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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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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안은 명문가 출신으로, 동진 시대의 정치가이자 군사 전략가였다. 젊은 시절에는 은둔 생활을 하며 왕희지 등과 교류했으나, 40세에 관직에 나아가 환온의 사마를 거쳐 상서복야가 되어 동진의 실권을 장악했다. 383년, 전진의 부견이 백만 대군으로 남하하자 정토대도독으로 임명되어 비수 전투에서 승리하며 태보에 올랐다. 이후 북벌을 추진했으나 사마도자의 방해로 좌절되었고, 65세에 사망하여 태부로 추증되었다. 그는 비수 대전에서 보여준 침착함과 일화들을 통해 인기를 얻었으며, 관련 기록과 작품으로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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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20년 출생 - 동진 간문제
    동진 간문제는 동진 원제의 아들로 371년에 황제에 즉위하여 372년까지 재위했으며, 총명했으나 정치적 수완이 부족했고 환온의 권력에 불안감을 느끼다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셰안
셰안, 만소당죽장서부(晩笑堂竹荘畫傳)
이름셰안
한자謝安
자(字)안석(安石)
시호문정공(文靖公)
존칭셰 동산(谢东山)
출생과 사망
출생320년, 진나라 허난성(河南省) 진군(陳郡) 양하(陽夏)
사망385년 (66세), 동진
경력
직업정치가
가족
자녀셰옌(謝琰-사염)

2. 생애

명문 양하(陽夏) 사씨(謝氏)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주위의 기대를 받았으나, 젊은 시절에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왕희지 등과 교류하며 청담을 즐겼다. 360년 40세에 환온사마(司馬)로 벼슬을 시작했으나[8] 곧 환온과 대립하고 시중(侍中), 이부상서(吏部尚書) 등을 지냈다.

환온이 간문제 사후 효무제를 폐위하려 하자 왕탄지와 함께 반대했다. 373년 환온 사후 상서복야(尚書僕射)에 올라[9] 동진의 실권을 잡았다.

383년 전진 부견의 침입에 맞서 동생 사석, 조카 사현 등을 지휘하여 비수 대전에서 승리했다.[10] 이 공으로 태보(太保)에 오르고 양하 사씨는 냥야(琅邪) 왕씨와 동등한 명문가가 되었다.

이후 북벌을 추진했으나 사마도자(司馬道子)의 반대로 좌절되고[12] 광릉보구(広陵歩丘)로 좌천되었다. 385년 사망 후 태부(太傅)와[13] 여릉군공(廬陵郡公)에 추증되었다.

2. 1. 초기 생애

명문 양하(陽夏) 사씨(謝氏)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총명해 주위의 큰 기대를 받았으나, 젊은 시절에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명필로 유명한 왕희지 등과 깊은 교분을 나누며 청담만 탐구했다. 그는 자녀들과 형제들의 자녀들에게 문학, 철학, 토론을 가르쳤다. 그가 가장 아끼는 조카는 작가이자 토론가로 유명해질 사도윤이었다.[3] 그녀는 나중에 환현의 비판으로부터 그를 변호했다.

승평 4년(360년), 40세에 처음으로 벼슬에 나가 당시 동진의 최고 권력자 환온사마(司馬)가 됐으나[8] 곧 환온과 대립하고 시중(侍中), 이부상서(吏部尚書) 등을 지냈다.

당시 환온의 세력은 동진을 덮쳤고, 환온은 찬탈의 야망을 드러내 간문제가 붕어한 뒤 즉위한 효무제로부터의 선양을 꾀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안은 왕탄지와 함께 강경하게 반대하며 지연 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 노령의 환온이 사망하고 동진은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2. 2. 환온과의 갈등과 정권 장악

360년, 40세에 처음으로 벼슬에 나가 당시 동진의 최고 권력자였던 환온사마(司馬)가 되었다.[8] 그러나 곧 환온과 대립하고 시중(侍中), 이부상서(吏部尚書) 등을 지냈다.

당시 환온은 동진을 완전히 장악한데다가 간문제까지 붕어하여,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갓 즉위한 효무제를 폐하고 자기가 황제가 되려 일을 꾸미고 있었다. 그러나 사안은 왕탄지와 함께 반기를 들고 공작을 시작했다. 이미 노령이었던 환온이 얼마 안가 의문사하자 사안은 373년에 상서복야(尚書僕射)[9]에 올라 동진의 실권을 거머쥐었다.

373년 환온이 수도를 방문했을 때, 왕탄지와 사안은 그를 맞이하러 보내졌다. 환온이 사안과 왕탄지를 처형하고 왕위를 찬탈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왕탄지는 매우 두려워했지만, 사안은 침착하게 "우리의 여정은 제국이 살아남을지 여부를 결정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환온이 도착하자, 그는 군대를 대대적으로 과시했고, 왕탄지는 너무 불안하여 옷이 땀으로 젖었고, 손에 들고 있던 필담(筆談)은 거꾸로 들려 있었다. 그러나 사안은 자리에 앉아 매우 침착했고, 그 후 환온을 설득하여 군대 과시를 멈추게 했다.

2. 3. 비수 대전 (淝水大戰)

383년 가을, 전진의 황제 부견동진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려는 야심으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사안은 동생 사석을 전진에 저항하는 군대를 지휘하도록 보냈다. 사석의 휘하 선봉장인 사현이 전선으로 떠날 준비를 하자, 사안에게 추가 지시를 구했다. 사안은 "나중에 추가 지시를 하겠다"라고만 말했다. 사현은 더 이상 묻지 못했다. 그들은 사안의 별장으로 가서 바둑을 두었다. 사현은 평소 사안보다 바둑을 잘 두었지만, 다가오는 전투에 불안해하며 침착한 사안에게 졌다. 한편, 환온은 수도 건강이 추가 방어가 필요하다고 믿고 정예 병사를 보내 수도 방어를 돕게 하려 했다. 그러나 사안은 병사들을 환온에게 돌려보내며 수도는 이미 잘 방비되어 있고, 병사들이 (환온의 지휘하에 있는) 서부 지역을 방어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진군은 수양을 점령했다. 그러나 비수(淝水) (현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회하 근처의 루안을 통과했을 것으로 추정됨)에서 양군이 대치한 후, 전진군은 진군을 강으로 유인하려다가 퇴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당황하여 붕괴되었다.[15] 승전 소식이 사안의 본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지만 "아이들이 싸움에서 이겼네."라고만 말했다. 게임이 끝난 후, 그는 침실로 돌아가다가 문턱을 잊고 나무 샌들을 부러뜨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15]

2. 4. 북벌 좌절과 죽음

383년 화북을 통일한 전진의 부견전연을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백만 대군으로 남하하자, 동진 조정은 사안을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으로 임명했다. 사안은 동생 사석(謝石)과 조카 사현(謝玄) 등과 함께 전진에 맞서 승리했다([비수 전투]).[10] 이 승전으로 사안은 태보(太保)에 올랐고, 양하 사씨는 냥야(琅邪) 왕씨(王氏)와 동격으로 대우받는 동진 최고 명문가가 되었다.

사안은 이 여세를 몰아 북벌을 추진했지만, 황족 사마도자(司馬道子)[12]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사마도자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재건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사안의 공훈이 너무 커져 황실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경계했다. 결국 사안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광릉보구(広陵歩丘)로 좌천되었다.

385년, 사안은 65세로 병사했다. 사후 태부(太傅)[13]와 여릉군공(廬陵郡公)의 작위가 추증되었다. 아들 사염(謝琰)과 손자 사혼(謝混)도 동진에서 벼슬을 지냈다.

3. 일화


  • 귀족 출신이었음에도 평소 소탈하여 인기가 많았다. 재상 자리에 올라서도 변함이 없었는데, 하루는 시골 고향에 가는 사람이 그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사안은 그에게 노잣돈은 갖고 여행을 다니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수중에 포규선(蒲葵扇, 부들잎으로 만든 부채) 5자루뿐이라고 하자, 사안이 그 부채 하나를 골라 쥐고 거리를 누비니 경향의 사서(士庶, 선비와 서민)들이 앞다퉈 사느라 포규선 값이 몇 배나 올랐다고 한다.[14]
  • 전진과 비수에서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이던 무렵, 사안은 백만 대군을 맞아 불안해하는 조정과 병졸들을 안심시키려고 지휘 천막 안에서 태연히 바둑을 뒀다. 황제가 보낸 사신이 전황을 묻자 바둑이나 한 판 두자며 사신을 바둑판에 앉혔다. 전령이 급히 달려오자 그는 대국 중 전황 보고를 받으려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왔는데, 돌아와서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고 바둑돌만 놓았다. 불안해진 사신이 전황을 재촉하자 뜬금없이 중들이 도적을 혼내줬다는 알 수 없는 말만 하고 태연자약했다. 조정 사신이 승전보냐고 거듭 묻고 급히 돌아간 연후에야 사안 자신도 기뻐 날뛰었는데, 얼마나 날뛰었는지 그 와중에 흔들리던 이가 부러진 것도 몰랐다고 한다.[15]

4. 평가

사안은 조정으로부터 정토대도독(征討大都督)에 임명되어, 동생 사석(謝石)과 조카 사현(謝玄) 등에게 군사를 맡겨 이를 대파했다(비수 전투).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사안은 침착한 모습을 주변에 보이기 위해 손님과 바둑을 두었다. 대국 중에 전선으로부터 보고가 오자, 손님이 어떻게 되었는지 묻자 "어린 아이들이 적을 격파했습니다."라고만 말하고, 특별히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손님이 돌아간 후, 지금까지의 평온한 모습을 버리고 기뻐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 때 나막신 이빨을 부딪혀 부러뜨렸지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 공적으로 인해 진군 사씨(陳郡謝氏)는 낭야 왕씨(琅邪王氏)와 동격의 최고 가문으로 여겨졌고, 사안은 태보가 되었다.

5. 관련 사적

謝安|사안중국어 관련 기록은 『진서』 「열전」49에 수록되어 있다.[1]

6. 사안을 소재로 한 작품

왕순전의 소설 「거미 남자 사안」(실학사(대만))이 있다.[1]

참조

[1] 서적 Book of Jin
[2] 서적 Book of Jin
[3] 간행물 Hong Lee and Stefanowsky
[4] 서적 晋書
[5] 서적 진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9] 문서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서적 晋書
[15] 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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