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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3세 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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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3세 당주는 루이 2세 당주와 비올란트 다라곤의 아들로, 아라곤 왕위 및 나폴리 왕위 계승을 주장했다. 1410년 아라곤 왕위 계승 분쟁에서 카스페 타협으로 페르난도 1세가 왕위에 오르자, 루이는 4왕국(시칠리아, 예루살렘, 아라곤, 마요르카)의 왕위를 주장했다. 이후 나폴리 여왕 조반나 2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1434년 말라리아로 사망하여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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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3세 당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이 3세의 미니어처
루이 3세의 미니어처, c. 1450
칭호앙주 공작
통치
앙주 공작1417년 – 1434년
이전루이 2세
계승르네
생애
출생일1403년 9월 25일
출생지앙제
사망일1434년 11월 12일
사망지코센차
결혼
배우자마르게리타・디・사보이아
가문
가문발루아=앙주 가문
아버지루이 2세
어머니욜란드・다라곤

2. 아라곤 왕위 계승권 주장

루이는 루이 2세 당주비올란트 다라곤의 장남이었다.

1410년, 아라곤 연합왕국의 마르틴 1세 국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가 공석이 되었다. 루이의 어머니 비올란트는 마르틴 1세의 형이자 선왕이었던 추안 1세의 유일하게 생존한 딸이었으므로, 아들인 어린 루이를 내세워 아라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아라곤의 왕위 계승 원칙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여성보다는 남성 친척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과거 비올란트의 아버지가 아들 없이 사망했을 때, 딸인 비올란트가 아닌 동생 마르틴 1세가 왕위를 계승한 선례에서도 확인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비올란트와 루이의 주장은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결국 2년간의 왕위 공백기 이후, 1412년 카스페 타협을 통해 마르틴 1세의 조카인 페르난도 1세가 새로운 아라곤의 군주로 선출되었다.

비록 아라곤 왕위 계승에는 실패했지만, 루이와 비올란트는 자신들을 아라곤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로 여겼고, 관련 칭호를 계속 사용하였다.[2][1] 또한 이 과정에서 몽펠리에와 루시용 등 일부 아라곤 영토를 확보하기도 했다.

2. 1. 카스페 타협

어머니 욜란다가 아라곤 왕 마르틴 1세의 조카였기 때문에, 마르틴 1세의 죽음으로 아라곤 왕가가 단절되었을 때 왕위 계승 후보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카스페의 타협 결과, 카스티야 왕가(트라스타마라 왕조)의 페르난도 1세가 최종적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2. 2. 4왕국 왕위 주장

루이는 루이 2세 당주비올란트 다라곤 사이에 태어난 장자이자 계승자였다.

1410년, 비올란트의 삼촌이자 아라곤 연합왕국의 왕이었던 마르틴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왕위가 공석이 되었다. 비올란트는 마르틴 1세의 형이자 선왕이었던 추안 1세의 유일하게 생존한 자녀였으므로, 그녀는 자신의 아들인 어린 루이를 아라곤의 왕으로 내세우며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아라곤 왕국과 바르셀로나 백작령의 왕위 계승법은 명확하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여계보다는 남계 후손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실제로 비올란트의 아버지인 추안 1세가 아들 없이 사망했을 때, 딸인 비올란트가 아닌 동생 마르틴 1세가 왕위를 계승한 선례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올란트와 루이의 왕위 주장은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결국 마르틴 1세 사망 후 2년간의 공위 시대를 거쳐, 1412년 아라곤의 유력자들은 카스페 타협을 통해 마르틴 1세의 조카인 카스티야의 페르난도를 새로운 아라곤의 군주로 선출했다. 페르난도는 후안 1세 데 카스티야와 레오노르 데 아라곤의 차남이었다. 비록 아라곤 왕위 계승에는 실패했지만, 루이와 비올란트 측은 몽펠리에와 루시용 등 일부 아라곤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다.

비올란트와 그녀의 아들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아라곤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라고 여겼고, '4왕국의 왕과 왕비'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4왕국이란 시칠리아(나폴리 포함), 예루살렘, 아라곤, 마요르카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칭호들 중에서 루이가 실제로 통치력을 행사한 곳은 시칠리아 본토의 일부였으며, 그마저도 잠시뿐이었다. 또한 루이는 할아버지인 루이 1세가 1383년에 사들인 라틴 제국 황제 칭호에 대한 권리도 가지고 있었으나, 정작 본인이 이 칭호를 사용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2][1]

3. 나폴리 왕위 계승 분쟁

교황 마르티노 5세는 1419년 12월 4일 루이 3세 당주를 나폴리 왕으로 선포하였다.[2] 이는 당시 후계자가 없던 나폴리의 여왕 조반나 2세가 이미 아라곤의 알폰소 5세를 후계자로 입양한 상태였기에, 나폴리 왕위를 둘러싼 분쟁의 시작이 되었다.

루이 3세는 교황의 지명을 바탕으로 나폴리 왕위를 주장하며 알폰소 5세와 경쟁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반나 2세는 알폰소 5세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입양을 파기하고 루이 3세를 새로운 후계자로 지명하며 칼라브리아 공작 작위를 주었다. 그러나 루이 3세는 1434년 조반나 2세보다 먼저 사망하여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하였다.[2] 그의 나폴리 왕위에 대한 권리는 동생 르네 당주에게 계승되었다.

3. 1. 나폴리 포위전

1419년 12월 4일, 교황 마르티노 5세루이시칠리아(나폴리)의 군주로 선포하였다. 이는 자식이 없던 나폴리의 조반나 2세 여왕이 알폰소 5세 데 아라곤를 후계자로 입양한 상황에서 내려진 결정이었다. 1420년 루이는 캄파니아에 상륙하여 나폴리를 포위했지만, 아라곤 함대가 도착하면서 퇴각해야 했다. 1421년 알폰소가 나폴리에 입성하자, 전쟁 비용에 부담을 느낀 교황은 루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그러나 알폰소가 조반나 여왕의 총신(寵臣)이자 수상인 잔니 카라촐로를 체포하면서 여왕과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에 조반나 여왕은 아브레사로 가서 루이와 접촉하였고, 알폰소의 입양을 파기하고 루이를 새로운 후계자로 입양하였다. 루이는 칼라브리아 공작 작위를 받았다. 이후 알폰소가 아라곤으로 돌아가면서 나폴리 왕국에는 잠시 평화가 찾아왔다. 루이는 칼라브리아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물러나 마르게리타 디 사보이아와 함께 살았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루이는 1434년 코센차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하면서, 끝내 나폴리의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이듬해 조반나 여왕도 사망하였고, 유언에 따라 루이의 동생 르네 당주가 나폴리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3. 2. 조반나 2세의 후계자

교황 마르티노 5세는 1419년 12월 4일 루이 3세를 시칠리아(나폴리)의 군주로 선포하였다. 이는 후계자가 없는 나이든 조반나 2세 여왕의 의지와는 반대되는 결정이었는데, 그녀는 이미 알폰소 5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입양한 상태였다.

1420년 루이 3세는 캄파니아에 상륙하여 나폴리를 포위하였으나, 아라곤 함대가 도착하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421년 알폰소 5세가 나폴리에 입성하였고, 루이 3세는 전쟁 비용에 지친 교황의 지지마저 잃게 되었다. 그러나 알폰소 5세와 조반나 2세의 관계는 알폰소가 여왕의 총애를 받던 총리 잔니 카라촐로를 체포하면서 급격히 악화되었다.

이에 조반나 2세는 아베르사로 거처를 옮기고 루이 3세와 접촉하였다. 루이 3세는 알폰소 5세를 대신하여 조반나 2세의 양자이자 후계자로 선정되었고, 칼라브리아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알폰소 5세가 아라곤으로 돌아가자 나폴리 왕국은 잠시 평화를 되찾았다. 루이 3세는 자신의 영지인 칼라브리아로 가서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의 딸인 아내 마르게리타 디 사보이아와 함께 살았다. 그들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하지만 루이 3세는 1434년 코센차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하여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하였다. 다음 해 조반나 2세가 사망하자, 루이 3세의 동생인 르네 당주가 그녀의 뒤를 이어 나폴리 왕으로 지명되었다.

4. 칼라브리아 통치와 사망

교황 마르티노 5세는 1419년 12월 4일 루이 3세를 시칠리아(나폴리)의 군주로 선포하였다. 이는 후계자가 없던 나폴리의 조반나 2세 여왕이 알폰소 5세를 후계자로 입양한 것과 대립되는 조치였다. 1420년 루이 3세는 캄파니아에 상륙하여 나폴리를 포위했지만, 아라곤 함대가 도착하자 퇴각해야 했다.

1421년 알폰소 5세가 나폴리에 입성했고, 전쟁 비용에 부담을 느낀 교황은 루이 3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그러나 알폰소 5세가 조반나 2세 여왕의 총애를 받던 잔니 카라촐로를 체포하면서 여왕과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여왕은 아베르사로 거처를 옮겨 루이 3세와 접촉하였고, 알폰소 5세 대신 루이 3세를 새로운 후계자로 입양하며 칼라브리아 공작 작위를 수여했다.

알폰소 5세가 아라곤으로 돌아가면서 나폴리 왕국은 일시적인 평화를 맞았다. 루이 3세는 자신의 영지인 칼라브리아로 이동하여,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의 딸인 아내 마르게리타 디 사보이아와 함께 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하지만 루이 3세는 1434년 코센차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하여 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이듬해인 1435년 조반나 2세 여왕도 사망하자, 루이 3세의 동생인 르네가 여왕의 유언에 따라 나폴리의 왕으로 지명되었다.

참조

[1] 서적 Le Roi René Fayard 2008
[2] 서적 Le Roi René Fayard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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