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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송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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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송은 후한 시대 촉군 성도 출신으로, 익주목 유장의 참모였다. 208년, 조조에게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나 냉대를 받자 유비와 결탁하여 유장을 배신할 계획을 세웠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후 유비에게 익주를 넘길 것을 설득하고 익주의 정보를 제공하며 유비의 익주 정복을 도왔다. 그러나 형 장숙이 유장에게 밀고하여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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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송 (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장송
본명장송 (張松)
자(字)자교(子喬)
출생지촉군 성도
사망일213년
사망 원인사형
국적후한
직업관리, 조언가
관직익주별가종사
소속유장
친척장숙 (형)
장표 (조카/양자)
로마자 표기Jang Song
간체자张松
병음Zhāng Sōng
상세 정보
장송
장송

2. 생애

장송은 쓰촨성 청두의 촉군 출신으로, 후한 익주목 유장의 참모였다. 그의 직책은 별가종사였다.[1]

208년 후반, 장송은 유장이 그의 형제 장숙(張肅)을 조조에게 사신으로 보냈을 때 첫 임무를 맡았다. 당시 조조는 형주 대부분을 정복하고 장판파 전투에서 유비를 몰아낸 상황이라 장송을 소홀히 대했다. 장송은 이에 분개하여 유장에게 조조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조언했다.[2] ''한진춘추''(漢晉春秋중국어)에 따르면, 조조는 장송을 깔보고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3]

이후 조조가 적벽 전투에서 패배하자, 장송은 조조를 비판하며 유장에게 그와의 관계를 단절할 것을 촉구했다. 동시에 유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도록 권하며, 같은 씨족 출신임을 강조했다. 유장은 법정을 유비와 교류하도록 보냈고, 법정과 맹달에게 수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유비의 형주 방어를 돕도록 했다.[4]

211년경, 유장은 조조한중군장로를 공격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했다. 장송은 유비를 익주로 초청하여 장로 정벌을 돕도록 조언하며, 조조의 군대가 강력하고 유비가 조조의 경쟁자임을 강조했다.[5] 또한 익주 내부 관리들의 불만을 언급하며 유비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설득했다.[6]

유장은 장송의 조언을 듣고 법정에게 4,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유비를 익주로 맞이하도록 했다. 황권과 왕뢰(王累)는 반대했지만, 유장은 듣지 않았다.[7]

장송과 법정은 유비가 익주를 장악하도록 돕기로 하고, 유비가 한중군을 점령하도록 익주로 초청했다.[8][9] 유비는 제갈량, 관우, 장비, 조운형주에 남겨둔 후 익주로 진군했고, 유장은 유비를 부현(涪縣; 현재의 쓰촨성, 몐양)에서 환영했다. 장송은 법정에게 방통의 지원을 받아 유비에게 유장을 매복할 수 있다고 보고했지만, 유비는 성급하다고 생각했다.[10]

213년 초,[11] 장송은 법정과 유비에게 편지를 보내 성공이 눈앞에 있는데 떠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송의 형 장숙(張肅)이 형의 음모를 알고 유장에게 밀고하여 장송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1] 유비는 장송의 죽음에 대해 "군교(장숙의 자)가 내 첩자를 죽였다!"라고 외쳤다.[11]

2. 1. 초기 활동과 조조와의 만남

익주 촉군 성도현(成都縣) 출신으로, 키가 작았다.[15] 유장을 섬기며 별가종사(別駕從事)로 일했다.[14]

208년(건안 13년),[16] 조조형주를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에 유장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예를 표했는데, 세 번째 사신으로 장송이 파견되었다. 조조는 이미 형주를 평정한 상황이라 장송을 성의껏 대우하지 않았고, 영창군[17] 비소현령(比蘇―) 자리를 주었다.[18] 장송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 조조가 적벽 대전에서 패배하자, 장송은 유장에게 조조와 관계를 끊고 유비와 제휴할 것을 권했다. 장송은 유비와 친분이 있던 법정을 사신으로 추천했다.[19]

유장은 유비와 연합하고 법정과 맹달을 통해 병사 수천 명을 지원했으며, 많은 선물을 보냈다. 법정은 돌아와 장송에게 유비가 웅대한 계략을 가졌다고 칭찬했다. 유장과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장송과 법정은 유비를 받들 계획을 세우고 때를 기다렸다.[19]

배송지가 《삼국지》 선주전에 주석을 달며 인용한 위소(위요)의 《오서》(吳書)에서는, 법정이 유비와 밀약하기 전에 장송이 먼저 유비를 만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장송은 익주의 병기·물자·인마의 수량, 요해처의 거리 등 정보를 유비에게 알려주고 지도까지 그려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장전〉, 〈선주전〉, 〈법정전〉에 따르면 장송은 유비에게 파견된 적이 없다. 사마광은 이를 《오서》의 오류로 보아 《자치통감》에 넣지 않았다.[21]

《삼국지》 선주전 주석에 인용된 『익부기구잡기』에 따르면, 장송은 키가 작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면이 있었지만, 식견과 판단력은 뛰어났다. 조조에게 냉대를 받았지만, 양수에게는 인정을 받았다. 양수가 장송에게 조조가 편찬한 병법서를 보여주자, 장송은 연회 중에 그것을 모두 읽고 곧바로 암송하여 보였다. 양수는 이전부터 장송을 높이 평가했지만, 이 일로 더욱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2. 2. 유비와의 내통

張松중국어유비와 내통하여 익주를 넘기려 하였다.

211년, 조조가 한녕 장로를 정벌하려 한다는 소문에 유장이 두려워하자, 장송은 유비와 손을 잡을 것을 권하였다. 장송은 조조군이 천하무적이라며, 장로의 자원을 이용해 촉을 경략한다면 막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비가 유장의 종실이고 조조의 오래된 원수이며 용병도 잘하므로, 유비라면 장로를 쳐부술 수 있다고 설득했다. 또한, 방희, 이이(李異) 등이 교만하고 외부 세력에 기울어 있어 유비를 부르지 않으면 안팎에서 난을 겪을 것이라고 경고했다.[15] 황권왕루가 반대했지만, 유장은 법정을 시켜 유비를 불러들였다.[15][7]

법정은 유비에게 유장 몰래 헌책하기를, 유장의 나약함을 틈타 의 고굉(股肱)인 장송이 내응하면 익주를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유비는 이에 응하였다.[15]

배송지가 《삼국지》선주전에 주석을 달며 인용한 위소(위요)의 《오서》(吳書)에서는 법정이 유비와 밀약하기 전에 장송이 먼저 유비를 대면해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하였다. 또 익주의 병기·물자·인마의 수량, 각 요해처의 거리 등 모든 정보를 알려주고 지도까지 그려주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장전〉, 〈선주전〉, 〈법정전〉에 의하면 장송은 유비에게 파견된 적이 없다. 사마광은 이를 《오서》의 오류로 보아 《자치통감》에 삽입하지 않았다.[21]

장송과 법정은 유비에게 익주의 지리, 물자, 군대 배치 등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장송은 심지어 익주 지도를 그려 유비에게 주었다.[8] 이들은 유비가 유장으로부터 익주를 장악하도록 돕기로 하고, 유비가 한중군을 점령하도록 익주로 초청했다.[8][9]

213년 초,[11] 장송은 법정과 유비에게 편지를 보내 성공이 눈앞에 있는데 떠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송의 형 장숙(張肅)이 형의 음모를 알고 유장에게 밀고하여 장송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11] 유비는 장송의 죽음에 대해 "군교(장숙의 자)가 내 첩자를 죽였다!"라고 외쳤다.[11]

2. 3. 배신과 죽음

장송의 형 장숙張肅중국어은 유비와 장송 간의 비밀 통신을 알게 되었다. 장숙은 연루될까 두려워 유장에게 이를 밀고했고, 유장은 장송을 체포해 처형했다.[11] 또한 유장은 성도로 가는 관문을 지키는 부하들에게 유비에게 보내는 비밀 문서와 편지를 보관하도록 명령했다. 유비는 장송의 죽음에 대해 듣고 "군교가 내 첩자를 죽였다!"라고 외쳤다.[11]

장송은 유비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유비법정에게 편지를 보내 만류하려 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형 장숙이 유장에게 밀고했다. 결국 유비와 장송의 계획은 유장의 귀에 들어가 장송은 참수당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술자리에서 유비에게 보내는 편지를 형에게 발각되어, 유비의 입촉 계획을 유장에게 밀고당해 분노한 유장에 의해 처자식과 함께 처형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3. 평가

장송은 방탕하고 절조가 없었지만, 식견이 넓고 과단성이 있었으며 재간도 뛰어났다. 조조에게 푸대접을 받았으나, 주부 양수에게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양수는 조조가 지은 병서를 연회 자리에서 을 마시면서 한번 보고 암송하는 장송을 남다르게 여겼다.[15]

3. 1. 삼국지연의에서의 장송

소설삼국지연의》에서 장송은 를 영년(永年)으로, 이마가 좁고 머리는 뾰족하며 는 들창코에 는 뻐드렁니인데 마저 5척(尺)도 안 되는 추한 인물로 묘사된다. 다만 목소리만큼은 구리종처럼 우렁차다고 하였다.

한중군장로동관 전투에서 서량 세력을 격파한 조조에 대비해 남하 준비를 하자, 유장에게 장송이 자신 있게 나서며 첫 등장한다. 장송은 조조로 하여금 장로의 배후를 치게 하자고 제안하여 사자로 가는데, 실은 익주를 바칠 목적에서 지도를 챙겨 간다. 당시 조조는 마초를 무찌른 후 오만해져 장송을 냉대한다. 장송의 비꼬는 말솜씨에 양수가 장소를 옮겨 대담한다. 장송이 조조는 공자맹자의 도(공맹지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손자오자도 통달하지 못한 채 무력이나 권모술수로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고 들었다고 하자, 양수가 조조가 쓴 병법서인 《맹덕신서》(孟德新書)를 보여준다. 장송은 이는 전국 시대에 누군가 쓴 으로 촉의 삼척동자도 암송한다며 밑밥을 깔고는 책 내용을 모조리 외워버린다. 그 과목불망(過目不忘)[22]에 놀란 양수는 조조와의 재만남을 주선해준다.

조조는 우연히 옛사람과 맞아떨어진 것 같다며 《맹덕신서》를 불태우고는 열병하는 것을 장송에게 구경시킨다. 장송은 복양 전투, 완성 전투, 적벽 전투와 화용도(華容道), 동관 전투에서 조조가 겪은 수모를 나열하며 희롱한다. 화가 난 조조한테 죽을 뻔하다가 양수와 순욱이 말린 덕분에 매질을 당하고 쫓겨난다.

장송은 형주유비를 떠보러 가는데, 조운이 영주(郢州) 입구서부터 마중 나와있다. 형주 경계에서 이 저물어 관역으로 가니 관우가 미리 와있어 영접한다. 다음 날 유비가 제갈량방통까지 대동해 성밖에서 친히 맞이한다. 사흘간 주연이 계속되는데 유비는 익주 얘기를 꺼내지도 않는다. 작별할 땐 유비가 10 밖 장정(長亭)까지 나와 송별연을 베푸는데 눈물을 줄줄 흘린다. 장송은 감복하여 유비에게 익주를 취해 기반으로 삼으라 조언하고 내응을 약속하며 지도도 헌상한다.

익주로 복귀한 장송은 친구인 법정맹달부터 만나 유비를 익주의 새 군주로 모시기로 뜻을 모으고 그 둘을 유비에게 사자로 보내기로 한다. 조조 및 장로 방어를 위한답시고 유장에게 유비 초청을 권유해 성사시킨다. 유비가 군사를 몰아 익주로 들어온다. 황권, 이회, 왕루 등이 여전히 간언하므로 장송은 촉의 문관들이 그 처자들만을 위할 뿐 주공에겐 충성하지 않는다고 모함한다. 유장이 부성에서 환영연을 개최하고 유비한테 만족하여 성도에 남아있던 장송에게 입고 있던 황금 500냥을 포상한다. 제61회에서 유비는 그 습격을 거부하고 가맹관으로 가 적당한 시기를 노린다.

제62회, 유비가 거짓으로 형주로 돌아간다고 성도에 통보한다. 장송이 진짜인 줄 알고 말리는 편지를 쓰는데 형 장숙이 방문한다. 장송은 서찰을 급히 옷소매에 숨기고 서로 대화하는데 장숙이 보기에 정신이 없는지라 마음속에 의혹이 생긴다. 술자리 중에 서신이 떨어져 장숙의 종인이 줍는다. 그 서신을 읽은 장숙이 유장에게 밝힘으로써 장송의 일가가 처형된다.

4. 가계


  • 형: 장숙
  • 아들: 장표(張表) - 《익부기구전》에서는 장숙의 아들, 《화양국지》에서는 장송의 아들이라 하였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23]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31
[2] 서적 Sanguozhi vol. 31
[3] 서적 Sanguozhi vol. 31
[4] 서적 Sanguozhi vol. 31
[5] 서적 Sanguozhi vol. 32
[6] 서적 Sanguozhi vol. 31
[7] 서적 Sanguozhi vol. 31
[8] 서적 Sanguozhi vol. 32
[9]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2
[10] 서적 Sanguozhi vol. 32
[11] 서적 Sanguozhi vol. 32
[12] 서적 Yi Bu Qijiu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2
[13] 서적 화양국지교보도주·권십일·원부사녀목록일권
[14] 서적 화양국지 12권 양익영삼주선한이래사녀목록 혹은 익양영삼주선한이래사녀목록
[15] 서적 익부기구잡기
[16] 서적 후한서 75권 열전 제65 유언 (삼국지)
[17] 서적 속한지 23권 군국 제5
[18] 서적 화양국지 5권 공손술유이목지
[19] 서적 삼국지 37권 촉서 제7 법정
[20] 서적 삼국지 37권 촉서 제7 방통
[21] 서적 자치통감고이 3권
[22] 서적 진서 114권 재기 제14 부견下 부융(苻融)
[23] 서적 삼국지 43권 촉서 제13 마충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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