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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굴 카미시 카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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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굴 카미시는 1248년부터 1251년까지 몽골 제국의 섭정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오이라트부 또는 메르키트부 출신으로, 칭기즈 칸의 손자 귀위크 칸의 정비가 되었으며, 코자와 나쿠 두 아들을 두었다. 귀위크 칸 사후 섭정으로 국정을 운영하며 몽골 제국 내 권력 투쟁에 휘말렸다. 그녀는 오고타이 칸이 후계자로 지명한 시레문을 옹립하려 했으나, 몽케 칸과의 대립 끝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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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굴 카미시 카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대카툰
칭호2몽골 제국의 섭정
이름오굴 카미시
한자斡兀立 海迷失 (알올립 해미실)
한자 (몽골어)斡兀立 海迷失 可敦 (알올립 해미실 가돈)
통치
섭정 재위 기간1248년 4월 21일–1251년 7월 1일
대카툰 재위 기간1246년–1251년
전임자 (섭정)귀위크 칸
후임자 (섭정)몽케 칸
전임자 (대카툰)퇴레게네 카툰
후임자 (대카툰)쿠툭타이 카툰
개인 정보
출생circa 1200년대
사망1252년
사망 장소몽골 제국 케룰렌강
배우자귀위크 칸
자녀코자
나쿠
종교텡그리, 샤머니즘
가문
왕조몽골 제국
가문메르키트부 오굴씨
아버지쿠투카 베키
어머니알 수 없음
기타
시호흠숙황후 (欽淑皇后)

2. 생애

메르키트 부족 출신인 오굴 카미시는[1] 몽골 제국 제2대 황제 오고타이 칸 사후, 구유크 칸을 옹립하려는 오고타이 가문과 몽케 칸을 옹립하려는 툴루이 가문 사이의 황위 다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몽골 관습에 따라 카안의 장례와 쿠릴타이는 카안의 미망인이 주관했는데, 도레게네의 지원으로 구육이 즉위했다. 그러나 주치 울루스의 바투 등은 구육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아 구육의 지위는 불안정했고, 1248년 구육이 급사하자 다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오굴 카미시는 구육의 장례를 치르고 섭정을 맡아, 시레문을 다음 카안으로 추대하려 했다. 1248년 쿠릴타이에서 오굴 카미시 측은 시레문이 오고타이의 후계자임을 주장했으나, 톨루이 가문의 모게는 과거 도레게네 등이 구육을 카안으로 세운 것을 지적하며 반박했고, 오고타이 가문은 반론하지 못했다.

1251년 몽케 칸 즉위 후, 1252년 시레문은 몽케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되었고, 오굴 카미시는 몽케세르의 심문을 받고 사형당했다.[3] 이후 오굴 카미시는 *흠숙황후(欽淑皇后)*로 시호되었다.[4]

2. 1. 초기 생애와 결혼

몽골비사에 의하면 오이라트부 오굴씨 출신 쿠투카 베키의 딸이라고 알려졌으나, 메르키트부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1] 오굴 카미시의 친정 오굴씨는 1208년 칭기즈 칸에게 투항했다. 그러나 1216년-1219년 오굴씨가 칭기즈 칸에게 반역했다가 진압당한 뒤 약탈혼 전통에 따라 칭기스 칸의 손자 귀위크의 처로 주어졌다.

귀위크의 제3황후였으며, 메르키트 족 출신 메르키트 울루헤이미시(蔑儿乞 乌兀儿黑迷失)가 일찍 사망하면서, 오굴 카이미시가 귀위크의 정비가 되었다.

오굴 카이미시(Oghul Qaimish)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가 앤 브로드브리지(Anne Broadbridge)는 그녀의 결혼 시기를 근거로 1200년대 초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녀의 이름은 튀르크계 어원으로, "우리는 사내아이를 찾고 있었다"는 뜻으로, 부모가 아들을 낳지 못한 데 대한 좌절감을 반영한다.

오굴 카이미시는 1204년 칭기즈 칸에게 정복당한 메르키트 부족 출신이었다. 메르키트족은 초기에는 부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1216년 반란을 일으킨 후 칭기즈 칸에게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그의 장군 수부타이가 1218년 메르키트 지도자들을 패퇴시키고 죽였고, 살아남은 부족원들은 칭기즈 칸의 충복들에게 노예로 흩어졌다. 오굴 카이미시의 남자 친족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여성 친족들은 몽골 사회에서 유용한 인맥을 제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1220년대 초, 오굴 카이미시는 귀유크 칸에게 부인으로 주어졌다. 그는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이자 후계자인 오고타이 칸과 그의 정비인 토레게네 카툰의 장남이었는데, 토레게네 역시 메르키트 부족 출신이었다. 분열된 부족 출신으로 결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연줄이 거의 없었던 오굴 카이미시는 귀유크에게 전략적으로 나쁜 선택이었다. 귀유크와 오굴 카이미시 사이에는 코자와 나쿠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2. 2. 황후 시절

오굴 카미시는 귀위크와의 사이에 코자와 나쿠 2남을 낳았다. 원사, 원사연의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라시드 알딘의 페르시아계 사서 집사에 의하면 귀위크 칸의 아들들 호자 오굴, 나쿠, 호쿠 중 호자 오굴과 호쿠는 오굴 카미시가 생모였다고 한다.

1246년 8월 24일 남편 귀위크가 칸위에 올랐다. 얼마 뒤 시어머니 퇴레게네 카툰은 병사했고, 귀위크는 1248년 4월 알코올 중독과 질병으로 사망한다.[6]

2. 3. 섭정 통치 (1248년 ~ 1251년)

1248년 귀위크 칸이 급사하자, 몽골 제국의 전통에 따라 오굴 카미시는 섭정으로서 국정을 대행했다.[3] 귀위크 칸의 측근이었던 친카이, 카다크, 발라 등이 섭정 통치를 보좌했다. 오굴 카미시는 오고타이 칸이 지명했던 후계자인 시레문을 옹립하려 하였으나, 정치적 역량과 협상 능력 부족으로 실패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무당들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50년 초, 프랑스의 앙드레 드 롱주모가 이끄는 루이 9세의 사절단이 카라코룸에 도착하여 오굴 카미시를 만났다. 이 사절단은 귀위크 칸 생전에 보낸 사절에 대한 답신이었다. 루이 9세가 보낸 선물은 공물로 여겨졌고, 오굴 카미시는 무슬림과의 싸움에 협력하는 대신, 루이 9세는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7]

1250년 킵차크 한국의 바투가 이식쿨 호수 북쪽 지역에서 쿠릴타이를 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오굴 카미시를 비롯한 우구데이계 왕족은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참여를 거부했다.

1251년 툴루이가와 금장 칸국이 케룰렌강가에서 다시 한번 쿠릴타이를 열고 몽케의 카간 즉위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오굴 카미시와 그의 아들 코자는 쿠릴타이 참여를 거부했다. 오굴 카미시 카툰은 자기 아들 코자를 카간으로 내세웠고, 우구데이 가와 차가타이 가는 오굴 카미시 모자를 지지했다.

2. 4. 몽케 칸과의 대립과 최후

1251년 툴루이 가문의 몽케 칸쿠릴타이를 통해 제4대 황제로 즉위하자, 오굴 카미시는 이에 불복하고 권력 투쟁을 벌였다. 시레문 등 오고타이 가문 왕족들과 함께 몽케 칸을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발각되었다.[2][3]

오굴 카미시 카툰과 시레문의 모친 카다카치 카툰은 체포되었다. 오굴 카미시는 벌거벗겨진 채 소르칵타니 베키 등의 앞에서 고문을 받았고,[8] 이내 살해되었다. 죄명은 몽케 칸 암살 음모 혐의였다. 그 시체는 펠트에 둘둘 말아서 강에 던져졌다.[9] 자라이르부족 출신 몽케세르의 고문을 받고 죽었다는 설,[10] 소르칵타니 베키가 그를 처형했다는 설, 몽케 칸이 직접 그녀의 사형을 집행했다는 설이 있다. 신원사와 십팔사략, 원사연의 등에 의하면 오굴 카미시와 시레문의 생모가 몽케 칸을 저주하는 기도를 천지신명에게 드렸고, 이 때문에 체포되어 사사되었다고 한다. 원사 헌종 본기에는 카다카치 카툰과 함께 사사되었다는 설도 있고, 마녀 혐의로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다. 사망 시점도 1252년 여름이었다는 설이 있다.

3. 몽골 제국 내 권력 투쟁과 오굴 카미시

몽골 제국에서는 제2대 황제 오고타이 사후, 오고타이 가문과 툴루이 가문 사이에 황위(카안)를 둘러싼 권력 투쟁이 발생했다. 몽골의 관습에 따라 카안의 미망인이 카안의 장례식과 차기 카안을 결정하는 쿠릴타이를 주관하게 되어 있었고, 도르게네의 지원으로 구육이 카안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조치 가문의 바투 등은 구육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아 그의 지위는 매우 불안정했고, 구육 사후 다시 권력 투쟁이 발생했다.[2]

1248년 구육이 급사하자, 오굴 카미시는 섭정으로서 국정을 대행하며 오고타이가 후계자로 정했던 시레문을 추대하려고 모의했다. 같은 해 열린 쿠릴타이에서 오굴 카미시의 사자는 시레문이 차기 카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모게는 “이전 쿠릴타이에서 [태종이 후계자로 정한 시레문이 아니라] 구육을 카안으로 세운 것은 도르게네 등이었고, 즉 처음으로 오고타이 카안의 명령에 거역한 것은 너희들 [오고타이 가문의 인물]이다. 지금 와서 어떻게 [시레문 이외의 자를 세우는 것을] 꾸짖을 수 있는가?”라고 반박했다. 오고타이 가문 측은 이에 전혀 반론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몽케가 제4대 황제를 계승했다.[2]

1252년, 시레문은 몽케 암살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오굴 카미시는 몽케의 측근 몽케셀에게 심문을 받고 사형당했다.[3]

3. 1. 오고타이 가문과 툴루이 가문의 대립

오고타이 칸 사후, 킵차크 한국의 바투 등의 반대로 쿠릴타이가 열리지 못했다. 오고타이는 생전 후계자로 손자 시레문을 지명하였으나, 퇴레게네 카툰의 몽골 귀족 설득과 모략으로 그의 남편 귀위크가 1246년 8월 24일 칸위에 올랐다.[6] 그러나 몽케를 지지하는 바투 등은 구육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육의 지위는 매우 불안정했고, 구육 사후에는 다시 오고타이 가문과 툴루이 가문 사이에서 황위를 둘러싼 다툼이 발생했다.

1248년 4월 20일 남편 귀위크가 투르키스탄 원정을 가던 중 쿰셍기르(현,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사망하자, 오굴 카미쉬는 섭정 감국이 되었다. 1248년에 열린 쿠릴타이에서는 오굴가이미슈가 파견한 사자가 과거 시레문이 오고타이로부터 후계자로 임명되었던 것을 제기하며, 시레문이야말로 차기 카안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툴루이 왕가의 모게는 “오고타이 카안의 명령에 누가 거역하려는가? 그러나 이전 쿠릴타이에서 [태종이 후계자로 정한 시레문이 아니라] 구육을 카안으로 세운 것은 도르게네 등이었고, 즉 처음으로 오고타이 카안의 명령에 거역한 것은 너희들 [오고타이 가문의 인물]이다. 지금 와서 어떻게 [시레문 이외의 자를 세우는 것을] 꾸짖을 수 있는가?”라고 반박했고, 오고타이 가문 측 인물은 이에 전혀 반론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몽케가 제4대 황제를 계승했다.[2]

몽케 즉위 후인 1252년, 시레문은 몽케 암살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오굴가이미슈는 몽케의 측근 몽케셀의 심문을 받고 사형당했다.[3]

3. 2. 오굴 카미시의 섭정과 몽케의 즉위

1248년 4월 귀위크 칸이 사망하자, 오굴 카미시는 섭정이 되었다. 오굴 카미시는 오고타이 칸이 생전 후계자로 지정했던 시레문을 다음 칸으로 옹립하려 했다. 그러나 1249년, 청장 칸국바투 칸이 알라 카마크에서 쿠릴타이를 소집하고 툴루이가의 몽케를 카간으로 추대하면서 오굴 카미시의 계획은 무산되었다.[7]

1248년 열린 쿠릴타이에서 오굴 카미시 측은 시레문이 오고타이 칸의 후계자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툴루이 가문의 모게(モゲ)는 "이전 쿠릴타이에서 귀위크를 칸으로 세운 것은 도르게네 등이었고, 즉 처음으로 오고타이 칸의 명령에 거역한 것은 바로 오고타이 가문 사람들이다. 지금 와서 어떻게 시레문 이외의 사람을 세우는 것을 꾸짖을 수 있는가?"라고 반박했다. 결국 오고타이 가문 측은 이에 제대로 반론하지 못했고, 몽케가 제4대 카안으로 즉위하게 되었다.[2]

1250년 초, 프랑스의 앙드레 드 롱주모(André de Longjumeau)가 이끄는 루이 9세의 사절이 카라코룸에 도착, 오굴 카미시를 만났다. 귀위크 칸이 생전에 사절을 보낸 것에 대한 답변이었다. 루이 9세가 보낸 선물은 공물로 여겨졌고, 오굴 카미시는 무슬림과의 싸움에 협력하는 대신, 루이 9세는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1250년 킵차크 한국의 바투가 이식쿨 호수 북쪽지역에서 쿠릴타이를 열자고 제안했으나, 오굴 카미시를 비롯한 우구데이계 왕족은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1251년 케룰렌강가에서 열린 쿠릴타이에서 몽케가 카간으로 공식 즉위하자, 오굴 카미쉬와 그의 아들 코자는 쿠릴타이 참여를 거부했다. 오굴 카미시 카툰은 자기 아들 코자를 카간으로 내세웠고, 우구데이 가와 차가타이 가는 오굴 카미시 모자를 지지했다.

3. 3. 오굴 카미시의 몰락과 오고타이계의 숙청

1251년 7월 몽케 칸이 즉위하면서 오고타이 가문과 툴루이 가문 사이의 권력 투쟁은 툴루이 가문의 승리로 끝났다. 몽케 칸은 오고타이 가문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는데, 쿠빌라이 칸의 친형제인 호자는 남송 전선 최전방으로 유배되었고 시레문은 사형당했다.[8]

오굴 카미시 카툰과 시레문의 모친 카다카치 카툰은 체포되었다. 오굴 카미시는 소르칵타니 베키를 포함한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채 고문을 당했고,[8] 곧 살해되었다. 몽케 칸 암살 모의 혐의였으며, 시체는 펠트에 싸여 강에 던져졌다.[9] 케룰렌강에 던져졌다는 설도 있다. 자라이르 부족 출신 몽케세르에게 고문을 받고 죽었다는 설,[10] 소르칵타니 베키가 처형했다는 설, 몽케 칸이 직접 사형을 집행했다는 설 등이 있다. 『신원사』, 『십팔사략』, 『원사연의』 등에 따르면 오굴 카미시와 시레문의 생모가 몽케 칸을 저주하는 기도를 천지신명에게 드려 체포되어 사사되었다고 한다. 『원사』 헌종 본기에는 카다카치 카툰과 함께 사사되었다는 설, 마녀 혐의로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다. 사망 시점은 1252년 여름이었다는 설도 있다.

오굴 카미시를 지지하던 72명 역시 몽케 칸에게 체포되어 돌에 맞아 죽는 형벌을 받았다. 입에 돌을 물려 죽였다는 설도 있다. 몽케 칸은 이들 외에도 오고타이계, 차가타이계 왕족들을 숙청하였다.

몽케는 귀위크의 적자인 호자와 나쿠의 죽음은 면하게 했지만, 변방으로 추방하였다. 이들은 금고형을 당했다는 설도 있다. 시레문 추대 운동 실패 후 오고타이계 왕자들은 권좌에서 완전히 몰락하였다.

1252년, 시레문은 몽케 암살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오굴 카미시는 몽케의 측근 몽케세르에게 심문을 받고 사형당했다.[3] 이후 쿠빌라이 칸1266년 10월 태묘를 건립하면서 그녀에게 '''흠숙황후'''(欽淑皇后)라는 시호를 추서하였다.[4]

4. 평가

오굴 카미시는 섭정 기간 동안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고 무속 신앙에 과도하게 의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248년 귀위크 칸이 사망한 후 섭정을 맡았으나, 시어머니 퇴레게네 카툰에 비해 정치적 모략, 술수, 협상 능력이 부족했다. 그녀는 주로 무당들과 시간을 보냈으며,[6] 국정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엘지기데이프랑스 루이 9세에게 무슬림에 대항하는 동맹을 제의했을 때, 오굴 카미시는 도미니코회 수도사 앙드레 드 롱쥐모를 통해 몽골의 지배에 복종하라는 답장을 보내 동맹을 거절했다.[6] 1250년 앙드레 드 롱쥐모가 이끄는 사절단이 카라코룸에 도착했을 때, 오굴 카미시는 루이 9세가 보낸 선물을 공물로 간주하고 복종을 요구하기도 했다.

1251년 쿠릴타이에서 몽케가 대칸으로 선출된 후, 몽케 칸은 오굴 카미시를 '최악의 마녀', '개보다 더 비열한 인간'이라고 폄하했다.

4. 1. 정치적 역량 부족

1248년 귀위크 칸이 사망하자, 오굴 카미시는 섭정으로서 몽골 제국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어머니였던 퇴레게네 카툰과 달리 정치적인 모략, 술수, 협상 능력 등이 부족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오굴 카미시는 주로 무당들과 시간을 보냈다.[6]

엘지기데이프랑스 루이 9세에게 무슬림에 대항하는 동맹을 제의했으나, 오굴 카미시 카툰은 도미니코회 수도사 앙드레 드 롱쥐모를 통해 몽골의 지배에 복종하라는 답장을 보냄으로써 동맹을 거절했다.[6]

1250년 초, 앙드레 드 롱주모가 이끄는 루이 9세의 사절이 카라코룸에 도착했을 때, 오굴 카미시는 루이 9세가 보낸 선물을 공물로 간주하고, 무슬림과의 싸움에 협력하는 대신 루이 9세에게 복종을 요구했다.

1251년 쿠릴타이에서 몽케가 대칸으로 선출된 후, 몽케 칸프랑스에 보낸 편지에서 오굴 카미시를 '최악의 마녀', '개보다 더 비열한 인간'이라고 폄하했다.

4. 2. 무속 신앙에 대한 과도한 의존

오굴 카미시 카툰은 대부분의 시간을 무당들과 보내는 등 무속 신앙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국정을 소홀히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엘지기데이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게 무슬림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자고 제의한 것이 오굴 카미시 카툰의 섭정 기간 중 벌어진 일이다.[6] 1250년 초, 프랑스의 앙드레 드 롱주모가 이끄는 루이 9세의 사절이 카라코룸에 도착, 오굴 카미시를 만났을 때, 오굴 카미시는 무슬림과의 싸움에 협력하는 대신, 루이 9세는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훗날, 몽케 칸프랑스에 사절을 보냈는데, 프랑스에서 온 기욤 드 뤼브룩을 만났을 때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에 보낸 편지에서 모두 오굴 카미쉬를 최악의 마녀, 개보다 더 비열한 인간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4. 3. 비극적 최후

1251년 쿠릴타이에서 몽케가 대칸으로 선출되자, 몽케 칸프랑스에 사절로 온 기욤 드 뤼브룩과 프랑스의 국왕 루이 9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굴 카미쉬를 최악의 마녀이자 개보다 더 비열한 인간이라고 폄하했다.[7] 오고타이계 일부 왕공족들과 엘지기데이의 두 아들 등은 쿠릴타이를 무효로 할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었고, 1251년 7월 몽케 칸은 오굴 카미시와 그 지지자들을 체포하여 재판을 명령했다.

몽케 칸의 명으로 우구데이가는 숙청되었고, 오굴 카미시 카툰과 시레문의 모친 카다카치 카툰은 체포되었다. 오굴 카미시는 소르칵타니 베키 등의 앞에서 벌거벗겨진 채 고문을 받고 살해되었다.[8] 죄명은 몽케 칸 암살 음모 혐의였으며, 시체는 펠트에 둘둘 말려 강에 던져졌다.[9] 일설에는 케룰렌강에 던져졌다고 하며, 자라이르부족 출신 몽케세르에게 고문을 받고 죽었다는 설,[10] 소르칵타니 베키가 처형했다는 설, 몽케 칸이 직접 사형을 집행했다는 설도 있다. 신원사와 십팔사략, 원사연의 등에는 오굴 카미시와 시레문의 생모가 몽케 칸을 저주하는 기도를 천지신명에게 드려 체포되어 사사되었다고 한다. 원사 헌종 본기에는 카다카치 카툰과 함께 사사되었다는 설, 마녀 혐의로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으며, 사망 시점은 1252년 여름이었다는 설이 있다.

몽케 칸은 오굴 카미시의 지지자 72인 역시 체포하여 돌을 던져 죽이거나 입에 돌을 물려 죽였다. 이외에도 오고타이계, 차가타이계 왕족들을 숙청하였다. 한편, 코자는 화남의 대남송전선 최전방으로 유배되었고 시레문은 사형에 처해졌으며,[7] 일설에는 시레문이 남송 정벌에 보내졌다가 몽케 칸 말년에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다.

5. 가족 관계

(혹은 메르키트부)시어머니퇴레게네 카툰



몽골비사에 의하면 오굴 카미시는 오이라트부 오굴씨 출신 쿠투카 베키의 딸이다. 메르키트부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1] 그녀의 오빠 토레르치 쾨르겐은 칭기즈 칸의 딸 치체겐과 혼인하였고, 여동생 오굴 투이미시 카툰은 툴루이 칸과 결혼했다가 툴루이 사후 그의 장남 몽케 칸이 수계하였다.[1] 토레르치 쾨르겐의 아들들 중 부카 테무르, 바르스부카 등은 아리크 부카, 훌라구의 자녀들과 혼인했고, 토레르치의 딸 쿠이쿠 카툰과 올제이투 카툰은 툴루이의 아들 일 한국의 훌라구의 부인이 되었다.[1]

6. 기타

오굴 카미시는 귀위크 칸과의 사이에서 코자와 나쿠 두 아들을 낳았다. 1248년 4월 20일 남편 귀위크 칸이 투르키스탄 원정 중 쿰셍기르(현,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사망하자, 오굴 카미시는 섭정이 되었다. 카미시 카툰은 그의 영지가 있던 에밀 강 지역으로 그의 시신과 함께 관을 운구해왔다.

오고타이 칸 때부터 측근이었던 위구르 출신 친친카이와 카다크, 발라 등이 오굴 카미시를 보좌하였다. 1248년 동투르키스탄의 오고타이 가문의 영지인 에밀 강가에서 우구데이가의 오르도를 소집했다. 오굴 카미시는 오고타이 칸이 생전 후계자로 지정했던 시레문을 내세웠다. 차가타이 칸국예수 몽케가 이것을 지지했다. 하지만 카미시 카툰은 시어머니 퇴레게네 카툰 같은 정치적 모략 능력과 술수, 협상 능력 등이 결여되어 있었고, 주로 무당들과 시간을 보냈다.

1250년 초, 프랑스의 앙드레 드 롱주모(André de Longjumeau)가 이끄는 루이 9세의 사절이 카라코룸에 도착, 오굴 카미시를 만났다. 귀위크 칸이 생전에 사절을 보낸 답변이었다. 루이 9세가 보낸 선물은 공물로 여겨졌고, 오굴 카미시는 무슬림과의 싸움에 협력하는 대신, 루이 9세는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1250년 킵차크 한국의 바투가 이식쿨 호수 북쪽지역에서 쿠릴타이를 열자고 제안했다. 이식쿨 호는 톈산 산맥에 있으며 현재의 키르기스 공화국에 있다. 그러나 오굴 카이미쉬를 비롯 우구데이계 왕족은 거리가 멀며 참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1251년 툴루이가와 금장 칸국이 케룰렌 강가에서 다시 한 번 쿠릴타이를 열고 몽케의 카간 즉위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오굴 카미쉬와 그의 아들 코자는 쿠릴타이 참여를 거부했다. 오굴 카미시 카툰은 자기 아들 코자를 카간으로 내세웠고 우구데이 가와 차가타이 가는 오굴 카미시 모자를 지지했다.

1251년 7월 몽케 칸은 오굴 카미시와 그 지지자들을 체포, 재판을 명령했다. 오굴 카미시 카툰은 벌거벗겨진 채 소르칵타니 베키 등의 앞에서 고문을 받았고,[8] 이내 살해되었다. 죄명은 몽케 칸 암살 음모 혐의였다. 그 시체는 펠트에 둘둘 말아서 강에 던져졌다.[9] 자라이르부족 출신 몽케세르의 고문을 받고 죽었다는 설[10], 소르칵타니 베키가 그를 처형했다는 설, 몽케 칸이 직접 그녀의 사형을 직접 집행했다는 설이 있다.

몽케는 귀위크의 적자인 그녀의 아들 호자, 나쿠 죽음은 면하게 했으나 변방으로 추방하였다.

쿠빌라이 칸1266년 10월 그녀의 시호를 '''흠숙황후'''(欽淑皇后)라 하였다.

오굴 카미시 카툰원년2년3년4년
서력1248년1249년1250년1251년
육십간지
(六十干支)
무신(戊申)기유(己酉)경술(庚戌)신해(辛亥)


참조

[1] 서적 志茂2013
[2] 서적 元史 巻3憲宗本紀
[3] 서적 佐口1968
[4] 서적 元史 巻114列伝1后妃1
[5]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6] 서적 The Mongols
[7] 서적 Rashiduddin Fazlullah's Jamiʻuʼt-tawarikh
[8] 서적 Rashiduddin Fazlullah's Jamiʻuʼt-tawarikh
[9] 서적 Mongol Khatuns Garland 2000
[10] 서적 モンゴル帝国史 2(東洋文庫 128) 平凡社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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