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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노부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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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나다 노부타다는 사나다 유키타카의 아들로, 다케다 신겐의 명령으로 가즈노 마사요의 양자가 되어 다케다 가문을 섬겼다. 다케다 가문 멸망 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조카인 사나다 노부시게가 도요토미 가문에 참여하자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1632년에 사망했으며, 자손들은 하타모토로 막부를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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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노부타다
기본 정보
씨명사나다 씨
이름사나다 노부타다
원 이름사나다 겐지로
다른 이름가쓰노 노부마사, 사나다 노부마사, 노부타다
통칭이치우에몬노조, 오키노카미
시대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출생덴분 16년 (1547년)
사망간에이 9년 5월 4일 (1632년6월 21일)
묘소야마나시현 호쿠토시 나가사카초의 류간지
관위오키
가문사나다 씨
가계
아버지사나다 유키쓰나
어머니가와하라 다카마사의 여동생, 교운인
양아버지가쓰노 마사요
형제노부쓰나, 마사테루, 마사유키, 노부타다, 가나이 다카카쓰, 세이쿄?
정실바바도노 (바바 노부하루의 딸)
자녀유키마사, 노부카쓰
생애
주군다케다 신겐가쓰요리 → 우에스기 가게카쓰 → 호조 우지나오도쿠가와 이에야스가모 우지사토 → 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 이에미쓰

2. 생애

어릴 적 이름은 겐지로(源次郎)였다. 다케다 신겐의 명으로 가즈노 마사요의 양자가 되어 가즈노씨를 이었고, 오키노카미라는 관직명을 사용했다. 다케다 가쓰요리의 측근으로서 야리부교(槍奉行; 창 관련 업무 관리)직을 맡았다.

1574년 아버지 사나다 유키타카가 사망하고,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형 노부쓰나와 마사테루가 전사했다. 1582년 다케다 가문이 멸망하자 사나다 성으로 복귀하고 '''노부타다'''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고 호조씨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사나다 마사유키와 이에야스 사이를 중재했다. 혼다 다다카쓰의 딸 고마쓰히메와 노부유키의 혼인도 노부타다의 노력으로 성사되었다. 가모 우지사토를 섬기기도 했으나, 다시 도쿠가와 가문의 직속 신하가 되어 하타모토부교(旗本奉行)가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오사카 전투에서 조카 노부시게가 도요토미 측에 가담하자, 이에야스는 노부타다에게 노부시게를 회유하라 명했지만 실패했다. 노부시게의 수급을 확인한 것도 노부타다였다.

1632년 5월 4일, 86세로 사망했다. 묘소는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나가사카초 나가사카카미조의 류간지이다. 아들 유키마사 이후 자손은 하타모토로서 에도 막부를 섬겼다.

2. 1. 다케다 가문 가신 시대

사나다 유키타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1], 어릴 적 이름은 겐지로(源次郎)였다. 동복 형으로는 노부쓰나, 마사테루, 마사유키가 있었다.

마사유키와 마찬가지로 어릴 적부터 인질로 고후에 출사했다[3]다케다 신겐의 명에 따라 가이의 가쓰노 마사요를 양자로 맞아 명문인 가쓰노 씨(와노, 시카노)를 이었다. 오키노카미 관위를 자칭하며 다케다 가쓰요리를 측근에서 모시며 창 봉행을 맡았고, 가쓰노 이치에몬노조 노부마사라고 칭했다[3]。 다케다 가문에서는 기마 15, 아시가루 10을 거느리는 창 봉행 지위에 있었다고 『고요 군감』의 「신겐 시대 총인원수 기록」에 있다[3]

겐키 2년(1571년) 1월, 다케다 신겐이 호조 쓰나시게가 지키는 스루가후카사와성을 함락시켰는데, 이는 노부마사(노부스미)의 무공에 기인한 바가 컸다고 전해지며, 이때 쓰나시게의 "황팔번" 깃발을 빼앗았다고 한다[2]。 마사유키와 마찬가지로 다케다 가문의 용주인장 봉사를 맡아 덴쇼 7년(1579년) 6월 25일 자로 니노미야 신주 앞으로의 거처 제반 역할 면허장을 내렸으며, 다케다 가문의 가신단의 일익을 구성했다[2]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두 형(노부쓰나, 마사테루)이 전사하는 불행을 겪었다.

2. 2. 다케다 가문 멸망 후

1582년 다케다 가문이 멸망하자 사나다 성으로 복귀하고 이름을 노부타다(信尹)로 바꾸었다.[1] 다케다 가쓰요리오다 노부나가에게 멸망당한 뒤, 형 사나다 마사유키와 달리 호조 가문에 들어갔다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형과 이에야스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1]

노부유키가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인 혼다 다다카쓰의 딸 고마쓰히메를 아내로 맞은 것도 노부타다의 노력 덕분이었다.[1]

처음에는 우에스기 가문에 속해 마키노시마성에 배속되었지만, 1582년 7월에 호조 우지나오시나노가와나카지마로 진군해 오자 호조 측에 붙은 형 마사유키와 통하여 마키노시마성에 호조군을 유도하려 했지만, 책략을 거부한 야마다 우콘노조에 의해 추방되었다. 그 후 같은 해 9월, 마사유키가 호조 가문에서 도쿠가와 가문으로 갈아탈 때 중재를 맡아 그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다.

일시적으로 가모 우지사토를 섬기기도 했으나, 다시 도쿠가와 가문의 직속 신하가 되어 3천 석의 녹봉을 받았다.[1] 1591년 구노헤 마사자네의 난 평정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595년 우지사토가 사망하고 가모 소동이 일어나자, 1598년 다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돌아와 4천 석을 받았다.[2]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1614년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워 3천 석의 녹봉을 추가로 받았다.[1] 아들 유키마사 이후 자손들은 대대로 하타모토(쇼군의 직속 무사)로서 에도 막부를 섬겼다.[1]

오사카 전투에서 노부타다의 조카 노부시게가 도요토미 가문에 가담하자, 이에야스는 노부타다에게 시나노 지방 10만 석을 조건으로 노부시게를 회유하라 명했지만, 노부시게는 이를 거절했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노부시게의 수급을 확인한 것도 노부타다였다고 한다.[1]

2. 3. 도쿠가와 가문 가신 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겨 형 사나다 마사유키와 이에야스 사이를 중재하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 마사유키의 장남 사나다 노부유키가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 혼다 다다카쓰의 딸 고마쓰히메를 아내로 맞은 것도 노부타다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1]

일시적으로 가모 우지사토를 섬기기도 했지만, 다시 도쿠가와 씨의 직속 신하로 복귀해 하타모토부교(旗本奉行)가 되어 3천 석의 녹봉을 받았다.[2] 이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1614년 오사카 전투에 참가해 공훈을 세워 다시 3천 석의 녹봉을 추가로 받았다.[2]

오사카 전투에서 노부타다의 조카 사나다 노부시게도요토미 진영에 참가하자, 이에야스는 노부타다에게 '시나노 지방에 10만 석의 영지를 주는' 조건으로 노부시게에게 도요토미 진영에서 이탈할 것을 권유하도록 했다. 그러나 노부시게는 이를 거절했다.[1] 노부시게의 수급 확인(전장에서 얻은 적장의 목이 진짜 적장의 목인지 다른 사람의 목인지를 적장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확인하는 것)을 한 것도 노부타다였다고 한다.

1632년 5월 4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묘소는 야마나시현 호쿠토시 나가사카초 나가사카카미조의 류간지(龍岸寺)이다.

아들 사나다 유키마사 이후 자손은 대대로 하타모토로서 에도 막부를 섬겼다.[2] 자손은 4개의 계통으로 나뉘었고, 그중 2개의 계통이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했다.[2]

3. 인물 및 평가

다케다 가쓰요리를 섬기며 창 관련 업무를 보는 야리부교(槍奉行)직을 맡았던 사나다 노부타다는 1582년 다케다 가문이 멸망한 후, 고 호조씨 휘하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형 사나다 마사유키와 이에야스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마사유키의 장남 사나다 노부유키가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 혼다 다다카쓰의 딸 고마쓰히메와 결혼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4]

이후 가모 우지사토를 섬기기도 했지만 다시 도쿠가와씨의 직속 신하로 복귀하여 하타모토부교(旗本奉行)가 되어 3천 석의 녹봉을 받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워 3천 석의 녹봉을 추가로 받았다. 오사카 전투 당시 도요토미 측에 가담한 조카 사나다 노부시게에게 시나노 10만 석 영지를 조건으로 이탈을 권유했으나 거절당했다는 일화가 있다. 노부시게의 수급 확인을 노부타다가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진정록』), 확실치 않다는 문헌(『무덕 편년집성』, 『유키무라군 전기』)도 있다.[4]

노부타다는 다케다 가문 멸망 후에도 사나다 본가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도쿠가와와 사나다 사이의 중재 역할 외에도 마사유키에게 꾸준히 정보를 제공하며 사나다 가문이 살아남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오사카 전투 당시 노안이었다는 기록(『난파전기』)이 남아있다.[4]

4. 등장 작품

2016년 NHK 대하드라마 사나다마루에서 쿠리하라 히데오가 연기하였다.[1]

참조

[1] 문서
[2] 인용 1996
[3] 인용 1996
[4] 서적 真田四代と信繁 平凡社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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