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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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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관은 유장의 인척으로, 유장의 사위이자 비의의 족부이다. 213년, 이엄과 함께 유비와 싸우다 항복하여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비장군에 임명되었고 파군태수, 강주도독을 역임했다. 223년 도정후에 봉해지고 진위장군으로 승진했으나 37세에 요절했다. 『계한보신찬』에 따르면 재간과 문무를 겸비하고, 관직 수행 능력이 뛰어나며, 재산을 늘리면서도 베풀기를 좋아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장의 처남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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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
인물 정보
이름비관
한자 표기費觀
로마자 표기Fèi Guān
빈백
출생생년 미상
사망미상
출신지형주강하군鄳縣
관직 및 직위
소속촉한
초기 소속유장 휘하
최종 계급진위장군
작위도정후

2. 행적

비의의 족부이자 유장의 인척이었던 비관은 유장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비관의 어머니는 유장의 재당고모였다.

비관은 213년 이엄과 함께 면죽관에서 유비에 맞서 싸웠으나, 이엄과 함께 항복했다. 유비가 익주를 평정한 후 비관을 비장군(裨將軍)에 임명했고, 이후 파군태수와 강주도독을 역임했다.[5] 223년에는 도정후에 봉해지고 진위장군(振威將軍)으로 승진했으나, 3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5]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에 따르면, 비관의 사적은 산실되어 전을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다만 재간이 있고 문무를 겸비하여 사람들을 감탄하게 했으며, 관직에 있을 때 임무를 잘 수행하고 당당하면서도 말을 잘해 자주 거론되었다고 한다. 또한 재산 증식을 많이 꾀하면서도 베풀기를 좋아하여 인의와 공덕이 지극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관은 사람들과의 교제에도 뛰어났는데, 자존심이 강해 자신과 나이·지위가 비슷한 사람하고만 교류했던 이엄보다 20여 세나 어렸지만, 마치 동년배처럼 친밀하게 지냈다.

2. 1. 유장 휘하 시절

213년, 이엄과 함께 면죽관에서 유비와 싸우다가 이엄과 함께 항복했다.

2. 2. 촉한 건국 이후

유비익주를 평정한 후 비장군(裨將軍)에 임명되었다.[5] 파군태수 겸 강주도독을 역임했다. 223년,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지고 진위장군(振威將軍)으로 승진했다.[5] 3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2. 3. 평가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에 따르면, 비관의 사적은 산실되어 전을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재간이 있고 문무에 능하여 사람들을 감탄하게 했다.[4] 관직에 있을 때 임무를 잘 수행하고, 당당하고 총명하게 말을 잘해 자주 거론되었다. 재산 증식을 많이 꾀하면서도 많이 베풀고 인의와 공덕이 지극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람과의 교제에 뛰어났으며, 특히 자존심이 강한 이엄과도 20여 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년배처럼 친밀하게 지냈다. 이엄과 보광이 대립했을 때 중재자 역할을 했다.

3. 《삼국지연의》 속 비관

삼국지연의》에서는 유장의 처남으로 등장한다. 낙성이 함락된 후 유장의 명령으로 이엄과 함께 3만을 이끌고 면죽관을 지켰다. 면죽관에서 이엄이 제갈량의 계책에 걸려 위험에 빠지자 촉군에 항복했고, 이엄이 항복 사자로 파견되어 설득하자 유비군에게 항복했다.

4. 가계

비의 가계도

참조

[1] 문서 費禕
[2] 문서 費禕伝
[3] 문서 季漢輔臣賛
[4] 문서 欷歔
[5] 문서 계한보신찬(季漢輔臣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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