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티아 크리스피나
1. 개요
브루티아 크리스피나는 2세기 로마 제국의 황후로, 황제 콤모두스의 아내였다. 그녀는 명문 귀족 가문 출신으로, 178년에 콤모두스와 결혼하여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다. 콤모두스 재위 기간 동안 대중적 이미지로 영예를 누렸지만, 남편의 기괴한 통치에는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188년 간통 혐의로 카프리 섬으로 유배된 후 처형되었으며, 그녀의 몰락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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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브루티아 크리스피나 |
|---|---|
| 전체 이름 | 브루티아 크리스피나 아우구스타 |
| 칭호 | 아우구스타 |
| 배우자 | 콤모두스 |
| 왕조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 아버지 |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 |
| 어머니 | 발레리아 |
| 출생 | 164년 |
| 출생지 | 로마, 이탈리아 또는 볼체이, 이탈리아 |
| 사망 | 191년 (26-27세) |
| 사망지 | 카프리, 이탈리아 |
| 통치 기간 | 178년 – 19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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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년 출생 -
갈현
갈현은 후한 말에서 오나라 시대의 도사로, 유교 경전과 노장사상에 심취하여 좌자에게 도경을 전수받고 손권의 초빙을 거절한 채 산을 유람하며 수도 생활을 했으며, 북송과 남송 시대에 추존되어 각조종에서 조사로 여겨진다. -
164년 출생 -
우번
우번은 삼국 시대 오나라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역경》에 능통하고 손책과 손권을 섬기며 회계 업무를 담당했으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아 손권의 미움을 사 교주로 유배되어 사망했다. -
191년 사망 -
화웅
화웅은 후한 말 동탁 휘하의 무관으로, 정사에서는 손견과의 전투에서 사망하고,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에게 죽는 인물로 묘사된다. -
191년 사망 -
장온 (후한)
장온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환관 조등의 제자였으며 사공과 사도를 역임했고, 황건적의 난 당시 주준을 옹호하며 양주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동탁과의 갈등으로 191년에 처형당했다. -
로마 황후 -
포파이아 사비나
포파이아 사비나는 폼페이 출신으로 뛰어난 미모와 정치적 야망을 가진 로마 황후였으며, 네로의 두 번째 아내가 되어 클라우디아 옥타비아를 제거하고 황후 자리에 올랐으나, 사치스러운 생활과 유대교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고, 임신 중 사망 원인에 대한 여러 주장이 존재하며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
로마 황후 -
폼페이아 플로티나
폼페이아 플로티나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의 아내이자 하드리아누스 즉위에 영향을 미쳤으며, 에피쿠로스 학파를 후원하고 황제 숭배 대상이 된 로마 황후이다.
2. 가문
크리스피나는 저명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두 차례 집정관을 지낸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와 그의 아내 발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계 조부모는 집정관이자 원로원 의원이었던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와, 두 차례 집정관을 지낸 마니우스 라베리우스 막시무스의 딸이자 부유한 상속녀였던 라베리아 호스틸리아 크리스피나였다.
크리스피나에게는 훗날 집정관에 오른 오빠 루키우스 브루티우스 퀸티우스 크리스피누스가 있었다. 그녀의 가문은 본래 이탈리아 루카니아 지방의 볼케이 출신이었으며,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크리스피나는 로마 혹은 볼케이에서 태어나 자란 것으로 추정된다.
3. 혼인
크리스피나는 178년 여름, 당시 16세였던 콤모두스와 혼인하였다. 이 결혼은 정략결혼으로, 크리스피나의 아버지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와 시아버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주선하였다. 그녀는 지참금으로 넓은 영지를 가져왔는데, 이 영지들은 황실 소유지에 편입되어 루카니아 지역에 대한 콤모두스의 통제력 강화에 기여했다. 결혼식 자체는 수수하게 치러졌으나, 이를 기념하는 주화가 발행되고 로마 시민들에게 기부금이 배포되었다. 또한 소피스트 율리우스 폴룩스가 이 결혼을 축하하는 결혼 축시를 지어 헌정하기도 하였다.
3.1. 황후 시절
크리스피나는 178년 여름, 당시 16세였던 콤모두스와 혼인하였다. 이 결혼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뜻에 따른 정략결혼이었으며, 크리스피나는 지참금으로 루카니아 지역의 넓은 영지를 가져왔다. 결혼식 자체는 수수하게 치러졌으나, 이를 기념하는 주화가 발행되고 로마 시민들에게 기부금이 배포되었다. 소피스트 율리우스 폴룩스는 이 결혼을 위한 결혼 축시를 짓기도 했다.
결혼과 함께 크리스피나는 '아우구스타' 칭호를 받았고, 당시 남편 콤모두스가 시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공동 황제였으므로 로마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그녀는 시아버지의 재위 마지막 2년과 남편의 재위 초기에 대중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로 알려졌으며 많은 영예를 누렸다. 그녀는 품위 있고 감수성이 풍부한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콤모두스가 그녀를 싫어했다는 기록도 있다.
크리스피나는 남편 콤모두스의 통치 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궁정 내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었다. 전 황후였던 시누이 루킬라는 크리스피나의 지위와 권력을 질투하여 182년 콤모두스 암살 음모를 꾸미게 된다. 일부에서는 크리스피나가 182년경 임신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것이 루킬라의 질투심을 더욱 자극하여 암살 음모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러한 주장은 크리스피나의 주화에 다산을 상징하는 도상(디아나 루키페라, 유노 루키나, 페쿤디타스 등)이 나타나는 것에 근거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신생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설령 아이를 낳았더라도 일찍 사망했을 수 있으며, 결국 크리스피나와 콤모두스 사이에 자녀가 있었다는 명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이로 인해 제위 계승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결혼 생활 약 10년 후인 188년, 크리스피나는 남편 콤모두스에 의해 간통 혐의로 부당하게 고발당했다. 그녀는 카프리섬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일부 기록에는 191년 사망설도 있다.) 콤모두스는 크리스피나를 추방한 뒤 재혼하지 않았고, 정부 마르키아를 두었으나 그녀 역시 훗날 콤모두스 암살에 가담하게 된다.
4. 몰락과 죽음
결혼 생활 10년 만인 188년, 크리스피나는 남편 콤모두스에게 간통 혐의로 고발당해 카프리섬으로 유배되었고, 이후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182년 루킬라의 암살 미수 사건 직후 '반란 혐의'로 유배되어 191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크리스피나가 추방된 후, 콤모두스는 재혼하지 않고 마르키아라는 여성을 정부로 두었으며, 마르키아는 훗날 콤모두스 암살에 가담했다고 전해진다.
크리스피나의 몰락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와 카시우스 디오의 기록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근거로, 그녀의 몰락을 181년 혹은 182년에 있었던 루킬라의 콤모두스 암살 미수 사건과 잘못 연관 짓는 경우가 있다. 실제 원인으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레안데르의 몰락과 관련되었거나, 콤모두스와의 사이에서 제위를 계승할 자녀를 낳지 못한 것이 지목되기도 한다.
그녀의 정확한 사망 시점은 불분명하다. 늦으면 191년까지 작성된 비문(CIL VIII 2366)에서 그녀의 이름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이때까지 생존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는 188년 처형설이나 191년 사망설 등 다른 기록들과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