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노스케팔라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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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노스케팔라이 전투는 기원전 197년에 벌어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이다. 로마 공화정의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필리포스 5세가 지휘하는 마케도니아군이 테살리아에서 격돌했다. 전투 결과 로마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항복하고, 그리스의 자유를 선언하게 되었다. 이 전투는 로마 군단의 유연한 전술이 팔랑크스 전술의 한계를 극복한 사례로 평가받으며, 로마가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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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스케팔라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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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명칭 | 키노스케팔라이 전투 |
전쟁 |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
위치 | 테살리아, 키노스케팔라이 언덕 |
날짜 | 기원전 197년 |
결과 | 로마의 결정적인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로마 공화정 |
교전국 2 | 아이톨리아 동맹 |
교전국 3 | 마케도니아 |
지휘관 | |
로마 공화정 |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
아이톨리아 동맹 | 아미난더 오브 아타마니아 |
마케도니아 | 필리포스 5세 (왕) |
마케도니아 지휘관 | 헤라클레이데스 오브 기르톤, 아테나고라스 오브 마케도니아, 니카노르 더 엘리펀트 |
병력 규모 | |
로마 연합군 | 약 26,000명 |
로마 보병 | 21,600명 |
로마 기병 | 1,300명 |
로마 해병 | 3,000명 |
로마 코끼리 | 20마리 |
마케도니아 | 25,500명 |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 16,000명 |
마케도니아 경보병 | 2,000명 |
마케도니아 용병 및 동맹군 | 5,500명 |
마케도니아 기병 | 2,000명 |
피해 규모 | |
로마 연합군 | 700 ~ 750명 전사 |
마케도니아 | 13,000명 |
마케도니아 전사 | 8,000명 |
마케도니아 포로 | 5,000명 |
2. 배경
기원전 215년 제2차 포에니 전쟁 동안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마케도니아와 카르타고 간의 동맹으로 시작된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교착 상태로 끝났다.[4] 아이톨리아 동맹과의 로마 동맹과 전쟁 초기에 마케도니아 함대가 파괴되면서 마케도니아는 카르타고를 지원할 수 없었고 방어적인 입장을 취해야 했다.[4] 기원전 205년에 마케도니아와 로마 사이에 휴전이 조인되어 불안정한 평화가 이루어졌고,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원전 201년에 종료되었다.[4] 마케도니아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제한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카르타고와의 동맹으로 인해 로마의 분노를 샀다.[4]
이후 강화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플라미니누스는 보이오티아로 진군하여 그곳을 아군으로 만들었다.[26] 다급해진 필리포스 5세는 로마 본국으로 강화 사절을 보냈지만, 플라미니누스도 대리인을 보내 항변했기 때문에 로마 원로원을 통해 강화를 하려던 필리포스 5세의 계획은 무산되었다.[26] 이 결과를 알게 된 플라미니누스는 결전을 준비했다. 플라미니누스는 26,000명의 병력을 테살리아로 진격시킨 후, 아이톨리아에서 보병 6000명, 기병 400기가 합류해 총 32,400명이 되었다. 필리포스 5세의 병력은 25,500명 중 2,000명이 기병이었다. 그리고 양군은 스코투사 근처에서 마주쳤다.
2. 1.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발발
기원전 202년, 제5차 시리아 전쟁이 발발했고, 마케도니아는 셀레우코스 제국과 동맹하여 소아시아를 분할하기로 했다. 필리포스 5세가 트라키아의 도시 국가, 다르다넬스 해협 주변으로 이동하고, 이후 로도스와 페르가몬 왕국에 대해 취한 조치들은 이 두 국가를 크게 불안하게 만들었다. 로도스와 페르가몬 왕국은 키오스 해전에서 필리포스 5세의 해군을 결정적으로 패배시키며 우위를 점했지만,[5] 여전히 마케도니아에 대한 우려로 로마에 사절을 보내 참전을 설득했다. 로마는 그리스에 사절을 보내 반(反) 마케도니아 연합을 결성했는데, 필리포스 5세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막 끝난 상황을 로마의 약점으로 여겼다. 필리포스 5세가 이 지역에서의 추가 정복을 포기하지 않자, 로마 원로원과 민회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선포했다.[6]2. 2. 초기 전황 (기원전 200년 ~ 기원전 198년)
기원전 200년부터 로마와 마케도니아 왕국 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 로마군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와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의 지휘 하에 마케도니아와 전투를 벌였으나,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23]기원전 198년, 30세도 채 되지 않은 젊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집정관이 되어 마케도니아 전쟁의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이전 사령관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할 것을 결심했다. 그는 함대 사령관과 공동 작전을 펼치고,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휘하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격파한 정예병 3000명을 원정군에 동원했다.[23]
플라미니누스는 이피로스에 진입하여 필리포스 5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을 아오우스 전투에서 격파했다. 마케도니아군은 테살리아로 패주하면서 도시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산지로 대피시켰다. 반면 플라미니누스는 병사들에게 점령지에서 약탈하지 말 것을 명령했고, 이로 인해 테살리아의 여러 도시들이 로마와 동맹을 맺었다. 아카이아도 로마 측으로 돌아섰다.[24]
필리포스 5세는 플라미니누스에게 강화를 제의했지만, 플라미니누스가 그리스의 자치와 마케도니아군 철수를 요구하자 협상은 결렬되었다.[25]
2. 3. 플라미니누스의 등장과 전환점 (기원전 198년)
기원전 198년, 30세가 채 되지 않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로마의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마케도니아 전쟁의 사령관으로 부임했다.[23] 그는 이전 사령관들인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와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가 소극적인 전투를 벌인 것과 달리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결심했다.[23] 플라미니누스는 함대사령관과 협력하고,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히스파니아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휘하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격파한 정예병 3000명을 원정군에 포함시켰다.[23]이피로스에 도착한 플라미니누스는 아오우스 전투에서 필리포스 5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을 신속하게 격파했다.[24] 패배한 마케도니아 군은 테살리아로 후퇴하면서 적에게 물자를 남기지 않기 위해 도시 주민들을 산지로 대피시키고 불을 질렀다.[24] 반면 플라미니누스는 병사들에게 "보호를 요청한 나라의 국토를 통과할 때는 자국처럼 행동하라"고 명령하며 약탈을 금지했다.[24] 그 결과, 테살리아의 여러 도시들이 로마군에 항복하고 동맹을 맺었으며, 아카이아는 마케도니아에서 로마 측으로 돌아섰다.[24]
이후 필리포스 5세는 플라미니누스에게 강화를 제안했지만, 플라미니누스가 그리스의 자치와 마케도니아 군의 철수를 요구하고 필리포스 5세가 이를 거부하면서 결렬되었다.[25]
3. 양측 군대의 구성과 전술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로마군과 마케도니아군은 병력 규모, 구성, 전술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약 26,000명의 병력으로, 레기온이라 불리는 두 개의 로마 군단과 아이톨리아 동맹 등 동맹군으로 구성되었다. 필리포스 5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은 약 25,500명으로, 이 중 16,000명은 팔랑기테스였다. 이들은 계속된 전쟁으로 인력 부족을 겪어 왕국 전역에서 징집되었다.[9][11]
양측 군대의 자세한 병력 구성은 다음과 같다.
구분 | 로마군 | 마케도니아군 |
---|---|---|
총 병력 | 약 26,000명 | 약 25,500명 |
주요 구성 | 레기온 (두 개의 로마 군단), 동맹군 | 팔랑기테스 (16,000명), 경보병, 용병, 기병 |
3. 1. 로마군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약 26,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레기온이라 불리는 두 개의 정규 로마 군단과 아이톨리아 동맹에서 지원받은 보병 6,000명과 기병 400명, 아타마니아의 아미난데르 휘하의 1,200명이 포함되었다.[7] 플라미니누스는 누미디아에서 온 전차 코끼리 부대도 지휘했다.[9] 이탈리아에서 온 증원군으로 보병 6,000명, 기병 300명, 해병 3,000명을 추가로 얻었다.[10]3. 2. 마케도니아군
필리포스 5세는 약 25,5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중 16,000명은 팔랑기테스였는데, 이들은 어린 소년에서 노련한 참전 용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한 인력 부족 때문에 왕국 전역에서 징집된 병사들이었다.[9][11] 이 외에도 2,000명의 펠타스트(경보병), 4,000명의 트라키아인과 트랄리아인, 1,500명의 용병, 그리고 2,000명의 기병이 있었다.[12]테살리아 기병대는 기르톤의 헤라클레이데스가 이끌었고, 마케도니아 기병대는 레온이 지휘했다. 트라키아인을 제외한 용병은 마케도니아의 아테나고라스가, 제2 보병 군단은 코끼리 니카노르가 지휘했다.[13][14]
4.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의 전개
전투 당일, 밤부터 내리던 비가 그친 후 짙은 안개가 끼어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양측 군대는 정찰대를 파견했고, 키노스케팔라이에서 양측 정찰병 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양측 모두 지원군을 투입하여 전투가 격화되었고, 안개가 걷히면서 시야가 확보되자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27]
필리포스 5세는 마케도니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고지대에서 팔랑크스 전군을 투입했다. 팔랑크스의 사리사 창은 로마군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군 좌익은 지형이 고르지 않아 전열이 무너져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플라미니누스는 로마군 좌익이 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력 부대를 우익에 집중시켜 마케도니아군 좌익을 공격했다.[28] 팔랑크스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마케도니아군 좌익 병사들은 로마군에게 각개격파 당했다. 팔랑크스는 밀집 대형일 때 강력하지만, 대형을 이루지 못하면 중장비 때문에 오히려 약해지는 약점을 노출했다.
로마군 우익은 마케도니아 군 좌익을 격파한 뒤 일부는 추격하고, 나머지는 마케도니아군 우익의 측면을 공격했다. 측면에서 포위된 마케도니아 군은 혼란에 빠져 패주하거나 항복했다. 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군은 8,000명이 전사하고 5,000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로마군의 전사자는 700명에 불과했다.
4. 1. 안개 속의 조우전
다음날, 밤부터 내리던 비가 그친 후 주변은 짙은 안개로 덮여 시야를 확보할 수 없었다. 양측은 정찰대를 파견했고, 키노스케팔라이 언덕에서 우연히 마주쳐 교전이 일어났다.[27]짙은 안개 속에서 양측의 경보병들이 서로 부딪혔고, 시야가 제한되어 혼란스러운 근접전이 벌어졌다. 양측이 정찰 부대와 함께 보냈던 기병대가 전투에 참여했고, 로마군은 필리포스 군대에 수적으로 밀려 서서히 압도당했다. 로마군은 곧 플라미니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4][7][9]
플라미니누스는 2,000명의 경보병과 500명의 기병을 증원군으로 파견하여 로마군에게 우위를 제공했고, 마케도니아군은 키노스케팔라이 봉우리로 밀려났다. 필리포스는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고 상황이 명확해질 때까지 추가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이후 필리포스는 그의 장교 중 한 명인 아테나고라스와 용병 중보병 1,500명과 중기병 1,500명을 보냈다.[4] 이로 인해 로마군은 정점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이톨리아 동맹 기병대 때문에 언덕에서 완전히 밀려나지는 않았다.
4. 2. 필리포스 5세의 오판과 팔랑크스 투입
필리포스 5세는 로마 정찰 부대가 후퇴하는 모습을 과장되게 보고받고, 자신의 군대가 로마군 전체를 격파했다고 오판했다.[4] 그는 깨지고 언덕이 많은 지형에 팔랑크스를 보내는 것을 꺼렸지만, 군대의 칭찬에 힘입어 팔랑기테(Phalangite) 8,000명과 펠타스트(Peltast) 4,000명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4][8] 또한 니카노르(Nicanor)에게 나머지 팔랑기테들을 준비시키고 가능한 한 빨리 그를 도우라고 지시했다.[4][8]4. 3. 플라미니누스의 반격과 마케도니아 군 좌익 격파
플라미니누스는 마케도니아군 좌익이 지형 때문에 대열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을 간파했다. 그는 궁지에 몰린 로마군 좌익을 돕는 대신, 자신의 우익 부대를 이끌고 마케도니아군 좌익에 공격을 집중했다.[28] 이때 로마군은 전차 코끼리를 앞세워 공격했고,[4][7][8][9] 제대로 팔랑크스를 형성하지 못한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개별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팔랑크스는 밀집 대형을 이루어야 강했지만, 대형을 갖추지 못하면 중장비 때문에 오히려 약해졌다. 결국 로마군 우익은 마케도니아군 좌익을 격파했다.[28] 해먼드(Hammond)에 따르면, 플라미니누스는 우익 군단을 이끌고 이동 중인 마케도니아 군 좌익에 코끼리를 사용하여 공격을 집중시켜 대열을 갖추지 못한 팔랑크스를 격파했다고 한다.[4][7][8][9]4. 4. 로마군 무명 트리부누스의 활약과 마케도니아 군 우익 붕괴
이 추격이 진행되는 동안, 이름 없는 군사 호민관은 마케도니아군 오른쪽 날개의 노출된 후방을 파악하고, 20개의 마니풀(약 2,500명의 보병)을 이끌고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후방을 공격했다.[4][7][8][9][15]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는 대형의 유연성이 부족하여 즉시 무너졌다. 일부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고, 다른 병사들은 사리사를 위로 곧게 세워 항복의 뜻을 표했으나, 로마군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공격을 계속했다. 결국 플라미니누스가 개입하여 학살을 중단시켰다.[4]필리포스 5세는 소수의 기병대와 함께 정상으로 물러나 전투 상황을 살폈다. 그는 오른쪽 날개가 붕괴되고 왼쪽 날개가 패주하는 것을 보고, 호위병과 함께 전장에서 도망쳐 마케도니아 영토로 돌아갔다.[4][7][9]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키노스케팔라이 전투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정치적 야망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전투의 패배로 마케도니아는 더 이상 로마의 확장에 도전할 수 없게 되었다. 기원전 196년에 맺어진 평화 조약에서 필리포스 5세는 왕국을 유지했지만, 여러 가혹한 조약을 강요받았다.
플루타르코스는 필리포스 5세의 아들 데메트리우스를 인질로 로마에 보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5년 후 데메트리우스는 마케도니아가 셀레우코스 왕조와의 전쟁 동안 로마에 제공한 도움으로 인해 필리포스에게 풀려났다.
기원전 196년 이스토미아 경기에서 플라미니누스는 이전에 필리포스가 지배했던 모든 그리스 국가가 이제 자유롭고 독립적이라고 발표했다.[8]
5. 1. 마케도니아의 패배와 로마의 패권 장악
폴리비우스와 리비우스에 따르면,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군은 8,000명이 사망했다.[16] 리비우스는 다른 자료를 인용하여 마케도니아 군의 사망자가 32,000명에 달하며, 심지어 "무한한 과장"으로 인해 40,000명이라고 주장하는 저술가도 언급하지만, 폴리비우스가 이 문제에 대해 신뢰할 만한 자료라고 결론 내린다.[16] 플라미니누스는 또한 5,000명의 포로를 잡았다. 반면 로마 군은 700명에서 750명 사이의 전사자를 기록했다.[4][7][8][9]이 전투의 결과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정치적 야망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마케도니아는 더 이상 로마의 지정학적 확장에 도전할 수 없게 되었다. 기원전 196년에 체결된 평화 조약에 따라 필리포스 5세는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조항을 강요받았다.[4][8][17][18]
- 이전의 정복지를 포기하고 마케도니아 본토의 국경으로 돌아갈 것
- 마케도니아 외부에 있는 모든 주둔군을 철수할 것 (기원전 196년 이스토미아 경기 전에 이 국가들을 자유롭고 자치적으로 만들기 위해)
- 로마에 은 의 배상금을 지불할 것 (그 중 절반은 즉시 지불하고, 나머지는 10년에 걸쳐 매년 50탈렌트씩 분할 납부)
- 갑판이 있는 배를 5~10척만 남기고 모두 포기할 것
- 5,000명의 병력만 유지할 것 (코끼리는 포함될 수 없음)
- 로마 원로원의 허가 없이 마케도니아 국경 밖에서 전쟁을 수행하지 않을 것
플루타르코스는 필리포스 5세의 아들 데메트리우스를 인질로 로마에 보냈다고 기록했다.
이후 필리포스 5세는 플라미니누스에게 항복했고,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마케도니아의 패배가 결정되었다. 플라미니누스는 필리포스 5세에게 왕위를 유지시키는 대신, 마케도니아 군대의 전 그리스 철수, 배상금 지불, 전 함대의 인도, 왕자 데메트리오스를 인질로 로마에 보내는 조건을 받아들이게 했다.[21]
기원전 196년, 플라미니누스는 코린토스의 이스토미아 축제에서 그리스의 자유를 선언했다. 로마 원로원의 결의에 따라 필리포스 5세와의 평화 조약이 로마에서 성립되었고, 필리포스 5세는 로마와 동맹을 맺었다. 이 패배 이후 필리포스 5세는 친 로마 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대항하지 않았다.
5. 2. 강화 조약과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자유
이후 필리포스 5세는 플라미니누스에게 항복했고,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마케도니아의 패배로 끝났다.[21] 플라미니누스는 일리리아와 그리스의 완충 지대로서 필리포스 5세의 왕위를 유지시켰다.[21] 기원전 196년, 플라미니누스는 코린토스에서 열린 이스토미아 경기에서 이전에 필리포스 5세가 지배했던 모든 그리스 국가들이 이제 자유롭고 독립적이라고 선언했다.[8] 이 패배 이후 필리포스 5세는 친로마 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그의 생전에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대항하지 않았다. 강화 조약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4][8][17][18]조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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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는 이전의 정복지를 포기하고 마케도니아 본토의 국경으로 되돌아간다. |
마케도니아 외부에 있는 모든 주둔군을 철수한다. (기원전 196년 이스토미아 경기 전에 이들 국가를 자유롭고 자치적으로 만들기 위해) |
로마에 은 1000탈렌트(무게)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그 중 절반은 즉시 지불하고, 나머지는 10년에 걸쳐 매년 50탈렌트씩 분할 납부) |
갑판이 있는 배를 5~10척만 남기고 모두 포기한다. |
5,000명의 병력만 유지한다. (코끼리는 포함될 수 없음) |
로마 원로원의 허가 없이 마케도니아 국경 밖에서 전쟁을 수행하지 않는다. |
필리포스 5세의 아들 데메트리우스를 인질로 로마에 보낸다. |
5. 3. 군사 전술의 변화와 역사적 의의
키노스케팔라이 전투는 팔랑크스 전술보다 유연한 로마 군단 전술의 우월성을 입증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일반적으로 이 패배는 피드나 전투와 함께 로마 군단이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 인식된다. 팔랑크스는 정면에서 매우 강력했지만, 로마의 마니풀라(manipular) 대형만큼 유연하지 못하여 전장의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거나 필요할 경우 교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4][9]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부는 로마군이 마케도니아 좌익이 완전히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을 이용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의를 제기하지만, 이는 또한 군단에 비해 팔랑크스의 다루기 힘든 특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되기도 한다.[7][9]폴리비우스와 리비우스에 따르면, 마케도니아인 8,000명이 사망했다. 리비우스는 다른 자료에서 마케도니아인 32,000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 "무한한 과장"으로 인해 40,000명이라고 주장하는 한 저술가도 언급하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는 폴리비우스가 신뢰할 만한 자료라고 결론 내린다.[16] 플라미니누스는 또한 5,000명의 포로를 잡았다. 로마군은 전투에서 700명에서 750명 사이의 손실을 입었을 뿐이다.[4][7][8][9]
이 전투의 결과, 마케도니아 왕국은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다시는 로마의 확장에 도전할 수 없게 되었다. 기원전 196년에 맺어진 평화 조약에서 필리포스 5세는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강요받았다.[4][8][17][18]
- 이전의 정복지를 포기하고 마케도니아 본토로 돌아갈 것
- 마케도니아 외부에 있는 모든 주둔군을 철수할 것(기원전 196년 이스토미아 경기 전에 이 국가들을 자유롭고 자치적으로 만들기 위해)
- 로마에 은 1,000 탈렌트의 배상금을 지불할 것(그 중 절반은 즉시 지불하고, 나머지는 10년에 걸쳐 매년 50탈렌트씩 분할 납부)
- 갑판이 있는 배를 5~10척만 남기고 모두 포기할 것
- 5,000명의 병력만 유지할 것(코끼리는 포함될 수 없음)
- 로마 원로원의 허가 없이 마케도니아 국경 밖에서 전쟁을 수행하지 않을 것
플루타르코스는 또한 필리포스 5세의 아들 데메트리우스를 인질로 잡았다고 기록했다.
키노스케팔라이 전투는 기원전 190년의 마그네시아 전투와 함께, 밀집 대형을 이루어 압력을 가하는 팔랑크스와 3중 전열 덕분에 예비 병력을 보유하고, 마니풀루스(중대) 단위로 움직여 유연성이 있는 로마 군단과의 차이가 드러난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6. 평가
키노스케팔라이 전투는 기원전 190년의 마그네시아 전투와 함께, 밀집 대형을 이루어 압력을 가하는 팔랑크스와 3중 전열 덕분에 예비 병력을 보유하고 마니풀루스 (중대) 단위로 움직여 유연성이 있는 로마 군단의 차이가 드러난 전투였다. 또한, 헬레니즘 제국은 전쟁을 협상으로 끝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반면, 로마는 상대를 철저하게 궤멸시킬 때까지 끝나지 않는 문화적 차이도 드러났다.[1]
6. 1. 군사적 관점
키노스케팔라이 전투는 기원전 190년의 마그네시아 전투와 함께, 밀집 대형을 이루어 압력을 가하는 팔랑크스와 3중 전열 덕분에 예비 병력을 보유하고 마니풀루스 (중대) 단위로 움직여 유연성이 있는 로마 군단의 차이가 드러난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전쟁을 협상으로 끝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헬레니즘 제국과, 상대를 철저하게 궤멸시킬 때까지 끝나지 않는 로마와의 문화적 차이도 드러났다.[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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