 함께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하여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제9보병사단장(계급 소장)으로 재직하던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등 하나회 세력과 함께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신군부의 집권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예하 부대를 불법적으로 동원하여 반란 성공에 기여했다.[42] 쿠데타 이후 수도경비사령관, 국군보안사령관 등 군 요직을 거치며 중장으로 진급했고, 이 기간 동안 5·18 민주화 운동의 무력 진압 과정에도 관여했다. 1981년 대장으로 진급한 직후 예편하여 정계에 입문했다.

정계 입문 후 정무 제2장관, 초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특히 체육부 장관과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장을 맡아 대회 준비를 총괄했다. 1985년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자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포함한 6·29 선언을 발표했다. 같은 해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야권 분열에 힘입어 36.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43][44]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제6공화국 시대를 열었다. 재임 중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으며, 냉전 종식 기류 속에서 북방 외교를 적극 추진하여 소련, 중화인민공화국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과 수교했다. 남북 관계에서도 유엔 동시 가입(1991년),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1991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합의(1992년)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국내 정치에서는 여소야대 국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90년 김영삼, 김종필3당 합당을 단행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했으나, 이는 정치적 야합이라는 비판과 함께 이후 극심한 당내 계파 갈등을 유발했다. 대일 관계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공식 의제로 제기하고 재일 한국인 지문날인 제도 폐지를 이끌어냈다.

1993년 2월 퇴임한 후, 1995년 대통령 재임 중 조성한 거액의 비자금 은닉 사실이 드러나 구속되었다.[45][46] 이 사건은 12·12 군사 반란과 5·18 민주화 운동 진압 책임에 대한 재수사로 이어졌다. 1997년 대법원은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 뇌물수수 등 혐의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88억을 확정했다.[47][48] 그러나 같은 해 12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49][50] 추징금은 2013년 완납되었다.[23]

말년에는 건강 악화로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으며, 아들을 통해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사죄의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2021년 10월 26일 숙환으로 향년 88세로 사망했다.[53][54][55][56][57] 유언에서 과거 과오에 대한 용서를 구한다는 뜻을 남겼고, 정부는 이를 고려하여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렀다.[58] 유해는 경기도 파주시 통일동산에 안장되었다.[60]

2. 1. 생애 초기

노태우는 1932년 12월 4일 대구에서 태어났다.[9] 그의 가계는 조선 전기 문신 노사신으로 이어지며,[10] 아버지는 경상북도의 하급 공무원이었으나 노태우가 7살 때 교통사고로 사망했다.[10]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학업을 이어가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 전두환과 친구가 되었다.[10]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였으며, 이후 육군사관학교에 11기로 입학하여 전두환과 동기가 되었다.[42]

2. 1. 1. 출생과 가계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에서 1932년 12월 4일 태어났다.[9][68] 아버지는 공산면사무소 면서기를 지낸 노병수이며, 어머니는 김태향이다. 부모는 오랫동안 자녀를 갖지 못하다가 팔공산에 백일기도를 드린 끝에 결혼 9년 만에 3남 중 장남인 노태우를 낳았다.[68] 5년 뒤 남동생 노재우가 태어났다.[68]

그의 가계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오나라의 참모 노숙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세조부터 성종 대까지 의정부 영의정을 지낸 문광공 노사신의 15대손이다. 다른 기록에서는 노사신을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언급하며 노태우가 그의 16대손이라고도 한다.[10] 노사신은 고려 말기 관료였던 노진|盧稹한국어의 6대손이다.[10] 노태우 가문의 뿌리는 중국 산둥성의 성도인 지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전해진다.[10]

어머니 김태향이 노태우를 임신했을 때, 콩밭에서 일하던 중 큰 구렁이가 나타나 집까지 따라와 발뒤꿈치를 물고 온몸을 감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이를 용꿈으로 해석하여 아이 이름을 '태룡'(泰龍)으로 지으려 했으나, 당시가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꿈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일부러 '어리석을 우'(愚) 자를 넣어 '태우'(泰愚)라고 이름 지었다.

아버지는 노태우가 7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10] 이후 삼촌의 도움으로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4학년 때 경북고등학교로 전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10][61]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 전두환과 친구가 되었다.[10]

2. 1. 2. 유년 시절 및 학창 시절

1932년 12월 4일 대구에서 태어났다.[9]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인 노사신의 16대손이며, 노사신은 고려 말기 관료 노진(盧稹)의 6대손이다.[10]

아버지는 경상북도의 하급 공무원이었으며, 소학교 학력이 전부였으나 신문물에 일찍 눈을 떴고 한문을 잘하여 면서기를 지냈다. 189cm의 큰 키에 음악적 재능도 뛰어나, 노태우와 동생 노재우에게 유성기 음악을 들려주곤 했다. 노태우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 불렀으며, '베사메무초'와 '방랑시인 김삿갓'을 즐겨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의 유품인 퉁소를 불며 음악적 소양을 키우기도 했다. 어머니 김태향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1940년, 노태우가 7살 때 아버지가 동생(노태우의 숙부) 노병상(盧秉祥)의 중학교 졸업식에 가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9] 이후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끼니를 거르는 등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자신 때문에 형이 죽었다고 생각한 숙부 노병상은 아버지 이상으로 조카들을 돌보았고, 사촌 형제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어린 시절부터 어리광을 부리기보다는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말을 아끼며 조심스러운 성격이었다. 집은 팔공산 근처에 있었다. 1939년 3월, 집에서 6km 떨어진 공산소학교에 입학하여 직접 걸어 다녔으며, 형편이 어려워 맨발로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성격이 유순하여 화를 잘 내지 않았고, 학창 시절 별명은 '스마일'이었다고 한다. 귀가 크고 남의 말을 잘 듣는다는 평도 있었다. 소학교 시절 성적은 상위권이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6학년 담임선생님이 저녁 늦게까지 보충수업을 해주기도 했다. 그는 밤길에 혼자 산을 넘어 집에 도착하여 밤늦게까지 공부하곤 했으며, 점차 말수가 적어지고 독서에 흥미를 두게 되었다.

아버지 사후 집안에 이렇다 할 공직자가 없었기에, 창씨개명에 참여하지 않고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1945년 공산소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업중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소학교 동창 101명 중 중학교에 진학한 학생은 남학생 1명, 여학생 2명뿐으로, 노태우가 유일한 남학생 진학자였다. 중학교 5학년 무렵에는 싸우는 친구들을 설득하여 화해시키는 등 조정 능력을 보여 조선 세종 때의 명재상 황희에 빗대어 '노(盧) 정승'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했으나, 4학년 때 경북고등학교로 전학하여[61] 평균 이상의 성적을 거두었다. 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 전두환과 친구가 되었다.[9]

2. 2. 청소년기

1932년 12월 4일,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4학년 때 경북고등학교로 전학했다.[61]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하였으며, 전쟁 이후 육군사관학교에 11기로 입학하여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42]

2. 2. 1. 한국 전쟁 참전

한국 전쟁(1950~1953)이 발발하자 징집되어 육군 포병 부대에 입대하였다. 이때 가수 송해와 함께 복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M114 155mm 곡사포 포대에서 복무하며 상병까지 진급하였다.

전쟁 이후 육군사관학교(KMA)에 11기로 입학하여[42] 1954년 2월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육사 11기 동기로는 후에 대통령이 되는 전두환이 있다.[42]

2. 2. 2. 육사 수학과 임관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 학도병으로 복무하던 중 대구에 있던 헌병학교에 입학하여 정식 이등병 신분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일설에는 가수 송해와 함께 징집되어 포병 부대에서 복무하며 상병까지 진급했다고도 한다.

1951년에는 경북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10월, 헌병학교 정규 1기생 신분으로 첫 정규 4년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전두환과 동기(11기)가 되었다.[42]

1954년 2월,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며 이학사 학위를 받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군에 처음 입대했을 당시 자신의 성씨를 영어로 "No"라고 표기하였으나, 영어에서 "No"가 갖는 부정적인 의미를 피하기 위해 나중에 "Roh"로 변경하였다.[11]

2. 3. 군인 생활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전두환, 정호용 등과 교류하며 인맥을 쌓았다. 특히 경상도 출신인 전두환과는 육사 11기 동기생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노태우는 훗날 인터뷰에서 "전두환에게는 사람을 끌리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입학 당시에는 상위권 성적이었으나, 전두환 등 학업과 거리가 먼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성적이 점차 떨어져 소위 임관 시에는 156명 중 67등을 기록했다.

스포츠를 좋아하여 육상부와 럭비부원으로 활동했다. 럭비 선수 초기에는 부상이 잦아 일본식 소독약 '아카징키(빨간 소독약)를 자주 바른다 하여 '악까중끼'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으나, 꾸준한 연습으로 주전 선수가 되어 해군사관학교, 공군사관학교 등과의 경기에서 팀의 연승을 이끌었다. 이 시기에 이기백, 김복동, 권익현 등과도 친분을 쌓았다. 감수성이 예민하여 헤르만 헤세의 시집을 애독했으며, 홍사용 시인의 시집, 특히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작품을 아꼈다.

육사 재학 중 대통령 이승만이 학교를 시찰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1955년 2월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70] 이후의 군 복무 과정과 주요 활동은 아래 하위 문단에서 상세히 다룬다.

2. 3. 1. 장교 생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징집병으로 입대하여 포병 부대에서 복무했으며, 이때 가수 송해와 같은 부대원이었다. M114 155mm 곡사포 포대의 상병(포병)까지 진급했다.

전쟁 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4년 과정을 마치고 1954년 2월 졸업(11기)과 함께 이학사 학위를 받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42] 육사 11기 동기로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전두환이 있었다.

1954년부터 보병 장교로 복무하며 꾸준히 진급했다.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하여 1967년에는 보병 대대장으로 파병되어 무공훈장을 받았다. 주요 군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계급주요 보직 및 활동
1956년소위보병 소대장
1960년대위군사정보대 영어번역 장교
1961년대위방첩부대 정보장교
1967년중령보병 대대장 (베트남 전쟁 파병, 무공훈장 수훈)
1968년중령대대장
1971년대령보병 연대장
1974년준장공수특전여단장
1978년준장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
1979년소장제9보병사단(백마사단) 사단장



전두환 등과 함께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하고 핵심 회원으로 활동했다.[42] 제9보병사단장(육군 소장)으로 재직 중이던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등 하나회 세력과 함께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사령부의 승인 없이 지휘 하의 제9사단 제29연대 병력을 서울로 이동시켜 반란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43][44] 이는 명백한 군 형법 위반 행위였다.

군사 반란 이후 쿠데타에 반대했던 장태완 소장의 후임으로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80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국군보안사령관을 역임했다. 보안사령관 재직 중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무력 진압 과정에도 관여하였다.

1981년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으나, 곧바로 예편(예비역 편입)하여 군복을 벗었다. 이는 전두환 정권 하에서 정계에 진출하기 위한 수순으로 평가된다.

군 복무 초기 영어 성씨 표기를 'No'로 사용했으나, 영어에서 부정적인 의미('아니오')를 피하기 위해 나중에 'Roh'로 변경했다.[11]

2. 3. 2. 월남전 참전

1954년부터 육군 보병 장교로 복무하며 꾸준히 승진하였다. 1967년에는 육군 중령 계급으로 보병 대대장을 맡아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무공훈장을 수훈하였다.[42] 1968년에도 중령 계급으로 대대장을 역임하였다.

2. 3. 3.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윤필용 필화사건으로 다른 하나회 회원들과 함께 정치적 위기에 몰렸으나, 1979년 3월 전두환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으로 복귀한 후 노태우는 육군 제9보병사단 사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되자(10·26 사태), 노태우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해 12월 초, 서울에서 전두환, 정호용 등과 함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김재규의 내란 방조 혐의로 체포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12·12 군사 반란의 시작이었다. 당시 노태우는 작전 실패를 염려하여 박철언 등에게 자신의 가족을 부탁하기도 했다.

하나회의 핵심 멤버였던 노태우는 12·12 군사 반란 당시 제9보병사단장(계급 소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주한미군사령부의 동의 없이 휘하의 제9사단 제29연대 병력을 서울로 이동시켜 반란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42] 쿠데타 이후 해임된 장태완 소장의 후임으로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80년 5월에는 5·18 민주화 운동의 무력 진압 과정에도 관여하였다. 이후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12·12 군사 반란과 5·18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재수사가 이루어졌다. 노태우는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기소되어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88억을 선고받았다.[47][48] 그러나 같은 해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특별사면되었다.[49][50]

2010년대에 들어 병환으로 외부 활동이 거의 없었으나, 아들 노재헌을 통해 5·18 민주화 운동 피해자들에게 여러 차례 사죄의 뜻을 표명하고 매년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도록 했다. 2021년 사망 후 공개된 유언에서도 자신의 재임 중 과오에 대한 용서를 구하며 역사의 책임을 지겠다는 뜻을 밝혔다.[58] 이러한 태도를 고려하여 문재인 정부는 그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으나,[58] 5·18 민주화 운동 진압 책임 문제로 인해 광주광역시 등 일부 지역에서는 조기 게양을 거부하는 등 여론의 평가는 엇갈렸다.

2. 4. 정치 활동

하나회 회원으로서 윤필용 필화사건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1979년 3월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 복귀하면서 9사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해 10.26 사태 이후 전두환, 정호용 등과 함께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하여 군부 내 실권을 장악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군사 반란 성공 이후 수도경비사령관, 국군보안사령관 등 군내 요직을 거쳐 1981년 7월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으나, 곧바로 예편하고 정계에 입문했다.

정계 입문 후 정무 제2장관, 초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등을 역임하며 정치적 경력을 쌓았다. 특히 체육부 장관과 서울 올림픽아시안 게임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제적인 행사를 성공적으로 준비하는 데 기여했다.

1985년 민주정의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당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어 집권 여당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자,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포함한 6·29 선언을 발표하여 정국 수습에 나섰다. 같은 해 12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 후보였던 김영삼김대중의 분열에 힘입어 36.6%의 득표율로 제13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43][44]

2. 4. 1. 12.12 군사 정변 이후

12·12 사태 당시 제9사단장이었던 노태우는 전두환의 요청에 따라 휘하 29연대 병력을 서울 중앙청으로 출동시켜 군사 반란 성공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75] 쿠데타 이후 해임된 장태완 육군 소장의 후임으로 수도경비사령관에 취임했다.

1980년 5월 17일 오전에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 단행과 군부의 정치 개입 필요성을 강조하여, 이날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데 관여했다. 이러한 조치를 통해 신군부는 사실상 정권을 장악했으며, 노태우는 수도경비사령관으로서 민주화 세력 진압 등 신군부의 집권 계획과 과정에 참여했다.

같은 해 5월 31일, 노태우는 국가보위입법위원회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 25명 중 한 명으로 선임되었고, 6월에는 국보위 상임위원으로도 활동하며 수도경비사령관직을 겸임했다. 이 시기 가택 연금된 김종필 등 구 군사정권 출신 인사들을 예우했으며, 특히 김종필로부터는 처세술과 권력 관계에 대한 조언을 받았다. 김종필은 노태우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1인자인 전두환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라고 충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종필은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 유일하게 자신을 선배로 예우한 노태우에게 이승만김구, 자신과 박정희의 관계를 설명하며 1인자와의 관계 유지 비법을 전수했다고 한다.

1980년 8월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고, 같은 해 8월 23일에는 전두환의 후임으로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에 취임했다. 이는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의 강력한 추천에 따른 것이었다. 1981년 7월 11일에는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나흘 뒤인 7월 15일 서부전선에서 전역식을 갖고 예비역으로 예편하며 군복을 벗었다.

그러나 군 시절 친구였던 전두환과의 관계는 점차 상하 관계로 변질되었고, 노태우는 전두환으로부터 하대를 받으며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노태우가 한강변에서 통곡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으나, 그는 김종필의 조언대로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2인자의 자리를 지켰다. 이는 훗날 6.10 민중 항쟁 이후 전두환이 노태우를 후계자로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노태우는 결국 전두환을 백담사로 보내고 민주정의당 명예총재직에서도 사퇴시켰다.

예편 후에는 정무 제2장관을 거쳐 1982년 초대 체육부 장관에 임명되어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대회 준비를 총괄했다. 같은 해 우범근 순경 총기 난사 사건으로 서정화 내무부 장관이 사실상 경질되자, 그 후임으로 내무부 장관에 취임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의 기반을 다졌다.

2. 4. 2. 초기 정치 활동

1981년 7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후, 전두환의 제안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정무 제2장관에 임명되었다.[61] 이후 국가안전기획부장, 초대 체육부 장관, 내무부 장관 등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 1982년에는 남북한 고위급 회담 수석대표를 맡기도 했다.

특히 1983년부터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 (SLOOC) 위원장과 서울 아시안 게임 조직위원회 (SAGOC) 위원장을 겸임하며 1988년 하계 올림픽의 서울 유치 및 개최 준비를 총괄했다. 1984년에는 대한체육회 회장 및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도 맡았다.

1985년에는 민주정의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제12대 국회에 입성하였고, 같은 해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어 당내 입지를 다졌다.

2. 4. 3. 서울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준비 위원장

1981년 대한민국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후, 정무 제2장관을 거쳐 1982년 초대 체육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1983년에는 서울 아시안 게임 조직위원회(SAGOC) 위원장과 1988년 하계 올림픽 조직위원회(SLOOC) 위원장을 맡아 양 대회의 준비 실무를 총괄했다. 1984년에는 대한체육회 회장 및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도 겸임하였다. 이러한 경력을 통해 체육계 및 정계에서 입지를 다졌으며, 1988년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후 1988년 하계 올림픽 개막을 공식 선언했다.[43][44]

2. 4. 4. 민정당 대표 활동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전국구, 민주정의당)으로 당선되었고, 같은 해 민주정의당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2·12 군사 반란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의 유혈 진압에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전두환 정부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며 민주 개혁 의지를 내세웠다.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8개항의 제안을 통해 정치 개혁에 대한 야당의 요구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이며,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넘어서 개혁가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다.

1987년 6월, 전두환은 노태우를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는 사실상 노태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대규모 민주화 시위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가 거세지자, 노태우는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포함한 광범위한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는 내용의 6·29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으로 민정당 총재직에 올랐다.

같은 해 12월 16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권의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하여 표가 분산된 결과, 36.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12] 이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국민 직선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라는 의미가 있지만, 낮은 득표율과 야권 분열이라는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승리였다.

2. 4. 5. 1987년 대통령 선거

12·12 군사반란과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의 유혈 진압에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전두환 정부와의 차별화를 시도하며 민주 개혁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포함한 8개항의 제안을 통해 정치 개혁에 대한 야당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며 개혁가로서의 입지를 다지려 노력했다.

1987년 6월, 전두환은 노태우를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이는 사실상 노태우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에 반발하여 1987년 6월 항쟁이라는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거센 민주화 요구에 직면하자 노태우는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김대중 사면복권 등을 포함한 8개 항의 시국 수습 방안, 이른바 6·29 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한 조치였으나, 한편으로는 6월 항쟁으로 인한 정권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기도 했다.

6·29 선언 이후, 1971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이래 16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로 198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에서 노태우는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민주화 진영의 대표 주자였던 김영삼김대중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여 각자 출마함으로써 표가 분산되었다.[12] 이러한 야권 분열 상황 속에서 노태우는 36.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국민 직접 선거로 선출된 첫 대통령이었으나, 과반에 미치지 못하는 득표율과 야권 분열이라는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승리였다. 선거 과정에서 노태우는 군인 출신이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친근함과 소통을 강조하는 전략을 사용하기도 했다.[43][44]

2. 5. 13대 대통령 재직

1987년 6월 항쟁으로 고조된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서 6·29 선언을 발표하였고, 이를 계기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이 마련되었다. 같은 해 12월 16일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 실패에 힘입어 36.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86] 이는 1971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이후 16년 만에 치러진 직선제 선거였다. 선거 과정에서 노태우는 "보통 사람" 이미지를 내세우며 군인 출신이라는 이미지를 희석시키려 노력했다.[43][44]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제6공화국 시대를 열었다. 취임식은 국회 의사당 앞 광장에서 거행되었는데, 이는 헌정사상 최초의 국회 밖 취임식이었으며 이후 대통령 취임식의 선례가 되었다.[13] 노태우는 취임사에서 민주주의 발전과 국민 화합을 약속하며 "위대한 보통 사람들의 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재임 기간 동안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냉전 종식의 국제 정세 변화에 발맞춰 북방 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이를 통해 헝가리를 시작으로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몽골 등 동구권 국가들과 수교하였고, 1990년에는 소련, 1992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역사적인 수교를 맺었다(한중 수교). 남북 관계에서도 진전을 이루어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실현하고, 같은 해 남북 기본 합의서를 채택했으며,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국내 정치에서는 5공 청산 요구에 직면했으나, 전두환 전 대통령 처리 문제 등에서 미온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취임 직후 치러진 제13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여 여소야대 국회가 형성되자, 국정 운영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1990년 통일민주당(김영삼), 신민주공화당(김종필)과의 3당 합당을 통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다. 이는 정국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이었으나, 정치적 야합이라는 비판과 함께 이후 당내 심각한 계파 갈등을 야기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균형 성장'을 목표로 주택 200만 호 건설, 인천국제공항한국고속철도(KTX) 건설 착수 등 대규모 국책 사업을 추진했으나, 임기 중반 이후 노동쟁의 심화와 원화 가치 상승 등으로 경제 성장이 둔화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대일 관계에서는 1990년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공식 의제로 제기하고, 재일 한국인의 지문날인 제도 폐지를 요구하여 관철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1993년 2월 24일, 5년의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2. 5. 1. 취임 초기

1988년 2월 25일 노태우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이자 제6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 취임식은 국회 밖에서 거행된 최초의 대통령 취임식이었으며, 이후 대통령들의 취임식도 같은 장소에서 열리게 되었다.[13]

노태우는 취임사에서 국민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민주주의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하며, "민족자존의 새 시대"가 열렸음을 선언했다. 그는 민주주의라는 지도와 국민 화합이라는 나침반을 가지고 나아갈 것을 강조했으며, 미국, 일본 등 서방 국가와의 관계 강화와 더불어 제3세계 및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북방 외교를 활발히 전개할 의지를 밝혔다. 이는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 공동 번영에 기여하고 통일로 가는 길을 열 것이라고 언급했다.[87] 또한 "중용(中庸)을 근간으로 화합과 화해의 정치를 실천하고 이를 바탕으로 계층간ㆍ지역간의 반목을 해소하면서 새 시대를 민주 발전과 민족 자본의 시대로 만들겠다"는 정치 이념을 피력하였다. 그는 연설문 등의 초안을 검토 후 내용을 암기하여 자연스럽게 발표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취임 직후 5공 청산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높았으나, 노태우는 전두환 전 대통령 처벌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전두환은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을 사퇴하고 백담사로 은둔하게 되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전두환 구속과 12.12, 5.18 관련자 처벌을 꾸준히 요구했지만, 노태우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태우는 5공 인사들을 정리하고 자진 퇴임을 유도하였으나, 5.18 관련자 처벌에는 미온적이어서 야당과 운동권으로부터 '5.5공화국'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6.29 선언을 통해 5공화국과의 단절 의지를 보였고, 장기집권 종식을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인사 면에서는 청와대 내 군 출신 인사들을 대거 해임하고, 김종인 등 민간 전문가들과 대학 교수 출신들을 기용했다. 특히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여 '대쪽 판사'로 알려졌던 법관 이회창을 발탁하여 정계에 입문시켰다. 이러한 인적 쇄신은 신군부 출신들의 반발을 샀으나, 노태우는 이를 묵살했고 이로 인해 일부 신군부 인사들과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정치 민주화, '균등 성장'을 위한 경제 발전, 그리고 국가 통일을 3대 정책 목표로 설정했다. 외교적으로는 북방정책을 추진하여, 1988년 7월 7일 남북 교류 등을 골자로 한 '7·7 선언'을 직접 작성하여 발표하고, 8월 8일에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중공'을 '중국'으로 공식 호칭하기로 발표하였다. 이는 일부 보수 세력의 반발을 샀으나,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중국'이라는 명칭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1991년 노태우 대통령과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


1992년 노태우 대통령과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


그러나 1992년 노태우 정부는 제주 4·3 사건 희생자 유해가 발견된 한라산의 동굴을 봉쇄했는데, 이는 역대 정부가 제주 4·3 사건 진상을 은폐하려는 일련의 행위를 계속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14]

2. 5. 2. 국정 방향

노태우 정부가 내세운 대표적인 국정 방향은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와 "북방 정책" 두 가지였다.[88]

"북방 정책"은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목표로 한 외교 정책으로, 노태우 정부의 주요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노태우는 집권 후 제2세계의 상징과도 같았던 소련과 국교를 맺었으며, 이후 헝가리 등 다른 동구권 국가들과도 차례로 수교했다. 또한 냉전이 종식된 후인 1992년에는 한국 전쟁 당시 적대 관계였던 중국과도 국교를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한국 통일 문제에도 영향을 미쳐, 1991년 9월 17일 북한과의 유엔 동시 가입을 실현시키고, 같은 해 12월 13일에는 남북 기본 합의서를 체결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1988년 7월 7일에는 남북 동포 교류 추진 등을 골자로 한 '7·7 선언'을 발표했으며, 8월 8일에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중공'을 '중국'으로 공식 호칭하기로 발표하여 일부 보수 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그러나 중국과의 수교는 오랜 우방이었던 중화민국과의 단교라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는 노태우가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시절인 1987년 국회연설에서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하며 제시한 구호였다.[89] 그 배경에는 "이 시대는 권위체제로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없는 다원의 시민사회이기 때문"[89]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약속은 실현되지 못했고,[90] 결국 정치적 구호에 그치며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88]

노태우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5공 청산을 내세웠다. 6.29 선언을 통해 5공화국과의 단절 의지를 밝혔고, 장기집권 종식을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청와대 내 군 출신 인사들을 해임하고 김종인 등 민간 전문가와 이회창 같은 소신파 법조인 등을 등용했으며, 헌법에서 "5·16 혁명정신" 관련 조항을 삭제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폐지했다. 또한 박정희 시대를 부정과 부패로 규정하고 정의사회 구현을 표방했으며,[102] 박정희 추모 행사에 대한 간섭도 중단했다. 그러나 5·18 민주화 운동 관련자 처벌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야당과 재야 세력으로부터 "5.5공화국"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법통을 찾아야 한다는 김준엽의 제안은 수용하지 않았다.

국정 운영에서 노태우 정부는 정치 민주화, '균등 성장'을 위한 경제 발전, 국가 통일을 주요 정책 목표로 삼고 민주 개혁과 국내 정치·사회·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13대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형성되자, 국정 운영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단행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김영삼통일민주당, 김종필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 것이다. 이는 정치적 안정을 통해 사회경제적 발전을 도모하려는 의도였으나, 합당 이후 당내 심각한 계파 갈등으로 인해 오히려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15] 한편, 1992년에는 제주 4·3 사건 희생자 유해가 발견된 한라산 동굴을 봉쇄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는 역대 정부의 진상 은폐 시도를 답습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14]

대일 관계에서는 1990년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아키히토 당시 일왕, 우노 소스케 총리와 회담했다. 이 방문에서 노태우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대일 협상 의제로 삼았으며, 이듬해 우노 총리의 방한 시에는 재일 한국인의 지문날인 제도 폐지를 요구하여 관철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2. 5. 3. 외교 정책

노태우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기존 정부들과는 다른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는데, 특히 '북방 정책'으로 대표되는 공산권 국가와의 관계 개선 노력이 두드러졌다. 이는 1988년 7월 7일 발표된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7·7 선언)을 통해 구체화되었으며, 미국 중심의 외교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취임 첫해인 1988년 서울 하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것은 노태우 정부의 주요 외교적 성과 중 하나로 꼽힌다. 냉전 시대 분단국가에서의 올림픽 개최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소련, 중국, 동유럽 국가 등 대다수 공산권 국가들의 참가를 이끌어내며 동서 화합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는 이후 북방 정책 추진에 긍정적인 환경을 조성했다.

북방 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1989년 헝가리폴란드를 시작으로, 1990년에는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몽골과 잇따라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특히 1990년 6월, 노태우 대통령은 미국 방문 중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역사적인 첫 정상회담을 가졌고, 이는 양국 간 42년간의 공식적인 단절을 끝내고 수교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었다.[16] 같은 해 서울과 모스크바는 총영사관을 교환했으며, 1991년 노태우 대통령은 소련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과도 수교(한중 수교)를 맺었다. 이러한 일련의 외교적 성공은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외교 지평을 넓혔으나, 한편으로는 북한의 외교적 고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중국과의 수교로 인해 중화민국(대만)과는 단교하게 되었다.

남북 관계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1990년 9월에는 서울에서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렸으며, 1991년 9월 17일에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역사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같은 해 12월 13일에는 남북 간 화해와 불가침, 교류 협력을 약속하는 남북 기본 합의서를 체결했다. 이 합의서에는 상호 불가침 확인, 군사적 신뢰 구축 조치(주요 군사 이동 사전 통보, 군사 핫라인 설치 등), 정전협정의 평화 체제 전환 노력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남북 관계 발전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7][18][19] 1992년 1월에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서명하여 한반도 평화 정착에 대한 기대를 높였으나, 이후 북한의 핵 개발 추진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20] 이 시기에는 남북 단일팀이 구성되어 1991년 일본 지바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와 포르투갈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통일기를 앞세우고 함께 출전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노태우 대통령은 활발한 정상외교를 펼쳤다. 1988년 10월 유엔 총회 연설을 시작으로, 미국의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여러 차례 회담하고 미 의회 합동회의에서 연설했으며, 1989년 12월에는 유럽 5개국을 순방했다. 필리핀코라손 아키노 대통령과 만나 양국 간 경제, 사회, 문화적 유대 강화를 논의하기도 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1990년 민주화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아키히토 당시 천황, 우노 소스케 총리와 회담했다. 이 방문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양국 간 주요 의제로 제기했으며, 재일 한국인의 지문날인 제도 폐지를 강력히 요구하여 이후 실현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2. 5. 4. 북방 정책

노태우 정부는 기존 정부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외교 노선인 북방 정책(Nordpolitik|노르트폴리티크de)을 추진하여 주목받았다. 이는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주요 외교 정책 기조로,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 및 한반도 평화 정착을 목표로 했다. 1988년 7월 7일,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 이른바 7·7 선언을 발표하며 북방 정책의 시작을 알렸다. 이 선언은 남북 관계를 동반자 관계로 설정하고, 교류 협력 및 북한의 국제 사회 참여 지원 의사를 밝히는 등 기존의 대북 적대 정책에서 벗어나는 내용을 담았다. 이는 과거 미국 중심의 외교에서 벗어나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평가받는다.

북방 정책은 실제적인 외교 성과로 이어졌다. 1988년 하계 올림픽 성공 개최 이후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으며, 1989년 헝가리폴란드를 시작으로 공산권 국가들과의 수교가 본격화되었다. 1990년에는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몽골과 연이어 외교 관계를 맺었다. 특히 소련과의 관계 개선은 북방 정책의 핵심 성과 중 하나였다. 1990년 6월 4일, 노태우 대통령은 미국 방문 중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역사적인 첫 정상회담을 가졌고, 이는 양국 간 42년간의 공식적인 단절을 끝내고 관계 정상화의 길을 열었다. 같은 해 양국은 총영사관을 교환했으며, 1991년 노태우 대통령은 소련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또한 중국과의 관계도 꾸준히 발전하여 무역 규모가 크게 증가했고, 마침내 1992년 한중 수교를 맺었다. 이러한 일련의 외교적 성과는 북한을 외교적으로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대한민국 외교의 지평을 넓힌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북방 정책은 남북 관계 개선에도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 노태우 정부는 북한의 연방제 통일 방안과 유사점을 가지면서도 단계적 통일을 지향하는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을 제안했다.[16] 1990년 9월에는 서울에서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렸는데, 이는 분단 이후 최초의 총리급 회담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91년 9월 남북한은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역사적 성과를 거두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남북 관계의 기본 틀을 마련한 남북 기본 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했다. 이 합의서는 상호 체제 인정, 불가침, 교류 협력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며, 이후 남북 관계 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17][18][19] 1992년 1월에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서명하여 한반도 평화 정착의 의지를 밝혔으나, 이후 북한의 핵 개발 문제로 인해 실효성을 거두지는 못했다.[20] 이 밖에도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와 포르투갈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 남북 단일팀이 참가하여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출전하는 등 체육 교류에서도 성과가 있었다.

2. 5. 5. 경제 정책

노태우 정부는 '균형있는 경제성장'을 주요 정책 목표로 내세우며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기조 아래 농어촌 지역의 부채를 탕감하고, 200만 호의 신규 주택을 건설했으며, 공익 목적의 공유지 소유권 확립 정책 등을 추진했다. 또한 인천국제공항(1992년 착공, 2001년 개항) 건설과 한국고속철도(KTX, 2004년 개통) 시스템 구축과 같은 대규모 국책 사업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21]

그러나 경제 운영 면에서는 어려움도 있었다. 연간 경제성장률은 1988년 12.3%를 정점으로 1989년에는 6.7%로 하락했다. 노동쟁의가 심화되고 임금 인상 요구가 거세지자, 정부는 수출 주도형 경제의 경쟁력 유지를 위해 긴축 정책을 시행했다. 하지만 파업에 따른 임금 상승과 대한민국 원의 대미 달러 환율 상승(원화 가치 상승)으로 인해 한국 상품의 국제 경쟁력은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2. 5. 6. 퇴임

임기 말 민주자유당의 당권을 놓고 김영삼과 갈등이 있었으며, 한때 후계자로 박철언 등을 염두에 두기도 했다. 이에 김영삼은 강하게 반발하며 집단 탈당과 반정부 투쟁까지 고려하였다. 결국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대권과 당권을 넘기기로 결정하고, 1992년 8월 28일 민자당 총재직을 사퇴하였다. 같은 날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총재로 취임하면서 노태우는 민자당 명예총재로 추대되었으나, 9월 18일에는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이유로 모든 당직을 내려놓고 민자당을 탈당하였다.[134]

1992년 9월 18일 민주자유당 탈당과 함께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선언하였고,[134] 이에 따라 10월 9일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당이 없는 중립내각이 출범하였다.[135] 이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현직 대통령이 여당을 탈당하는 선례를 남겼다.

1987년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 재선이 금지되었으므로, 노태우는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1993년 2월 24일 임기를 마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퇴임 후 1995년, 대통령 재임 중 조성한 거액의 비자금 등 정치 자금 은닉 사실이 드러나 구속되었다.[45][46]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에서는 징역 15년과 추징금 2628억을 선고받았다. 비자금 사건 수사 과정에서 12·12 사태와 5·18 민주화 운동 강경 진압에 대한 재수사 요구 여론이 높아졌고,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이 사건들에 대한 재수사를 지시했다.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12·12 사태 주도 및 5·18 민주화 운동 강경 진압, 그리고 비자금 조성 혐의 등으로 노태우에게 징역 17년과 추징금 2688억을 확정 판결했다.[47][48] 그러나 같은 해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되었다.[49][50]

미납 상태였던 추징금 중 230억에 대해서는 2013년 9월, 친족들이 대신 납부하겠다고 발표하며 완납되었다.

2010년대에 들어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는 등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이 시기 아들을 통해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사죄의 뜻을 여러 차례 밝혔고, 매년 아들이 대신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도록 했다.

2021년 10월 26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숙환으로 향년 8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53][54][55][56][57] 유언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위대한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고 영광스러웠다"며 "재임 중의 일들에 대해 책임과 과오가 있었다면 너그러이 용서해주길 바라며, 역사의 어두운 면은 모두 자신이 짊어지고 가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반성적 태도를 고려하여 문재인 정부는 10월 27일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58] 하지만 5·18 민주화 운동 진압 책임 문제 등으로 인해 여론의 평가는 엇갈렸으며, 광주광역시 등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국가장 기간 중 조기 게양을 하지 않기도 했다.

2021년 10월 30일,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국가장 영결식이 거행되었다.[59] 이후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되었고, 유해는 경기도 파주의 통일동산 내에 안장되었다.[60]

2. 6. 퇴임 이후

1993년 2월 24일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였다. 퇴임 이후 비자금 사건 등으로 구속되기도 했으나,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전두환과 함께 특별사면되었다.[49][50]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김대중 대통령은 동서 화합을 명분으로 노태우를 복권시켰고, 이후 그는 국가 원로로서 각종 국가 행사에 초청되었다.

1999년 6월에는 전두환과 함께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로부터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144] 그러나 광주 학살 등에 책임이 있는 인물을 고문으로 추대하는 것에 대한 비판과 함께 기념사업회 회원 일부가 단식 농성을 벌이는 등 논란이 일었다.[145] 그럼에도 집행부 측은 추대 결정을 철회하지 않았고, 노태우는 기념관 건립 때까지 고문직을 유지했다.

2003년 2월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여 전두환과 나란히 앉아 행사를 지켜보았는데, 이것이 그가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인 마지막 공식 석상이었다.

2012년 12월 12일, 비자금 조성과 추징금 미납 등에 불만을 품은 한 남성에 의해 대구에 있는 그의 생가가 방화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방화범은 시너를 뿌리고 불을 질렀으나 큰 피해 없이 진화되었고, 이후 체포되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52]

이후 건강 악화로 주로 자택에 머물렀으며, 외부 활동은 거의 없었다. 비자금 사건과 관련된 추징금은 2013년 9월에 완납되었고[23], 2021년 10월 26일 8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53][54][55][56][57]

2. 6. 1. 비자금 수수 사건과 구속

대통령 퇴임 직후인 1993년 8월 김영삼 정부의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이후 증권가를 중심으로 노태우의 비자금 보유설이 제기되었으나, 그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며 부인했다. 1994년 국회의원 서석재가 4000억 비자금 설을 제기했을 때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반박했다. 1995년에도 서석재 의원 등에 의해 비자금 조성 문제가 계속 제기되었다.

1995년 10월, 노태우는 "문화대혁명 때 수천만 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보면 광주사태 저것은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발언과 함께 중국 공산당의 관용을 언급하며 등소평을 예로 들어 국민적 비난을 받았다.[138][139]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처음에는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이 나지 않았으나 나중에 녹음 테이프를 들어보니 그런 얘기를 했더라면서 어떻게 그런 얘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놀랐다."고 해명하여 더 큰 공분을 샀다.[140] 당시 집권당인 민자당은 해명을 촉구하는 선에서 사태 수습을 시도했으나 역부족이었다.[141] 결국 노태우는 10월 13일, "자신의 발언으로 5.18 피해자 유족에게 상처를 준 점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공식 사과했다.[142]

얼마 지나지 않은 1995년 10월 19일, 민주당 소속 박계동 국회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에 (주)우일양행 명의로 예치된 110억의 예금계좌 조회표 사본을 제시하며 노태우의 비자금 4000억이 차명계좌로 분산 예치되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다음 날인 10월 20일, 신한은행 측의 해명 과정에서 비자금에 대한 구체적인 단서가 드러나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수사가 시작되자 노태우의 전 경호실장 이현우가 검찰에 자진 출두하여 해당 차명계좌의 돈이 노태우가 재임 중 조성해 사용하다 남은 돈이며, 전 청와대 경호실 경리과장 이태진이 관리해왔다고 진술하면서 비자금의 실체가 확인되었다. 결국 노태우는 대국민 담화를 통해 "재임 중 기업체로부터 5000억 가량을 받아 사용하고 1700억 가량이 남았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검찰 수사 과정에서는 기업체로부터 받은 돈은 3400억에서 3500억 가량이며, 198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당시 조성한 자금 중 남은 돈과 당선 축하금 1100억 등을 합쳐 자금을 조성했다고 진술을 바꾸었다. 1995년 10월, 노태우는 눈물을 흘리며 텔레비전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수억 달러의 불법 정치 자금을 비밀리에 모았던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했다.[22]

1995년, 노태우는 포괄적 뇌물죄 및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구속되어 법원 재판에 회부되었다.[2]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그해 11월 16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45][46] 대법원은 노태우에게 대통령 재직 당시 뇌물을 건넨 재벌 총수 8명을 포함한 기업인 40여 명을 뇌물 공여죄로 기소했으나, 항소심에서 이들 기업인들은 전원 집행유예나 무죄 선고로 석방되어 논란이 일었다. 노태우는 옥중에서 항소했고, 항소심에서는 징역 15년에 추징금 2628억을 선고받았다.

이 비자금 사건은 12.12와 5.18에 대한 재수사 여론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문민 정부가 5.18 정신을 계승함을 천명하며 12.12와 5.18에 대한 재수사를 지시했다. 1996년부터 진행된 수사 결과,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12.12 군사 반란 및 5.18 내란 목적 살상, 대통령 비자금 사건 관련 혐의 등으로 노태우에게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688억의 확정 판결을 내렸다.[47][48]

그러나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건의에 따라 김영삼 대통령은 전두환과 함께 노태우를 특별사면했다.[49][50] 노태우는 2013년에 추징금 2629억(2200만달러) 전액을 완납했다.[23] 그는 은퇴 후 조용히 지내며 자신의 과거 범죄에 대해 지속적으로 후회를 표했으며, 아들 노재헌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광주 5·18 국립묘지를 찾아 사죄하기도 했다.[24] 이는 끝까지 반성하지 않고 추징금도 완납하지 않은 전두환과 대조적인 모습으로 평가받는다. 2006년 3월에는 기존에 받았던 국가 훈장 11개가 박탈되었다.[2]

2. 6. 2. 사망

1997년 12월 사면 이후 노태우는 건강이 악화되어 특별한 정치적 행보나 언론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6·29 선언 20주년 기념 만찬(2007년 6월 29일) 참석[146] 외에는 외부 활동이 드물었고,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에도 건강 문제로 불참했다. 2000년대 초반 전립선암 수술을 시작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연희동 자택에서의 와병 생활과 병원 입퇴원을 반복했다. 특히 소뇌 위축증을 앓아 휠체어에 의존할 정도로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148]

2011년 4월에는 기관지에서 침술용 침이 발견되어 논란이 되었다.[149] 한의사협회는 침뜸사 김남수의 제자들이 사용하는 침과 유사성을 제기하며 검찰에 진정서를 냈으나[150], 김남수 측은 관련성을 부인했다. 한의사협회 자체 조사 결과, 노 전 대통령이 치료받은 S병원에서는 침 시술 기록이 없어 무면허 시술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151], 노 전 대통령 측이 시술자를 밝히지 않아 사건은 내사 종결되었다.[152]

한편, 추징금 문제도 지속되었다. 2008년 기준으로 전체 추징금 2,628억 원 중 2,339억 원을 납부하여 231억 원 가량이 미납 상태였다. 노태우 측은 2013년, 동생 노재우와 사돈 신명수 전 신동방그룹 회장이 남은 추징금을 납부하도록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153], 실제로 2013년 9월 3일 신명수 전 회장이 80억[154], 9월 4일 동생 노재우가 나머지 150.39999999999998억을 납부하여[155] 추징금을 완납하였다.

2021년 10월 초,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하여 집중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2021년 10월 26일 오후 1시 46분에 향년 88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156] 공교롭게도 이는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한 날과 같은 날짜였다.

유족들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공개했다.[27][15]

정부는 10월 27일 국무회의를 열어 노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결정하고, 김부겸 국무총리를 장례위원장으로 임명하여 10월 30일까지 5일간 진행했다.[157] 정부는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와 유언에서 밝힌 반성의 자세 등을 고려하여 국가장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28][29][58] 빈소는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되었으며, 사위인 최태원 SK그룹 회장, 노재봉 전 국무총리, 김종인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등 각계 인사들의 조문이 이어졌다.[158]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애도 메시지를 발표했으나, 직접 조문 대신 유영민 비서실장과 이철희 정무수석을 보냈다.[159]

그러나 국가장 결정은 5·18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와 더불어민주당 일부 의원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광주광역시를 포함한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조기 게양이나 분향소 설치를 거부하기도 했으며[30][31], 서울에 마련된 분향소의 조문객 수도 많지 않았다.[32]

COVID-19 팬데믹 상황을 고려하여 간소화된 영결식은 10월 30일 오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발인 후 연희동 자택에서 노제를 지낸 뒤, 서울올림픽공원 평화의 광장에서 거행되었다.[59] 이후 서초구 원지동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 절차를 거쳐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의 검단사에 임시 안치되었다.[160] 노 전 대통령은 과거 군사반란 및 내란죄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법률상 국립묘지 안장 대상에서 제외되었다.[33]

장지는 2021년 11월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통일동산 지구 내 실향민 묘역인 동화경모공원으로 최종 확정되었으며[161], 사망 두 달 후인 2021년 12월 9일 안장되었다.[33][34] 약 한 달 뒤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달리 국가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파주 동화경모공원에 위치한 노태우 묘소

3. 평가

6월 민주 항쟁 당시 시국수습방안(일명 6·29 선언)을 발표하고,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며 전두환 측근에 대한 사법처리를 단행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전두환군사 반란에 가담하고 5공 성립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점, 비자금 문제 등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윤치영은 노태우의 6·29 선언이 국가적 혼란을 수습하고 국민에게 안도감을 주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63] 그는 이 선언을 '항복 선언'이나 '궁여지책'으로 폄하하는 시각에 대해 정치적 선동에 치우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163]

3. 1. 긍정적 평가

노태우(1989년)


6·10 민중 항쟁의 요구를 수용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고, 이를 통해 5년 단임의 대통령제를 기반으로 하는 새 헌법을 마련했다. 이는 권위주의적인 전두환 정권과 차별화를 시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1972년 이후 15년 만에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고, 5공 청문회를 여는 등 제5공화국의 비리를 청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대통령을 소설이나 풍자물에 등장시키는 것을 허용하는 등 기존의 권위주의적 질서를 완화하려는 노력을 보였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재임 중 '북방 정책'을 추진하여 소련,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나서 한러 및 한중 국교 회복의 전기를 마련했다. 1990년대 초에는 남북한이 공동으로 유엔에 가입하고, 남북 단일 탁구팀을 구성하는 등 남북 관계 개선에도 기여했다. 7·7 선언 등은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외교적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3. 2. 부정적 평가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군인 출신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제5공화국의 연장선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특히 5·18 민주화 운동 진압에 책임이 있다는 점과, 5공 청산을 내세우면서도 관련 인사들을 비호하고 비리 청산에 미온적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5공 비리의 핵심 인물인 전두환이 처벌 대신 백담사에 은거한 것은 이러한 비판을 뒷받침한다.

대통령 재임 중 기존의 권위주의적 질서를 일부 해소하려는 모습을 보였으나,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물태우'라며 리더십 부재와 소극적인 태도를 비판하거나 비아냥대기도 했다. 3당 합당을 통해 김영삼, 김종필 등 야당 지도자들을 끌어들여 민주자유당을 창당한 것은 군부 정권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또한 공공부문의 지나친 확대로 대한민국 경제의 잠재성장성을 훼손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164] 육군사관학교장 민병돈은 1989년 졸업식사에서 노태우 정부의 북방 외교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군 내부의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대변하기도 했다.[165]

가장 큰 비판 지점은 재임 중 조성한 거액의 비자금 문제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수천억 원 규모의 비자금 조성 사실이 드러나 국민적 지탄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 노태우는 눈물을 흘리며 대국민 TV 연설을 통해 비자금 조성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했고,[22] 11월에는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었다.[2] 이후 김영삼 정부는 12·12 사태를 쿠데타로 공식 인정했으며, 노태우는 12·12 사태와 5·18 민주화 운동 당시의 반란 및 내란죄 혐의로 추가 기소되었다.

1996년 8월, 소위 "세기의 재판"에서 전두환과 함께 반란, 내란, 부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노태우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이 확정되었다.[47][48] 그러나 1997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두환과 함께 노태우를 특별 사면했다.[49][50]

사면 이후 2006년에는 기존에 받았던 국가 훈장 11개가 박탈되었고,[2] 2013년에는 미납되었던 추징금 2629억 전액을 완납했다.[23] 노태우는 은퇴 후 대부분의 시간을 자택에서 보내며 자신의 과오에 대해 지속적으로 후회를 표했으며, 2019년과 2020년에는 아들 노재헌을 통해 광주를 찾아 5·18 민주묘지에 참배하고 사죄의 뜻을 전했다.[24] 이는 추징금 납부를 거부하고 반성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 전두환과 대비되는 모습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4. 가족 관계


  • 증조부: 노기윤(盧基尹, 1844년~1924년)
  • 조부: 노영수(盧永洙, 1883년~1966년)
  • 조모: 진주 소씨(晉州蘇氏, 1888년~?)
  • 아버지: 노병수(盧秉壽, 1901년~1940년)
  • 어머니: 김태향(金泰香, 1907년~1999년 4월 4일)
  • 큰숙부: 노병도(盧秉道, 1912년~1970년대)
  • 막내숙부: 노병상(盧秉祥, 1926년~1988년)
  • 배우자: 김옥숙(金玉淑, 1935년 9월 8일~)
  • * 딸: 노소영(盧素英, 1961년 3월 31일~) - 아트센터 나비 관장을 역임했다. 1988년 시카고 대학교 유학 중 SK그룹 최종현의 장남인 최태원(崔泰源, 1960년 12월 3일~)과 결혼했다.[62]
  • ** 손녀: 최윤정(崔潤政, 1989년~)
  • ** 손녀: 최민정(崔敏政, 1992년~) - 대한민국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 ** 손자: 최인근(崔仁根, 1994년~)
  • * 아들: 노재헌(盧載憲, 1965년 11월 3일~) - 국제변호사이다.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시도했으나, 1995년 아버지 노태우의 정치자금 은닉 사건이 드러나면서 포기했다.[63]
  • ** 자부: 신정화(申廷花, 1973년~)

손녀: 노지영(盧志永, 1992년~)
손자:노장호(1995년~)
손자: 노민우(盧民優, 2008년~)

  • 동생: 노재우(盧載愚, 1937년 4월 15일~)
  • 제수: 백송주(1942년~)
  • * 조카: 노호준(盧昊埈, 1962년~)
  • * 조카: 노성준(盧星埈, 1964년~)
  • 장인: 김영한(金永漢, 1900년~1980년)
  • 처남: 김복동(金復東) -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아내 김옥숙의 오빠이다.[63]
  • 동서: 금진호(琴震鎬) - 전 상공부 장관이다. 아내 김옥숙의 여동생 남편이다.[63]
  • 처사촌: 박철언(朴哲彦) - 전 정무장관이자 국회의원이다. 아내 김옥숙의 사촌 형제이다.[63]

5. 학력

6. 상훈


  • 무궁화대훈장
  • 말레이시아 왕관 훈장
    말레이시아 왕관 훈장(Order of the Crown of the Realm) 명예 수여자 (1988)[35]
  • 영국 세인트 마이클 및 세인트 조지 훈장
    영국 세인트 마이클 및 세인트 조지 훈장(Order of St Michael and St George) 명예 대십자 훈장
  • 유고슬라비아 대수훈장
    유고슬라비아 대수훈장(Order of the Yugoslav Great Star) (1990)[36][37]
  • 올림픽 훈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올림픽 훈장(Olympic Order)
  • 독일 대훈장
  • 1989년 조지워싱턴 대학교 명예법학 박사
  • 1991년 모스크바 대학교 명예정치학 박사
  • 1992년 아시아협회 올해의 정치인상


=== 서훈 취소된 훈장 ===

2006년 3월 21일, 12·12 군사 반란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 관련 유죄 판결에 따라 아래 훈장들의 서훈이 취소되었다.

훈장 종류훈장명비고
보국훈장삼일장2회 (2006년 3월 21일 서훈 취소)
보국훈장국선장2006년 3월 21일 서훈 취소
보국훈장통일장2006년 3월 21일 서훈 취소
보국훈장천수장2006년 3월 21일 서훈 취소
화랑무공훈장2회 (2006년 3월 21일 서훈 취소)
충무무공훈장2006년 3월 21일 서훈 취소
인헌무공훈장2006년 3월 21일 서훈 취소
을지무공훈장2006년 3월 21일 서훈 취소
근정훈장청조근정훈장2006년 3월 21일 서훈 취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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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뉴스 노태우 발언 파문 https://imnews.imbc.[...] mbc 1995-10-11
[173] 뉴스 盧(노)씨「光州(광주)」발언 각계 규탄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5-10-12
[174] 뉴스 노태우,자신의 광주사태 발언 공식 사과 https://imnews.imbc.[...] mbc
[175] 뉴스 盧泰愚(노태우)씨「光州(광주)」발언 커지는 파문…정치권“술렁” "경솔한 언동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5-10-12
[176] 뉴스 盧泰愚(노태우)씨「광주발언」공식사과 기자회견"5.18피해자가족에 상처줘 미안" 국민회의등 與野(여야) 수용태세 盧泰愚(노태우)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5-10-13
[177] 뉴스 노태우 망언 "광주학살 진범은 유언비어" http://www.viewsnnew[...] 뷰스앤 뉴스
[178] 서적 도대체 청와대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2007
[179] 뉴스 盧大統領(노대통령)"나를「물泰愚(태우)」라 부르는데 매우 좋은 별명이다"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9-06-09
[180] 뉴스 "92년 YS 대선자금 3000억원 건넸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1-08-09
[181] 기타
[182] 뉴스 한겨레신문 1999-04-05
[18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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