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롤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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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 롤링(Bill Rowling)은 뉴질랜드의 정치인으로, 1974년부터 1975년까지 뉴질랜드 총리를 역임했다. 1927년 모투에카에서 태어나 캔터베리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교사로 활동하다가, 군 복무 후 정계에 입문했다. 1962년 뷸러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재무장관을 거쳐 총리가 되었다. 총리 재임 중 석유 파동에 대응했으나, 1975년 총선에서 패배하여 야당 대표를 지냈다. 이후 주미 대사를 역임하고, 뉴질랜드 국제 문제 연구소 회장을 지냈다. 1995년 넬슨에서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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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롤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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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존칭 접두사 | 각하 |
이름 | 월리스 에드워드 "빌" 롤링 |
출생일 | 1927년 11월 15일 |
출생지 | 모투에카, 뉴질랜드 |
사망일 | 1995년 10월 31일 |
사망지 | 넬슨, 뉴질랜드 |
자녀 | 5명 |
정당 | 노동당 |
모교 | 캔터베리 대학교 |
서명 | Bill Rowling Signature.jpg |
군 복무 | 뉴질랜드 육군 |
복무 기간 | 1956–61 |
계급 | 대위 |
전투 | 말라야 비상사태 |
정치 경력 | |
재임 기간 | 1974년 9월 6일 – 1975년 12월 12일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총독 | 데니스 블런델 |
부총리 | 밥 티저드 |
전임 총리 | 노먼 커크 |
후임 총리 | 로버트 멀둔 |
야당 대표 재임 기간 | 1975년 12월 12일 – 1983년 2월 3일 |
야당 대표 부대표 | 밥 티저드, 데이비드 랭 |
전임 야당 대표 | 로버트 멀둔 |
후임 야당 대표 | 데이비드 랭 |
노동당 대표 재임 기간 | 1974년 9월 6일 – 1983년 2월 3일 |
노동당 대표 부대표 | 밥 티저드, 데이비드 랭 |
전임 노동당 대표 | 노먼 커크 |
후임 노동당 대표 | 데이비드 랭 |
외무부 장관 재임 기간 | 1974년 9월 6일 – 1975년 12월 12일 |
전임 외무부 장관 | 노먼 커크 |
후임 외무부 장관 | 브라이언 탈보이스 |
재무부 장관 재임 기간 | 1972년 12월 8일 – 1974년 9월 6일 |
전임 재무부 장관 | 로버트 멀둔 |
후임 재무부 장관 | 밥 티저드 |
통계부 장관 재임 기간 | 1972년 12월 8일 – 1974년 9월 6일 |
전임 통계부 장관 | 로버트 멀둔 |
후임 통계부 장관 | 믹 코널리 |
노동당 총재 재임 기간 | 1970년 5월 5일 – 1973년 5월 8일 |
전임 노동당 총재 | 노먼 더글러스 |
후임 노동당 총재 | 찰스 베넷 |
의원 지역구 | , (1962–1972)}} |
의원 재임 기간 | 1962년 7월 7일 – 1984년 7월 14일 |
전임 의원 | 제리 스키너 |
후임 의원 | 켄 셜리 |
2. 생애
빌 롤링은 1927년 11월 15일 뉴질랜드 남섬 북부 모투에카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는 과수원을 운영했으며, 롤링은 어린 시절 노동당의 주요 정치인들과 교류하며 정치적 영향을 받았다.[1]
캔터베리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고 교사 자격을 취득한 후,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풀브라이트 프로그램 장학생으로 미국에서 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1] 1958년에는 군에 입대하여 4년간 복무하며 대위까지 진급했다. 말레이시아 비상사태에 파병되기도 했다.[26]
1960년 총선에서 노동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2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1972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하자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재무장관 재임 중 제1차 석유 파동에 대응하여 뉴질랜드가 타국에 비해 큰 피해를 입지 않도록 노력했다.[26]
1974년 노먼 커크 총리가 재임 중 사망하자, 후임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75년 총선에서는 로버트 멀둔이 이끄는 국민당에 패배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노동당 당수로 활동하다가 1982년에 데이비드 롱기에게 당수직을 넘겨주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주미 대사를 역임하고, 테 파파 설립에 기여했다. 1995년 10월 31일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 '''정치 경력'''
기간 | 정당 | 선거구 | 직책 |
---|---|---|---|
1962년 - 1972년 | 노동당 | 불러 | 국회의원 |
1972년 - 1984년 | 노동당 | 태즈먼 | 국회의원, 재무장관(1972-1974), 총리(1974-1975) |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빌 롤링은 1927년 11월 15일 뉴질랜드 남섬 북부 모투에카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과수원을 운영했다.[26] 롤링의 아버지는 노동당의 마이클 조셉 세이비지, 피터 프레이저, 패디 웹, 밥 셈플 등 주요 정치인들과 친분이 있었으며, 이들은 롤링의 유년 시절에 큰 영향을 미쳤다.[1]롤링은 지역 초등학교를 거쳐 넬슨 칼리지에 진학했다. 17세에 학교를 떠나 일본 점령 기간 중 J군에 복무하기 위해 뉴질랜드 육군에 입대하려 했으나,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1]
이후 캔터베리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고, 크라이스트처치 교육대학에서 교사 자격을 취득했다. 졸업 후에는 모투에카, 크라이스트처치, 와버리, 노스랜드 등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26] 1953년에는 마오리 교육 서비스에 합류하여 왕가페 항의 한 학교에서 근무하며 지역 정치 조직 활동에 참여, 노동당의 새로운 지부를 설립하기도 했다. 1955년부터 1956년 사이에는 풀브라이트 프로그램 장학생으로 미국에 건너가 시애틀의 한 중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뉴질랜드 귀국 후에는 후케레누이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홉슨 노동당 대표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1]
1958년, 롤링은 교직을 떠나 뉴질랜드 육군에 입대하여 4년간 복무하며 대위 계급까지 올랐다. 육군 교육 부국장을 역임하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단기간 복무했는데, 이는 말레이시아 비상사태와 관련된 파병이었다.[26] 부국장 재직 중에도 캔터베리 대학교에서 시간제로 경제학 강의를 하고 회계학을 공부했다.[1]
2. 2. 교사 경력
빌 롤링은 모투에카(Motueka)의 농가 출신으로, 넬슨의 명문 넬슨 칼리지를 졸업했다. 이후 크라이스트처치의 캔터베리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교원 양성 기관을 졸업하여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교직에서 은퇴한 후에는 뉴질랜드 군에 입대하여 군사학교 조교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근무했으며, 말라야 사태에 배치되기도 했다.2. 3. 정치 입문
1960년 총선에서 로링은 크라이스트처치의 펜덜턴 선거구에서 노동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국가당의 해리 레이크에게 패배하였다. 그러나 2년 후, 제리 스키너의 사망으로 인해 발생한 보궐선거에서 불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농업 배경을 가진 로링은 스키너가 이전에 맡았던 농업 및 토지 담당 노동당 대변인이 되었다.[2] 로링은 1972년 총선까지 불러 선거구를 유지했으며, 이 선거구가 해산되자 그는 새로운 태즈먼 선거구에서 성공적으로 경쟁했다. 그는 코머 캠핑카를 타고 선거구를 오가며 선거 운동을 했고, 그 기간 동안 캠핑카에서 생활했다.[3]의회에 입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링은 노동당 내부 서열을 통해 승진하기 시작했다. 1966년, 1967년, 1968년 당 대회에서 노동당 부위원장직에 출마했지만 매번 헨리 메이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지만, 1969년에는 메이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다.[2] 다음 해 그는 당 의장으로 승격되었으며, 노동당 역사상 처음으로 무투표로 당 의장에 선출된 첫 번째 사람이었다.[3] 노동당 지도자 노먼 커크 하에서 야당이었던 동안 로링은 해외 무역, 마케팅, 방송, 광산, 계획 개발 및 천연 자원을 포함한 여러 부문의 대변인을 역임했다.[4]
1972년 총선을 앞두고 커크는 로링에게 더 불리한 태즈먼 선거구에서 안전한 크라이스트처치의 에이번 선거구로 이전할 것을 설득하려고 했다. 커크는 당시 당 의장이었던 로링이 선거에서 패할까 봐 우려했고 그의 경제 전문 지식을 잃고 싶지 않았지만, 로링은 그러한 이기적인 행동은 당 의장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했다.[5]
3. 뉴질랜드 국회의원
빌 롤링은 1962년 제리 스키너의 사망으로 인한 보궐선거에서 뉴질랜드 노동당 후보로 뷸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농업 배경을 가진 롤링은 스키너가 이전에 맡았던 농업 및 토지 담당 노동당 대변인이 되었다.[2] 1972년 선거에서 선거구가 개편되면서 태즈먼 선거구로 옮겨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롤링은 코머 캠핑카를 타고 선거구를 오가며 선거 운동을 했고, 그 기간 동안 캠핑카에서 생활했다.[3]
의회에 입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롤링은 노동당 내부 서열을 통해 승진하기 시작했다. 1966년, 1967년, 1968년 당 대회에서 노동당 부위원장직에 출마했지만 매번 헨리 메이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하지만 1969년에는 메이를 물리치고 부위원장에 당선되었으며,[2] 다음 해에는 당 의장으로 승격되었다. 롤링은 노동당 역사상 처음으로 무투표로 당 의장에 선출된 인물이었다.[3] 노동당 지도자 노먼 커크 하에서 야당이었던 동안 롤링은 해외 무역, 마케팅, 방송, 광산, 계획 개발 및 천연 자원을 포함한 여러 부문의 대변인을 역임했다.[4]
1972년 총선을 앞두고 커크는 롤링에게 더 불리한 태즈먼 선거구에서 안전한 크라이스트처치의 에이번 선거구로 이전할 것을 설득하려고 했다. 커크는 당시 당 의장이었던 롤링이 선거에서 패할까 봐 우려했고 그의 경제 전문 지식을 잃고 싶지 않았지만, 롤링은 그러한 이기적인 행동은 당 의장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했다.[5]
빌 롤링의 국회의원 당선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62년 선거 | 하원의원 (뷸러 선거구) | 33대 | 뉴질랜드 노동당 | 44.98% | 5,242표 | 1위 | ![]() |
1963년 선거 | 하원의원 (뷸러 선거구) | 34대 | 뉴질랜드 노동당 | 52.28% | 7,338표 | 1위 | |
1966년 선거 | 하원의원 (뷸러 선거구) | 35대 | 뉴질랜드 노동당 | 48.36% | 6,510표 | 1위 | |
1969년 선거 | 하원의원 (뷸러 선거구) | 36대 | 뉴질랜드 노동당 | 53.36% | 8,319표 | 1위 | |
1972년 선거 | 하원의원 (태즈먼 선거구) | 37대 | 뉴질랜드 노동당 | 52.52% | 8,046표 | 1위 | |
1975년 선거 | 하원의원 (태즈먼 선거구) | 38대 | 뉴질랜드 노동당 | 46.09% | 8,344표 | 1위 | |
1978년 선거 | 하원의원 (태즈먼 선거구) | 39대 | 뉴질랜드 노동당 | 49.08% | 8,973표 | 1위 | |
1981년 선거 | 하원의원 (태즈먼 선거구) | 40대 | 뉴질랜드 노동당 | 41.57% | 8,803표 | 1위 |
3. 1. 재무장관 (1972-1974)
1972년 총선에서 노먼 커크가 이끄는 노동당이 승리하자 빌 롤링은 재무장관으로 지명되었다.[1] 재무장관으로서 롤링은 국가주의적 감정을 불어넣어, 뉴질랜드인에 의한, 뉴질랜드인을 위한 국가 개발을 목표로 선언하고, 뉴질랜드인들이 자국과 산업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다.[26]롤링의 재무부 장관 재임 기간은 다소 격동적이었다. 제1차 석유 파동 대응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뉴질랜드는 타국에 비해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1973~1975년 경기 침체, 전례 없는 유가 폭등, 정부 지출의 급증으로 1974년까지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4]
정부는 선거 공약을 이행하는 데 많은 돈을 지출했고, 커크는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출 감소를 꺼렸다. 롤링은 정부 지출 감소를 주장했고, 커크는 그를 구두쇠라고 비난했다.[5]
4. 뉴질랜드 총리 (1974-1975)
1972년 총선에서 노먼 커크가 이끄는 노동당이 승리하자 롤링은 재무장관으로 지명되었다. 재무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발생한 제1차 석유 파동 대응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그 결과 뉴질랜드는 타국에 비해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74년 노먼 커크가 재임 중 폐색전증으로 인해 사망하자 후임 총리로 선출되었다.
1974년 8월 노먼 커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부총리였던 휴 왓은 며칠간 권한대행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노동당 의원총회에서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했다. 롤링은 커크의 후계자로 거론된 여러 장관 중 한 명이었지만, 왓이 처음에는 유력 후보로 여겨졌다.[6] 다른 몇몇 후보들이 스스로 후보에서 사퇴한 후, 롤링과 왓 간의 2파전으로 좁혀졌고, 롤링이 승리할 유력 후보로 여겨졌다. 그러나 당의 중앙위원회와 노동연맹은 여전히 왓을 선호했다.[7]
1974년 9월 6일 의원총회 투표에서 롤링이 왓을 44대 9로 압도적인 표차로 이겼다. 46세의 나이에 그는 1887년 이후 뉴질랜드에서 가장 젊은 총리가 되었다. 롤링은 1974년 9월 6일 공식적으로 당 대표이자 30대 총리로 선출되었다.[8] 커크 사망 후 내각 개편에서 롤링은 외무 장관직을 맡았다.[9] 그는 추밀원에 임명되었다.[10]
롤링은 총리로서 개인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조기 총선을 치르는 것을 고려했지만, 기회주의적으로 보이는 것을 피하고 노동당의 자금 조달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하지 않았다. 농업 장관인 콜린 모일은 롤링을 설득하려고 시도했지만, 1974년 10월 조기 총선을 치르는 데 실패했다.[11]
반낙태 성향이었던 커크와 달리, 롤링은 낙태 찬성이었다. 1975년 6월, 그는 피임, 불임 및 낙태에 관한 왕립 위원회를 설립했으며, 이 위원회는 1977년 보고서를 발표했고, 그 권고안은 1977년 피임, 불임 및 낙태법에 통합되었다.[12][13]
롤링은 외무장관직도 맡았지만, 그의 정부는 주로 국내 문제에 집중했다. 롤링의 부총리 밥 티자드가 재무장관직을 대신 맡았지만, 경기 침체의 심각성으로 인해 총리의 관심이 필요했다. 정부는 일자리를 보호하기 위해 해외 차입을 늘리는 것을 방어했다. 1975년 8월, 뉴질랜드 달러는 현지 제조업체와 수출업체를 지원하기 위해 15% 평가절하되었다.[26] 경기 침체는 40년 만에 최악이었고 롤링은 대량 실업이 발생하지 않도록 집중했다. 이를 위한 그의 주요 정책은 국내 수요가 더 이상 감소하지 않도록 자극적인 지출을 하는 것이었고, 노동조합이 임금 조절에 동의하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5] 전반적으로 그의 총리직 기간 동안 재정 전망은 1973년 석유 위기의 지속적인 영향으로 인해 제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부는 1975년부터 모든 대학생에게 표준 장학금을 제공하는 등 교육 지출 확대와 같은 여러 진보적인 조치를 도입했다. 롤링 총리 시대의 또 다른 주요 재정 정책은 근로자와 고용주가 각각 총 수입의 최소 4%를 기여하는 포괄적인 연금 제도였다.[26]
4. 1. 1975년 총선 패배
1975년 총선 선거운동 기간 동안, 롤링은 로버트 멀둔이 이끄는 야당의 공격을 받았으며, 일반적으로 무능하고 무력한 인물로 묘사되었다.[1] 롤링 지지자들은 롤링을 위한 시민들 운동을 벌여 에드먼드 힐러리 경과 같은 유명한 뉴질랜드인들을 끌어들여 롤링의 조용하고 협의적인 접근 방식을 칭찬했다. 이 운동은 엘리트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일반적으로 롤링에게 역효과를 낸 것으로 여겨진다. 이 운동은 그의 강점을 부각했지만, 그 강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전기 작가 존 헨더슨에 따르면, 롤링은 "...대중 이미지 관리 과정, 즉 정치의 연기 측면을 혐오했다."[1]11월 선거에서 노동당은 예상치 못한 패배를 당했고, 롤링은 총리직을 유지하지 못했다.[14]
롤링 자신은 총리 재직 시절 자신의 리더십 능력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고 느꼈다.[26] 헨더슨은 롤링이 재선되었다면 멀둔에 의해 지연되었고 결국 로저노믹스가 된 경제 개혁을 더 계획적이고 느린 속도로 시작할 의향이 있었다고 말했다.[1]
5. 야당 대표 (1975-1983)
총리직에서 사퇴한 후, 롤링은 당 지도부를 유지했지만, 그의 리더십에 대한 의문은 계속되었다. 야당 대표로서 그의 첫 시험은 1976년 초 넬슨 보궐선거에서 노동당이 의석을 방어해야 했을 때였다. 해설자들은 롤링이 연이은 패배를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기에 이 선거는 그의 미래에 매우 중요했다. 노동당은 강력한 선거운동을 펼쳐 의석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다수당 지위도 늘렸다. 넬슨에서의 성공은 롤링의 지도력에 대한 의구심을 일시적으로 잠재웠다.
이후 롤링은 두 명의 국회의원과 관련된 두 가지 스캔들을 처리해야 했는데, 그의 접근 방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과도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졌다.[15] 1976년, 아일랜드 베이 국회의원이자 당 부위원장인 제럴드 오브라이언(Gerald O'Brien)은 두 소년을 모텔 방으로 불러 음료를 주려 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기소는 기각되었지만, 오브라이언은 이후 노동당의 아일랜드 베이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오브라이언은 이것이 정적들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당보다 국민당 당원들로부터 더 많은 동정을 얻었다고 말했다.[16]
이어서 '모일 사건'(Moyle Affair)이 발생했는데, 노동당 국회의원 콜린 모일(Colin Moyle)이 멀둔에 의해 전년도에 동성애 활동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진상 조사 위원회가 소집되었고, 모일은 결국 의회에서 사퇴하여 망게레 지역구 보궐선거에서 승리하여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 했다. 롤링은 그와 만나 그의 절친한 친구인 모일을 설득하여 보궐선거 후보 지명을 추구하지 않도록 했다. 1977년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항의했고, LGBT 커뮤니티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롤링은 대중의 인식을 점차 개선하는 데 성공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모일과 오브라이언 '사건'이 그의 소극적인 대중적 평판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브닝 포스트''의 마이크 니콜라이디(Mike Nicolaidi) 기자는 "그는 대중 앞에서는 '쥐'로 여겨지지만, 당 조직 내에서는 그의 포효가 점점 더 크게 들리고 있다"고 말했다. 1978년 선거에서 롤링은 노동당의 운명을 크게 바꾼 강력한 선거운동을 이끌었고, 실제로 국민당보다 많은 표를 얻었다. 개표 결과 국민당이 더 많은 의석을 차지했지만, 많은 의석의 득표율이 근소했기 때문에 특별 투표가 충분히 많은 선거구를 뒤집으면 노동당이 정부를 구성할 수도 있었다.[17] 결국 이는 발생하지 않았고, 노동당은 야당으로 남았다. 롤링의 지도력은 여론의 변화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18]
1978년 선거 이후 롤링은 당의 경험 많고 존경받는 마오리족 담당 대변인인 마티우 라타(Matiu Rata)를 야당 전면 벤치에서 제거한 후 일부 마오리 사람들을 소외시켰다.[19] 앞서 롤링은 노동당의 마오리족 담당 위원회 의장직을 자신으로 교체했다. 라타는 노동당의 마오리 정책의 무감각성에 대해 불평했고, 자신의 마오리 권리 정당인 마나 모투하케를 결성했다. 라타는 자신의 지역구 보궐선거에 출마했지만, 노동당 후보인 브루스 그레고리(Bruce Gregory)가 노동당을 위해 지역구를 유지했다.[20]
노동당은 교통 및 통신부 그림자 장관인 로저 더글러스(Roger Douglas)가 롤링의 의지에 반해 "대안 예산"을 발표한 후 혼란을 겪었다. 이 제안은 공식적인 노동당 정책이 아니었고, 롤링은 그것의 발표를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으며, 더글러스는 1980년 6월 30일에 그림자 내각에서 해임되었다. 더글러스는 그 후 롤링에 반대하는 선동가가 되었다. 1980년 내내 노동당의 여론조사 지지율은 꾸준히 하락하여 결국 소크레딧당(뉴질랜드 소크레딧당)(소수 정당)보다 간신히 앞서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그는 연말에 지도자 경쟁에 직면했다. 롤링은 한 표 차이(자신의 표)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는 이 도전에 분노하여 도전자들(피시 앤 칩 브리게이드(Fish and Chip Brigade)로 알려짐)을 언론에 "노골적으로 야망에 차 있는 쥐"라고 부르며, 이 발언을 번복하지 않았다.
1981년 선거에서 노동당은 다시 한번 국민당보다 많은 표를 얻었지만 여전히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다. 롤링은 (1978년처럼) 도덕적 승리를 주장했다.[26]
선거 패배 이후 가맹 노동 조합의 노동당의 미래에 대한 심각한 논의가 있었다. 노동당은 단 15%의 노동 조합만 가맹하고 연간 당비의 8%만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 조합의 당'이라는 비판을 자주 받았다. 1982년 2월 롤링은 티마루에서 열린 노동당 지역 회의에서 노동당이 노동 조합과의 공식적인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당의 대중적 인식이 노동 조합과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구성원들의 인구 통계가 노동 계급에서 중산층 자유주의자로 크게 변화했음을 지적했다. 롤링은 노동부 그림자 장관인 프레드 제르빅(Fred Gerbic)과 뉴질랜드 전기 및 관련 무역 노동 조합의 전국 서기인 토니 니어리(Tony Neary) 및 웰링턴 의류 노동 조합의 서기인 프랭크 손(Frank Thorn)과 같은 몇몇 주요 노조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자신의 가맹비가 너무 높고 그에 대한 보상이 거의 없다고 믿었다. 뉴질랜드 노동 연맹의 서기인 짐 녹스(Jim Knox)와 노동당의 의장인 짐 앤더튼(Jim Anderton)과 같은 다른 사람들은 반대하며 당 내에서 노동 조합의 지속적인 존재를 주장했다. 3월까지 논쟁이 거세지면서 롤링과 제르빅은 일부 가맹 노동 조합이 특히 사회주의 통일당(SUP)의 당원을 가지고 있다는 우려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앤더튼은 SUP이 노동당에 영향력이 없고 "SUP의 전체 회원을 우표 뒷면에 적을 수 있다"고 말하며 롤링과 공개적으로 의견을 달리했다. 1982년 5월 노동당 연례 회의에서 회의 대표들은 롤링의 제안을 거부했고, 노동 조합 가맹은 유지되었다. 이 실패로 인해 더글러스는 롤링의 지도력과 방향성 부족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롤링은 답변하지 않았지만 앤더튼은 더글러스의 발언으로부터 롤링을 강력하게 옹호했다.
롤링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상당 부분 해소했지만, 노동당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변화의 시기라고 믿었고, 그는 1982년 말 노동당 의원들에게 지도자직에서 은퇴할 것을 발표했다. 1983년 2월 롤링은 카리스마 넘치는 데이비드 랭에게 지도자직을 물려주었고, 그는 1984년 선거에서 멀둔을 물리쳤다. 지도자직을 사임한 후 그는 외무부 그림자 장관으로 전면 벤치에 남았다. 롤링은 1984년 선거에서 의회를 은퇴했다.[21]
6. 정계 은퇴 이후
정계를 떠난 후, 롤링은 랭에 의해 주미 대사로 임명되어 1985년부터 1988년까지 그 직책을 수행했다.[22] 그는 미국과 뉴질랜드 간에 핵무기와 ANZUS 문제가 불거졌을 때 그 직책을 맡고 있었으며, 전국을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정책을 설명했다.[22] 그는 나중에 뉴질랜드 국제 문제 연구소의 회장이 되었다.[26]
후임자에 의해 시작된 노동당의 자유 시장 로저노믹스 경제 정책에 좌절한 롤링은 결국 당원 자격을 상실했고, 제4차 노동당 정부와 제4차 국가당 정부 모두가 추진한 정책에 대해 실망감을 표명했다. 그는 노동당 정부가 와해되어 랭이 총리직에서 사임한 것에 실망했다. 그는 의원총회가 (수년 전 롤링의 눈에 가시였던) 더글러스를 내각에 재선출한 것이 중대한 실수였다고 생각하며, 이로 인해 랭이 사퇴했다고 여겼다. 롤링은 그 투표가 의원총회가 "자체 정치적 파괴에 몰두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말했다.[23] 그는 마이크 무어를 대신하여 헬렌 클라크가 1993년 1993년 노동당 대표가 되는 것을 지지했다. 그는 클라크의 지도력 스타일이 연합당과 같은 다른 정당과의 협력에 더 적합할 것이라고 말했다.[24]
롤링은 나중에 많은 지역 사회 단체, 자선 단체 및 신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1992년 아벨 타스만의 뉴질랜드 지도 제작 기념 행사의 의장을 역임했다.[1] 그는 또한 뉴질랜드 박물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극심한 공공 지출 감축에도 불구하고 테 파파 설립의 "추진력"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1988년 정부는 그를 박물관 프로젝트 개발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1992년 그는 뉴질랜드 박물관 이사회에 임명되었고 1994년 이사회 의장이 되었다. 롤링은 1995년 10월 9일 건강 악화를 이유로 이사회에서 사임했다. 그의 가족은 언론에 질병의 성격을 공개하지 않고 단지 "심각한" 질병이라고만 밝혔다.[25]
같은 달 말, 롤링은 1995년 10월 31일 넬슨에서 암으로 사망했다.[26]
7. 사망
Bill Rowling영어은 1995년 10월 31일 뉴질랜드 넬슨에서 뇌종양으로 사망하였다.[26] 사망 직전인 10월 9일, 그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테 파파 이사회 의장직에서 사임했다. 당시 그의 가족은 언론에 질병의 성격을 공개하지 않고 "심각한" 질병이라고만 밝혔다.[25]
8. 개인사
1927년 11월 15일 뉴질랜드 남섬 북부에 있는 모투에카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는 과수원을 가꾸는 사람들이었다.[1]
로토이티 호수 근처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중 글렌 리브스를 만났다. 두 사람은 1951년 웨벌리 성공회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다섯 자녀를 두었다.[1] 1957년 둘째 아이가 다섯 달 만에 사망했고, 또 다른 딸인 킴은 18세에 자살했다.[22] 롤링은 뉴질랜드 성공회 신자였다.[26] 은퇴 후에는 조깅을 시작하여 여러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1]
1995년 10월 31일 뉴질랜드 넬슨에서 뇌종양으로 사망하였다.
9. 서훈
롤링은 1983년 뉴질랜드 여왕 생일 기념 서훈에서 세인트 마이클 및 세인트 조지 훈장 기사 휘장을 받았다.[27] 1987년 캔터베리 대학교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28] 네덜란드에서는 오라녜-나소 훈장을 받았다.[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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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id weight for Watt but Rowling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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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me Minister Appointed
1974-09-0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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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unds heal but scars show – 'Moyle affair' distorts fine record of popular Labour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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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d news for Labour and NZ — Row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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