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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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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리사는 고대 마케도니아 군대에서 사용된 긴 창으로, 팔랑크스 대형의 핵심 무기였다. 필리포스 2세에 의해 도입되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4~6m에 달하는 길이와 5~6kg의 무게를 가졌다. 사리사는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비잔틴 시대까지 사용되었으며, 유사한 형태의 무기가 중세 후기에도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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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사
개요
사리사를 든 병사들의 모습
'사리사'
종류장창
사용 국가마케도니아 왕국
사용 시기헬레니즘 시대
상세 정보
길이5 ~ 7 m
재질골쇄목
무게 중심뒤쪽
사용 부대마케도니아 팔랑크스

2. 구성 및 특징

사리사를 든 히파스피스트(은방패병단)


사리사는 길이 4~6m, 무게 4~5kg으로 쇠로 나뭇잎 모양의 창끝을 만들었고 아랫쪽 끝에는 구리로 감싸서 필요시 땅에 고정시켜 사용할 수 있었다.[2] 당시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창이 2.1~2.7m 정도였던 것에 비해, 사리사는 약 4m~6.4m로 두 배 이상 길어 적군의 팔랑크스에 대해 더 긴 사거리를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뒤에 있는 병사의 창도 더 많이 내뻗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사리사는 긴 나무 자루와 금속 팁, 이 두 가지 핵심 부분으로 만들어졌다. 일부 사리사에는 반대쪽 끝에 금속 창 자루(슴베)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사용하지 않을 때 자루가 손상되지 않도록 땅에 고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자루에 적합한 목재로는 물푸레나무산딸나무 두 가지 유형이 선호된다. 물푸레나무는 길이, 유연성, 가벼움을 지녔고, 산딸나무는 더 짧지만 더 튼튼하다. 창날 반대쪽 끝에는 슴베(cf.)가 달려 있어 자세를 잡을 때 안정성을 유지하게 해 주었으며, 창이 부러졌을 때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예비 장비이기도 했다.

팁의 크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70~2000년대의 많은 학문은 마놀리스 안드로니코스가 베르기나의 마케도니아 무덤에서 발견한 잎 모양의 무기(길이 51cm)를 바탕으로 비교적 크고 무거운 창머리를 선호했다. 그러나 21세기 학문은 이것이 실제로 발견된 사리사 머리였는지에 대해 더 회의적이다. 니콜라스 빅터 세쿤다는 금속 팁이 약 13.5cm 정도로 작고, 철로 만들어졌으며 다이아몬드 모양이라고 주장한다. 고대 작가들은 사리사가 방패와 갑옷을 모두 뚫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세쿤다가 작지만 초점이 맞춰진 창머리, 즉 넓은 창머리를 사용하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는 작은 창머리를 보여주는 것 같고, 작은 창머리는 나중에 중세의 창병들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것과 일치한다.

고대 권위자들은 사리사가 병사들이 팔랑기테와 안전하게 교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엄청난 길이로 구별되었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 길이가 정확히 얼마나 되었는지는 덜 명확하다. 왜냐하면 다른 저자들은 다양한 설명을 제공하고, 고대 단위 측정이 항상 일관되거나 정확하지 않았으며, 헬레니즘 시대의 사리사를 만드는 데 사용된 나무가 오래전에 썩어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많은 역사가들은 폴리비우스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설명으로 간주하는데, 그는 헬레니즘 팔랑크스를 관찰한 실제 경험이 있었고, 그의 설명은 다른 곳에서도 정확하기 때문이다. 폴리비우스는 "사리사의 길이는 원래 설계에 따라 16 큐빗이며, 실제로는 14로 줄어들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2세기 경의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사리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3] 이를 바탕으로 많은 역사가들은 두 설명이 기본적으로 정확하며, 사리사는 알렉산드로스 이후 헬레니즘 시대에 테오프라스토스가 보고한 12큐빗에서 폴리비우스가 관찰한 14큐빗으로 더 길어졌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다른 역사가들은 다른 이론을 제시했다. 피터 코놀리는 길이가 기본적으로 같았다고 제안한다. 이를 현대 단위로 변환하면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시대의 사리사는 약 5.8m, 기원전 3~1세기의 사리사가 실제로 더 길어졌다면 약 6.3m이 된다.[4]

안드로니코스의 발견과 그의 저널 기사 및 마클의 저널 기사를 기반으로 한 학문에서 사리사는 창 치고는 무거워서 약 5.5kg에서 6.5kg 정도의 무게가 나갔다고 생각된다. 이후의 재건에서 이것이 너무 무거웠다고 제안했다. 피터 코놀리는 4.05kg 무게의 체리나무로 된 5.8m 길이의 보병 창을 재건할 수 있었고, 물푸레나무 창은 훨씬 가벼웠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고려한 가능성 중 하나는 이렇게 엄청나게 긴 창을 만들기 위해 두 개의 개별 나무 가지를 금속 튜브로 연결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안드로니코스의 베르기나 발견에서 발견된 그러한 튜브를 사리사의 중간 부분으로 식별한 것과 산딸나무가 설명된 가장 긴 길이로 자라기 어렵다는 사실에 근거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다루기 어렵고 부러질 가능성이 있는 무기를 만들기 때문에 대체로 폐기되었다.

팔랑크스 대형에서 사리사를 사용하는 보병은 방패도 함께 사용했다. 린디안 사원 연대기에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에게 "열 개의 ''펠타'', 열 개의 ''사리사'', 열 개의 헬멧"이 헌정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마케도니아인들이 사리사와 청동 펠타(방패)를 한 세트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사리사의 크기 때문에 병사들은 양손으로 사용해야 했으므로, 작은 방패를 휴대했다. 알렉산드로스 시대의 펠타는 약 60cm 크기였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약 45cm 크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방패는 목 끈을 사용하여 왼쪽 어깨에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65cm 에서 75cm 범위의 더 큰 방패가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2. 1. 자루

사리사는 긴 나무 자루와 금속 팁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일부는 반대쪽 끝에 금속 창 자루(Spike)가 추가되기도 했다. 이 금속 자루는 보관 시 자루 손상을 방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1]

자루 재료로는 물푸레나무산딸나무가 주로 사용되었다. 물푸레나무는 길이, 유연성, 가벼움이 뛰어나고, 산딸나무는 더 짧지만 튼튼하다.[2] 사리사가 물푸레나무로 제작되었다는 주장은 고대 자료와 여러 역사학자들에 의해 뒷받침된다.[3] 반면, 테오프라스토스의 저작에 근거하여 탄력 있는 산딸나무가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지지한다.[4] 산딸나무는 강하고 질기지만 길게 자라지 않아, 짧은 사리사나 여러 가닥을 결합한 자루 제작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 자루는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6]

팁의 크기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1970~2000년대에는 베르기나의 마케도니아 무덤에서 발견된 잎 모양의 무기(길이 51cm)를 바탕으로 크고 무거운 창머리가 선호되었다.[7] 그러나 21세기 들어 이 유물이 실제 사리사 머리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8] 니콜라스 빅터 세쿤다는 금속 팁이 약 13.5cm 정도로 작고 철로 만들어졌으며 다이아몬드 모양이라고 주장한다.[9] 고대 작가들은 사리사가 방패와 갑옷을 모두 뚫을 수 있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작고 날카로운 창머리가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10]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에서도 작은 창머리가 묘사되며, 이는 중세 창병들이 선호했던 형태와도 일치한다.[11]

사리사의 길이는 고대 문헌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며, 정확한 길이는 불분명하다. 폴리비우스는 사리사의 길이가 원래 설계상 16 큐빗(약 7.3m)이었으나 실제로는 14큐빗(약 6.4m)으로 줄었다고 기록했다.[12] 테오프라스토스는 가장 긴 사리사가 12큐빗(약 5.5m)이었다고 언급했다.[13] 많은 역사가들은 이 두 기록을 바탕으로 사리사가 알렉산드로스 이후 헬레니즘 시대에 더 길어졌다고 추정한다. 피터 코놀리는 알렉산드로스 시대의 사리사는 약 5.8m, 이후에는 약 6.3m까지 길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사리사는 창 치고는 무거워 약 5.5kg에서 6.5kg 정도의 무게가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후 재건 실험에서 이 무게가 너무 무겁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렇게 긴 창을 만들기 위해 두 개의 나무 가지를 금속 튜브로 연결했을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이 이론은 무기가 다루기 어렵고 부러지기 쉽다는 이유로 대체로 폐기되었다.

마케도니아 기병의 그림 (~기원전 3세기; K. F. Kinch에 의해 출판).


알렉산더 시대의 마케도니아 군대는 사리사를 사용하는 경기병 부대인 사리소포로이를 운용했는데, 이들은 다소 짧은 사리사를 사용했다. Minor Markle은 기병용 사리사가 약 4.5m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피터 코놀리는 4.9m 길이의 기병 창도 사용 가능하며, 전술적으로 4m 창이 백병전에서 더 유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병 사리사는 보병 사리사와 달리 한 손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헬레니즘 기병이 사용한 창이 사리사의 짧은 버전인지, 크시스톤으로 분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니콜라스 빅터 세쿤다는 마케도니아 기병 창이 크시스톤으로 분류되는 것이 더 적절하며, 크시스톤은 산딸나무로 만들어졌고 보병 사리사보다 짧고 넓은 창 머리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당시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창(2.1-2.7m)에 비해 사리사는 4.0-6.4m로 훨씬 길어, 적군에 대해 긴 사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뒤에 있는 병사의 창도 앞으로 내뻗을 수 있어 유리했다. 창날 반대쪽 끝에는 슴베(cf.)가 달려 있어 자세를 잡을 때 안정성을 높이고, 창이 부러졌을 때 예비 무기로 사용할 수 있었다.

2. 2. 창촉

사리사는 긴 나무 자루와 금속 팁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일부는 반대쪽 끝에 금속 창 자루(사우로테르)가 있어 땅에 안전하게 보관할 때 사용되었다.[1] 자루 재료로는 물푸레나무산딸나무가 선호되었는데, 물푸레나무는 길고 유연하며 가벼운 반면, 산딸나무는 짧지만 튼튼했다.[2] 자루는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3]

팁의 크기는 논란이 있는데, 1970~2000년대에는 베르기나의 마케도니아 무덤에서 발견된 잎 모양의 무기(길이 51cm)를 바탕으로 크고 무거운 창머리가 선호되었다.[4] 그러나 21세기 학문에서는 이것이 실제 사리사 머리였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있다.[5] 니콜라스 빅터 세쿤다는 금속 팁이 약 13.5cm 정도로 작고, 철로 만들어졌으며 다이아몬드 모양이라고 주장한다.[6]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는 작은 창머리를 보여주는 듯하며, 이는 중세 창병들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것과 일치한다.[7]

사리사의 길이에 대해서는 고대 문헌마다 차이가 있고, 고고학적 증거도 부족하여 정확히 알기 어렵다. 폴리비우스는 사리사의 길이가 원래 설계상 16 큐빗이었으나 실제로는 14큐빗으로 줄었다고 기록했다.[8] 테오프라스토스는 ''식물 탐구''에서 가장 긴 사리사가 12큐빗이었다고 언급했다.[9] 이를 바탕으로 많은 역사가들은 사리사가 알렉산드로스 이후 헬레니즘 시대에 더 길어졌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피터 코놀리는 길이가 기본적으로 같았다고 보았으며, 현대 단위로 환산하면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시대의 사리사는 약 5.8m, 기원전 3~1세기의 사리사는 약 6.3m이 된다.[10]

사리사는 창 치고는 무거워서 약 5.5kg에서 6.5kg 정도의 무게가 나갔다고 생각된다.[11] 그러나 이후 재건에서는 이것이 너무 무거웠다고 제안하며, 피터 코놀리는 4.05kg 무게의 5.8m 길이의 보병 창을 재건할 수 있었다.[12]

일부 학자들은 두 개의 나무 가지를 금속 튜브로 연결하여 긴 창을 만들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다루기 어렵고 부러질 가능성이 있어 대체로 폐기되었다.[13]

알렉산더 시대의 마케도니아 군대는 사리사를 사용하는 경기병 부대(프로드로모이)인 사리소포로이를 보유했는데, 이들은 다소 짧은 사리사를 사용했다. Minor Markle은 고대 묘사를 바탕으로 기병용 사리사가 약 4.5m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피터 코놀리는 4.9m만큼 긴 기병 창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전술적으로 4m 창이 백병전에서 더 사용하기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클과 코놀리 모두 기병 사리사는 보병 사리사와 달리 한 손으로 휘둘렀을 것이라고 보았다.

헬레니즘 기병이 사용한 창이 사리사의 짧은 버전인지, 크시스톤(ξυστόν|크시스톤grc)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니콜라스 빅터 세쿤다는 마케도니아 기병 창이 크시스톤으로 분류되는 것이 더 적절하며, 크시스톤은 산딸나무로 만들어졌고 보병 사리사보다 짧고 넓은 창 머리를 가졌다고 주장한다.

당시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창(약 2.1-2.7m)에 비해 사리사는 약 4.0-6.4m로 두 배 이상 길어 적군에 대해 더 긴 사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뒤에 있는 병사의 창도 더 많이 내뻗을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창날 반대쪽 끝에는 슴베(창의 보강 부분)가 달려 있어 안정성을 유지하고, 창이 부러졌을 때 예비 무기로 사용할 수 있었다.

2. 3. 슴베

그리스 군대에서 사용되던 창과 마찬가지로, 창날 반대쪽 끝에는 슴베(cf.)가 달려 있어 자세를 잡을 때 안정성을 유지하게 해 주었으며, 창이 부러졌을 때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예비 장비이기도 했다.

2. 4. 길이 및 무게



사리사는 길이 4~6m, 무게 4~5kg으로 쇠로 나뭇잎 모양의 창끝을 만들었고 아랫쪽 끝에는 구리로 감싸서 필요시에 땅에 고정시켜 사용할 수 있었다.[2] 당시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창이 2.1-2.7m 정도였던 것에 비해, 사리사는 약 4m~6.4m로 두 배 이상 길어 적군의 팔랑크스에 대해 더 긴 사거리를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뒤에 있는 병사의 창도 더 많이 내뻗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스 군대에서 사용되던 창과 마찬가지로, 창날 반대쪽 끝에는 슴베가 달려 있는데, 이는 자세를 잡을 때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창이 부러졌을 때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예비 장비이기도 했다.

사리사는 긴 나무 자루와 금속 팁, 이 두 가지 핵심 부분으로 만들어졌다. 일부 사리사에는 반대쪽 끝에 금속 창 자루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사용하지 않을 때 자루가 손상되지 않도록 땅에 안전하게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다. 자루에 적합한 목재로는 물푸레나무산딸나무 두 가지 유형이 선호된다. 물푸레나무는 길이, 유연성, 가벼움을 지녔고, 산딸나무는 더 짧지만 더 튼튼하다.

팁의 크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70~2000년대의 많은 학문은 마놀리스 안드로니코스가 베르기나의 마케도니아 무덤에서 발견한 잎 모양의 무기(길이 51cm)를 바탕으로 비교적 크고 무거운 창머리를 선호했다. 그러나 21세기 학문은 이것이 실제로 발견된 사리사 머리였는지에 대해 더 회의적이다. 니콜라스 빅터 세쿤다는 금속 팁이 약 13.5cm 정도로 작고, 철로 만들어졌으며 다이아몬드 모양이라고 주장한다. 고대 작가들은 사리사가 방패와 갑옷을 모두 뚫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세쿤다가 작지만 초점이 맞춰진 창머리, 즉 넓은 창머리를 사용하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는 작은 창머리를 보여주는 것 같고, 작은 창머리는 나중에 중세의 창병들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것과 일치한다.

고대 권위자들은 사리사가 병사들이 팔랑기테와 안전하게 교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엄청난 길이로 구별되었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 길이가 정확히 얼마나 되었는지는 덜 명확하다. 왜냐하면 다른 저자들은 다양한 설명을 제공하고, 고대 단위 측정이 항상 일관되거나 정확하지 않았으며, 헬레니즘 시대의 사리사를 만드는 데 사용된 나무가 오래전에 썩어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많은 역사가들은 폴리비우스를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설명으로 간주하는데, 그는 헬레니즘 팔랑크스를 관찰한 실제 경험이 있었고, 그의 설명은 다른 곳에서도 정확하기 때문이다. 폴리비우스는 "사리사의 길이는 원래 설계에 따라 16 큐빗이며, 실제로는 14로 줄어들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2세기 경의 안티고노스 왕조 마케도니아 사리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3] 이를 바탕으로 많은 역사가들은 두 설명이 기본적으로 정확하며, 사리사는 알렉산드로스 이후 헬레니즘 시대에 테오프라스토스가 보고한 12큐빗에서 폴리비우스가 관찰한 14큐빗으로 더 길어졌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다른 역사가들은 다른 이론을 제시했다. 피터 코놀리는 길이가 기본적으로 같았다고 제안한다. 이를 현대 단위로 변환하면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시대의 사리사는 약 5.8m, 기원전 3~1세기의 사리사가 실제로 더 길어졌다면 약 6.3m이 된다.[4]

안드로니코스의 발견과 그의 저널 기사 및 마클의 저널 기사를 기반으로 한 학문에서 사리사는 창 치고는 무거워서 약 5.5kg에서 6.5kg 정도의 무게가 나갔다고 생각된다. 이후의 재건에서 이것이 너무 무거웠다고 제안했다. 피터 코놀리는 4.05kg 무게의 체리나무로 된 5.8m 길이의 보병 창을 재건할 수 있었고, 물푸레나무 창은 훨씬 가벼웠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고려한 가능성 중 하나는 이렇게 엄청나게 긴 창을 만들기 위해 두 개의 개별 나무 가지를 금속 튜브로 연결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안드로니코스의 베르기나 발견에서 발견된 그러한 튜브를 사리사의 중간 부분으로 식별한 것과 산딸나무가 설명된 가장 긴 길이로 자라기 어렵다는 사실에 근거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다루기 어렵고 부러질 가능성이 있는 무기를 만들기 때문에 대체로 폐기되었다.

2. 5. 방패

사리사는 긴 나무 자루와 금속 팁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며, 반대쪽 끝에는 금속 창 자루가 추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 금속 자루는 사리사를 땅에 안전하게 보관하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다.[2]

자루는 물푸레나무 또는 산딸나무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3] 물푸레나무는 가볍고 유연하며, 산딸나무는 더 짧지만 튼튼하다.[4] 자루는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졌을 것이다.[5]

금속 팁의 크기는 논란이 있지만, 니콜라스 빅터 세쿤다는 약 13.5cm 정도의 작고 다이아몬드 모양의 철제 팁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6] 고대 기록에 따르면 사리사는 방패와 갑옷을 모두 뚫을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고 한다.[7] 알렉산드로스 모자이크에서도 작은 창 머리가 묘사되어 있다.[8]

사리사의 길이는 고대 문헌마다 다르게 나타나지만, 폴리비우스는 14 큐빗(약 6.3m)이라고 기록했다.[9] 테오프라스토스는 12큐빗(약 5.8m)이라고 언급했다.[10] 사리사는 무게가 약 5.5kg 에서 6.5kg 정도로 추정되지만,[11] 최근 연구에서는 이보다 가벼웠을 가능성을 제시한다.[12]

일부 학자들은 두 개의 나무 가지를 금속 튜브로 연결하여 사리사를 만들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이 이론은 무기가 다루기 어렵고 부러지기 쉽다는 이유로 폐기되었다.[13]

팔랑크스 대형에서 사리사를 사용하는 보병은 방패도 함께 사용했다. 린디안 사원 연대기에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에게 "열 개의 ''펠타'', 열 개의 ''사리사'', 열 개의 헬멧"이 헌정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마케도니아인들이 사리사와 청동 펠타(방패)를 한 세트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사리사의 크기 때문에 병사들은 양손으로 사용해야 했으므로, 작은 방패를 휴대했다. 알렉산드로스 시대의 펠타는 약 60cm 크기였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약 45cm 크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방패는 목 끈을 사용하여 왼쪽 어깨에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65cm 에서 75cm 범위의 더 큰 방패가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3. 전술



사리사는 길이 4m~6m, 무게 4kg~5kg였으며, 쇠로 만든 나뭇잎 모양의 창끝과 구리로 감싼 아랫부분을 가지고 있어 필요시 땅에 고정시켜 사용할 수 있었다. 사리사로 무장한 마케도니아 군대는 전진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고, 주로 중앙 정예부대에 배치되어 전선 중앙에서 적의 진격을 막는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양측면의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원활한 기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사리사로 무장하고 잘 훈련된 마케도니아 군대에 대항할 수 있는 군대는 거의 없었으며, 인도의 전투 코끼리조차도 사리사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가 전차를 이용해 공격했지만, 사리사로 무장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이를 무력화시켰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도 사리사는 헬레니즘 제국 군대의 주력으로 남았지만, 팔랑크스 전술이 지나치게 사리사에만 의존하면서 혼합 병력을 유기적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전술에 의해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사리사를 사용하는 팔랑크스는 전투 시 움직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열린 대형을 취했다. 돌격 전에는 밀집대형이나 압축 대형(synaspismos)으로 대형을 좁혔는데, 이는 "창의 벽"을 형성하여 적의 진격을 막는 데 효과적이었다. 창은 매우 길어 병사들 최전열 앞으로 5열이나 튀어나왔고, 후방 열은 창을 위로 기울여 날아오는 화살을 막는 부가적인 역할을 했다.[7]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정면에서는 사실상 무적이었지만, 적 지휘관을 죽이거나 대형을 파괴하거나 측면 공격을 통해 사기를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격파할 수 있었다.

3. 1. 팔랑크스

필리포스 2세마케도니아 군대에 팔랑크스를 처음 도입하면서, 보통 3m를 넘지 않던 창의 길이를 최대 6.3m까지 늘린 것이 사리사이다. 사리사는 휴대하기 어렵다는 단점과 다른 나라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7]

사리사는 길이 4m~6m, 무게 4kg~5kg로 쇠로 만든 나뭇잎 모양의 창끝을 가지고 있었고, 아랫쪽 끝은 구리로 감싸 필요시 땅에 고정시켜 사용할 수 있었다. 사리사로 무장한 마케도니아 군대는 전진하는 적을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었고, 주로 중앙의 정예부대에 배치되어 전선 중앙에서 적의 전진을 완전히 봉쇄했기 때문에 양측면의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원활한 기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마케도니아 군의 전술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기인 "계획된 밀집방어에 이은 신속하고 대담한 기병의 포위공격의 토대"가 되었다.

당시 사리사로 무장한 잘 훈련된 마케도니아 군대에 대항할 군대는 거의 없었고, 인도의 전투 코끼리도 사리사의 위력에 무릎을 꿇었다. 특히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가 전차를 이용해 공격했으나, 사리사로 무장한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앞에서 전차는 무력화되었다.

사리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도 헬레니즘 제국 군대의 주력으로 남았으나, 지나치게 사리사를 이용한 팔랑크스 전술에만 의존한 나머지 혼합병력을 유기적으로 구사하는 새로운 전술에 의해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표준 헬레니즘 군대의 배치는 중앙에 중장 보병 팔랑크스, 측면에는 기병, 전방에는 경보병 산병이 배치되는 형태였다. 이 중 보병 팔랑크스는 사리사를 사용했고, 기병은 "사리사"로 간주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약간 짧은 창을 사용했다.

행군 및 기동 중 보병 사리사는 수직으로 잡혀 있었다. 전투를 위해 사리사를 수평으로 앞으로 향하게 되면 팔랑크스는 앞으로 진격할 수 있었지만, 팔랑크스를 회전시키는 것은 더 어렵고 훈련과 규율이 필요했다. 사리사는 이미 너무 길어서 앞으로 찌르는 것은 사거리를 크게 늘리지 못했을 것이고, 아마도 0.5m 정도였을 것이다.

사리사를 든 팔랑크스는 일반적으로 움직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열린 대형으로 전투에 임했다. 돌격 전에는 밀집대형 또는 압축 대형(synaspismos)으로 대형을 좁혔다. 팔랑크스의 좁은 대형은 "창의 벽"을 만들었고, 창은 너무 길어서 병사들의 최전열 앞쪽으로 완전히 5열이나 튀어나와 있었다. 후방 열은 창을 위로 기울여 준비 상태를 유지했는데, 이는 날아오는 화살을 막는 부가적인 역할을 했다.[7]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정면에서 사실상 무적으로 여겨졌다. 팔랑크스를 물리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 지휘관을 죽이거나, 대형을 파괴하거나, 측면 공격하여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로마군은 키노스케팔라이 전투 (기원전 197년)에서 측면 공격 전술을 사용했고, 테르모필레 전투 (기원전 191년)에서는 로마군의 기습 측면 공격으로 인해 군대는 대형을 잃고 후퇴했다.[4] 리비우스는 피드나 전투 (기원전 168년)에서의 로마의 승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사리사를 사용할 수 있는 한 가지 기술은 적의 돌격이 임박했을 때 땅에 직접 꽂는 것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전술을 보고하는 유일한 출처는 사모사타의 루키아노스이므로, 실제 기술이었다면 드문 기술이었을 것이다.[9]

팔랑기테스는 일반적으로 검이나 단검과 같은 보조 무기를 휴대했다. 팔랑크스가 대형을 깨거나, 고립된 병사가 근접전에 처했을 경우, 사리사는 무기로서 거의 쓸모가 없었고, 대신 보조 무기가 사용되었다.

당시 그리스에서 사용되던 창이 2.1m~2.7m 정도였던 것에 비해, 사리사는 약 4m~6.4m로 두 배 이상 길어 적군의 팔랑크스에 대해 더 긴 사거리를 가질 수 있었다. 게다가 뒤에 있는 병사의 창도 더 많이 내뻗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리스 군대에서 사용되던 창과 마찬가지로, 창날 반대쪽 끝에는 슴베(창#보강)가 달려 있는데, 이는 자세를 잡을 때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창이 부러졌을 때 무기로 사용할 수 있는 예비 장비이기도 했다.

3. 2. 기병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 마케도니아 군에는 사리사를 다루는 경기병 부대인 사리소포로이(프로드로모이)가 있었는데, 이들은 비교적 짧은 사리사를 사용했다. 그러나 "사리소포로이"라는 용어는 후기 헬레니즘 시대 문헌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남아있는 대부분의 마케도니아 기병 묘사에서는 사리사를 겨드랑이 아래에서 휘두르는 모습을 보이지만, 어깨 위로 휘두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1]

Minor Markle은 고대 묘사를 바탕으로 기병용 사리사가 약 4.5m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기병이 항상 사리사를 장비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았다. 정찰 임무 시에는 투창 두 자루와 칼만 휴대하고, 사리사는 주요 전투에 사용하기 위해 남겨두었을 것이다.[2] 피터 코놀리도 이 문제를 연구했는데, 기병 창은 (투창처럼 한 번 던지고 마는 로마의 필룸과 달리) 주요 무기로 묘사되므로 반복 사용이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코놀리는 현대 기수에게 다양한 길이로 재구성한 창을 시험하게 한 결과, 4.9m 길이의 기병 창도 사용 가능함을 발견했다. 그는 전술적으로 4.5m 이상의 긴 창이 파괴적인 초기 돌격에 유리하지만, 4m 창은 지속적인 백병전에서 더 사용하기 쉬울 것이라고 보았다.[1] 마클과 코놀리는 모두 기병용 사리사는 보병용 사리사와 달리 한 손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는데, 이는 양손으로 강하게 내려칠 경우 기수가 말에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1][3]

헬레니즘 기병이 창을 자주 사용했지만, 이들의 무기를 사리사의 짧은 형태로 볼 것인지, 아니면 크시스톤(ξυστόνgrc)으로 분류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4] 니콜라스 빅터 세쿤다는 마케도니아 기병 창이 크시스톤에 더 가깝다고 주장한다. 크시스톤은 산딸나무로 만들어졌고, 보병용 사리사보다 짧지만 더 크고 넓은 창 머리를 가졌다.[4] 그는 또한 고대 마케도니아인들이 '사리사'라는 용어를 모든 종류의 창을 지칭하는 의미로 폭넓게 사용했을 수 있다고 언급한다.[5]

3. 3. 한계

사리사는 그 길이 때문에 휴대하기 어려웠고, 다른 나라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7] 팔랑크스 전술이 지나치게 사리사에만 의존하면서, 혼합 병력을 유기적으로 구사하는 새로운 전술에 밀려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로마군은 키노스케팔라이 전투 (기원전 197년)에서 측면 공격 전술을 사용하여 안티고노스 마케도니아군을 물리쳤다. 몇 년 후, 셀레우코스 팔랑크스는 테르모필레 전투 (기원전 191년)에서 잘 버텼지만, 로마군의 기습적인 측면 공격으로 인해 대형을 잃고 후퇴했다.[4] 리비우스는 피드나 전투 (기원전 168년)에서 로마군이 안티고노스 마케도니아군을 상대로 승리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팔랑크스가 대형을 깨거나 고립된 병사가 근접전에 처했을 경우, 사리사는 무기로서 거의 쓸모가 없었고, 대신 보조 무기인 검이나 단검 등을 사용했다.

4. 역사

사리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에도 헬레니즘 제국 군대의 주력으로 계속 사용되었으나, 지나치게 사리사를 이용한 팔랑크스 전술에만 의존한 나머지 혼합 병력을 유기적으로 구사하는 새로운 전술에 의해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1] 이 단어는 비잔틴 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어 보병의 긴 창을 묘사하기도 했다. 긴 파이크는 중세 후기와 근세 초기 시대 (1300–1700)의 변화하는 상황으로 인해 다시 유행하게 되었다. 군사 역사가들은 스위스 용병, 독일 란츠크네히트, 잉글랜드 및 아일랜드의 파이크병이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사용하여 마케도니아 사리사가 어떻게 사용되었을지 분석했다. 1521년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전술론''에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오늘날 스위스 대대와 다름없다고 추측한다. 그들은 모든 힘과 권력을 파이크에 쏟고 있다"라고 썼다. 이 시대의 보존된 영국 파이크는 길이가 5.6m 에서 5.9m 정도이며, 6.7m에 달하는 파이크에 대한 보고서도 있다. 이러한 보고서는 마케도니아인들이 그렇게 긴 파이크를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고 군사적으로 실행 가능했음을 시사한다.

4. 1.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드로스 대왕

필리포스 2세는 마케도니아 군대에 팔랑크스를 처음 도입하고 기병을 유기적으로 활용하면서, 창의 길이를 보통보다 더욱 길게 만들었는데, 이것이 사리사이다. 당시의 창은 보통 3m를 넘지 않았지만 사리사는 길이를 최대 6.3m까지 늘렸다. 그러나 긴 길이 때문에 휴대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고, 다른 나라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1]

사리사는 길이 4∼6m, 무게 4∼5kg으로 쇠로 나뭇잎 모양의 창끝을 만들었고 아랫쪽 끝에는 구리로 감싸서 필요시에 땅에 고정시켜 사용할 수 있었다. 사리사로 무장한 마케도니아 군대는 전진하는 적을 완전히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었고, 주로 중앙에 정예부대에 배치하여 전선 중앙에서 적의 전진을 완전히 봉쇄하여 양측면의 마케도니아 기병대가 원활한 기동력을 확보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마케도니아군의 전술은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기인 “계획된 밀집방어에 이은 신속하고 대담한 기병의 포위공격의 토대”가 되었다.[1]

당시 사리사로 무장한 잘 훈련된 마케도니아 군대에 맞서 대항할 군대는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인도의 전투 코끼리도 사리사의 위력에 무릎을 꿇었다. 특히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가 전차를 이용해 공격했으나, 사리사로 무장한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앞에서 전차도 무력해졌다.[1]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아시아 전역에서의 전쟁에서 사리사를 장착한 팔랑크스를 사용했으며, 소아시아, 페르시아 이집트, 페르시아 제국의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고향, 그리고 파우라바스 (인도 북서부)를 정복했다. 사리사를 사용하는 팔랑크스는 초기의 모든 전투에서 필수적이었으며, 페르시아 왕의 낫 전차가 팔랑크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결정적인 가우가멜라 전투가 포함되었으며, 이는 동반 기병과 펠타스트 (투창병)의 결합된 사용에 의해 지원되었다. 후기의 원정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팔랑크스와 사리사의 중요성을 점차 줄여나갔고, 마케도니아식 전투 전술에 특별히 훈련되지 않은 아시아 무기와 병력을 통합하기 위해 무기 결합 방식을 수정했다.[1]

4. 2. 헬레니즘 시대



마케도니아필리포스 2세가 사리사를 처음 도입했다. 그는 마케도니아 군대에 팔랑크스를 처음 도입하고 기병을 유기적으로 활용했으며, 창의 길이를 보통보다 더욱 길게 만들었다. 당시의 창은 보통 3m를 넘지 않았는데 사리사는 길이를 최대 6.3m까지 늘렸다. 그러나 긴 길이 때문에 휴대하기 어렵고 종종 다른 나라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1]

사리사는 길이 4∼6m, 무게 4∼5kg으로 쇠로 나뭇잎 모양의 창끝을 만들었고 아랫쪽 끝에는 구리로 감싸서 필요시에 땅에 고정시켜 사용할 수 있었다. 사리사로 무장한 마케도니아 군대는 전진하는 적을 완전히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었고 주로 중앙에 정예부대에 배치하여 전선 중앙에서 적의 전진을 완전히 봉쇄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양측면의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원활한 기동력을 확보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마케도니아군의 전술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기인 “계획된 밀집방어에 이은 신속하고 대담한 기병의 포위공격의 토대”가 되었다.[1]

당시 이 사리사로 무장한 잘 훈련된 마케도니아 군대에 맞서 감히 대항할 군대는 아무도 없었고 심지어 인도의 전투 코끼리도 사리사의 위력에 무릎을 꿇었다. 특히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가 전차를 이용해 공격했으나 이 기다란 사리사로 무장한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앞에서 전차도 무력해졌다.[1]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 이후에도 사리사는 헬레니즘 제국 군대에 주력으로 남았으나, 지나치게 사리사를 이용한 팔랑크스 전술에만 의존한 나머지 혼합병력을 유기적으로 구사하는 새로운 전술에 의해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1]

3세기경의 레프카디아의 심판의 무덤에서 나온 창을 든 전사의 예술 작품—사리사일 가능성이 있음


마케도니아 보병의 사리사 채택은 일반적으로 필리포스 2세에게 기인하며,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시아 전역에서의 전쟁에서 사리사를 장착한 팔랑크스를 사용했으며, 소아시아, 페르시아 이집트, 페르시아 제국의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 고향, 그리고 파우라바스 (인도 북서부)를 정복했다. 사리사를 사용하는 팔랑크스는 초기의 모든 전투에서 필수적이었으며, 페르시아 왕의 낫 전차가 팔랑크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결정적인 가우가멜라 전투가 포함되었으며, 이는 동반 기병과 펠타스트 (투창병)의 결합된 사용에 의해 지원되었다. 후기의 원정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팔랑크스와 사리사의 중요성을 점차 줄여나갔고, 마케도니아식 전투 전술에 특별히 훈련되지 않은 아시아 무기와 병력을 통합하기 위해 무기 결합 방식을 수정했다.[2]

사리사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디아도코이 계승 국가의 헬레니즘 군대의 핵심으로 남았다.[2]

참조

[1] 논문 2013
[2] 웹사이트 The Histories, 18.29 https://www.perseus.[...]
[3] 서적 Enquiry into Plants https://archive.org/[...]
[4] 서적 The Seleucid Arm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6
[5] 서적 Lindos. Fouilles de l'Acropole, 1902-1914. Volume 2: Inscriptions. 1941
[6] 기타 1977, 2000
[7] 서적 An Invincible Beast: Understanding the Hellenistic Pike Phalanx in Action Pen and Sword Military 2016
[8] 웹사이트 The History of Rome, Book 44 https://www.perseus.[...] 1850
[9] 서적 The Works of Lucian of Samosata Clarendon Press 1905
[10] 기타 "The History, Histories" "11th century, 6th century"
[11] 기타 1982, 2001, 2000
[12] 웹사이트 The Art of War 1675
[13] 간행물 The Macedonian Sarrissa, Spear and Related Armor Archeological Institute of America 1977-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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