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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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냐는 이탈리아 북동부에 위치한 역사적 지역으로, "로마인들이 거주하는 땅"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다. 아펜니노 산맥, 아드리아해, 레노 강, 실라로 강 등으로 경계가 구분되며, 체세나, 파엔차, 포를리, 이몰라, 라벤나, 리미니 등의 도시를 포함한다.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며, 움브리족, 갈리아족 등 다양한 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 공화정과 제국 시대를 거쳐 동고트 왕국, 라벤나 관구, 교황령 시대를 겪었으며,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거쳐 이탈리아 통일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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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도는 1859년부터 2014년까지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주에 존속했던 도이며, 포 평원에서 아펜니노 산맥까지 뻗어 있었고, 농업, 축산업 외 기계, 자동차, 에너지 산업이 발달했으며 두카티와 람보르기니 본사가 위치한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였다. - 에밀리아로마냐주의 역사 - 트레비아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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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냐 | |
---|---|
지리 | |
일반 정보 | |
국가 | 이탈리아 |
위치 | 이탈리아 북동부 |
언어 | 로마냐어, 이탈리아어 |
역사 | |
기원 | 고대 로마 시대 |
주요 시기 | 라벤나 총독령 시대, 교황령 시대 |
행정 구역 | |
주요 도시 | 라벤나, 포를리, 체세나, 리미니 |
현재 소속 주 | 에밀리아로마냐 주 |
문화 | |
음식 | 파스타, 피아디나, 모르타델라 |
축제 | 지역별 다양한 축제 존재 |
기타 | |
관련 항목 | 로마냐 요리 |
2. 어원
로마냐(Romagna)라는 명칭은 라틴어 로마니아(Romania)에서 온 것으로, 본래 "로마인들이 거주하는 땅"을 총칭하는 명칭이었으며, 5세기 라틴어 문서에서 처음 등장한다. 나중에는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는 영토"라는 좀 더 상세한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이곳의 시민들은 스스로를 로마인(라틴어로는 로마니(Romani), 그리스어로는 로마이오이(Ῥωμαῖοι))이라 칭했다.[1] 이에 따라 로마니아라는 용어는 랑고바르드족의 지배를 받는 북부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들을 뜻하는 랑고바르디아(Langobardia) 또는 롬바르디아와 대조되는 라벤나 관구의 관할에 속한 지역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1] 로마니아는 이후 속라틴어로 '작은 로마니아'를 뜻하는 로만디올라(Romandìola)가 됐고, 현대에는 로마냐가 되었다.[1]
로마냐는 전통적으로 남서쪽은 아펜니노 산맥, 동쪽은 아드리아해, 북쪽과 서쪽은 레노 강과 실라로 강으로 경계가 정해진다.[1] 주요 도시로는 체세나, 파엔차, 포를리, 이몰라, 라벤나, 리미니가 있으며, 독립 국가인 산마리노 공화국은 일부에서 이 지역의 일부로 간주되기도 한다.
3. 지리
3. 1. 몬테펠트로 지역과의 관계
콘카 강이 형성한 계곡은 역사적으로 로마냐와 마르케 지역 사이의 완충 지역을 형성해 왔다.[1]
로마냐 문화는 에밀리아로마냐, 토스카나, 마르케의 경계에 있는 몬테펠트로 역사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2009년 8월 15일, 페사로 우르비노 주의 7개 지방 자치체(카스텔델치, 마이올로, 노바펠트리아, 펜나빌리, 산 레오, 산타가타 펠트리아, 타라멜로)가 리미니 주로 이관되었다.[2] 2021년 6월 17일에는 몬테코피올로와 사소펠트리오가 이관되었다.[3]
4. 역사
로마냐 지역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몬테포졸로를 비롯한 여러 유적들은 이 지역이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움브리아어라는 단절된 이탈리아어파 계열 언어를 구사한 움브리족들이 이 지역에 처음으로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에트루리아인 역시 로마냐 일부 지역에 거주했다.
기원전 5세기에 린고네스족, 세노니족, 보이족 등 여러 갈리아 부족들이 이탈리아로 남하했고, 기원전 390년에 로마를 약탈했다. 세노니족은 움브리족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로마냐에 정착했다. 이탈리아 언어학자 자코모 데보토에 의하면, 로마뇰로 억양에는 여전히 상당한 켈트어 언어층위가 존재한다고 한다.
기원전 295년, 로마 공화국은 센티눔 전투에서 움브리아인, 세노네족, 삼니움인, 에트루리아인 연합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268년 로마냐 남부에 아리미눔(리미니) 식민지가 건설되었고, 로마에서 아리미눔까지 이어지는 플라미니아 가도가 건설되어 승리를 굳혔다.[4][5] 기원전 225년 텔라몬 전투에서 로마인들은 켈트족 부족을 물리쳤고, 무티나(현재의 모데나)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로마 속주인 갈리아 키살피나에 대한 로마의 패권이 확립되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친카르타고파인 린고네스족과 세노니족이 쫓겨났다. 기원전 187년 아리미눔에서 피아켄티아(피아첸차)까지 아이밀리아 가도가 완공되어 이 지역에 대한 로마의 지배가 공고해졌다.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 이후에 제정된 율리아 법은 포강 남쪽의 모든 무니키피아에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기원전 82년 술라의 내전 당시, 대부분의 식민지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지지했다. 포룸 리비이와 카이세나(체세나)는 초토화되었고, 이 지역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승리한 군대에 의해 약탈당했다.
제1차 삼두정치는 악명 높은 루비콘강을 따라 로마 공화국을 분할했다. 오늘날 로마냐에 있는 대부분의 식민지는 강 남쪽에 있는 아리미눔을 제외하고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를 받았다. 기원전 49년, 라벤나에 머물던 카이사르는 13군단을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 카이사르의 내전을 일으켰다.
악티움 해전에서 완승을 거둔 아우구스투스는 1세기 간 지속된 팍스 로마나의 막을 열었다. 갈리아 키살피나 전역이 로마 속주 이탈리아로 통합되었다. 기원전 7년쯤, 아우구스투스는 이탈리아 전역을 11개의 레기오네스(regiones)로 나누었다.
3세기가 시작될쯤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을 4개의 현으로 다시 나누고, 그 나뉜 현을 관구로, 그 관구를 속주로 나누었다.
늡과 습지로 둘러싸여 있던 라벤나는 서서히 번창하고 중요성이 증대했으며, 로마 함대가 주둔했다. 아드리아해의 중요 항구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330년에 로마 제국의 수도가 라벤나에 주둔하던 함대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고, 따라서 아드리아해의 해안 방어는 약해졌다.
5세기가 시작되면서 게르만족 대이동이 더욱 증가했다. 402년에 서로마 제국의 황제 호노리우스는 수도를 메디올라눔에서 라벤나로 옮겼는데, 주된 이유는 그곳이 방어에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476년에 오도아케르는 라벤나에서 로물루스를 폐위시켰는데, 이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의미했다.[1]
제논 황제의 자극을 받은 테오도리쿠스 마그누스는 동고트족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는 493년 라벤나에 입성하여 오도아케르를 죽이고, 로마인과 고트족의 이중 왕국을 세웠다.[1]
535년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고트 전쟁을 시작했다. 20년간의 전쟁으로 동고트족은 결국 복속되었다. 인구가 줄어들고 황폐해진 이탈리아 반도는 라벤나 관구장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제국의 영향력은 10년이 조금 넘게밖에 유지되지 못했다. 727년에 랑고바르드족의 왕 리우트프란트는 비잔티움을 상대로 전쟁을 재개하여 로마냐 대부분을 차지하고 라벤나를 포위했다. 이 영토들은 730년에 비잔티움에게 반환되었다. 결국에는 다른 랑고바르드족 왕 아이스툴프가 다시 한번 로마냐를 정복함으로써 751년에 라벤나 관구는 막을 내렸다.[1]
1278년 독일왕 루돌프 1세는 로마냐를 교황령에 공식적으로 양도했다.[15] 그러나 오랫동안 교황령에 명목상 속해 있었을 뿐, 교황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 않고 독립적인 자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아비뇽 유수(1309~1377)와 서방교회 대분열(1378~1417) 사건이 종료된 후 교황권이 안정되며 강해진 15세기 말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힘이 강력해진 교황들은 점차 이 분열된 지역에 자신들의 권위를 재주장했다.
1500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아인 체사레 보르자는 스스로 단명한 로마냐 공국을 만들어냈으나, 그의 영지는 교황이 사망한 뒤 교황령으로 재흡수되었다.
샤토캉브레지 조약은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의 파르네세가, 페라라와 모데나 레조 공국의 에스테가, 교황령 사이로 나뉘었다.
이 상황은 1796년 프랑스의 침략이 일어날 때까지 지속됐다. 나폴레옹 통치 시기의 로마냐는 피노(Pino, 라벤나)와 루비코네(Rubicone, 포를리) 주가 만들어지면서 최초로 고유의 존재로서 인정받았다. 1815년 빈 조약으로 전쟁 이전 상황으로 복귀되었을 때, 비밀리에 반교황적 단체들이 조직되었고, 1820년, 1830–31년과 1848년에 폭동이 발생했다.
이 저항은 마치니의 프로파간다와 주세페 가리발디의 직접 행동에서 유발되었다. 펠리체 오르시니, 피에로 마론첼리, 아우렐리오 사피 같은 이들은 이탈리아 리소르멘토의 주역들이었다.
1860년 이탈리아 통일이 이루어진 후, 로마냐는 위에 언급했었던 유명 인물들의 위험하고 사회를 흔드는 성향들을 두려워하던 사보이아 군주들에게서 별개 지위를 보상받지 못했다.[1]
20세기 초에 로마냐의 자치권은 알도 스팔리치, 주세페 푸시니, 에밀리오 루수 외 다른 이들이 옹호했다.[1]
4. 1. 선사 시대
몬테포졸로를 비롯한 로마냐 지역의 여러 유적들은 이 지역이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했음을 보여준다.4. 2. 움브리족과 갈리아족
움브리아어라는 단절된 이탈리아어파 계열 언어를 구사한 움브리족들이 이 지역에 처음으로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에트루리아인 역시 로마냐 일부 지역에 거주했다.기원전 5세기에 린고네스족, 세노니족, 보이족 등 여러 갈리아 부족들이 이탈리아로 남하했고, 기원전 390년에 로마를 약탈했다. 세노니족은 움브리족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로마냐에 정착했다. 세노니족은 그들의 수도 세나 갈리카(Sena Gallica, 세니갈리아)가 있는 안코나 쪽으로 더 남하했다. 세노니족들이 과거 거주한 땅은 로마인들에게 아게르 갈리쿠스(ager Gallicus, 갈리아 평원)이라고 알려졌다.
이탈리아 언어학자 자코모 데보토에 의하면, 로마뇰로 억양에는 여전히 상당한 켈트어 언어층위가 존재한다고 한다.
4. 3. 로마 공화정
기원전 295년, 로마 공화국은 센티눔 전투에서 움브리아인, 세노네족, 삼니움인, 에트루리아인 연합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기원전 268년 로마냐 남부에 아리미눔(리미니) 식민지가 건설되었고, 로마에서 아리미눔까지 이어지는 플라미니아 가도가 건설되어 승리를 굳혔다.[4][5] 기원전 225년 텔라몬 전투에서 로마인들은 켈트족 부족을 물리쳤고, 무티나(현재의 모데나)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로마 속주인 갈리아 키살피나에 대한 로마의 패권이 확립되었다.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친카르타고파인 린고네스족과 세노니족이 쫓겨났다. 기원전 187년 아리미눔에서 피아켄티아(피아첸차)까지 아이밀리아 가도가 완공되어 이 지역에 대한 로마의 지배가 공고해졌다. 그 노선을 따라 일련의 식민지가 건설되었는데, 로마냐에는 포룸 리비이(포를리), 포룸 코르넬리이(이몰라), 포룸 포필리이(포를림포폴리)가 포함되었다. 기원전 90년, 동맹시 전쟁 이후에 제정된 율리아 법은 포강 남쪽의 모든 무니키피아에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다.
기원전 82년 술라의 내전 당시, 대부분의 식민지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지지했다. 포룸 리비이와 카이세나(체세나)는 초토화되었고, 이 지역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승리한 군대에 의해 약탈당했다.
제1차 삼두정치는 악명 높은 루비콘강을 따라 로마 공화국을 분할했다. 오늘날 로마냐에 있는 대부분의 식민지는 강 남쪽에 있는 아리미눔을 제외하고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통치를 받았다. 기원전 49년, 라벤나에 머물던 카이사르는 13군단을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 카이사르의 내전을 일으켰다.
4. 4. 로마 제국
악티움 해전에서 완승을 거둔 아우구스투스는 1세기 간 지속된 팍스 로마나의 막을 열었다. 갈리아 키살피나 전역이 로마 속주 이탈리아로 통합되었다. 기원전 7년쯤, 아우구스투스는 이탈리아 전역을 11개의 레기오네스(regiones)로 나누었다. 11개의 레기오네스에서 로마냐 대부분 (리미니 제외)은 8번째 지역인 아이밀리아(Aemilia)였다.3세기가 시작될쯤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을 4개의 현으로 다시 나누고, 그 나뉜 현을 관구로, 그 관구를 속주로 나누었다. 새로운 체계에서 이탈리아는 단지 제국의 속주로 격하되었다. 오늘날 로마냐는 플라미니아와 피케눔(Flaminia et Picenum) 속주로 편성되었다.
늡과 습지로 둘러싸여 있던 라벤나는 서서히 번창하고 중요성이 증대했으며, 로마 함대가 주둔했다. 아드리아해의 중요 항구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330년에 로마 제국의 수도가 라벤나에 주둔하던 함대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고, 따라서 아드리아해의 해안 방어는 약해졌다.
4. 5. 게르만족 이주와 라벤나 관구
5세기가 시작되면서 게르만족 대이동이 더욱 증가했다. 402년에 서로마 제국의 황제 호노리우스는 수도를 메디올라눔에서 라벤나로 옮겼는데, 주된 이유는 그곳이 방어에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8년 뒤, 서고트족의 알라리쿠스 1세가 로마를 약탈했다. 476년에 오도아케르는 라벤나에서 로물루스를 폐위시켰는데, 이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의미했다.[1]제논 황제의 자극을 받은 테오도리쿠스 마그누스는 동고트족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는 493년 라벤나에 입성하여 오도아케르를 죽이고, 로마인과 고트족의 이중 왕국을 세웠다. 동고트족의 지배 아래에서 이탈리아는 부분적으로 과거의 번영을 되찾았다.[1]
535년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고트 전쟁을 시작했다. 20년간의 전쟁으로 동고트족은 결국 복속되었다. 인구가 줄어들고 황폐해진 이탈리아 반도는 라벤나 관구장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제국의 영향력은 10년이 조금 넘게밖에 유지되지 못했다. 568년에 새로운 게르만 부족인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에 들어와 파비아를 수도로 삼았다. 동로마 제국은 여러 해안 도시들과 더불어 페루자를 통과하는 좁은 영토로 연결된 라벤나와 로마 주변 지역만을 간신히 지켜낼 수 있었다. 제국의 국경은 볼로냐로 후퇴했다.[1]
727년에 랑고바르드족의 왕 리우트프란트는 비잔티움을 상대로 전쟁을 재개하여 로마냐 대부분을 차지하고 라벤나를 포위했다. 이 영토들은 730년에 비잔티움에게 반환되었다. 737년에 리우트프란트는 다시 한번 로마냐를 침입하여 라벤나를 점령했다. 라벤나 관구장 에우티키오스는 베네치아인들의 도움으로 740년에 로마냐를 탈환했다. 결국에는 다른 랑고바르드족 왕 아이스툴프가 다시 한번 로마냐를 정복함으로써 751년에 라벤나 관구는 막을 내렸다.[1][1]
4. 6. 교황령 시기
1278년 독일왕 루돌프 1세는 로마냐를 교황령에 공식적으로 양도했다.[15] 그러나 오랫동안 교황령에 명목상 속해 있었을 뿐, 교황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지 않고 독립적인 자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지역은 포를리의 오르델라피가나 리미니의 말라테스타가 같은 여러 지방 영주들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중 다수는 친교황 세력인 구엘프에 대적하는 기벨린에 속했다.이런 상황은 아비뇽 유수(1309~1377)와 서방교회 대분열(1378~1417) 사건이 종료된 후 교황권이 안정되며 강해진 15세기 말부터 변화하기 시작했는데, 힘이 강력해진 교황들은 점차 이 분열된 지역에 자신들의 권위를 재주장했다. 로마냐의 일부는 베네치아를 포함한 다른 국가들이 차지했었는데, 그 중 대부분은 포를리와 체르비아, 요새 도시로 유명한 테라델솔레를 가지고 있던 피렌체 공화국 소유였다. 피렌체령 로마냐는 1920년대까지 토스카나에 속했었다.
1500년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아인 체사레 보르자는 스스로 단명한 로마냐 공국을 만들어냈으나, 그의 영지는 교황이 사망한 뒤 교황령으로 재흡수되었다.
샤토캉브레지 조약은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의 파르네세가, 페라라와 모데나 레조 공국의 에스테가, 교황령 사이로 나뉘었다. 페라라 공국은 신성 로마 제국령인 모데나와 레조의 영지를 유지하고 있는 분가가 있는 가운데, 1597년에 에스테가의 본가가 단절되었기에 교황령에 합병되었다.
이 상황은 비극적인 사건들 (루고 학살, 약탈, 과징세, 체세나 대학교 파괴)을 가져왔지만 사회적, 정치적 분야에 혁명적 사상을 불러오기도 한 1796년 프랑스의 침략이 일어날 때까지 지속됐다. 나폴레옹 통치 시기의 로마냐는 피노(Pino, 라벤나)와 루비코네(Rubicone, 포를리) 주가 만들어지면서 최초로 고유의 존재로서 인정받았다. 1815년 빈 조약으로 전쟁 이전 상황으로 복귀되었을 때, 비밀리에 반교황적 단체들이 조직되었고, 1820년, 1830–31년과 1848년에 폭동이 발생했다.
이 저항은 마치니의 프로파간다와 주세페 가리발디의 직접 행동에서 유발되었다. 펠리체 오르시니, 피에로 마론첼리, 아우렐리오 사피 같은 이들은 이탈리아 리소르멘토의 주역들이었다.
4. 7. 이탈리아 통일 이후
1860년 이탈리아 통일이 이루어진 후, 로마냐는 위에 언급했었던 유명 인물들의 위험하고 사회를 흔드는 성향들을 두려워하던 사보이아 군주들에게서 별개 지위를 보상받지 못했다.[1]20세기 초에 로마냐의 자치권은 알도 스팔리치, 주세페 푸시니, 에밀리오 루수 외 다른 이들이 옹호했다.[1] 1990년대에는 에밀리아로마냐주에서 분리하자는 운동이 생기기도 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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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lle rive del Conca, confine che unis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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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gge 28 maggio 2021, n.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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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zapegul: il folletto romagnolo che ha fatto dannare i nostri no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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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da dei morti, preparazione e curiosità sulla dolce "piadina" romagn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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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zapegul, il folletto romagno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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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zapègul, il 'folletto di Romagna' al Centro Merc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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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Mazapég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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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e addio: all'Emilia Romagna sette Comuni dell'Alta Valmarecch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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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S Quotidiani S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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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메디치 가 이야기
생각의 나무
2002-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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