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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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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견은 춘추 시대 명장 손무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지만, 근거는 없다. 젊은 시절 해적을 소탕하여 이름을 알렸고, 황건적의 난과 양주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별부사마에 임명되었다. 반동탁 연합군에 참여하여 동탁을 공격했으며, 이후 원술 휘하에서 유표를 공격하다가 사망했다. 손견은 용맹하고 강인한 면모를 보였으나, 성급한 성격으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아들 손권은 오나라를 건국하고 손견을 무열황제로 추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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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견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손견
로마자 표기Son Geon
본관오군 부춘현 (현재의 저장성 항주시 푸양구)
시대후한
출생155년
사망191년 (향년 36세)
사인전사
사망 장소샹양
문대
시호무열황제
묘호시조
작위오정후
가족 관계
아버지손종
배우자오부인
진부인
자녀손책, 장사환왕
손권, 오나라 대제
손익
손광
손부인
손랑
반준의 처
홍자의 처
딸 최소 1명 이상
관직
주요 경력군사마 → 염독승 → 우이승 → 하비승 → 좌군사마 → 별부사마 → 참군 → 의랑 → 장사태수 → 파로장군 겸 예주자사
최종 관직파로장군
봉호오정후
소속
소속 세력후한
관동 연합
원술군
군대손견군
주요 전투
참전 전투허창의 반란
황건적의 난
양주 반란
반동탁 연합군
양양 전투
이미지
손견 청나라 삽화
손견 청나라 삽화
기타 정보
관련 인물동오의 가계도 참고

2. 생애

손견은 오늘날 저장성 푸양구에 위치한 옛 오군 부춘현에서 태어났으며, 《손자병법》의 저자 손자의 후손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한나라 시대에 그의 가족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21] 아버지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민간 전승에 따르면 손중(孫鍾)이라고 한다.[21]

젊은 시절 손견은 고향 현에서 관리로 일했다. 16세 때 아버지와 함께 항저우로 여행하던 중, 해적들이 육지에서 약탈한 물건을 나누는 것을 목격했다. 칼을 들고 육지로 뛰어올라 병사들을 지휘하여 해적들을 포위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자, 해적들은 속아 넘어가 도망쳤다. 손견은 해적들을 추격하여 모두의 목을 베고 돌아와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172년, 회계군에서 서창의 난을 진압하기 위한 친정부 민병대의 현감을 맡았다. 약 1,000명의 민병대를 모아 훌륭한 공을 세웠고, 양주의 감찰관 장민의 천거로 조정에 추천되었다. 그 결과 광릉군의 부현령으로 임명되었고, 이후에는 하비의 두 현에서 현령으로 일하며 많은 추종자들을 모았다.

184년, 장각이 이끄는 황건적의 난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주준(朱儁) 장군과 함께 유주(오늘날 허난성 남부와 안후이성 북부 지역)에서 반란을 진압했는데, 치열한 전투 끝에 반란군을 완(오늘날 허난성 난양시 완청구)으로 후퇴시켰다. 손견은 스스로 선봉에 서서 홀로 성벽에 올라갔고, 그 뒤를 이어 다른 병사들이 성에 진입하여 반란군을 패퇴시켰다.[23]

이 무렵, 변장(邊章)과 한수(韓遂)가 강족과 결탁하여 량주(涼州; 오늘날 간쑤성 서부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량주 반란). 동탁(董卓)이 반란 진압에 실패하자, 중앙 정부는 장문(張溫)을 파견했고, 장문은 손견을 모사로 초빙했다. 장문이 동탁을 장안의 진영으로 소환했지만, 동탁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고, 나타났을 때 장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손견은 장문에게 동탁을 처형할 것을 건의했지만, 동탁이 서쪽에서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장문은 거절했다.

손견은 매양에서 반란군을 크게 무찔렀지만, 장문은 이 기세를 몰아 반란을 완전히 진압하지 못했고, 결국 수모를 안고 수도 낙양으로 돌아왔다. 한편, 장사군 근처에서 또 다른 소규모 반란이 일어나 반란군이 장사를 포위하자, 손견은 장사군 태수로 임명되었고, 취임 한 달 만에 반란을 진압했다. 그 사이 인근 영릉군(오늘날 후난성 영주시 지역)과 계양군(오늘날 후난성 구이양현 지역)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손견은 구성, 주조, 그리고 과석을 물리치고 반란을 진압하여, 한나라 조정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오정후에 봉했다.

189년, 한령제가 죽고 어린 아들이 하태후와 하진의 보호 아래 놓였다. 하진은 십상시를 제거하기 위해 동탁을 불렀으나, 동탁이 도착하기 전에 환관들에게 암살당했다. 동탁은 수도의 군사 통제권을 장악하고 어린 황제를 폐위시켜 한헌제를 세웠다. 그러나 동탁의 폭정은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고, 이듬해 동중국의 여러 군벌들이 연합하여 동탁을 치기 위한 연합군을 결성했다.

190년 1월,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손견은 이에 호응하여 낙양으로 진군하였다.[50] 가는 길에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형주자사 왕예와 남양태수 장자를 살해했다. 군대를 일으켜 원술에게 합류하여 뤄양에 주둔했고, 원술은 손견을 파로장군 겸 예주 자사로 임명했다. 뤄양에서 군대를 훈련하고 준비했는데, 동탁이 보낸 부대는 손견 군대의 엄격한 규율에 깊은 인상을 받고 뤄양 공격 계획을 포기했다. 양동으로 이동했을 때, 동탁군보다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수십 명의 기병과 함께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붉은 융단 스카프를 벗어 부하 조무에게 건네주었고, 동탁의 군사들은 조무를 쫓는 동안 손견은 도망쳤다. 조무는 스카프를 반쯤 불에 탄 기둥에 걸고 근처의 풀숲에 숨었고, 적들은 기둥을 포위하고 접근했지만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물러났다.

군대를 재편성한 후 낙양으로 진격하여 양인에서 동탁군과 전투를 벌여 빛나는 승리를 거두고 적장 화웅을 죽였다 (191).[28] 이때 누군가 원술에게 손견이 동탁을 물리치고 낙양을 차지하면 복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자, 의심을 품은 원술은 손견군에 대한 식량 공급을 중단했다. 손견은 양인에서 낙양까지 백여 리를 밤새도록 말을 타고 달려 원술을 만나 "한나라를 위해 악당(동탁)을 제거하고, 당신 가족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동탁과 개인적인 원한이 없는데, 중상모략을 믿고 저를 의심하십니까!"라고 말했고, 원술은 수치심을 느끼고 즉시 식량 공급을 재개하라고 명령했다.

손견을 두려워한 동탁은 이각을 사절로 보내 화친을 제안하고 혼인을 제안했으나, 손견은 거친 말로 제안을 거절하고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계속 진격했다. 190년 말, 군대는 수도에서 겨우 90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동탁은 낙양을 불태우라고 명령한 후 장안으로 서쪽으로 후퇴했다. 손견은 낙양 폐허에 들어가 동탁이 발굴한 한나라 황제들의 무덤을 다시 봉인하라고 명령한 후 뤄양으로 돌아갔다. 위조가 지은 《오서》에는 손견이 낙양 남쪽 우물에서 황제의 옥새 중 하나를 발견하여 보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1년, 반동탁 연합군은 분열하여 원술공손찬과 손잡고, 원소는 유표와 손잡고 서로 싸웠다.[45] 원소가 주흔, 주앙, 주우 형제로 하여금 손견을 공격하여 예주를 취하려 하기에 막아냈다.[58] 원술의 명으로 유표도 공격하여 요격 나온 황조를 번성과 등성 사이에서 무찌르고 한수를 건넜다. 유표의 거점 양양을 포위한 채 현산으로 달아난 황조, 여공을 쫓다가 화살과 돌에 맞아 죽었다.[60] 환계생명위험을 무릅쓰고 유표에게 청해 손견의 시신을 받아왔다.[60] 손견을 따라 전전하던 조카 손분이 시신을 영구하여[61] 곡아(지금의 장쑤성 단양시)에 묻었으며,[62] 후일 를 건국하고 황제에 오른 차남 손권에 의해 무열황제(始祖 武烈皇帝)로 추존되었다.[63]

2. 1. 초반 생애

孫堅|손견중국어춘추 시대의 병법가 손자의 자손이라고 전해지나, 손무의 후손이지 않을까란 가설이 있지만 근거는 없다.[21] 17세 때 아버지를 타고 가다가 항저우시 인근 전당(錢唐)에 이르렀을 때 호옥(胡玉) 등의 해적이 상인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것을 목격하였다.희평 원년(172년)에 전당현에서 해적들이 약탈을 하는 상황이였다.[18] 아버지가 만류했음에도 을 쥐고 강가에 올라 병사들을 지휘하는 척 하였다. 전망이 좋은 곳에 서서 마치 대군을 지휘하여 해적들을 포위 섬멸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18] 도적들이 이를 보고는 관군이 온 줄 착각하여 도주하니 추격하여 머리 하나를 베어 돌아왔다. 이로 인해 유명해져서 의 관리가 되었다.

172년(희평 원년) 회계 구장현(句章縣)에서 허창(許昌)이 난을 일으켜 약 만 명을 모으고 스스로 양명황제(陽明―)라 칭하자 군사마(司馬)로서 종군하여 토벌에 공을 세우고 염독승(鹽瀆丞)이 되었다가 우이승(盱眙―)과 하비승(下邳―)을 역임하였다.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지인들과도 친하게 지냈다.[43]

2. 2. 황건적의 난과 양주의 난

184년, 장각이 이끄는 황건적의 난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손견은 주준(朱儁) 장군과 함께 유주(豫州)(오늘날 허난성 남부와 안후이성 북부 지역)에서 반란을 진압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반란군을 완(宛; 오늘날 허난성 난양시 완청구(宛城區))으로 후퇴시켰다. 손견은 스스로 선봉에 서서 홀로 성벽에 올라갔고, 그 뒤를 이어 다른 병사들이 성에 진입하여 반란군을 패퇴시켰다.[23] 이 공적으로 별부사마가 되었다.

185년 음력 8월,[44] 거기장군 장온이 양주(凉州)에서 난을 일으킨 변장·한수 등을 토벌하러 가면서 손견을 참군사(參軍事)로 삼아 자신을 따르게 했다. 어느날 장온이 파로장군(破虜將軍) 동탁을 호출했는데 늦게 온 데다 태도까지 불손하였다. 손견이 군율에 따라 참수할 것을 장온에게 진언했으나 동탁은 농(隴)과 촉(蜀)에서 위세와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탁은 훗날 이 일을 전해듣고 장온과 손견에 대해 원망을 품게 되었다.

장온군은 약 10만 명으로 미양(美陽)에서 싸웠는데 고전을 거듭하였다. 손견 역시 천 명의 병력과 인수(印綬)까지 잃기도 하였다.[45] 11월(음력) 동탁이 반전하여 반군을 크게 깨트렸고 유중(楡中)으로 도망가는 반군을 탕구장군(盪寇―) 주신(周愼)이 3만 명으로 쫓았다.[46] 동탁은 그 뒤를 지키려고 했지만 장온이 출격을 명하였고 손견은 반군의 보급로를 끊자고 했지만 주신이 채택하지 않았다. 이에 한수와 변장이 역으로 보급선을 차단하니 주신은 퇴각하였다.[45]

후한의 토벌군 대군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변장·한수이군은 두려워 흩어졌고, 변장과 한수이는 항복했으며, 손견은 의랑이 되었다.

손견은 형주 남부에서 일어난 구성의 반란 진압 명령을 받고, 장사 태수로 부임하여 여러 가지 계략을 사용하여 이 반란을 진압했다. 구성의 반란을 지원했던 영릉계양의 두 군에도 진출하여 반란을 진압했다.[24] 이때 여강태수 육강의 종자는 의춘장이었는데, 적에게 공격받아 손견에게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손견이 군사를 정비하여 구원하려 하자, 주부가 나아가 간했다. 손견은 “태수에게는 문덕이 없고, 정벌을 공으로 삼아 왔다. 군계를 넘어 공격하여 이국을 평정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죄를 얻는다 해도, 어찌 천하에 부끄러워하겠는가?”라고 답하고, 이에 군사를 진격하여 구원했으며, 적은 이 소식을 듣고 퇴각했다.[25] 이 공적으로 손견은 오정후(烏程侯)에 봉해졌다.

2. 3. 강남 토벌

187년[47] 장사군에서 구성, 영릉군계양군에서 주조(周朝)와 곽석(郭石), 관곡(觀鵠)[48]이 함께 난을 일으키자 장사태수에 임명되어 그 진압을 맡았다. 육강조카인 의춘현장(宜春縣長)이 이들의 습격을 받아 구원을 청하였다. 주부(主簿)가 의 경계를 넘으면 가 된다고 간했지만 손견은 “나는 문덕이 없어 무공으로 봉사하는 사람이오. 경계를 넘음으로써 죄를 짓는다 해도 다른 군국을 도와주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겠소?”라며 출병하였다.[49] 손견은 이들을 모두 평정하고 오정후(烏程侯)에 봉해졌다.

2. 4. 반동탁 연합군

190년(초평 원년) 1월(음력), 반동탁 연합군이 결성되자 손견은 이에 호응하여 낙양으로 진군하였다.[50] 가는 길에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형주자사 왕예와 남양태수 장자(張咨)를 살해했다. 왕예는 손견이 무관이라고 가벼이 대했고 무릉태수 조인(曹寅)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왕예가 동탁을 치기 전에 조인을 죽일 것이라고 하자, 두려워진 조인은 광록대부(光祿大夫) 온의(溫毅)의 격문이라 꾸며 쓴 것을 손견에게 보여주며 왕예를 죽이자고 부추겼다. 손견은 이에 응하여 병사를 이끌고 왕예를 습격하였다. 자신의 죄가 무엇이냐는 왕예의 질문에 ‘모르는 것이 죄’라 답하고 죽였다.[45] 장자는 보급을 잘 안 해준다는 이유로 군중으로 유인해서 죽였다.[51]

189년, 한령제가 죽고 어린 아들이 하태후와 좌장군 하진의 보호 아래 놓였다. 하진은 십상시를 제거하기 위해 동탁을 불렀으나, 동탁이 도착하기 전에 환관들에게 암살당했다. 동탁은 수도의 군사 통제권을 장악하고 어린 황제를 폐위시켜 한헌제를 세웠다. 그러나 동탁의 폭정은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고, 이듬해 동중국(東中國)의 여러 군벌들이 연합하여 동탁을 치기 위한 연합군을 결성했다.

손견 또한 군대를 일으켜 연합군 지도자 중 한 명인 원술에게 합류하여 뤄양(魯陽; 현재 허난성 루산 현)에 주둔했다. 원술은 손견을 파로장군(破虜將軍, "오랑캐를 무찌르는 장군"으로도 번역됨) 겸 유주 자사(豫州刺史중국어)로 임명했다. 손견은 뤄양에서 군대를 훈련하고 준비했다. 동탁이 보낸 부대는 손견 군대의 엄격한 규율에 깊은 인상을 받고 뤄양 공격 계획을 포기했다. 손견이 양동(梁東; 현재 허난성 린루 현 동쪽)으로 이동했을 때, 그는 동탁군보다 수적으로 열세였다. 손견은 수십 명의 기병과 함께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그는 항상 착용하던 붉은 융단 스카프를 벗어 신뢰하는 부하 조무(祖茂중국어)에게 건네주었고, 동탁의 군사들은 조무를 쫓는 동안 손견은 도망쳤다. 추격자들을 따돌릴 수 없었던 조무는 말에서 내려 스카프를 반쯤 불에 탄 기둥에 걸고 근처의 풀숲에 숨었다. 적들은 기둥을 포위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했지만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물러났다.

손견은 군대를 재편성한 후 낙양으로 진격하여 양인(陽人; 현재 허난성 루저우 웬촨 근처로 추정됨)에서 동탁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는 빛나는 승리를 거두고 전투에서 적장 화웅을 죽였다 (191). 이때 누군가 원술에게 손견이 동탁을 물리치고 낙양을 차지하면 더 이상 아무에게도 복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의심을 품은 원술은 손견군에 대한 식량 공급을 중단했다. 손견은 양인에서 낙양까지 백여 리를 밤새도록 말을 타고 달려 원술을 만나 "나는 한나라를 위해 악당(동탁)을 제거하고, 두 번째로 당신 가족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전투에서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저는 동탁과 개인적인 원한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중상모략을 믿고 저를 의심하십니까!"라고 말했다. 원술은 수치심을 느끼고 즉시 손견군에 대한 식량 공급을 재개하라고 명령했다.

손견을 두려워한 동탁은 장군 이각을 사절로 보내 화친을 제안하고 동맹을 굳히기 위해 혼인을 제안했다. 그러나 손견은 거친 말로 제안을 거절하고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계속 진격했다. 190년 말, 그의 군대는 수도에서 겨우 90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동탁은 낙양을 불태우라고 명령한 후 장안으로 서쪽으로 후퇴했다. 손견은 낙양 폐허에 들어가 동탁이 발굴한 한나라 황제들의 무덤을 다시 봉인하라고 명령한 후 뤄양으로 돌아갔다. 위조가 지은 ''오서''()에는 손견이 낙양 남쪽 우물에서 황제의 옥새 중 하나를 발견하여 보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 원술이 스스로 황제를 선포했을 때, 그는 옥새와 교환으로 손견의 부인 무씨를 인질로 잡았다.

낙양에서는 동탁이 실권을 장악했다. 영한 원년(189년), 동탁은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옹립하는 등 횡포를 저질렀다. 이에 초평 원년(190년), 원소(袁紹)를 중심으로 여러 제후들이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군을 일으켰고, 손견도 이에 호응하여 군을 일으켰다. 손견은 먼저 장사(長沙)에서 북상하여 경주(荊州)를 통과하면서 평소 자신을 모욕적으로 대했던 상관인 경주자사 왕예를 살해했다.[27]

다음으로 진격하여 남양 태수 장자(張咨)를 찾아가,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그를 살해했다. 더 나아가 루양의 원술(袁術)을 알현했는데, 원술은 상소하여 손견에게 파려장군(破虜將軍) 대행과 예주(豫州) 자사(刺史)의 직책을 맡겼다.

이후, 자군의 손실을 꺼리는 제후들이 동탁군과 정면으로 싸우지 않는 가운데, 조조(曹操)와 손견이 지휘하는 군단은 동탁군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조조군은 동탁의 부하 서영(徐榮)군에게 패했고, 손견군 또한 서영에게 패했지만, 조조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전선을 이탈한 반면, 손견은 원술의 지원을 받아 즉시 재기하여 동탁군에 계속 도전했다. 초평 2년(191년) 양인의 전투(陽人の戦い)에서 손견은 패잔병을 모아 양인(陽人)에 주둔했다. 동탁은 대독호(大督護) 호전(胡軫)과 기독(騎督) 여포(呂布)를 파견하여 양인의 손견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여포와 호전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들의 부하들은 허둥지둥 도망쳤지만, 손견은 부대를 지휘하여 추격하여 여포와 호전을 패주시켰다. 동탁은 손견의 기세에 두려워하여 이각(李傕)을 사자로 삼아 회유하려 했지만, 손견은 이를 거절했다. 손견은 출격하여 동탁을 크게 무찔렀고, 동탁군의 도위(都尉) 화웅(華雄)을 토벌했다. 동탁은 천도를 결정하고 낙양의 도시를 불태운 후 장안(長安)으로 도망쳤다. 그때 여포는 낙양에서 손견과 싸웠지만, 다시 손견에게 패했다.[28] 손견은 낙양에 입성했다.

2. 5. 원술 휘하

손견은 원술을 따랐는데, 원술은 손견에게 파로장군과 예주자사를 겸하게 했다.[52] 손견은 노양(지금의 허난성 루산현)에서 군대를 조련하였다. 동탁이 군대를 보냈으나 손견의 방비가 철저하여 싸우지 않고 돌아갔다. 이후 양(지금의 허난성 루저우시)으로 옮겼다가 서영의[45] 공격에 크게 패하고 수십 만을 이끌고 탈출하였다. 이때 손견은 붉은 융단 두건을 조무에게 씌워 추격을 따돌렸다.

191년 2월(음력),[53] 손견은 양인에서 군사를 수습하였다. 동탁이 호진여포에게 5,000명을 주어 출전시켰으나, 이들이 반목하는 틈을 타[54] 격파하고 도독 화웅 등을 효수했다. 원술은 손견이 낙양을 점령하면 다른 뜻을 품을까 염려하여[45] 보급을 중단하였다. 손견이 밤새 100여 를 달려가 원술에게 에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하고 사심이 없음을 밝히자, 원술은 의심을 풀었다.

동탁은 손견이 계속 진격해오자 이각을 보내 화친을 청하며 아들들에게 자사나 태수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손견은 ‘동탁의 삼족을 멸하지 않으면 을 못 감는다’며 거절하고 진격을 계속하였다. 대곡에서 동탁을 패주시키고 낙양을 지키던 여포까지 물리쳤다.[45] 손견은 낙양에 입성하여 훼손된 종묘을 복구하였다. 그러나 낙양은 이미 동탁에 의해 황폐해져 보급이 어려웠기에[55] 곧 노양으로 돌아왔다. 이때 전국새를 얻어 원술에게 넘어갔다.[56]

손견은 예주자사였으나, 원소는 주우를 예주자사로 임명하여, 손견과 원술은 주우, 주앙, 주신과 예주를 놓고 다투게 되었다. 이로써 원술과 원소의 대립은 결정적이 되었고, 반동탁연합군은 와해되어 군웅할거의 양상이 나타났다. 손견과 원술은 주우와 주신을 패주시켰다.

초평 2년(191년), 원술은 손견에게 襄陽의 유표를 공격하게 했다.[30] 손견은 유표의 부하 황조를 격파하고 향양을 포위했다. 그러나 견산에서 황조의 부하에게 살해당했다(향양 전투).[31] [32]

환계가 유표에게서 손견의 시신을 되찾아왔다. 손견의 군대는 와해되었고, 손번이 군세를 이어받아 손견의 관을 곡아로 운구했다. 이후 손번은 수춘으로 이동한 원술의 휘하에 들어갔다.

2. 6. 최후

191년, 반동탁 연합군은 분열하여 남양 태수 원술공손찬과 손잡고, 원소는 형주 자사 유표와 손잡고 서로 싸웠다.[45] 원소가 주흔, 주앙, 주우 형제로 하여금 손견을 공격하여 예주를 취하려 하기에 막아냈다.[58] 이 과정에서 공손찬의 종제 공손월전사하였다.[59] 원술의 명으로 유표도 공격하여 요격 나온 황조를 번성(樊城)과 등성(鄧城) 사이에서 무찌르고 한수(漢水)를 건넜다. 유표의 거점 양양(襄陽)을 포위한 채 현산(峴山)으로 달아난 황조, 여공[45] 을 쫓다가 화살과 돌에 맞아 죽었다.[60]

환계생명위험을 무릅쓰고 유표에게 청해 손견의 시신을 받아왔다.[60] 손견을 따라 전전하던 조카 손분이 시신을 영구하여[61] 곡아(曲阿, 지금의 장쑤성 단양시)에 묻었으며,[62] 후일 를 건국하고 황제에 오른 차남 손권에 의해 시조[45] 무열황제(始祖 武烈皇帝)로 추존되었다.[63]

3. 생몰년 문제

손견의 생몰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기록이 존재한다.



다만, 손견은 173년 이전에 전당에서 해적을 쫓아낸 적이 있으므로 193년 설은 맞지 않으며, 손견이 유표를 공격한 시기는 191년 11월(음력) 이후이다.[65] 손책건안 5년(200년) 26살에 죽었는데[45] 《오록》에 실린 손책의 표에서는 17세에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하였다.[66] 배송지는 이를 계산하여 191년이 옳다고 하였고,[67] 사마광도 이를 따랐다.[68]

손책의 전기에 있는 《오록(吳録)》의 주석에 따르면 손책이 조정에 올린 상소에서 아버지가 죽었을 때 자신의 나이가 (동아시아식 나이 계산으로) 17세였다고 밝혔다.[3] 이 기록에 따르면, 손책이 200년에 (동아시아식 나이 계산으로) 26세의 나이로 죽었으므로 손견은 191년에 죽었어야 한다.

『삼국지』 손책(孫策)전의 주석을 쓴 배송지(裴松之)는 『삼국지』 손견전에 기록된 손견의 192년 사망 기록은 오류라고 지적하며, 장번(張璠)의 『한기(漢紀)』와 『오력(吳歷)』 모두 손견이 191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음을 언급했다.[8] 사마광(司馬光) 또한 그의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에서 손견이 191년에 사망했다는 견해에 동의했다.[9]

왕찬(王粲)의 『영웅기(英雄記)』에는 손견이 초평(初平) 4년 정월 7일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0] 이는 줄리안력으로 193년 2월 25일에 해당한다.

손견의 사망 날짜에 대해서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의 주석, 또는 후대의 사서에 따라 서로 다른 기록이 있어 아래에 열거한다.

사료사망 연도 및 사인
진수의 본문 (『삼국지』 오지 손파로전)초평 3년(192년), 형주를 공격하려던 중 단독 행동 중에 황조의 부하 병사에게 화살을 맞아 살해당했다. 『삼국지』 위지 유표전에는 그 후에 이각과 곽사가 장안에 침입한 기록이 있으며, 손견의 죽음은 대략 1월부터 4월 사이로 추정된다.
『삼국지』 오지 손파로전 · 주 『전략사망 연도의 기록이 없다. 유표는 성에 틀어박히고 황조를 성 밖으로 내보내 병사를 모으게 했다. 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손견과 교전하여 패했지만, 덤불에 숨어 있던 병사가 손견을 추격하여 살해했다고 한다.
『삼국지』 오지 손파로전 · 주 『오록』이때 손견의 나이 37세였다.
『삼국지』 오지 손파로전 · 주 『영웅기초평 4년(193년) 정월 7일에 사망했다. 사인은 유표의 부하 여공이 매복시켜 놓았던 매복병에게 당하여, 낙석이 머리에 맞았기 때문이다. 사인에 대해서는 『삼국지연의』에서 채택되었다. 참고로, 『연의』에서는 초평 2년 11월에 사망했다고 한다.
『삼국지』 오지 손토역전 · 주 『오록』 안, 손책의 상소손견이 죽었을 때 손책의 나이가 17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지』 오지 손토역전 · 배송지의 고찰손책의 향년(26세)을 거꾸로 계산하면, 초평 3년 당시 손책의 나이는 18세였어야 하며, 『오록』 상소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한기』와 『오력』은 각각 초평 2년(191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것이 옳고 본전은 잘못되었다고 단정한다.
후한서』 효헌제기초평 3년, 계교의 전투(원소와 공손찬의 전투) 앞에 기록되어 있다. 동탁의 죽음은 그 이후이다.
자치통감』 권60 · 한기 52초평 2년 조에 기록되어 있다.


4. 평가

손견이 낙양으로 진격할 때 유애(劉艾)는 미양에서의 고전을 예로 들며 손견의 군사적 재능이 이각, 곽사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이에 동탁은 그때는 병사들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며 손견은 용병을 꽤 잘하고 조금 우직한 면이 있다고 하였다.[45] 부인 오씨의 친정에서는 손견이 경박하고 교활하다 여겨 구혼을 거절했었다.[69]

진수는 손견에 대해 '용맹하고 강인하여 외로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와 명성을 떨쳤으며 충장지렬(忠壯之烈)이 있었다. 다만 큰아들 손책과 마찬가지로 언행과 성격이 가볍고 조급하여 스스로를 해치고 말았다.'고 평가하였다.[45] 배송지 역시 손견이 반동탁 연합군 중 가장 충렬(忠烈)이란 말에 어울린다고 하였다.[70] 반면에 홍매(洪邁)는 '사사로운 원한으로 상관인 왕예를 죽이고 군대의 위세를 이용해 이웃 군수 장자도 죽였으며 역심을 품은 원술의 명을 받들어 유표까지 쳤는데 어찌 임금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비판하였다.[71]

손견은 훌륭한 용모에 성격은 활달했으며, 다른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행동을 좋아했다고 한다.[33]

진수는 다음과 같이 손견을 평가했다.


  • "용감하고 강직하며, 오직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여 일어섰고, 장온에게 동탁을 토벌할 것을 권했으며, 동탁에 의해 파괴된 낙양의 능묘를 수리하였다. 충의와 용맹을 갖춘 열사이다."[34]
  • "행동이 경솔하여 결과를 내는 것을 서두르다 보니 성급하였다. 그러한 모습이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실패하는 원인이 되었다."[35]


배송지는 "같은 시대, 의로 일어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충렬한 의지를 가졌다."라고 손견을 평가했다.[36]

공손찬은 "동탁을 몰아내고, 무덤과 능묘를 정화하였다. 그 공적은 헤아릴 수 없다"라고 손견을 평가했다.[37]

5. 가족 관계

항목내용
아버지손종
형제손강, 손정
부인오부인
자녀손책, 손권, 손익, 손광, 손랑, 손부인, 판미의 아내, 홍자의 아내
손자손소, 손등, 손려, 손화, 손패, 손분, 손휴, 손량, 손노반, 손노유
기타손경(孫景), 손강(孫羌), 손견의 여동생인 손씨(孫氏) (서곤의 어머니이자 서씨의 조모)[15], 손하, 서곤 (여동생의 아들), 오경 (오부인의 남동생), 서진 (손견의 여동생의 남편)


6. 대중문화 속 손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손견은 고정도를 쓰며 강동의 호랑이라 불린다. 동탁 토벌전의 사수관 전투 초반에는 선전했으나, 원술에게서 군량 보급을 받지 못해 화웅에게 패했다. 낙양에서 전국새를 얻은 후 역심을 품고 장사로 돌아가려다 원소에게 제지당하자, "만약 보물을 숨겼다면 화살을 맞고 좋지 않게 죽을 것이다!"라고 맹세했다.[42] 그러나 유표와의 전투에서 여공의 유인에 걸려 온몸에 돌과 화살을 맞고 머리가 터져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14]

손견과 원소가 옥새를 두고 다투는 청나라 시대 그림.


14세기 역사소설 『삼국지』에서 손견은 위대한 무장이자 손자의 후손으로 묘사되며,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고 동탁 토벌 연합군에 합류한다. 화웅과의 전투에서 자신의 붉은 머리띠를 조모(祖茂중국어)에게 넘겨주어 화웅의 주의를 돌리게 했으나, 조모는 화웅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후 손견은 관우가 화웅을 상대할 때까지 지원을 요청하며 버텼다.

동탁이 장안으로 후퇴한 후, 손견은 가장 먼저 낙양에 입성하여 불을 끄도록 명령했다. 옥새를 발견한 손견은 야망을 품고 후퇴하려 했으나, 원소에게 심문을 받자 "만약 내가 보물을 숨겼다면, 화살에 맞아 비참하게 죽을 것입니다!"라고 맹세하며 낙양을 떠났다. 경주에서 유표의 공격을 받아 패배한 손견은, 이후 원술의 명령에 따라 경주를 공격하다 절벽 아래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손견의 시신은 포로 황조와의 교환을 통해 손견 진영으로 돌아왔다.

손견은 코에이(Koei)의 ''삼국무쌍'' 시리즈와 ''무장풍운록'' 시리즈, ''삼국지'' 시리즈에 등장한다.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Creative Assembly)의 ''토탈 워: 삼국''에서는 플레이 가능한 군주로 등장하며, SD건담 시리즈 ''BB전사 삼국전''에서는 건담 손견 제피란서스로 등장한다. 코에이의 ''臥龍:폴른 다이너스티''에서는 캐릭터이자 보스 중 하나로 등장한다.

참조

[1] 書籍 Sanguozhi vol. 46 annotation
[2] ウィキペディア Historical discrepancies on death date
[3] 文書 Sun Ce's Memorial
[4] 書籍 Sanguozhi vol. 46 annotation
[5] 書籍 Sanguozhi vol. 46
[6] 書籍 Houhanshu 192-02-01/192-04-29
[7] 書籍 Houhanji 192-05-29/192-06-27
[8] 書籍 Sanguozhi zhu, vol. 46 Commentary
[9] 書籍 Zizhi Tongjian Kao Yi, vol. 03
[10] 書籍 Sanguozhi vol. 46 annotation
[11] 書籍 Sanguozhi vol. 50
[12] 書籍 Sanguozhi vol. 46
[13] 書籍 Sanguozhi vol. 32
[14] 書籍 Jiankang Shilu vol. 01 annotation
[15] 書籍 Sanguozhi, vol. 50
[16] 文書 Sun Lang's birth order
[17] 書籍 Sanguozhi
[18] ウィキソース 三國志/卷46#孫堅
[19] ウィキソース 三國志/卷46#孫堅
[20] 書籍 三国志
[21] 文書
[22] 文書
[23] 書籍 三国志
[24] 書籍 三国志
[25] 書籍 呉録
[26] 書籍 三国志
[27] 書籍 呉録
[28] 書籍 後漢書
[29] 書籍 江表伝
[30] 書籍 三国志
[31] 書籍 三国志
[32] 書籍 三国志
[33] 書籍 呉書
[34] 文書
[35] 文書
[36] 문서 원문「於興義之中、最有忠烈之思」
[37] 서적 삼국지
[38] 서적 삼국지
[39] 서적 삼국지
[40] 문서 손이 아닌 자식이라는 설도 있다.
[41] 서적 삼국지
[42] 서적 삼국지연의
[43] 서적 강표전
[44] 서적 삼국지
[45] 서적 산양공재기
[46] 서적 후한서
[47] 서적 자치통감
[48] 서적 후한서
[49] 서적 오록
[50] 서적 후한서
[51] 서적 삼국지
[52] 서적 후한서
[53] 서적 후한서
[54] 서적 영웅기
[55] 서적 후한서
[56] 서적 오서, 산양공재기
[57] 서적 후한서
[58] 서적 후한서
[59] 서적 후한서
[60] 서적 삼국지
[61] 서적 삼국지
[62] 서적 삼국지
[63] 서적 삼국지
[64] 서적 후한서
[65] 서적 후한서
[66] 서적 오록
[67] 서적 삼국지
[68] 서적 자치통감
[69] 서적 삼국지
[70] 서적 삼국지
[71] 간행물 용재속필 10권 손견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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