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펠타스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펠타스트는 초승달 모양의 방패인 펠테를 사용한 고대 그리스의 경보병이다. 트라키아에서 유래했으며, 펠테는 염소나 양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펠타스트는 투창을 주 무기로 사용하며, 중장보병의 약점을 보완하고, 기원전 391년 레카이온 전투에서 아테네의 이피클라테스가 스파르타 중장보병을 격파하는 데 기여하며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용병으로 활동했으며, 헬레니즘 시대에는 마케도니아 군대에서 정예 부대로 활약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사 - 사리사
    사리사는 고대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보병이 사용한 4m에서 6m에 이르는 긴 자루 창으로, 적 접근을 막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기병용으로 변형되어 헬레니즘 시대 군대의 주력 무기가 되었다.
  •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사 - 크시스톤
    크시스톤은 고대 아테네의 공공 집회 장소로,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졌으며, 클레이스테네스 개혁 이후 아테네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시민 참여를 위한 중요한 공간이었다.
  • 고대 그리스의 군사 - 스트라테고스
    스트라테고스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여 군대 지휘관을 의미하며, 아테네에서는 군사 및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고,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에는 행정 역할도 담당했으며, 비잔틴 제국에서는 지역 통치와 군사를 겸하는 직위로, 현대 그리스군에서는 최고위 장교 계급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다.
  • 고대 그리스의 군사 - 밀집 장창 보병대
    밀집 장창 보병대는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하여 발전한 전술 대형으로, 병사들이 밀집하여 긴 창을 사용하여 전투를 벌이는 전술이며, 스파르타, 테베를 거쳐 마케도니아에서 더욱 강력한 형태로 발전했으나 로마 군단의 등장과 함께 쇠퇴했다.
  • 보병 - 소총
    소총은 강선이 있는 총열을 사용하고 어깨에 견착하여 발사하는 개인 화기로, 핸드 캐논에서 발전하여 15세기부터 소형화되었으며, 다양한 종류로 분류된다.
  • 보병 - 아시가루
    아시가루는 일본 전국시대부터 에도시대에 걸쳐 존재한 보병 계급으로, 초기에는 용병 성격이 강했으나 점차 훈련된 정규군으로 발전하여 전투의 주력이 되었고, 일부는 사회적 상승을 이루기도 했지만, 에도시대에는 행정, 경비, 경찰 업무를 맡으며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었다.
펠타스트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종류경보병
사용 시기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
주요 무기펠타 (가죽 방패), , 투창
전투 역할유격전, 정찰, 측면 공격, 적군 교란
로마자 표기peltastēs
역사
기원트라키아
발전그리스에서 사용
마케도니아 군대에서 주요 전력으로 활용
전술적 중요성전통적인 중장보병의 약점을 보완
기동성과 유연성을 제공
특징
장비가벼운 갑옷 또는 갑옷 미착용
펠타라는 초승달 모양의 가벼운 방패 사용
이동력매우 빠르고 기동성이 뛰어남
전투 방식원거리에서 투창으로 적을 공격
근접전에서는 창을 사용
개활지보다는 험준한 지형에서 더 효과적
다른 보병과의 비교호플리테스 (중장보병)에 비해 장비가 가볍고 기동성이 우수
적군에게 혼란을 야기하고 측면을 공격하는 데 특화
전술적 활용
유격전적군을 괴롭히고 유인하는 데 사용
정찰전방에서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역할 수행
측면 공격적군 대형의 측면이나 후방을 공격하여 혼란을 유발
적군 교란신속한 기동을 이용해 적군의 대형을 흐트러뜨림
참고 자료
관련 전투레우크트라 전투
코린토스 전투
관련 인물이피크라테스 (펠타스트를 개량한 장군)

2. 명칭과 특징

펠타스트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활동했던 경장보병의 일종이다. 이들은 주로 트라키아에서 기원했으며, '펠타'라는 가벼운 방패를 사용한 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리스군의 주력은 중장보병인 호플리타이였고, 이들은 파랑크스라는 밀집 대형을 이루어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파랑크스는 견고하지만 기동력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북방의 트라키아인들과 싸우면서 펠타스트의 전술과 무기를 받아들였다. 초기 펠타스트는 중장보병 장비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계층으로, 중장보병의 보조 역할만 담당했다. 그러나 기원전 391년 레카이온 전투에서 아테네의 장군 이피클라테스가 이끄는 펠타스트 부대가 스파르타 중장보병을 격파하면서 펠타스트의 역할이 재조명되었다.

펠타스트는 주로 투창을 이용한 산병전을 벌였지만, 다른 경장보병과 달리 대열을 짜서 백병전을 벌이기도 했다. 투창에는 투척 시 힘을 더하기 위해 끈이 달려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투창 외에도 슬링이 있었지만, 활은 주로 경기용으로 사용되었고, 전투에서는 투창 공격이 페르시아나 스키타이와 같은 다른 문명보다 더 많았다.[25] 창던지기는 고대 올림픽에서 각 도시 국가가 투창 기술을 겨루던 것에서 기원한다.

그리스 펠타스트는 트라키아, 아이토리아, 일리리아 등의 경장보병을 원형으로 한다. 이들은 산악 지형에서 쉽게 활동할 수 있도록 가벼운 방패인 펠타와 투구만 착용하고, 창과 론케이아라는 곡선형 단검, 망토를 걸치고 전투에 임했다.[25]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아이토리아 원정에서 아테네군이 경장보병에게 패배한 후, 스팍테리아 해전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하면서 그리스에서 펠타스트가 증가했다. 그리스 펠타스트는 망토를 착용하지 않는 점을 제외하면 트라키아 펠타스트를 계승했다.[26]

펠타스트는 경보병 중 가장 강력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비용이 저렴하여 쉽게 입대할 수 있었다.[29] 이들은 그리스 또는 다른 지역에서 용병으로 활동했으며, "펠타스트"라는 명칭은 이후 용병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30]

2. 1. 펠테 (Pelte)

펠타스트들은 '펠테'(πέλτη|peltē|label=nonegrc)라고 불리는 초승달 모양의 위커 방패를 주요 방어구로 사용했으며, 그래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펠테는 테두리가 없고 염소나 양가죽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일부 문헌에서는 이 방패가 둥글 수도 있음을 암시하지만, 미술 작품에서는 대개 초승달 모양으로 묘사된다. 또한 스키타이 예술에도 등장하며 중앙 유럽에서 일반적인 유형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방패는 중앙 끈과 가장자리 근처의 손잡이 또는 중앙 손잡이만으로 휴대할 수 있었다. 트라키아 펠타스트들은 적을 피할 때 방패를 등에 메고 다녔기 때문에 휴대용 끈(구이지)이 있었을 수도 있다.

시이카와 사다하루에 따르면, 펠타는 초승달 모양의 방패로, 가로는 70cm, 세로는 30cm가 채 되지 않으며, 뒷면 중앙에 팔을 넣는 끈이 있고, 초승달의 곡선이 아래로 향하도록 손잡이가 끝에 달려 있다.[21] 미나미카타 쿠마쿠스는 『뱀에 관한 민속과 전설』에서 펠타를 "원형 방패"로 번역하고 있지만,[22] 고대 그리스에서는 원형인 것도 있었다.[23]

원래 이 방패는 펠티페라(peltiferae, "펠타를 가진 자")라고 불린 전설적인 아마존 여전사들이 사용했다고 여겨진다. 시이카와는 이에 대해 "사실은 불명"이라고 하면서도, 여걸이라 불린 그들이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의 상징인 을 본뜬 방패를 사용할 가능성은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시이카와에 따르면 그 이전에 페르시아 제국의 병사들이 비슷한 모양의 방패를 사용했고, 이 모양의 방패가 트라키아인들이 애용하는 것이 되어, 마침내 고대 그리스로 전해졌다고 한다.[24]

2. 2. 무장

펠타스트의 무기는 여러 개의 으로 구성되었는데, 투척 시 더 큰 힘을 가할 수 있도록 끈이 달려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시이카와 사다하루에 따르면, 펠타는 초승달 모양의 방패로, 가로는 70cm, 세로는 30cm가 채 되지 않으며, 뒷면 중앙에 팔을 넣는 끈이 있고, 초승달의 곡선이 아래로 향하도록 손잡이가 끝에 달려 있었다.[21] 미나미카타 쿠마쿠스는 『뱀에 관한 민속과 전설』에서 펠타를 “원형 방패”로 번역했지만,[22] 고대 그리스에서는 원형인 것도 있었다.[23]

원래 이 방패는 펠티페라(peltiferae, “펠타를 가진 자”)라고 불린 전설적인 아마존 여전사들이 사용했다고 여겨진다. 시이카와는 이에 대해 “사실은 불명”이라고 하면서도, 여걸이라 불린 그들이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의 상징인 을 본뜬 방패를 사용할 가능성은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시이카와에 따르면 그 이전에 페르시아 제국의 병사들이 비슷한 모양의 방패를 사용했고, 이 모양의 방패가 트라키아인들이 애용하는 것이 되어, 마침내 고대 그리스로 전해졌다고 한다.[24]

그리스의 펠타스트(peltast) 또는 펠타스타이(peltastae)의 원형은 트라키아, 아이토리아, 일리리아 등의 경장보병이다. 그들은 산악 지형에서 용이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방어구는 경량의 방패인 펠타(pelta)와 투구만을 착용하고, 창과 론케이아(ロンケイヤ)라 불리는 곡선형 단검을 지니고, 망토를 걸치고 전투에 임했다.[25]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아이토리아 원정에서 "산악 지형에서는 평지에서만 전투가 가능한 호플리타이"밖에 없는 "이상한" 아테네군이 경장보병에게 패배한 후 이를 채용하여, 스파크테리아 해전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리스에서 이러한 병사들이 증가하게 된다. 그리스의 펠타스타이는 망토를 착용하지 않는 점을 제외하면 트라키아의 펠타스타이를 계승하였고, 창을 지녔으며, 투구와 펠타 외에는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았다.[26] 시가와(市川)에 따르면, 창 외에 백병전용의 창을 지닌 그림은 확인되지만, 그것이 사용된 기록은 없다.[27] 마틴 J. 도어티(Martin J. Doerity)에 따르면, 산병으로 사용된 그들은 나이프나 단검, 검을 가지고 있었다.[28]

마틴 J. 도어티에 따르면, 펠타스트는 경보병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비용이 저렴하여 쉽게 입대할 수 있었다.[29] 또한 그리스 또는 그 외 지역에서 용병으로 활동했으며, "펠타스트"라는 명칭은 이후 용병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30]

2. 3. 복장

시이카와 사다하루에 따르면, 펠타는 초승달 모양의 방패로, 가로는 70cm, 세로는 30cm가 채 되지 않으며, 뒷면 중앙에 팔을 넣는 끈이 있고, 초승달의 곡선이 아래로 향하도록 손잡이가 끝에 달려 있다.[21] 미나미카타 쿠마쿠스는 『뱀에 관한 민속과 전설』에서 펠타를 “원형 방패”로 번역하고 있지만,[22] 고대 그리스에서는 원형인 것도 있었다.[23]

원래 이 방패는 펠티페라(peltiferae, “펠타를 가진 자”)라고 불린 전설적인 아마존 여전사들이 사용했다고 여겨진다. 시이카와는 이에 대해 “사실은 불명”이라고 하면서도, 여걸이라 불린 그들이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의 상징인 을 본뜬 방패를 사용할 가능성은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시이카와에 따르면 그 이전에 페르시아 제국의 병사들이 비슷한 모양의 방패를 사용했고, 이 모양의 방패가 트라키아인들이 애용하는 것이 되어, 마침내 고대 그리스로 전해졌다고 한다.[24]

그리스의 펠타스트(peltast) 또는 펠타스타이(peltastae)의 원형은 트라키아, 아이토리아, 일리리아 등의 경장보병이다. 그들은 산악 지형에서 용이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방어구는 경량의 방패인 펠타(pelta)와 투구만을 착용하고, 창과 론케이아(ロンケイヤ)라 불리는 곡선형 단검을 지니고, 망토를 걸치고 전투에 임했다.[25]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아이토리아 원정에서 "산악 지형에서는 평지에서만 전투가 가능한 호플리타이"밖에 없는 "이상한" 아테네군이 경장보병에게 패배한 후 이를 채용하여, 스팍테리아 해전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리스에서 이러한 병사들이 증가하게 된다. 그리스의 펠타스타이는 망토를 착용하지 않는 점을 제외하면 트라키아의 펠타스타이를 계승하였고, 창을 지녔으며, 투구와 펠타 외에는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았다.[26]

3. 역사

고대 그리스군의 주력은 중장보병인 호플리타이였고, 이들의 전술은 밀집대형을 짜서 견고하지만 기동력이 부족한 파랑크스였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북방에서 침입하는 트라키아인들과 싸우면서 그들의 전술과 무기를 받아들였는데, 그중 하나가 펠타와 펠타스트 전술이었다.

초기 펠타스트는 중장보병 장비를 스스로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계층이었고,[26] 중장보병의 보조 역할만 담당했다. 하지만 기원전 391년 레카이온 전투에서 아테네의 장군 이피클라테스가 이끄는 경장보병 부대가 스파르타의 중장보병을 격파하면서 펠타스트도 중장보병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펠타스트는 주로 투창을 이용한 산병전을 벌였지만, 다른 경장보병과 달리 대열을 짜서 백병전을 벌이기도 했다.[28] 투창에는 투척 시 손가락이 잘 걸려 힘이 전달되도록 끈이 달려 있었다. 그리스에는 투창 외에도 활과 슬링이 있었지만, 활은 주로 경기용이었고 전장이나 사냥에 사용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전투에서 투창 공격은 페르시아나 스키타이와 같은 다른 문명보다 더 많았다.[27]

그리스 펠타스트(peltast) 또는 펠타스타이(peltastae)의 원형은 트라키아, 아이토리아, 일리리아 등의 경장보병이다. 이들은 산악 지형에서 활동하기 쉽도록 경량 방패인 펠타(pelta)와 투구만을 착용하고, 창과 론케이아라는 곡선형 단검을 지니고, 망토를 걸쳤다.[25]

3. 1. 기원과 발전

고대 그리스 시대 그리스의 전통적인 전투 방식은 중장보병 혹은 호플리테스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북방에서 침입하는 트라키아인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그들의 전술과 무기를 받아들였는데, 그중 하나가 펠타와 펠타스트의 전법이었다.

펠타스트들이 사용한 전투 방식은 트라키아에서 유래했으며, 최초의 그리스 펠타스트들은 트라키아 해안의 그리스 도시들에서 모집되었다.[1] 이들은 일반적으로 도자기나 다른 이미지에서 여우 가죽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프리기아 모자와 귀덮개를 포함한 전형적인 트라키아 의상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또한 보통 무늬가 있는 튜닉, 사슴가죽 부츠, 그리고 밝고 기하학적인 무늬로 장식된 ''제이라스''라고 불리는 긴 망토를 착용했다. 그러나 많은 용병 펠타스트들은 그리스에서 모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코린토스 투구, 경갑, 흉갑을 착용하고 호플리테스 창을 들고 있는 호플리테스가 펠테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도자기들도 발견되었다. 종종 신화 속의 아마존 여전사들이 펠타스트 장비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초기에는 펠타스트는 중장보병의 장비를 스스로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계층(고대 그리스에서는 갑옷과 무기를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에 불과했고, 중장보병의 보조 역할만을 담당했다. 하지만 중장보병의 약점인 기동력 부족을 보완하고, 투척으로 적을 교란하는 등 그들의 역할에 점차 주목하게 되었다.

펠타스트들은 그리스 전쟁에서 점차 중요해졌는데,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그러했다. 크세노폰은 ''아나바시스''에서 기원전 401년 쿠낙사 전투에서 아케메네스 기병에 맞서 싸우는 펠타스트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때 그들은 키루스 2세의 용병 부대의 일원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크세노폰의 묘사는 이 펠타스트들이 창이 아닌 검과 투창으로 무장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페르시아 기병의 돌격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대열을 열고 기병이 통과하도록 허용하면서 동시에 검으로 치고 투창을 던졌다.[4]

펠타스트는 주로 투창을 이용한 산병전을 벌였지만, 다른 경장보병과 달리 대열을 짜서 백병전을 벌이기도 했다. 투창에는 투척 시 손가락이 잘 걸려 힘이 전달되도록 끈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스에는 투창 외에도 활과 슬링이 있었지만, 활은 주로 경기용이었고 전장이나 사냥에 사용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오히려 경기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전투에서의 사격은 이러한 투창 공격이 페르시아나 스키타이와 같은 다른 문명보다 더 많았다.

기원전 391년 레카이온 전투에서 아테네의 장군 이피클라테스가 이끄는 경장보병 부대가 스파르타의 중장보병을 격파하여 펠타스트도 중장보병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디오도로스 시켈루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피크라테스는 기원전 374년경에 그의 부하들에게 긴 창을 다시 장비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개혁은 작은 방패, 검, 그리고 투창 대신 창을 든 "펠타스트" 유형을 만들었을 것이다.

J.G.P. 베스트와 같은 일부 권위자들은 이후의 "펠타스트"들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펠타스트가 아니었고, 더 긴 창과 함께 펠테 방패를 휴대하는 가볍게 무장한 호플리테스였으며, 이는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7] 그러나 이피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펠타스트 그림들에는 찌르는 창이 포함되어 있으며, 일부 펠타스트들은 투창과 함께 혹은 투창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추가적으로 찌르는 창을 휴대했을 수도 있다. 어떤 전투 기록에서도 펠타스트가 찌르는 창을 사용했다는 묘사는 없으므로, 이는 개인의 선택에 따라 (정책이나 개혁의 일환으로가 아니라) 때때로 휴대되었을 수 있다. 기원전 400년경의 파이아바의 리키아 석관에는 둥근 펠테를 휴대하지만 팔을 들어올려 찌르는 창을 사용하는 병사가 묘사되어 있다. 그는 뺨보호대가 있는 ''필로스'' 투구를 쓰고 있지만 갑옷은 없다. 따라서 그의 장비는 이피크라테스의 새로운 병사들과 유사하다. 4세기 BC의 펠타스트들은 때때로 투구와 린넨 갑옷을 함께 착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마케도니아 북쪽의 트라키아 부족, 특히 아그리아노이 출신의 펠타스트들을 고용했다. 기원전 3세기에 펠타스트들은 점차 ''투레오포로이'' 보병으로 대체되었다. 후대에 펠타스트에 대한 언급은 사실 그들의 장비 스타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데, "펠타스트"라는 단어가 "용병"의 동의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3. 2. 펠로폰네소스 전쟁

고대 그리스 시대 그리스의 전통적인 전투 방식은 호플리테스라고 불리는 중장보병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북쪽에서 침입하는 트라키아인들과 싸우면서 그들의 전술과 무기를 받아들였는데, 그중 하나가 펠타와 펠타스트의 전법이었다.

펠타스트들이 사용한 전투 방식은 트라키아에서 유래했으며, 최초의 그리스 펠타스트들은 트라키아 해안의 그리스 도시들에서 모집되었다.[1] 펠타스트는 점차 그리스 전쟁에서 중요해졌는데,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에 그러했다.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아이토리아 원정에서 산악 지형에서는 평지에서만 전투가 가능한 호플리타이밖에 없는 아테네군이 경장보병에게 패배한 후 이를 채용하여, 스파크테리아 해전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리스에서 이러한 병사들이 증가하게 된다.

초기에는 펠타스트는 중장보병의 장비를 스스로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계층(고대 그리스에서는 갑옷과 무기를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에 불과했고, 중장보병의 보조 역할만을 담당했다. 하지만 중장보병의 약점인 기동력 부족을 보완하고, 투척으로 적을 교란하는 등 그들의 역할에 점차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391년의 레카이온 전투에서 아테네의 장군 이피클라테스가 이끄는 경장보병 부대가 스파르타의 중장보병을 격파하여 펠타스트도 중장보병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크세노폰은 ''아나바시스''에서 기원전 401년 쿠낙사 전투에서 아케메네스 기병에 맞서 싸우는 펠타스트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때 그들은 키루스 2세의 용병 부대의 일원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크세노폰의 묘사는 이 펠타스트들이 창이 아닌 검과 투창으로 무장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페르시아 기병의 돌격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대열을 열고 기병이 통과하도록 허용하면서 동시에 검으로 치고 투창을 던졌다.[4]

펠타스트들은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 용병 보병의 주요 유형이 되었다. 아테네 장군 이피크라테스는 기원전 390년 레케움 전투에서 주로 펠타스트들을 사용하여 스파르타의 팔랑크스를 격파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루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피크라테스는 기원전 374년경에 그의 부하들에게 긴 창을 다시 장비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개혁은 작은 방패, 검, 그리고 투창 대신 창을 든 "펠타스트" 유형을 만들었을 것이다.

J.G.P. 베스트와 같은 일부 권위자들은 이후의 "펠타스트"들이 전통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펠타스트가 아니었고, 더 긴 창과 함께 펠테 방패를 휴대하는 가볍게 무장한 호플리테스였으며, 이는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7] 기원전 3세기에 펠타스트들은 점차 ''투레오포로이'' 보병으로 대체되었다.

3. 3. 헬레니즘 시대와 이후

고대 그리스 시대에 펠타스트들은 그리스 전쟁에서 점차 중요해졌으며,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그러했다. 크세노폰은 ''아나바시스''에서 기원전 401년 쿠낙사 전투 당시 키루스 2세의 용병 부대 일원으로 아케메네스 기병에 맞서 싸운 펠타스트들을 묘사했다. 이들은 창이 아닌 검과 투창으로 무장했으며, 페르시아 기병의 돌격에 대열을 열어 통과시킨 후 검으로 치고 투창을 던졌다.[4]

기원전 4세기에 펠타스트들은 그리스 용병 보병의 주요 유형이 되었다. 그들의 장비는 호플리테스보다 저렴하여 빈곤층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아테네 장군 이피크라테스는 기원전 390년 레케움 전투에서 펠타스트들을 활용하여 스파르타의 팔랑크스를 격파했다. 디오도로스 시켈루스에 따르면, 이피크라테스는 기원전 374년경 부하들에게 긴 창을 다시 장비하도록 했다. 이 개혁은 작은 방패, 검, 투창 대신 창을 든 "펠타스트" 유형을 만들었을 수 있다.

J.G.P. 베스트 등 일부 학자들은 이후의 "펠타스트"들이 전통적인 의미의 펠타스트가 아니라, 더 긴 창과 펠테 방패를 든 가볍게 무장한 호플리테스였으며,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7] 그러나 이피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펠타스트 그림들에는 찌르는 창이 포함되어 있으며, 일부는 투창과 함께 혹은 투창 대신 찌르는 창을 휴대했을 수도 있다. 기원전 400년경 파이아바의 무덤에는 둥근 펠테를 들고 창을 찌르는 병사가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이피크라테스의 새로운 병사들과 유사하다. 4세기 BC의 펠타스트들은 때때로 투구와 린넨 갑옷을 착용하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마케도니아 북쪽의 트라키아 부족, 특히 아그리아노이 출신의 펠타스트들을 고용했다. 기원전 3세기에 펠타스트들은 점차 ''투레오포로이'' 보병으로 대체되었다. 후대에 펠타스트에 대한 언급은 장비 스타일이 아닌 "용병"을 의미하는 동의어가 되었을 수 있다.

헬레니즘 시대에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니드 왕조는 마케도니아 출신 정예 펠타스타 부대를 보유했다. 이 부대는 약 3,000명 규모였으나,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무렵에는 5,000명으로 증가했다. 이들은 킬리알키아(1000명 단위 부대)로 편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스피스트와 유사한 역할과 장비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대 내에는 아게마라는 정예 부대가 있었고, 필리포스 5세는 이들을 강행군에 사용했다. 기원전 168년 피드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펠타스타 부대는 파엘리그니족을 격파했지만, 파랑크스 전열을 직접 공격하는 위험성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이피크라테스식 호플리테스나 펠타스타와 비슷한 장비를 갖추었을 수 있다.[7]

그리스의 펠타스트(peltast) 또는 펠타스타이(peltastae)의 원형은 트라키아, 아이토리아, 일리리아 등의 경장보병이다. 이들은 산악 지형에서 활동하기 쉽도록 펠타(pelta) 방패와 투구만을 착용하고, 창과 론케이아라는 곡선형 단검을 지니고, 망토를 걸쳤다.[25]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아이토리아 원정에서 경장보병에게 패배한 후 아테네군이 이를 채용, 스파르타를 격파하면서 그리스에서 이러한 병사들이 증가했다. 그리스의 펠타스타이는 망토를 착용하지 않는 점을 제외하면 트라키아의 펠타스타이를 계승하였고, 창을 지녔으며, 투구와 펠타 외에는 방어구를 착용하지 않았다.[26] 펠타스트는 경보병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비용이 저렴하여 쉽게 입대할 수 있었다.[29] 또한 그리스 또는 그 외 지역에서 용병으로 활동했으며, "펠타스트"라는 명칭은 이후 용병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30]

4. 전술

표범과 싸우는 펠타스트 (기원전 5세기 아티카 백색 바탕 컵 출토)


펠타스트는 보통 파랑크스의 양쪽 측면에 배치되어 기병과 연결 역할을 하거나, 험준하거나 불규칙한 지형에서 활동했다. 크세노폰의 『헬레니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데르킬리다스는 (페르시아군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장교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정렬하여 8열의 깊이로 (호플리트 파랑크스) 병력을 배치하고, 펠타스트들을 기병과 함께 양쪽 날개에 배치하도록 명령했습니다."[14] 펠타스트는 궁수나 투석병과 같은 다른 경보병을 지원하는 역할도 수행할 수 있었다.

원래 그리스군의 주력은 중장보병인 호플리타이였고, 그들의 전법은 밀집대형을 짜서 견고하지만 기동력이 부족한 파랑크스였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북방에서 침입하는 트라키아인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그들의 전술과 무기를 받아들였는데, 그중 하나가 펠타와 펠타스트의 전법이었다.

초기에는 펠타스트는 중장보병의 장비를 스스로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계층이었고, 중장보병의 보조 역할만을 담당했다. 하지만 중장보병의 약점인 기동력 부족을 보완하고, 투척으로 적을 교란하는 등 그들의 역할에 점차 주목하게 되었다. 기원전 391년 레카이온 전투에서 아테네의 장군 이피클라테스가 이끄는 경장보병 부대가 스파르타의 중장보병을 격파하여 펠타스트도 중장보병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펠타스트는 주로 투창을 이용한 산병전을 벌였지만, 다른 경보병과 달리 대열을 짜서 백병전을 벌이기도 했다. 투창에는 투척 시 손가락이 잘 걸려 힘이 전달되도록 끈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스에는 투창 외에도 활과 슬링이 있었지만, 활은 주로 경기용이었고 전장이나 사냥에 사용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으며, 오히려 경기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전투에서의 사격은 이러한 투창 공격이 페르시아나 스키타이와 같은 다른 문명보다 더 많았다.

현재의 투척 경기창던지기도 각 도시 국가가 고대 올림픽에서 이러한 투창 기술을 겨루던 것이 기원이다.

4. 1. 중장보병 상대 전술

펠타스트는 중장보병(호플리테스)과 싸울 때 근거리에서 창을 던져 공격했다. 호플리테스가 돌격하면 펠타스트는 후퇴했다. 펠타스트는 호플리테스보다 장비가 훨씬 가벼웠기 때문에, 특히 지형이 험난할 경우 성공적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추격이 끝나면 가능하면 다시 공격을 재개하여 호플리테스 진형의 혼란을 이용했다. 스파크테리아 전투에서 아테네 군에는 궁수 800명과 펠타스트 800명 이상이 포함되어 있었다.[15]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스파르타 중장보병들은) 경보병들이 양쪽 측면에서 날리는 무기에 막혔다. (중장보병들은) 경보병들이 너무 가까이 접근하여 돌진해 들어온 곳에서는 격퇴했지만, 경보병들은 후퇴하면서도 여전히 싸웠다. 그들은 무거운 장비가 없었고, 그곳이 그때까지 무인지대였기 때문에 길이 험하고 어려웠던 곳에서 추격병보다 쉽게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15]

기원전 391년 레카이온 전투에서 아테네의 장군 이피클라테스가 이끄는 경장보병 부대가 스파르타의 중장보병을 격파하여 펠타스트도 중장보병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 2. 경보병 상대 전술

펠타스트는 중장보병(호플리테스)과 싸울 때 근거리에서 창을 던져 공격했다. 호플리테스가 돌격하면 펠타스트는 후퇴했다. 펠타스트는 호플리테스보다 장비가 훨씬 가벼웠기 때문에, 특히 지형이 험난할 경우 성공적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추격이 끝나면 가능하면 다시 공격을 재개하여 호플리테스 진형의 혼란을 이용했다. 스파크테리아 전투에서 아테네 군에는 궁수 800명과 펠타스트 800명 이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스파르타 중장보병들은) 경보병들이 양쪽 측면에서 날리는 무기에 막혔다. (중장보병들은) 경보병들이 너무 가까이 접근하여 돌진해 들어온 곳에서는 격퇴했지만, 경보병들은 후퇴하면서도 여전히 싸웠다. 그들은 무거운 장비가 없었고, 그곳이 그때까지 무인지대였기 때문에 길이 험하고 어려웠던 곳에서 추격병보다 쉽게 도망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15]

5. 페르시아 군대와 펠타스트

투창, 가벼운 방패, 그리고 때로는 창을 사용하는 전투 전통은 아나톨리아에 존재했으며, 이와 같이 무장한 여러 부대가 기원전 480년 그리스를 침략한 크세르크세스 1세의 군대에 나타났다. 예를 들어, 파플라고니아인과 프리고인들은 버드나무로 만든 투구와 무릎까지 오는 토착 부츠를 착용했다. 그들은 작은 방패, 짧은 창, 투창, 단검을 휴대했다.[10]

기원전 5세기 중반부터 그리스의 페르시아 군대 묘사에 '펠타스트' 병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11] 그들은 그리스와 트라키아 펠타스트들처럼 무장했지만, 전형적인 페르시아 군대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종종 '사가리스'로 알려진 가벼운 도끼를 측면 무기로 휴대했다. 이 부대는 페르시아어로 '타카바라'로 알려졌고, 그들의 방패는 '타카'라고 불렸다는 주장이 있다.[12] 페르시아는 그리스와 트라키아 펠타스트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영향의 원천은 코르두에네, 미시아인 또는 피시디아인과 같은 아나톨리아의 산악 부족이었을 것이다.[13] 그리스 자료에서 이 부대는 '펠타스트' 또는 '펠토포로이'(펠테 소지자)라고 불렸다.

참조

[1] 논문 Philopoemen's special forces: Peltasts and a new kind of greek light-armed warfare (Livy 35.27) https://www.jstor.or[...]
[2] 웹사이트 Commentary on Plato: Protagoras http://www.perseus.t[...]
[3] 서적 EOS. https://books.google[...] Museo Nacional de Ciencias Naturales
[3] 서적 Late Eocene Zoogeography of the Eastern Gulf Coast Region https://books.google[...] Geological Society of America
[4] 서적 Anabasis
[5] 서적 A Catalogue of Sculpture in the Department of Greek and Roman Antiquities https://archive.org/[...] British Museum
[6] 서적 The Numismatic Chronicle https://books.google[...] Royal Numismatic Society 2005
[7]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8] 서적 The Oxford Handbook of Warfare in the Classical World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9] 서적 The Archaeology of Greek and Roman Tro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10] 서적 Histories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Hellenica
[15] 서적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ペルタには軽い盾で葦を編んで作った物や円形の物もある。
[21] 서적 武器と防具 西洋編 新紀元社 2014-01
[22] 서적 十二支考
[23] 서적 幻の戦士たち
[24] 서적 武器と防具 西洋編 新紀元社 2014-01
[25] 서적 幻の戦士たち
[26] 서적 幻の戦士たち
[27] 서적 幻の戦士たち 新紀元社 2011-09
[28] 서적 古代の武器・防具・戦術百科
[29] 서적 古代の武器・防具・戦術百科
[30] 서적 古代の武器・防具・戦術百科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