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초 다 몬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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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초 다 몬토네는 1368년 이탈리아 몬토네에서 태어난 콘도티에로로, 용병대 지휘관으로서 군사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여러 이탈리아 도시들을 위해 싸웠으며, 특히 1416년 산테지디오 전투에서 승리하여 페루자를 점령하는 등 움브리아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교황령과 대립하며 독립 국가 건설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1424년 라퀼라 공성전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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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초 다 몬토네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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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안드레아 포르테브라초 |
출생 | 1368년 7월 1일, 페루자 |
사망 | 1424년 6월 5일, 라퀼라 |
매장지 | 페루자, 키에사 디 산 프란체스코 알 프라토 |
작위 | |
칭호 | 카푸아 공작 |
통치 | |
카푸아 공작 통치 기간 | 1421년 7월 - 1424년 6월 5일 |
이전 통치자 | 나폴리의 르네 |
다음 통치자 | 세르잔니 카라촐로 |
가문 | |
가문 | 포르테브라초 가문 |
아버지 | 오도 포르테브라초 |
어머니 | 자코마 몬테멜리니 |
배우자 | |
배우자 | 엘리사베타 아르만니, 니콜리나 다 바라노 |
자녀 | |
자녀 | 오도 포르테브라초, 루크레치아 포르테브라초, 카를로타 포르테브라초, 카를로 포르테브라초 (적자) |
종교 | |
종교 | 무신론 |
직업 | |
직업 | 콘도티에로 |
2. 생애
브라초 다 몬토네는 페루자 인근 몬토네에서 태어났으며 귀족 가문 출신이다. 엘리사베타 에르마니와 결혼하여 세 딸을 두었고, 그녀가 사망한 후 니콜리나 바라노와 재혼하여 아들 카를로를 낳았다. 이후 콘도티에로가 된 아들 오도 역시 이 결혼에서 태어났다.
군사 경력은 알베리코 다 바르비아노 휘하에서 시작했다. 무초 안텐돌로 스포르차와 친구가 되었고, 게릴라 전술을 익혔다. 로마냐 지역의 여러 가문을 위해 싸웠으며, 피렌체 공화국과 교황을 위해 일하기도 했다.
1402년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사망 후, 교황을 위해 밀라노 군에 맞서 싸웠다. 볼로냐, 페루자, 아시시를 되찾는 데 기여했지만, 추방당한 페루자 인들은 도시로 돌아가지 못했다. 1406년 페루자를 공격했고, 로카콘트라다 영주권을 받았다.
나폴리의 라디슬라오 왕에게 고용되어 피렌체와 교황에 맞서 싸웠다. 1409년 치타디카스텔로에서 피렌체를 위해 싸웠고, 로마 산탄젤로 성을 포위했다. 그의 군대는 빠른 기동으로 유명했으며, '브라체스카'(Braccesca)라는 새로운 콘도티에로 전술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1414년 대립 교황 요한 23세는 몬토네 봉토와 볼로냐 관리직을 주었다. 무초 안텐돌로 스포르차와 토디에서 싸웠고, 피렌체와 동맹을 맺었다. 1416년 산테지디오 전투에서 승리하여 페루자를 점령하고, 다른 움브리아 도시들의 군주로 추대되었다.
교황 마르티노 5세에게 움브리아 교황 대리인 임명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419년 교황과 협상하여 페루자, 토디, 아시시 등의 군주권을 얻었다.
나폴리 왕위 계승 분쟁에서 조반나 2세와 알폰소를 위해 싸웠다. 라퀼라 공성전 중, 1424년 6월 2일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3일 후 사망했다. 시신은 페루자 산 프란체스코 알 프라토 성당에 안치되었다.[4]
2. 1. 초기 생애와 군사 경력
브라초 다 몬토네는 1368년 7월 1일 페루자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몬토네에서 귀족 오도 포르테브라치(Oddo Fortebracci)와 자코마 몬테멜리니(Giacoma Montemelini) 사이에서 태어났다.[3] 그는 귀도 다시아노(Guido d'Asciano) 용병단에서 시동으로 군사 경력을 시작했다. 가문이 페루자에서 추방되고 몬토네 성을 잃자, 알베리코 다 바르비아노의 "성 조르조 용병단"에 입단하여 무초 안텐돌로 스포르차와 친구가 되었다. 그는 150명의 기사들을 지휘하며 게릴라 전술을 펼쳤는데, 이는 이후 그의 용병단 전술의 특징이 되었다.[1]몬토네로 잠시 돌아온 후, 로마냐 지역의 몬테펠트로 가문과 말라테스타 가문을 위해 싸웠으며, 포솜브로네 성 공성전(1391)에서 다리를 절게 되었다. 1394년 움베르티데의 로카에 잠시 갇혔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1395년 다시 나폴리 왕국에서 바르비아노 가문을 위해 싸웠으며, 1397년 피렌체 공화국에 고용되었다. 1398년에는 페루자와의 전쟁에서 교황을 위해 싸웠다.
2. 2. 세력 확장과 페루자 점령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사망한 1402년, 브라초 다 몬토네는 교황을 위해 밀라노 군대와 싸웠다.[3] 이듬해 교황 보니파시오 9세는 볼로냐, 페루자, 아시시를 되찾았지만, 추방당한 페루자 사람들은 도시로 돌아갈 수 없었다.[3] 브라초는 다시 알베리코 다 바르비아노의 지원을 받아 파엔차와 교황령에 맞서 싸웠다.[3] 그의 동료들이 지휘관을 죽이려 한다는 혐의로 그를 알베리코에게 고발하자, 브라초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3] 1406년 그는 다른 망명자들과 함께 페루자와 싸웠고, 이듬해 이들은 브라초의 새로운 부대의 대부분을 구성하여 움브리아 시골을 황폐화시켰다.[3] 1407년 5월 로카콘트라다 시민들은 페르모 후작과 싸우는 것을 지원하는 대가로 그에게 마을의 영주권을 주었다.[3]이후 브라초는 피렌체와 교황과 전쟁 중이던 나폴리의 라디슬라오 왕의 군대에 들어갔다. 당시 그는 1,200명의 기병과 1,000명의 보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폴리뇨의 트린치 영토를 약탈했지만, 페루자가 라디슬라오의 종주권을 받아들이자 브라초는 그에게 반대하여 안코나로 이동하여 예시를 점령했다.
1409년 브라초는 치타디카스텔로에서 피렌체인을 위해 싸운 다음, 로마로 이동하여 산탄젤로 성을 포위하고 겨울을 위해 마르케로 돌아갔다.[3] 1410년 로마는 루카스와 나폴리의 라디슬라오 군대와 브라초 자신의 용병 부대를 포함한 여러 용병단에 의해 공격받았다.[3] 나폴리 군대가 도시에서 후퇴했을 때, 그는 그들을 공격하여 소라에서 격파했으며, 그곳을 약탈하기도 했다.[3] 같은 해 그는 피렌체와 스폴레토의 용병으로 동시에 활동했지만, 이는 그가 혐오스러운 페루자를 포위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3] 그의 군대의 빠른 이동은 속담이 되었고, 콘도티에리의 새로운 전술 학파인 ''브라체스카''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3]
이듬해 대립 교황 요한 23세는 그에게 몬토네의 봉토와 볼로냐의 총독직을 할당했다.[3] 브라초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로마냐 도시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갈취했다.[3] 1414년 그는 나폴리 왕에 의해 고용된 스포르차와 토디에서 싸웠다.[3] 6월에는 피렌체에 입성하여 10년 동안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3]
다음 해 8월 라디슬라오가 사망했고, 브라초는 180000두카트를 받고 볼로냐를 해방시켰다.[3] 그는 움브리아의 대부분을 침략하여 정복했는데, 그의 목표는 다시 사랑하는 페루자였다.[3] 도시는 카를로 말라테스타에게 넘겨졌다.[3] 산테지디오 전투 (1416년 7월 12일, 나중에 파올로 우첼로의 유명한 프레스코화로 묘사됨)에서 ''브라체스키''가 승리했고, 페루자는 마침내 브라초 다 몬토네에게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3] 토디, 나르니, 오르비에토, 테르니와 같은 다른 움브리아 도시들은 그를 영주로 지명했다.[3]
2. 3. 교황과의 갈등과 독립 국가 건설 시도
교황 마르티노 5세는 브라초 다 몬토네에게 움브리아의 교황 대리인으로 임명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했다. 대신 교황은 북쪽에서 구이단토니오 다 몬테펠트로가, 남쪽에서는 스포르차가 이끄는 군대를 보내 브라초를 견제했다. 그러나 브라초는 스폴레토에서 이들을 격퇴했다.[3] 1419년 3월 14일, 브라초는 피렌체에서 교황을 만나 안톤갈레아초 벤티볼리오를 볼로냐에서 몰아내는 대가로 페루자, 토디, 아시시, 스펠로, 이에시 등의 군주권을 인정받았다.[3]2. 4. 나폴리 왕위 계승 분쟁과 최후
시간이 흘러 교황은 루이 3세 당주를 왕위 후계자로 임명한 나폴리의 여왕 조반나 2세를 파문하였다.[4] 조반나는 아라곤의 알폰소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브라초 다 몬토네를 고용하였다. 다시 한번 브라초는 앙주 군의 사령관이던 스포르차를 마주하게 되었다.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브라초의 군대는 모두 아브루초를 통과하였다. 조반나는 그에게 테라모 군주권을 수여했으며, 그 후 바로 브라초는 13달에 걸친 라퀼라 공성전에 돌입한다. 한편 1424년 2월 3일 브라초는 나폴리 왕국의 ''총사령관''(Gran Conestabile)으로 임명되었고 카푸아와 포자의 영지를 받았다.[4] 그러나 나폴리 여왕이 아라곤을 배신하고 루이 휘하의 앙주 편으로 넘어가자, 브라초는 알폰소에게 충성을 하기로 남는다.두 왕위 주장자 사이의 최후 전투는 오늘날 바차노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 인근인 여전히 공성이 벌어지던 라퀼라 성벽 아래에서 벌어졌다.
6월 2일 전투는 당대 최고의 콘도티에로들 사이에 벌어지던 것이었다. 브라초는 목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으며, 포로가 되어 라퀼라로 이송되어 3일 뒤인 1424년 6월 5일 사망한다.[4] 교황은 그를 비성역 토지에 매장했고, 그의 시신은 1432년까지 그곳에 있다가 그의 조카 니콜로 포르테브라초[4] 가 페루자의 산 프란체스코 알 프라토 성당으로 옮겼다.
3. 가족 관계
브라초 다 몬토네는 엘리사베타 에르마니(Elisabetta Ermanni)와 결혼하여 세 딸을 두었고, 1419년 엘리사베타가 사망한 후 니콜리나 바라노(Niccolina Varano)와 재혼하여 1421년에 아들 카를로(Carlo)를 낳았다.[3] 그는 또한 콘도티에로가 된 아들 오도(Oddo)를 포함하여 여러 사생아를 두었다.[3]
그의 딸들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 카스토라(Castora): 도메니코 마르텔리(Domenico Martelli)와 결혼했다.[2]
- 카밀라(Camilla, 인나모라타라고도 알려짐): 프란체스코 피치니노(Francesco Piccinino)와 결혼했다.[3]
4. 평가
브라초 다 몬토네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정치적 수완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빠른 기동과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여 "브라체스카(Braccesca)"라는 새로운 콘도티에로 전술파를 창시했다.[3] 그는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페루자를 중심으로 한 독립 국가를 건설하려 했으나, 그의 야망은 결국 라퀼라 전쟁에서의 패배와 죽음으로 실패로 끝났다.[4]
참조
[1]
웹사이트
Rocca di Umbertide
https://www.umbriato[...]
Umbria tourism
2020-03-13
[2]
서적
L. Tettoni e F. Saladini Teatro araldico, ovvero raccolta generale delle armi ed insegne gentilizie delle casate ... che fioriscono in tutta. l'Italia: VII
https://books.google[...]
C. Wilmant
1847
[3]
문서
일부 사료에 따르면, 브라초는 페루자에서 태어났고 이후 몬토네로 이주했다고 한다.
[4]
문서
우연스럽게도, 니콜로는 전투에서 그의 개인적 성과를 위해 그의 위치를 떠남으로서 브라초의 사망 원인으로 지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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