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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유니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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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리유니 협정은 1991년 7월 7일, 유럽 공동체의 중재로 크로아티아의 브리유니섬에서 유럽 공동체,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유고슬라비아 정부 간에 열린 협정이다. 이 협정은 슬로베니아에서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철수를 용이하게 했지만, 크로아티아에서는 무력 충돌이 계속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세르비아계 군대가 남아 불리하게 작용했다. 브리유니 협정은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 과정에서 유럽 공동체의 개입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슬로베니아의 독립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크로아티아에서는 분쟁을 완전히 종식시키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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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유니 협정
개요
이름브리유니 협정
원어 이름Brijunska deklaracija (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 슬로베니아어, 보스니아어)
협정 정보
초안 작성일1991년 7월 5일
서명일1991년 7월 7일
서명 장소크로아티아 브리유니
중재자
서명 당사자
관련 문서
위키소스브리유니 선언 (크로아티아어)
지도
브리유니 협정 당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유고슬라비아의 지도
브리유니 협정 체결 당시 슬로베니아(녹색), 크로아티아(분홍), 유고슬라비아 연방(엹은 노랑)의 지도

2. 배경

1991년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과정에서 독립을 선언할 움직임을 보이자, 유럽 공동체(EC)는 이들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유지를 위한 협상을 중재하려 했다. 그러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1991년 6월 25일 독립을 선언했고,[23] 이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개입과 열흘 전쟁 발발로 이어졌다.[22]

2. 1. 유럽 공동체의 중재 노력

1991년 6월 23일,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과정에서 독립을 선언할 준비를 하면서, 유럽 공동체(EC) 외무 장관들은 EC 회원국들이 양국을 국가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유럽 공동체는 독립선언을 일방적인 움직임으로 보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존속을 위한 협상을 중재했다. EC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의 직접적인 외교 교류를 중지하였고,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이를 환영했다.[21]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6월 25일 독립을 선언했으며,[23] 다음날부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슬로베니아 내로 배치되기 시작했다. 6월 27일에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슬로베니아 국토방위군(TDS)이 슬로베니아 국경 지역 통제권을 두고 충돌하면서 열흘 전쟁이 시작되었다.[22]

6월 말에서 7월 초 사이 EC 협상단 3명이 유고슬라비아 지역을 세 차례 방문하면서 정치 협상을 중재했다. 대표단은 유럽 연합 이사회 의장국인 룩셈부르크 외무부 장관이자 부총리인 자크퀴스 푸스, 이탈리아 대표인 지아니 데 미첼리스, 네덜란드 대표 한스 판 덴 브로크로 구성되었다.[21] 베오그라드 방문 직전 공항 기자회견에서 푸스는 유럽 공동체가 이 위기를 책임질 것이라고 말했다. 대표단과 만난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크로아티아 내에 세르비아인 60만 명이 살고 있다는 이유로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할 가능성을 일축하였다.[23]

6월 29일,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협상 합의를 위해 독립선언을 일시 보류하는 데에 합의했다. EC 대표단은 세르비아가 6월 30일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직의 크로아티아계 대표인 스체판 메시치를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직 대통령에 임명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기로 중재하면서 협상에 진전을 보였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슬로베니아 주둔 병력에게 막사로 복귀하라고 명령하면서 합의가 진전된 것처럼 보였다.[23] 7월 1일, 유럽 연합 이사회 의장직이 네덜란드에서 포르투갈로 넘어가면서 데 미첼리스는 포르투갈 외무부 장관인 조아오 데 데우스 핀헤이로로 교체되었다.[24]

2. 2.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개입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자,[23] 다음 날부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슬로베니아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6월 27일에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슬로베니아 국토방위군(TDS)이 슬로베니아 국경 지역 통제권을 두고 충돌하기 시작하면서 10일 전쟁이 발발했다.[22]

3. 브리유니 회담

브리유니 회담은 1991년 7월 7일 브리유니섬에서 열렸으며, 유럽 공동체,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및 유고슬라비아 정부 대표가 참석하여 협상을 진행했다.[5][23] 회담 결과, 브리오니 협정(브리오니 선언)이 도출되었다.[14]

이 협정으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국토방위군은 기지로 복귀하고, 슬로베니아 정부는 국경 통제권을 가지며,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3개월간 독립 관련 활동을 중지하기로 했다.[13] 또한, 유럽 공동체 감시 임무를 통해 슬로베니아 내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철수를 감시하기로 했다.[14][15]

3. 1. 회담 참가자

유럽 공동체의 중재로 열린 브리유니 회담에는 유럽 공동체 대표단, 유고슬라비아 연방,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대표단이 참여했다.[23]

브리유니 회담 참가자[5][23]
대표구성원
유럽 공동체 대표단반 덴 브로크 외 대표단원[25]
유고슬라비아 연방대통령 8명 중 5명:
크로아티아대통령 프라뇨 투지만[27]
슬로베니아대통령 밀란 쿠찬[27]
세르비아보리사브 요비치 (6월 15일 연방 대통령직 세르비아계 대표에서 사임)[27]



밀로셰비치는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다.[27]

3. 2. 협상 과정

유럽 공동체의 중재로 크로아티아 브리유니섬에서 유럽 공동체,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유고슬라비아 정부 간 중재 협상이 열렸다. 브리유니 회담은 1991년 7월 7일에 시작되었다.[23] 반 덴 브로크가 이끄는 유럽 공동체 대표단 외에도[25]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 8명 중 5명인 스체판 메시치(크로아티아), 보기치 보기체비치(보스니아), 야네즈 드르노브셰크(슬로베니아), 브란코 코스티치(몬테네그로), 바실 투푸르코브스키(마케도니아)가 참여했다. 이외에도 유고슬라비아의 총리인 안테 마르코비치, 유고슬라비아 연방 외무부 장관 부디미르 론차르, 내무부 장관 페타르 그라차닌, 국방차관이자 부제독인 스타네 브로베트도 참여했다.[26] 크로아티아의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이 크로아티아 대표로, 슬로베니아의 대통령 밀란 쿠찬이 슬로베니아 대표로 참여했다. 세르비아 측에서는 밀로셰비치가 참석을 거부했고, 6월 15일 연방 대통령직 세르비아계 대표에서 사임한 보리사브 요비치가 대신 참석했다.[27]

오전 8시부터 유럽 공동체 대표단은 쿠찬 및 슬로베니아 대표단과 별도로 협의를 진행하고, 이어서 투지만 및 크로아티아 대표단과 협의를 가졌으며, 마지막으로 요비치와 각각 회담을 가졌다. 오후에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유고슬라비아 대표단이 참여한 본회의가 열렸으나 요비치는 회담에 불만족스러워했다.[28]

협정은 7월 5일 헤이그유럽 공동체 이사회에서 준비되었다.[29] 이 협정 문서에는 공동선언 및 유고슬라비아 감시 임무를 위한 정치적 협상 및 지침 협의를 위한 환경 조성을 서술한 부속문서 2개가 포함되어 있었다.[30]

3. 3. 브리유니 협정의 주요 내용

브리유니 협정은 7월 5일 유럽 공동체 각료 이사회에서 준비되었으며, 공동 선언문과 2개의 부속 문서로 구성되었다.[12]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3]

  •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과 국토방위군은 기지로 복귀한다.
  • 슬로베니아 정부는 슬로베니아 국경을 통제한다.
  •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독립 관련 활동을 3개월간 중지한다.
  • 유럽 공동체 감시단(ECMM)이 슬로베니아에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철수를 감시한다.[14][15]

4. 여파

브리유니 협정은 합의 내용이 거의 없었고 서명국마다 다르게 해석했지만,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대한 유럽 공동체(EC)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7월 10일 헤이그에서 유럽 공동체 회담이 처음으로 열렸다.[33] 이 회담은 슬로베니아 내 군사적 대립을 완화하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의 슬로베니아 철수 협상을 중재하는 데 기여했다.[32]

그러나 크로아티아에서는 무력 충돌이 계속되었다. 협정 체결 당일 저녁,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오시예크를 포격했다.[33] 9월 중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과 경찰이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막사를 봉쇄하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크로아티아 내로 공세를 펼치면서 전쟁이 격화되었다.[36] 7월 18일 유고슬라비아 연방 대통령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에게 슬로베니아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지만,[34] 9월 1일에는 유럽 공동체의 감시 임무가 크로아티아로 확대되었다.[35]

브리유니 협정으로 연방을 유지하려던 안테 마르코비치는 고립되었고, 유럽 공동체는 사실상 유고슬라비아 해체를 지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25] 이 협정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지도부의 권한을 일부 약화시켰다.[37]

4. 1. 슬로베니아에 미친 영향

브리유니 협정은 슬로베니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슬로베니아 내 막사에서의 군사적 대립을 약화시켰고, 슬로베니아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사이의 철수 협상을 중재하는 데 큰 진전을 보였다.[32] 1991년 7월 18일, 유고슬라비아 연방 대통령은 브리유니 협정 이행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에게 슬로베니아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34]

이 협정으로 슬로베니아는 연방 정부, 특히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37] 이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목표 중 하나를 달성하는 데 기여했으며, 국제 국경을 다시 그릴 수 있게 되었다.[37] 미국의 저널리스트 사브리나 P. 라메트는 1991년 1월 쿠찬밀로셰비치 사이의 합의를 통해 밀로셰비치는 슬로베니아의 독립에 세르비아가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기록했다. 쿠찬은 대신 밀로셰비치의 대세르비아 수립에 대한 이해에 공감을 표했다.[25]

4. 2. 크로아티아에 미친 영향

브리유니 협정은 크로아티아에서 무력 충돌이 계속되는 상황을 막지 못했다. 협정 체결 당일 저녁,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은 오시예크를 포격했다.[33] 9월 중순에는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과 경찰이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막사를 봉쇄하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크로아티아 내로 공세를 펼치면서 전쟁이 더욱 격화되었다.[36]

이 협정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세르비아계 군사가 크로아티아에 계속 남아있게 하여 크로아티아에 불리하게 작용했다.[31] 또한, 유럽 공동체(EC)는 브리유니 협정을 위기 완화 방법으로 보았으나, 세르비아의 국가 대전략은 수정되지 않았고 완전한 분쟁 종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4. 3.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확대

브리유니 협정은 합의 내용이 거의 없었고, 서명국들마다 해석이 달랐지만,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대한 유럽 공동체(EC)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7월 10일 헤이그에서 유고슬라비아 문제에 대한 첫 유럽 공동체 회담이 열렸다.[33] 이 회담을 통해 슬로베니아 내 군사적 대립이 완화되었고, 슬로베니아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간의 철수 협상이 진전되었다.[32]

그러나 크로아티아에서는 협정 체결 당일 저녁 오시예크 포격 등 무력 충돌이 계속되었다.[33] 7월 18일, 유고슬라비아 연방 대통령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에게 슬로베니아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34] 9월 1일, 유럽 공동체의 감시 임무는 크로아티아로 확대되었다.[35] 9월 중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과 경찰이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막사를 봉쇄하고, 이에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크로아티아 내로 공세를 펼치면서 전쟁이 격화되었다.[36]

결과적으로 유럽 공동체는 슬로베니아의 무력 분쟁을 빠르게 해결하는데 기여했다고 자평했지만, 자신들의 외교적 노력이 현장의 상황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7]

4. 3. 1. 세르비아의 역할

브리유니 협정으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유지하려던 안테 마르코비치는 고립되었고, 유럽 공동체 대표단은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를 암묵적으로 지지했다.[25] 이 협정으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지도부의 일부 권한이 줄어들었다.[37]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등 연방 당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으며, 이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목표 중 하나인 국제 국경 재조정을 가능하게 했다.[37]

사브리나 P. 라메트는 1991년 1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밀란 쿠찬 사이의 합의에서 밀로셰비치가 슬로베니아 독립에 세르비아가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약을 주었다고 기록했다. 쿠찬은 그 대가로 밀로셰비치의 대세르비아 구상에 대한 이해를 표명했다.[25]

당시 유럽 공동체는 브리유니 협정을 위기 완화책으로 보았지만, 세르비아의 국가 대전략은 변하지 않았다. 유럽 공동체의 미흡한 대응은 세르비아에 유리하게 작용했다.[20]

5. 평가

브리유니 협정은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유럽 공동체(EC)가 유고슬라비아 지역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협정 체결 후, EC는 7월 10일 헤이그에서 유고슬라비아에 관한 첫 각료 회의를 열었다.[15] EC 감시단(ECMM)은 슬로베니아 내 군 막사 주변의 긴장을 완화하고, 슬로베니아 당국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간의 철수 협상을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14] 9월 1일에는 ECMM의 활동 범위가 크로아티아까지 확대되었다.[17]

하지만, 협정 내용의 모호성으로 인해 서명국들 간의 해석 차이가 발생했고, 크로아티아에서는 무력 충돌이 계속되었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존재한다.[15] 유고슬라비아 연방 유지를 지지하던 세력은 약화된 반면, 슬로베니아는 연방에서 벗어났고, 세르비아는 국경 재조정의 기회를 얻는 등 각 국가별 이해관계에 따라 협정의 결과가 다르게 나타났다.[19] 유럽 공동체(EC)는 협정을 통해 위기 완화를 시도했으나, 현장 상황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세르비아를 제어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7]

5. 1. 부정적 평가

브리유니 협정은 합의 내용이 거의 없었고, 서명국들마다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 협정은 유럽 공동체가 유고슬라비아 지역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무력 충돌은 계속되었다. 협정이 체결된 날 저녁,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오시예크를 포격하기도 했다.[33]

이 협정으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유지하려던 마르코비치는 고립되었고, 유럽 공동체는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를 암묵적으로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25] 또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지도부의 권한도 일부 약화되었다.[37] 크로아티아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세르비아계 군사가 계속 남아있어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31]

슬로베니아는 연방 정부, 특히 유고 인민군의 영향력에서 벗어났고,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국경을 다시 그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목표를 달성했다.[37] 사브리나 P. 라메트는 슬로베니아의 쿠챤과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가 1991년 1월에 슬로베니아 독립에 세르비아가 반대하지 않기로 합의했고, 쿠챤은 대세르비아 수립에 대한 밀로셰비치의 생각에 공감했다고 언급했다.[25]

유럽 공동체는 브리유니 협정이 위기를 완화시킬 것이라고 보았지만, 세르비아의 전략은 변하지 않았다. 유럽 공동체의 미흡한 대응은 세르비아를 더욱 고무시켰고, 결국 유럽 공동체는 슬로베니아의 분쟁 해결에는 기여했지만, 외교적 노력이 현장 상황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7]

참조

[1] 웹사이트 Brioni Agreement signed https://www.osce.org[...] 2023-07-03
[2] 문헌
[3] 웹사이트 Badinter Commission (for the Former Yugoslavia) https://opil.ouplaw.[...] 2021-09-18
[4] 문헌
[5] 문헌
[6] 문헌
[7]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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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문헌
[29] 문헌
[30] 문헌
[31] 문헌
[32] 문헌
[33] 문헌
[34] 문헌
[35] 문헌
[36] 서적 2002
[37] 서적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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