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와모토 요리오
1. 개요
사와모토 요리오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으로, 해군병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포술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경순양함 함장, 해군 차관, 구레 진수부 사령 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미일 개전에 반대했으나 차관직을 유지했다. 전후에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기소되지 않았고, 공직 추방 이후 방위청 고문과 수교회 회장을 지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 함대 사령 장관은 사와모토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냈으며, 사와모토는 정3위와 욱일대수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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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관련자 -
쇼와 천황
쇼와 천황은 메이지 천황의 손자로 태어나 124대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여 사망할 때까지 재위하며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 침략 전쟁에 관여했다는 논란이 있으며, 전후에는 상징적인 천황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고 그의 전쟁 책임 문제는 논쟁의 대상이다. -
태평양 전쟁 관련자 -
혼마 마사하루
혼마 마사하루는 일본 제국 육군 군인으로, 필리핀 공략전을 지휘했으나 바탄 죽음의 행진에 대한 책임으로 전범으로 처형되었고, 그의 재판은 지휘자 책임 적용 및 맥아더의 복수심 작용 등의 논란이 있다. -
해군 대학교 동문 -
나구모 주이치
나구모 주이치는 1887년 출생하여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진주만 공격을 지휘한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이며, 미드웨이 해전 패배 후 사이판 전투에서 자결하고 해군 대장으로 추서되었다. -
해군 대학교 동문 -
고가 미네이치
고가 미네이치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연합함대 사령장관을 지냈으며, 해군병학교 졸업 후 여러 함선 근무와 주요 요직을 거쳐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후임으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되었으나 팔라우 대공습 중 사망하여 대함거포주의론자이자 영미 협조파로서 복잡한 면모를 보였던 그의 사망과 일본 해군의 몰락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
중일 전쟁 관련자 -
무타구치 렌야
일본 제국 육군 장군 무타구치 렌야는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 노구교 사건과 임팔 작전 등 주요 사건에 관여했으며, 전후 전쟁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의 군사적 능력과 작전 실패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
중일 전쟁 관련자 -
아베 노부유키
아베 노부유키는 러일 전쟁에 참전한 일본 제국의 육군 대장이자 정치인으로, 제39대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중일 전쟁 종식과 일본의 중립 유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이후 조선총독을 지내며 전쟁 말기 조선에서의 압제적 통치를 담당했다.
2. 생애
사와모토 요리오는 해군병학교 및 해군 포술 학교 고등과를 졸업하고 포술 장교로 근무했다. 소좌 시절 영국 주재 경험이 있으며, 1941년 오이카와 고시로 해군 대신 시절 해군 차관에 취임했다. 미일 개전에 반대했으나 시마다 시게타로의 설득으로 차관직을 유지, 1944년 대장 승진 후 구레 진수부 사령 장관을 거쳐 1945년 군사 참의관으로 종전을 맞았다.
전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고, 1947년 공직 추방 가 지정 해제 후 1955년 방위청 고문, 수교회 회장을 역임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보낸 편지들은 2000년 방위청(현 방위성) 방위 연수소에 기증되었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사와모토 요리오는 해군병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해군 포술 학교 고등과를 수료한 포술 전공 장교이다. 해군병학교 동기이자 수석 졸업생은 사토 이치로였다. 소좌 시절에는 2년간 영국에 주재했다.
2.2. 군 경력
사와모토 요리오는 해군병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해군 포술 학교 고등과를 수료한 포술 전공 장교이다. 소좌 시절에는 2년간 영국에 주재했다. 경순양함 덴류 함장, 군무국 제1과장, 중순양함 다카오 함장, 전함 휴가 함장, 함정 본부 총무 부장, 연습 함대 사령관, 제2파견 지함대 사령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41년 4월 4일, 오이카와 고시로 해군 대신의 해군 차관에 취임했다.
미일 개전에 반대했으나, 시마다 시게타로가 연합 함대 사령 장관 보직을 내비치자 번의하여 해군 차관에 머물렀다. 1944년 3월 1일 대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군사 참의관 겸 해군 차관 사무 취급이 되었고, 같은 해 7월 17일 구레 진수부 사령 장관, 1945년 5월 1일 군사 참의관을 거쳐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전범으로 체포되지 않았고, 1947년 공직 추방 가 지정을 받았다. 1955년 방위청 고문에 취임하고, 수교회 회장을 역임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 함대 사령 장관이 1941년 8월부터 1943년 3월까지 사와모토에게 보낸 8통의 편지는 2000년 유족이 방위청(현 방위성) 방위 연수소에 기증했다.
2.3. 태평양 전쟁 시기
사와모토 요리오는 해군병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했다. 수석은 같은 고향 출신인 사토 이치로였다. 해군 포술 학교 고등과를 수료한 포술 전공 장교로, 소좌 시절에는 2년간 영국에 주재했다. 경순양함 "덴류", 군무국 제1과장, 중순양함 "다카오", 전함 "휴가" 함장, 함정 본부 총무 부장, 연습 함대 사령관, 제2파견 지함대 사령 장관 등을 역임하고, 1941년(쇼와 16년) 4월 4일 오이카와 고시로 해군 대신의 해군 차관에 취임했다.
미일 개전에 대해서는 반대했으며, 제3차 고노에 내각이 총사직하고 도조 내각이 성립될 때 오이카와 고시로는 후임 해상으로 도요다 소에무를 추천했다. 그러나 도요다의 육군 혐오는 육군 측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육군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다. 사와모토는 이를 호기로 내각의 유산을 기대했지만, 결국 시마다 시게타로가 해상에 취임했다.
미일 개전 결정에 대해서도 차관으로서 개전은 승복할 수 없으며 자신이 없으니 차관을 사임하게 해달라고 시마다에게 부탁했지만, 시마다가 사와모토의 대장 승진과 연합 함대 사령 장관 보직을 내비치자 번의했다. 이에 관해서 사와모토는 후년에 매우 후회했다.
결국 해군 차관에 머물러 1944년(쇼와 19년) 3월 1일 대장으로 승진하여 군사 참의관 겸 해군 차관 사무 취급이 되었다. 같은 해 7월 17일 구레 진수부 사령 장관, 1945년(쇼와 20년) 5월 1일 군사 참의관이 되어 그대로 종전을 맞이했다.
2.4. 전후 활동
1944년(쇼와 19년) 3월 1일 대장으로 승진하여 군사 참의관 겸 해군 차관 사무 취급이 되었고, 같은 해 7월 17일 구레 진수부 사령 장관, 1945년(쇼와 20년) 5월 1일에 군사 참의관이 되어 그대로 종전을 맞이했다.
전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개전 당시 육해군성의 대신, 차관, 군무 국장 중에서 사와모토는 해군 차관이었지만 유일하게 전범으로 체포되지 않아 재판을 받지 않았다. 1947년(쇼와 22년)에 공직 추방 가 지정을 받았다. 그 후 1955년(쇼와 30년) 9월 24일 방위청 고문에 취임했고, 수교회 회장을 역임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 함대 사령 장관은 1941년(쇼와 16년) 8월부터 1943년(쇼와 18년) 3월까지 사와모토에게 8통의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전후 사와모토 가에서 보관하고 있었지만, 2000년(헤이세이 12년) 5월 유족이 방위청(현 방위성) 방위 연수소에 일괄 기증했다. 묘소는 다마 영원(10-1-10)에 있다.
3. 야마모토 이소로쿠와의 관계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1941년(쇼와 16년) 8월부터 전사하기 전 달인 1943년(쇼와 18년) 3월까지 사와모토에게 8통의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들은 전후 사와모토 가문에서 보관하다가 2000년(헤이세이 12년) 5월에 유족이 방위성(당시 방위청) 방위연수소에 모두 기증했다.
4. 서훈 내역
| 구분 | 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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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계 | |
| 훈장 | |
| 외국 훈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