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다 노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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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나다 노부유키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 활약한 무장으로, 다케다 가문의 신하였던 사나다 마사유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항하여 제1차 우에다 성 전투에서 승리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화친을 맺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속하여 아버지와 동생과 대립했으며, 이후 우에다 번의 번주가 되었다. 노부유키는 93세까지 장수하며 가신과 영민들에게 존경받았고, 여러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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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다 노부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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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사나다 노부유키 |
로마자 표기 | Sanada Nobuyuki |
한자 표기 | 真田 信之 |
출생 | 1566년 |
사망 | 1658년 11월 12일 |
다른 이름 | 겐자부로 (源三郎), 노부유키 (信幸), 잇토사이 (一当斎) |
계명 | 다이호인덴 데쓰간 잇토 다이코지 (大鋒院殿徹巌一当大居士), 다이호인덴 데쓰간 이치메이 다이코지 (大法院殿徹岩一明大居士) |
묘소 | 나가노현나가노시마쓰시로 신덴산 초코쿠지 나가노현 나가노시 마쓰시로마치 시바의 신덴산 다이호지 와카야마현이토군고야정 고야산의 고야산렌게조인 교토시 우쿄구의 세이호산 묘신젠지 탑두 다이호인 (류센파) |
관직 | |
관위 | 종오위하, 이즈노카미, 종사위하 지쥬 |
주군 | 다케다 가쓰요리 사나다 마사유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미쓰 도쿠가와 이에쓰나 |
가문 및 번 | |
씨족 | 무토 씨 → 사나다 씨 |
번 | 시나노국우에다 번주 → 마쓰시로 번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사나다 마사유키 |
어머니 | 간쇼인 (山手殿) |
형제자매 | 무라마쓰도노 사나다 노부유키 사나다 유키무라 사나다 노부카쓰 사나다 마사치카 사나다 유키마사 실 가마하라 시게하루 실 호시나 마사미쓰 실 조슈인 (趙州院) 세이코인 (清光院) (쓰마키 요리쿠마 실) 오라쿠 |
배우자 | 세이인인 고마쓰히메 |
친척 | 사나다 노부쓰나 (삼촌이자 장인) 혼다 다다카쓰 (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장인) |
자녀 | 만히메 (1592년생) 사나다 노부요시 (1593-1634) 사나다 노부마사 (1597-1658) 사나다 노부시게 (1599-1648) 도쿄 에탄 (1642-1721) |
군사 활동 | |
참전 전투 | 가미카와 전투 (1585) 오다와라 포위전 (1590) 세키가하라 전투 (1600) 오사카 전투 (1614-1615) |
소속 | 다케다 씨 오다 씨 우에스기 씨 후기 호조 씨 도쿠가와 씨 도요토미 씨 동군 도쿠가와 막부 |
부대 | 사나다 씨 |
번주 경력 | |
마쓰시로 번 영주 | 재임 시작: 1616년 재임 종료: 1656년 전임: 사카이 다다카쓰 후임: 사나다 노부마사 |
누마타 번 영주 | 재임 시작: 1600년 재임 종료: 1656년 후임: 사나다 노부요시 |
우에다 번 영주 | 재임 시작: 1600년 재임 종료: 1622년 후임: 센고쿠 다다마사 |
2. 생애
사나다 마사유키의 장남으로 1566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마사유키가 다케다 가문의 신하였기 때문에, 노부유키는 다케다 가문에 인질로 보내졌다.[1] 1582년 다케다 가문이 멸망하자 아버지와 함께 피신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1582년 6월)으로 사망한 후, 천정임오의 난이 발생했다. 사나다 가문은 후호조씨에 복종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얼마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복종한 다케다 유신 이다 노부후사와 삼촌 사나다 노부타다의 권유로 누마타성을 호조 측으로부터 탈환하고, 사나다 가문은 호조씨와 적대하게 된다.
158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마사유키에게 본거지인 우에다 성을 내줄 것을 요구했으나 마사유키는 이를 거절했고, 이에 격분한 도쿠가와 군이 쳐들어오자 노부유키는 아버지와 함께 도쿠가와 군과 싸워 이를 격퇴했다(제1차 우에다 성 전투). 그 후 마사유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었다. 1589년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이에야스와 화친을 맺고 이에야스 휘하의 가신이 되었다. 이에야스는 노부유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도쿠가와 가문의 중신인 혼다 다다카쓰의 딸 고마쓰히메(이나히메)를 자신의 장녀로 삼은 뒤 노부유키에게 시집보냈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 공을 세워 누마타 성의 성주가 된다. 1594년 이즈노카미라는 관직을 받는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침략군의 본영이 있던 히젠 나고야 성에 주둔했다.
히데요시가 죽자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1600년 미쓰나리가 거병하여 이에야스 군을 토벌하자는 격문을 보내자 사나다 가문도 동군과 서군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1] 아버지 마사유키와 동생 노부시게는 미쓰나리의 서군에 가세했지만, 노부유키는 이에야스의 동군에 참가하여,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군에 소속되어 제2차 우에다 성 전투에 참가하여 아버지와 동생과 적이 되어 싸웠다.
마사유키가 이끄는 2천 명의 사나다 군을 상대로 3만 8천 명의 히데타다 군은 지나치게 시간을 소비하여, 정작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기일을 맞추지 못하고 결전이 끝난 후에야 도착했다.[1]
세키가하라 전투 후, 노부유키는 마사유키의 영지였던 우에다와 누마타 9만 5천 석을 계승하였다.[1] 노부유키는 서군에 속해 있었던 마사유키와 노부시게의 구명을 탄원하여, 마사유키와 노부시게는 사형 대신 기이 구도 산에 유배되는 형벌로 그쳤다.[1] 그 대신 노부유키(信幸)는 아버지 마사유키(昌幸)와의 결별을 선언하기 위해 노부유키(信之)로 이름을 바꾸었다.[1] 오사카 전투에서도 활약하여, 1622년 13만 석의 마쓰시로 번(마쓰시로)로 영지를 옮겼다.[1]
노부유키가 우에다 영지를 계승했을 무렵, 제2차 우에다 전투와 잇따른 아사마 산의 분화로 영내는 황폐해져 있었다. 그 후에도 아사마 산의 분화나 기후 불순 등 천재지변이 잇달았지만, 노부유키는 성 아랫마을을 정비하고 수로와 용수를 개척했으며, 연공을 감면하는 등 여러 정책을 실시하여 영내 재건에 힘썼다.
1656년, 장남 노부요시와 장손이자 노부요시의 장남인 사나다 쿠마노스케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차남 노부마사에게 가독(家督)을 양도하고 은거(隠居)한다.[3] 그러나 1658년에 노부마사도 사망했다. 최종적으로 유키미치가 제3대 번주가 되었고, 2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노부유키가 복귀하여 번정을 맡았다.[3]
같은 해 10월 17일에 사망.[3] 향년 93세.[3] 사세(辞世)는 "'''무엇이든, 변하면 변하는 세상을, 꿈이었구나 하고, 생각하지 못했구나''' "이다.[3]
2. 1. 다케다 가신 시대
1566년 (영록 9년), 사나다 마사유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아버지가 다케다 가문의 신하였기 때문에, 노부유키는 다케다 가문에 보내져 인질 생활을 했다. 『가자와키』에 따르면, 1579년 (텐쇼 7년)에 다케다 가쓰요리의 아들 노부카쓰와 함께 원복식을 치렀다고 한다.1582년 (텐쇼 10년) 3월, 다케다 가문이 오다 노부나가의 고슈 정벌로 멸망하자, 어머니 야마테덴과 함께 우에다 성으로 피신했다.
2. 2. 다케다 멸망 후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1582년 6월)으로 사망한 후, 가이와 시나노의 다케다 옛 영토를 둘러싼 천정임오의 난이 발생했다. 사가미국의 호조 우지나오가 오다 가신인 다키가와 가즈마스를 간나가와 전투에서 격파하자, 사나다 가문은 후호조씨에 복종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호조씨는 가와나카지마까지 진출하여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대립하게 된다. 이때 노부유키는 우에노를 버리고 오다 영토로 도주하는 다키가와를 지원하여 도중까지 배웅했다고 한다.같은 무렵, 에치고국의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시나노로 진출했지만, 노부유키는 가와나카지마에 여러 차례 출진하여 우에스기 영토인 가이즈성을 교란했다. 그러나 곧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복종한 다케다 유신 이다 노부후사와 삼촌 사나다 노부타다의 권유로 누마타성을 호조 측으로부터 탈환하고, 사나다 가문은 호조씨와 적대하게 된다. 노부유키는 수하 800기병을 이끌고 호조 측 도미나가 시게요시 군 5,000명이 방어하는 데고마루성을 단 하루 만에 함락시키는 무공을 세웠다고 한다. 이다 노부후사 등의 게릴라전도 효과를 거두어 사나다 가문은 호조 측을 누마타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1584년, 사나다 가문은 시나노 오가타군의 국인 무로가씨와 다툼이 있었고,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하여 화친을 맺었다. 얼마 후 노부유키는 아버지 사나다 마사유키와 공모하여 당주인 무로가 마사타케를 암살하고, 오가타 군의 동족인 네즈 마사쓰나를 회유하여 사나다 가문은 오가타를 지배하게 되었다. 같은 해, 여전히 사나다 영토를 노리는 호조씨의 침략에 대해, 호조 우지쿠니의 기습을 간파한 노부유키는 아즈마군 선인굴(仙人窟)에서 이를 격퇴했다.
2. 3.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
158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우에다 성을 공격했을 때, 노부유키는 아버지 사나다 마사유키와 함께 도쿠가와 군에 맞서 싸워 승리했다(제1차 우에다 전투). 노부유키는 토이시 성에 3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주둔하며, 신카와를 건너는 도쿠가와 군을 공격하고, 우에다 성으로 유인하여 측면을 공격하는 등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중재로 1589년 이에야스와 화친하고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이 되었다. 이에야스는 노부유키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양녀이자 도쿠가와 가문의 중신인 혼다 다다카쓰의 딸 고마쓰히메(이나히메)와 혼인시켰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 마쓰이다 성을 공격하는 등 공을 세워 누마타 성 성주가 되었다. 1594년에는 종오위하 이즈노카미에 서임되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침략군의 본영이 있던 히젠 나고야 성에 주둔했다.
2. 4. 세키가하라 전투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노부유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하여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에 소속되어 제2차 우에다 성 전투에 참전했다. 아버지 사나다 마사유키와 동생 노부시게는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에 가담하여, 노부유키는 아버지, 동생과 적이 되어 싸우게 되었다.노부유키는 장인인 혼다 다다카쓰의 아들이자 자신의 처남인 혼다 타다마사와 함께 아버지 마사유키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노부시게가 방어하는 도이시 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사나다 가문끼리의 소모를 피하기 위해 항복 권고 사자를 보냈고, 노부시게도 이에 응하여 도이시 성을 넘겨주고 우에다 성으로 철수했다.
마사유키가 이끄는 2천 명의 사나다 군을 상대로 3만 8천 명의 히데타다 군은 시간을 너무 많이 끌어, 세키가하라 전투 본전에는 늦게 도착했다. 전투 후, 노부유키는 서군에 속했던 아버지와 동생의 구명을 탄원하여, 이들은 사형 대신 기이 구도 산에 유배되는 형벌을 받았다. 그 대신 노부유키는 아버지와의 결별을 선언하기 위해 이름을 노부유키(信之)로 바꾸었다. 노부유키는 마사유키의 영지였던 우에다와 누마타 9만 5천 석을 계승하였다.
2. 5. 에도 막부 시대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호조 가문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고, 노부유키는 오다와라 정벌에서 공을 세워 누마타 성의 성주가 되었다. 1594년 이즈노카미라는 관직을 받았다.[1] 히데요시가 죽자 도요토미 정권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오대로의 필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오봉행의 필두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1] 미쓰나리가 거병하여 이에야스 군을 토벌하자는 격문을 보내자 사나다 가문도 동군과 서군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1] 아버지 마사유키와 동생 노부시게는 미쓰나리의 서군에 가세했지만, 노부유키는 이에야스의 동군에 참가하기로 하여, 도쿠가와 히데타다(德川秀忠)의 군에 소속되어 제2차 우에다 성 전투에 참가하여 아버지와 동생과 적이 되어 싸웠다.[1] 마사유키가 이끄는 2천 명의 사나다 군을 상대로 3만 8천 명의 히데타다 군은 지나치게 시간을 소비하여, 정작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기일을 맞추지 못하고 결전이 끝난 후에야 도착했다.[1]세키가하라 전투 후, 노부유키는 마사유키의 영지였던 우에다와 누마타 9만 5천 석을 계승하였다.[1] 노부유키는 서군에 속해 있었던 마사유키와 노부시게의 구명을 탄원하여, 마사유키와 노부시게는 사형 대신 기이 구도 산에 유배되는 형벌로 그쳤다.[1] 그 대신 노부유키(信幸)는 아버지 마사유키(昌幸)와의 결별을 선언하기 위해 노부유키(信之)로 이름을 바꾸었다.[1] 이후 오사카 전투에서도 활약하여, 1622년 13만 석의 마쓰시로로 영지를 옮겼다.[1]
우에다 성(上田城)은 파괴 명령을 받았고[3], 누마타 성을 본거지로 삼았다.[3] 노부유키는 마사유키 등의 사면을 탄원하고, 서군에 가담한 아버지와의 결별을 나타내기 위해 이름을 노부유키에서 '''노부유키(信之)'''로 개명했다.[3] 장인인 혼다 다다카쓰(本多忠勝)의 주선도 있어, 마사유키 등은 사면되어 키이국(紀伊国)구도야마로 유배되었다.[3]
노부유키가 우에다 영지를 계승했을 무렵, 제2차 우에다 전투와 잇따른 아사마 산의 분화로 영내는 황폐해져 있었다. 그 후에도 아사마 산의 분화나 기후 불순 등 천재지변이 잇달았지만, 노부유키는 성 아랫마을을 정비하고 수로와 용수를 개척했으며, 연공을 감면하는 등 여러 정책을 실시하여 영내 재건에 힘쓰는 한편, 구도야마에 있는 아버지와 동생에게 계속 지원하였다.
1614년부터 오사카의 진(大坂の陣)에서는 병 때문에 출진할 수 없었고, 장남인 노부요시와 차남인 노부마사가 대리로 출진했다.[3] 1622년 10월, 시나노(마쓰시로)로 영지가 증가, 이동되어 13만 석(누마타 3만 석은 계승)의 영지를 얻는다.[3]
1656년, 장남 노부요시와 장손이자 노부요시의 장남인 쿠마노스케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차남 노부마사에게 가독(家督)을 양도하고 은거(隠居)한다.[3] 그러나 1658년 2월에 노부마사도 사망했다.[3] 이때, 사나다 가문에서는 후계자 쟁탈이 일어나, 장남의 혈통(노부요시의 차남)인 누마타 성주 노부토시가 차남의 혈통(노부마사의 육남)인 유키미치의 가독 상속에 이의를 제기하여 막부에 소송하는 사태가 벌어져, 막부와 인척인 다이묘를 끌어들인 소동이 되었다.[3] 최종적으로 유키미치가 제3대 번주가 되었고, 2세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노부유키가 복귀하여 번정을 맡았다.[3]
같은 해 10월 17일에 사망.[3] 향년 93세.[3] 사세(辞世)는 "'''무엇이든, 변하면 변하는 세상을, 꿈이었구나 하고, 생각하지 못했구나''' "이다.[3]
묘소는 나가노현 나가노시의 다이호우지(大鋒寺)에 있으며, 초상화도 소장되어 있다.[3] 또한, 사나다 가문의 보다이 사찰인 장국사에는 번조 노부유키의 영묘 등 역대 번주의 묘소가 설치되어 있다.[3]
3. 사후의 사나다 가문
마쓰시로 번 제6대 번주 유키히로 대에 사나다 유키타카(친부 에도 막부 다이로 이이 나오히데의 9남)가 사나다 가문의 양자로서 가독을 이어 노부유키의 혈통이 끊기기는 했지만, 사나다 가문의 이름은 막말까지 지속되었다. 사나다 유키모토(친부 이요 우와지마번 제8대 번주 다테 무네나리의 장남) 대에는 메이지 시대에도 자작 가문으로 존속했을 뿐 아니라 후에 백작 가문으로 격상되었다.
4. 인물 및 일화
- 93세로 당시 기준으로 매우 장수했으나, 30대부터 병약하여 자주 병석에 누웠다.[1] 40대 이후에는 "손의 통증", "피로", "종기" 등으로 고생했다. 51세 때에는 말라리아에 걸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병문안을 가지 못하고 장남 노부요시를 대신 보냈다. 주기적으로 말라리아 발작을 일으켰으며, 76세에는 종기로 고생했다.
- 도요토미 정권 시절, 이시다 미쓰나리와 가장 친밀하게 교류했으며, 그 관계는 다른 다이묘들에게도 알려져 있었다. 사나다가문서에는 미쓰나리에게서 온 14통의 서신이 남아있다. 메이지 시대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받은 단도가 들어있다고 여겨진 장롱에서 미쓰나리의 서신 등 사나다 가문에 불리한 기밀 서류가 발견되었다. 노부유키는 생전에 미쓰나리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이 서류들을 보관했다. 마쓰시로 번으로 이봉될 때 중요 서류를 불태운 노부유키가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반감으로 숨겨 놓은 것이라고 전해진다.[2]
- 마에다 도시이에와 친분이 있었으며,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도 도시이에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당시 노부유키는 군대를 이끌고 진군 중이었는데, 도시이에의 태도에 감탄하여 군을 철수시켰다.
- 1582년, 호조씨가 누마타 성을 공격했을 때, 17세의 노부유키는 사나다 군 800명을 이끌고 테고마루 성을 구원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가라사와 겐바에게 호조 군 선봉을 유인, 매복 공격하여 격파하도록 명했다. 노부유키는 북쪽 마루에 공작 부대를 파견하여 "반역자가 나타났다"고 외치며 방화하게 했고, 혼란에 빠진 호조 군에게 직접 돌격하여 가마하라 유키시게를 잃었지만, 결국 테고마루 성 본마루를 탈환했다. 훗날 도쿠가와 쇼군가의 기봉행이 된 토미나가 시게요시는 노부유키의 지휘 능력을 극찬했다.
- 제1차 우에다 전투 무렵, 시오타 히라의 토호 스기하라 시로베에가 일으킨 반란 때, 노부유키는 신분이 낮은 마정 미즈데 오쿠라의 의견을 받아들여 성을 함락시키고 상을 주었다. 훗날 노부유키는 "전장에서는 신분에 관계없이 의견을 듣고 이치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회상하며, 유용한 의견은 신분에 관계없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다.
- '사나다의 적비에'는 동생 노부시게가 오사카 전투에서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1593년 노부유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무사조"를 명령받았을 때, "평소처럼 붉은 무사(적비에)가 되도록, 지물은 붉은색"이라는 지시를 내려, 이미 1590년대에 사나다 가는 갑옷과 지물에 붉은색을 사용하고 있었다.
- 두 번의 우에다 전투와 오사카 전투에서 사나다 가문이 도쿠가와 군을 괴롭혔고, 오사카 전투 때는 우에다 번 내부에서 도요토미 측에 내통하거나 노부시게에게 가담한 자들이 있어 막부의 눈총을 받았다. 노부유키는 이들을 엄격히 처벌했지만, 헌신적으로 막부의 공역을 수행했다.
- 마쓰시로 번으로의 이봉에 불만을 품고 중요 서류를 불태웠다는 일화가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마쓰시로 성은 가와나카지마 전투와 관련된 요충지로, 오히려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노부유키를 신뢰했음을 보여준다. 노부유키 자신도 중신 데우라 모리키요에게 "정말로 가문의 체면이며,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썼다. 다만, 오노 오토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고향을 떠나는 서러움이 드러난다.
- 서예와 시가에 정통한 오노 오토와 친분이 있었다. 노부유키는 마쓰시로 번 영지인 가와나카지마의 명승지를 언급하며 오토에게 마쓰시로로 내려와 달라고 요청했다. 신슈의 자연과 명승고적에 대한 애정은 노부유키에게 휴식의 근원이었다.
- 온천 요양과 신슈의 자연 감상을 즐겼으며, 구사쓰 온천을 자주 이용하고 지인들에게도 권했다.
- 도쿠가와 요리노부[3]는 노부유키를 존경하여 자택에 초대해 무용담을 들었으며, 훗날 요리노부 아들의 구족친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 노년기에 은거를 청원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어리다는 이유로 번번이 만류되어 91세까지 번정을 맡았다. 이에쓰나는 노부유키를 "천하의 장식"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후계자 노부마사는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었고, 가독 상속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을 때 유언에서 노부모를 전혀 언급하지 않아 노부유키가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 노부유키가 죽었을 때 가신뿐만 아니라 농민들까지 애도하며 출가하는 자가 속출했고, 농민과 시민들도 불사를 지내며 명복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가신과 영민들에게 사랑받는 명군이었다.
5. 관련 작품
- 이케나미 쇼타로의 소설 『혼란』일본어(1960년, 제43회 나오키상 수상작), 『사나다 태평기』일본어(1974년~1983년 연재)
- 이마무라 쇼고의 소설 『사나다를 討て』일본어(2022년), 『사나다의 꿈』일본어(2023년)
- 미나미 하루오의 장편가요낭곡 『사나다군기 누마타성 이야기』일본어, 『속・누마타성 이야기 세키가하라 전야』일본어
- 사쿠라유키의 『호월』일본어, 『기러기의 하늘』일본어, 『혼의 인연』일본어
- 드라마 『세키가하라』일본어(1981년, TBS, 배우: 니시다 켄)
- 드라마 『도쿠가와 이에야스』일본어 (2023년, NHK 대하드라마, 배우: 요시무라 카이토)
- 게임 『전국바사라 열전 시리즈 사나다 유키무라전』일본어 (호소야 요시마사 성우)[1]
5. 1. 드라마
5. 2. 게임
전국무쌍 시리즈에서 오노 다이스케가 성우를 맡았다.[4]참조
[1]
서적
2014年に丸島先生が出版された文献
# 출판사 정보 없음
2014-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으므로 년도만 표기
[2]
간행물
# 제목 정보 없음
長野県真田宝物館
[3]
서적
名将言行録
[4]
간행물
近世前期大名相続の実態に関する基礎的研究
史料館
1998-00-00 # 정확한 날짜 정보가 없으므로 년도만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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