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야마 사네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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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러일 전쟁에서 뛰어난 전략을 수립하여 일본의 승리에 기여했다. 1868년 에히메현에서 태어나 해군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미국 유학을 통해 해양 전략을 연구했다. 러일 전쟁 당시 연합함대 참모로서 뤼순항 봉쇄 작전과 쓰시마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이후 해군대학 교관, 군령부 제1반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문장가로 평가받았으며,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널리 알려졌다. 말년에는 종교에 심취하였으며, 1918년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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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야마 사네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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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아키야마 사네유키 |
로마자 표기 | Akiyama Saneyuki |
한자 표기 | 秋山 真之 |
출생일 | 1868년 4월 12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이요국 마쓰야마 (현재 일본 에히메현 마쓰야마시) |
사망일 | 1918년 2월 4일 |
사망지 | 일본 제국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 (현재 일본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시) |
묘소 | 가마쿠라 영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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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경력 | |
소속 | 일본 제국 해군 |
복무 기간 | 1890년 - 1917년 |
최종 계급 | 해군 중장 |
주요 지휘 | 제2함대 순양함 아키쓰시마 순양함 오토와 순양함 하시다테 순양함 이즈모 순양함 이부키 |
주요 참전 전투 | 청일 전쟁 러일 전쟁 |
서훈 | |
별명 | 없음 |
2. 초기 생애 및 교육
이요 마쓰야마번의 하급 무사 가문에서 5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친구인 마사오카 시키와 함께 도쿄 제국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했으나,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과 육군 장교였던 형 요시후루의 권유로 1886년 해군병학교에 입학하여 해군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해군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에는 여러 함선에서 근무하며 세계 각지를 둘러보았고, 정보 장교로서 조선과 만주 등지에서 첩보 활동을 수행하기도 했다.
2. 1. 출생과 성장
이요 마쓰야마 번의 마쓰야마 성 아래 중도정(현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번의 하급 무사인 아키야마 히사타케(秋山久敬)였고, 그는 5남이었다. 어머니 정(貞)은 마쓰야마 번사 야마구치 가문 출신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태어났을 때 절에 보내질 뻔했으나, 형인 아키야마 요시후루가 반대하여 무산되었다[9].어린 시절에는 현지의 한학 서당에서 공부하고 와카 등도 배웠다. 후에 유명한 시인이 되는 마사오카 시키와는 어릴 적 친구였다. 마사오카 시키가 도쿄로 간 것에 자극받아, 에히메현 마쓰야마 중학교를 5년 만에 중퇴하고 1883년 도쿄로 향했다. 처음에는 고급 관료(태정대신)를 목표로 삼고, 시험 준비를 위해 교립학교에서 영어를 배웠으며, 대학예비문 (훗날 제일고등학교, 현 도쿄 대학 교양학부)에 입학했다.
대학예비문 시절 도쿄 제국 대학 진학을 목표로 했으나,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비를 형 요시후루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결국 육군 장교였던 형의 권유(혹은 지시)에 따라 문학 공부를 포기하고 1886년 일본 해군병학교에 17기생으로 입교했다.
그가 재학 중 해군병학교는 도쿄 쓰키지에서 히로시마현 에타지마로 이전하며 일본 제국 해군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 아키야마는 뛰어난 학생으로, 1890년 7월 17일 88명의 생도 중 수석으로 졸업하며 소위후보생이 되었다. 이는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의 저서 『해양력의 역사적 영향』 일본어 번역본 일부가 출판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졸업 후 소위후보생으로서 해방함 히에이 (코르벳)에 승선하여 실무를 익혔고, 오스만 제국 군함 에르투룰 조난 사건(에르투룰호 조난 사고) 당시 생존자 송환 임무에도 참여했다. 이후 순양함 다카치호에서도 근무했다. 1892년 5월 23일 소위로 정식 임관된 후, 류조, 마쓰시마, 요시노 등에서 근무하며 경력을 쌓았다.
청일 전쟁 발발 시에는 통보함 쓰쿠시에 승선하여 위하이웨이 해전 등에서 정찰 및 후방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전쟁 후에는 순양함 이즈미의 분대장을 맡았다. 1896년 1월 요코스카로 전속되어, 청일전쟁에서 중요성이 부각된 어뢰 전술을 배우기 위해 신설된 해군 수뢰학교 학생이 되었다. 졸업 후에는 요코스카 수뢰단 제2수뢰대에 배속되었고, 이후 통보함 야에야마 (통보함)에 승선하며 대위로 진급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군령부 첩보과원으로 발령받아, 노동자로 신분을 위장하고 만주와 조선 등지에서 정보 수집 활동을 벌였다.
2. 2. 도쿄 유학과 해군 입대
이요 마쓰야마번의 하급 무사 아키야마 히사타케(秋山久敬)의 다섯째 아들로 마쓰야마성 아래 중도정(현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절에 보내질 뻔했으나, 형 요시후루가 자신이 학업에 힘써 돈을 벌겠다며 부모를 설득하여 집에 남게 되었다.[9] 어린 시절에는 현지의 한학 서당에서 공부하고 와카 등을 배웠다.어릴 적 친구인 시인 마사오카 시키가 도쿄로 상경한 것에 자극받아, 1883년 에히메현 마쓰야마 중학교(현 에히메현립 마쓰야마 동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도쿄로 향했다. 도쿄에서는 장차 태정대신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시험 준비를 위해 교립학교(현 가이세이 중학교·고등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대학예비문(후의 일고, 현 도쿄대학교 교양학부)에 입학했다.
대학 예비문 시절에는 도쿄 제국 대학 진학을 목표로 했으나,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과 육군 장교였던 형 요시후루의 권유로 문학의 길을 포기하고 1886년 해군병학교에 17기 생도로 입교했다. 당시 해군병학교는 도쿄 쓰키지에 있었으나, 아키야마가 재학 중 히로시마현 에타지마로 이전하여 일본 제국 해군사관학교로 개명되었다. 아키야마는 뛰어난 학생으로, 1890년 7월 17일 88명의 생도 중 수석으로 졸업하고 소위후보생이 되었다. 그의 졸업은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의 저서 『해양력의 역사적 영향 (1660-1783)』의 일본어 번역본 일부가 출판된 지 몇 주 후였다.
졸업 후 소위후보생으로서 해방함 히에이에 승함하여 실지 연습을 거듭하고, 오스만 제국 군함 에르투르르호 조난 사건 당시 생존자 송환 임무에도 참여했다. 1892년 5월 23일 해군 소위로 임관된 후에는 헤이와 순양함 다카치호에서 근무했다. 이후 류조, 순양함 마쓰시마, 순양함 요시노, 통보함 치쿠시, 순양함 이즈미, 통보함 야에야마 등 여러 함선에서 복무하며 경력을 쌓았다. 청일 전쟁 중에는 통보함 '치쿠시'에 승함하여 정찰 등 후방 지원 임무를 수행했으며, 위하이웨이 해전에도 참가했다.
전쟁 후에는 순양함 '이즈미'의 분대장을 맡았고, 1896년 1월에는 요코스카로 전속되어 청일전쟁에서의 어뢰 활약에 주목하여 신설된 해군 수뢰술 연습소(후의 해군 수뢰학교) 학생이 되어 수뢰술을 배웠다. 졸업 후에는 요코스카 수뢰단 제2수뢰대 부관이 되었다. 이후 통보함 '야에야마'에 승함하여 해군 대위로 진급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군령부 첩보과원으로 발령받아, 노동자로 신분을 위장하고 만주와 한국 등지에서 첩보 활동을 수행했다.
3. 군 경력
1886년 해군병학교에 17기생으로 입교하여 1890년 수석으로 졸업하고 해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소위후보생 시절 해방함 「히에이」에 승선하여 실무를 익혔고, 에르투르르 호 난파 사건 당시 생존자 송환 임무에도 참여했다. 1892년 해군 소위로 임관된 후 여러 함선에서 복무했으며, 청일전쟁에서는 통보함 「치쿠시」에 승선하여 후방 지원 활동에 참여했다.
전후 해군 대위로 진급하고 군령부 첩보과원으로 만주 등지에서 활동한 뒤, 1897년부터 약 3년간 미국에 해군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스페인 전쟁을 참관하고 보고서를 제출했으며, 미 해군 군함에 승선하여 해군 전술을 배우고 해군대학에서 고등 전술 교육을 받았다. 영국 시찰 후 1900년 귀국하여 해군 소좌로 진급, 참모직을 거쳐 해군대학교 교관이 되었다. 그는 해군대학 교육을 실전 중심으로 개편하고 새로운 전략·전술 교리를 개발하는 데 기여했으며, 학생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해군 중좌로 진급하여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의 작전 담당 참모로서 기함 미카사에 승선했다. 그는 뤼순항 공격 및 폐쇄 작전, 황해 해전, 쓰시마 해전 등 주요 해전의 작전 입안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일본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전후 해군대학교 교관으로 복귀했다가, 처음으로 지휘관 보직을 맡아 전함 미카사 함장을 시작으로 여러 함선의 함장을 역임했다. 1913년 일본 제국 해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제독이 되었다. 1914년 군수 비리 사건인 지멘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는 청렴결백함 덕분에 어떤 혐의도 받지 않고 자리를 지켰으며, 오히려 군무국장으로 임명되어 사건 수습과 군 개혁을 보좌했다. 이 시기 중국 정세에도 관여하여 쑨원의 혁명 운동을 비공식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11]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에는 유럽 전선을 시찰하고 영국 국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8] 귀국 후 제2수뢰전대 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나 건강 악화로 1917년 중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만년에는 니치렌슈에 귀의하고 신토 연구에 몰두하는 등 종교 및 영적 문제에 심취했다. 1918년 2월 4일, 맹장염이 악화되어 발병한 복막염으로 49세에 사망했다. 묘소는 가마쿠라 령원에 있다.[3]
3. 1. 초기 경력
마쓰야마성 아래 중도정(현: 에히메현 마쓰야마시)에서 이요마쓰야마번(伊予松山藩)의 하급 무사인 아키야마 히사타카(秋山久敬)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생활고로 절에 보내질 뻔했으나, 형인 아키야마 요코(秋山好古)가 부모를 설득하여 막았다.[9] 어머니 정(貞)은 마쓰야마번사 야마구치가(山口家)의 딸이다. 현지 한학 서당에서 공부했으며 와카 등에도 능했다. 어린 시절 친구로는 훗날 유명한 시인이 되는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가 있었다.마사오카 시키가 도쿄로 상경한 것에 자극받아, 에히메현 마쓰야마 중학교(현: 에히메현립 마쓰야마 동고등학교)를 5학년 때 중퇴하고, 1883년(메이지 16년) 장래 태정대신을 목표로 도쿄로 향했다. 시험 준비를 위해 교립학교(현: 가이세이 중학교·고등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대학예비문(후의 일고, 현: 도쿄대학교 교양학부)에 입학했다.
대학예비문에서는 제국대학 진학을 목표로 했으나, 집안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형 요코에게 학비를 의존했기 때문에, 문학부에 진학한 시키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1886년(메이지 19년) 해군병학교에 17기생으로 입교했다. 학생 시절 해군병학교는 히로시마현 에타지마로 이전하여 일본 제국 해군사관학교로 개명되었다.
1890년(메이지 23년) 7월 17일, 88명의 사관생도 중 수석으로 졸업하고 해군 소위후보생이 되었다. 그의 졸업 몇 주 전,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Alfred Thayer Mahan)의 저서 『해양력의 역사적 영향 (1660-1783)』(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 1660–1783)의 일본어 번역본 일부가 출판되었다. 졸업 후 해방함 「히에이」에 승선하여 실무 연습을 했고, 좌초된 오스만 제국 군함 「에르투르르」의 생존자 송환(에르투르르 호 난파 사건) 임무에도 참여했다.
1892년(메이지 25년) 5월 23일 해군 소위로 임관된 후, 순양함 다카치호, 류조, 마쓰시마, 요시노 등에서 복무했다. 청일전쟁 중에는 통보함 「치쿠시」에 승선하여 위하이웨이 해전 등에서 정찰 및 후방 지원 활동에 참여했다.
전후에는 순양함 「이즈미」 분대장을 지냈고, 1896년(메이지 29년) 1월에는 요코스카로 전속되어 해군 수뢰술 연습소(해군 수뢰학교) 학생이 되어 어뢰 전술을 배웠다. 졸업 후 요코스카 수뢰단 제2수뢰대 부관이 되었으며, 이후 통보함 「야에야마」에 승선하여 해군 대위로 진급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군령부 첩보과원으로 임명되어 노동자로 위장하고 만주와 한국 등지에서 첩보 활동을 수행했다.
3. 2. 미국 유학과 군사 연구
1896년 10월 24일 중위로 승진한 아키야마는 이듬해인 1897년 6월 26일부터 1899년 12월 27일까지 해군 무관으로 미국에 파견되었다. 이는 미국 해병대와 미국계 이주민들에 의한 하와이 왕국의 전복으로 일본과 미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던 시기였다. 처음에는 공비 유학이 아닌 사비 유학의 형태였다.뉴욕에 도착한 아키야마는 미국 해군사관학교나 해군전쟁대학에서의 연구 방법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당시 해군 대학 교장이자 군사 사상가인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에게 연락했으나, 마한은 추천 도서 목록만 제공할 뿐 직접적인 도움은 주지 않았다. 아키야마는 마한에게 사사하며 주로 대학 도서관과 해군 문고의 자료를 통해 병술 이론 연구에 몰두했다. 또한 해군장관 보좌관이었던 테오도르 루즈벨트에게 해군전쟁대학 입학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아키야마는 외국 군사 관찰자로서 미 해군 함대에 합류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1898년 6월 미군의 산티아고 데 쿠바 점령과 7월 아바나 항구 봉쇄 작전을 직접 목격했다. 아키야마는 자신의 관찰 내용을 담아 봉쇄 및 상륙 작전의 문제점을 지적한 장문의 보고서 「산티아고 데 쿠바의 역」(후에 「극비첩보 제118호」로 명명됨)을 일본에 제출했다. 이때 산티아고 데 쿠바 해전의 일환으로 미 해군이 실시한 쿠바 산티아고 항 폐쇄 작전을 견학한 경험은 훗날 러일전쟁에서의 뤼순항 폐쇄 작전 입안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10] 전쟁 관찰 후, 그는 워싱턴 D.C.에 있는 일본 대사관에서 짧은 기간 해군 무관으로 근무했다.
1899년 2월, 일본 대사의 노력 덕분에 아키야마는 미국 해군 군함 뉴욕호(ACR-2)에 6개월간 승선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이를 통해 북대서양과 카리브해에서 미국의 해군 전술과 함대 작전을 직접 관찰할 수 있었다. 함상 근무를 마친 후에는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의 해군전쟁대학에서 여러 강연에 참석하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연구를 마친 아키야마는 1899년 12월 27일부터 1900년 5월 20일까지 영국을 시찰한 후, 1900년 8월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해군성 군무국 제1과원, 상비함대 참모 등을 역임했으며, 1901년 해군 소좌로 승진했다.
3. 3. 해군대학 교관 시절
미국 유학을 마치고 1900년 8월 귀국한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1901년 10월 1일 해군 중좌로 진급하여 여러 참모직을 거쳤다. 1902년 7월부터 1903년 11월까지 해군대학교의 수석 전략 교관을 맡았다.교관으로서 아키야마는 해군대학교의 교육 과정을 실전 대비 중심으로 개편하는 데 힘썼다. 그는 가상 상황을 이용해 명령 작성과 현실적인 비상 계획 수립을 연습하는 시뮬레이션 방식을 도입했다. 또한 미서 전쟁 관전 경험을 바탕으로 워 게임(wargaming)과 탁상 지도 훈련 개념을 소개하고, 일본 해군을 위한 새로운 전략 및 전술 교리를 개발했다. 강의에서는 러시아를 일본의 주요 위협으로 지목했다.
당시 아키야마는 34세였으며, 학생들 중에는 동갑이거나 심지어 계급이 높은 장교들도 있었지만, 그의 전문 지식과 전문성, 그리고 성격 덕분에 동료와 학생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5]
러일전쟁이 끝난 후인 1905년 12월, 연합함대가 해산되자 다시 해군대학교 교관으로 복귀하였다.
3. 4. 러일 전쟁 참전
중앙 왼쪽부터 가토, 도고, 아키야마]]아키야마는 러시아 함대 격멸과 봉쇄를 목표로 뤼순항 공격 및 뤼순항 폐쇄 작전에서 기뢰 부설 등을 기획했다. 또한 황해 해전과 러시아 발트 함대의 회항에 대응한 격멸 작전 수립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쓰시마 해전에서는 러시아 함대를 완전히 격파하여 러시아의 동해 장악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해전에서 아키야마는 적 함대 앞에서 함대의 방향을 전환하는 과감한 전술을 고안했는데, 이는 12세기 후반의 고서 『노지마류 해적 고법(野島流海賊古法)』에 기록된 일본 해적의 전술에서 착안한 것이었다.[6] 쓰시마 해전에서의 승리는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정략적 우위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일본의 승리 이후 아키야마는 포츠머스 조약 체결을 위한 예비 협상에 해군 대표로 지명되었으나,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사망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하고 교체되었다.[7]
3. 5. 러일 전쟁 이후 활동

러일전쟁이 끝난 후인 1905년 12월, 연합함대 해산 후 해군대학교 교관으로 복귀했다. 이후 처음으로 참모가 아닌 지휘관에 임명되어 전함 미카사의 함장이 되었다. 1908년 9월 25일 대좌로 승진했으며, 이후 여러 함선의 함장을 역임했다.
[1]
1913년 12월 1일 소장으로 승진하여 제독의 반열에 올랐다. 1914년 군함 건조와 관련된 지멘스 사건이 발생하여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이 총사퇴하는 등 정치적 파장이 컸다. 아키야마는 이 사건에서 부패 혐의와 무관한 소수의 고위 장교 중 한 명이었으며, 그의 청렴함 덕분에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해군의 신뢰 회복을 위해 야시로 로쿠로 해군대신은 아키야마를 군무국장으로 임명하여 사건 수습과 군제 개혁을 보좌하게 했다. 그는 군함 건조 예산 확보와 치죄법 개정 논의에 참여했다.
군무국장 시절, 순양함 오토와를 타고 상하이를 방문하여 중국 정세를 직접 살폈다. 그는 쑨원과 비밀리에 교류하며 위안스카이의 제정 복고 시도를 막기 위한 혁명 운동을 비공식적으로 지원했다.[11] 또한 고이케 쵸조(小池張造), 이누즈카 신타로(犬塚信太郎) 등과 함께 '코이케 방'을 결성하고 쿠하라 후사노스케(久原房之助) 같은 재계 인사들의 지원을 받아 중국 혁명 운동을 도왔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황제로 추대되자 이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아키야마는 카와시마 나미하쓰(川島浪速) 등이 주도한 제2차 만몽 독립 운동에도 관여했다. 이후 군령부로 전출되면서 중국 관련 정책 일선에서는 물러났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16년 3월, 전쟁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유럽으로 파견되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이용하여 러시아, 핀란드 등 동유럽을 거쳐 5월에 영국에 도착했다. 영국에서는 일본해 해전 당시 영국 해군 관전 무관이었던 윌리엄 파켄햄 중장, 영국 함대 사령장관 존 젤리코 제독 등의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영국 국왕 조지 5세로부터 세인트 마이클 앤드 세인트 조지 훈장 기사 작위(KCMG)를 받았다. 이는 일본 황족 외 일본인으로서는 최초의 영국 기사 작위 수여로 알려져 있다.[8] 이후 프랑스, 이탈리아를 거쳐 미국을 경유하여 10월에 귀국했다.
귀국 후 1916년 12월 제2수뢰전대 사령관이 되었고, 1917년 7월에는 해군 장관 회의 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본 제국 해군 제2함대 사령관직을 맡았으나, 이미 건강이 크게 악화된 상태였다. 결국 1917년 12월 중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대기 발령을 받았다.
만년에는 영적, 종교적 문제에 깊이 몰두했다. 해군대학교 교관 시절 사토 테츠타로(佐藤鉄太郎) 등이 주재한 연구회 '텐세이카이'(天晴会)의 권유로 경전 연구를 시작했으며, 니치렌슈에 귀의하고 신토 연구가 가와모토 본지(川面凡児)에게 사사하여 황전 연구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신흥 종교인 오오모토에도 잠시 관여했으나, 신앙보다는 신토 연구 목적이었다는 설이 있다.[13] 한편, 전후 '해군 반성회'에서는 노모토 타메테루(野元為輝) 소장이 시미즈 미쓰요시(清水光美) 중장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아키야마가 과도한 성생활로 인한 매독의 영향으로 말년에 이상 행동을 보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12]
1917년 5월 맹장염을 앓아 하코네에서 요양했으나 1918년 재발하여 복막염으로 악화되었다. 1918년 2월 4일, 오다와라의 야마시타 카메사부로(山下亀三郎) 별장 '다이쵸카쿠'(対潮閣)에서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임종 직전 교육 칙어와 반야심경을 읊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묘는 도쿄 아오야마 묘지에 있었으나 후에 가마쿠라 령원으로 이장되었다.[3]
3. 6. 제1차 세계 대전 참관 및 말년
1913년 12월 1일 소장으로 진급한 아키야마는[1] 이듬해 1914년 군함 건조 비리 사건인 지멘스 사건이 터졌을 때, 부패 혐의에서 자유로운 몇 안 되는 고위 장교 중 한 명이었기에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당시 제2차 오쿠마 내각의 야시로 로쿠로 해군대신 아래에서 군무국장을 맡아 사건 수습과 해군 신뢰 회복에 힘썼으며, 지멘스 사건 조사위원회와 치죄법 개정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군무국장 시절 중국 상하이에 순양함 오토와를 기항시키며 현지 상황을 파악했고, 교환 학생으로 위장한 첩보원들을 활용한 정보망 구축을 지원했다. 또한 쑨원과 비밀리에 교류하며 그의 혁명 운동을 지원했고, 코이케 쵸조 등과 함께 '코이케 방'을 결성하기도 했다.[11] 1916년 2월에는 군령부로 자리를 옮겨 출사(出仕)했으며, 카와시마 나미하쓰, 타나카 기이치 등이 주도한 제2차 몽고 독립 운동에도 관여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아키야마는 1916년 3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이용해 유럽 시찰길에 올랐다. 러시아와 핀란드 등 동유럽을 거쳐 5월에는 영국에 도착하여 일본해 해전 당시 영국 해군 관전 무관이었던 윌리엄 페케넘 중장, 영국 함대 사령장관 존 제리코 제독 등의 환영을 받았다. 6월에는 영국 국왕 조지 5세로부터 세인트마이클앤드세인트조지 훈장 기사 작위(K.C.M.G.)를 받았는데, 이는 일본 황족 외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영국 군주에게 기사 작위를 받은 사례로 알려져 있다.[8] 이후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9월 미국을 경유하여 10월에 귀국했다.
귀국 후 1916년 12월 제2수뢰전대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917년 7월에는 해군 장관 회의 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본 제국 해군 제2함대 사령관직을 제안받았으나, 이미 건강이 크게 악화된 상태였다. 결국 1917년 12월 1일 중장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대기 발령을 받아 사실상 현역에서 은퇴했다.[3]
말년에는 종교와 영적 세계에 깊이 몰두했다. 해군대학교 교관 시절 사토 테츠타로 등의 권유로 연구회 '텐세이카이'(天晴会)에서 경전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군인 신자가 많았던 니치렌슈에 귀의했으며, 신도가 가와모토 본지에게 사사하여 신도를 연구하고 황전 연구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신흥 종교인 오모토교에도 관심을 보여, 1916년 12월 데구치 오니사부로의 초청으로 아야베를 방문하고 오모토 교단의 고문이 되었으나, 신앙보다는 신도 연구가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1917년 5월경 관계를 정리했다.[13] 한편, 전후 해군 반성회에서는 노모토 타메테루 소장이 시미즈 미쓰요시 중장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아키야마가 젊은 시절 성 문제(매독)로 인해 말년에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는 증언도 있다.[12] 러일전쟁의 참상을 겪은 후 출가를 원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포기하고, 대신 장남 아키야마 히로시(秋山大)에게 승려가 되도록 교육했다고 전해진다.[36] 그러나 아들 히로시는 훗날 "아버지는 종교에 부정적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35]
1917년 5월 맹장염을 앓아 하코네에서 요양했으나, 이듬해 1918년 재발하여 복막염으로 악화되었다. 결국 1918년 2월 4일, 야마시타 카메사부로의 별장이었던 오다와라의 다이초카쿠(対潮閣)에서 교육 칙어와 반야심경을 암송하며 49세(만 나이)의 나이로 사망했다.[3] 그의 묘는 본래 도쿄도 미나토구의 아오야마 묘지에 있었으나, 후에 가마쿠라 령원으로 이장되었다.
4. 사상과 업적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 연합함대의 핵심 작전 참모로서 일본해 해전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작전 입안 능력은 도고 헤이하치로 사령장관으로부터 "지모가 샘솟는 듯하다"(智謀湧くが如し|지모 와쿠가 고토시일본어)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30] 동료 야마나시 카츠노신은 그를 "보통 사람이 아니"며 "항상 머리가 빨리 돌아간다"[30]고 평했고, 후배 다카기 소키치는 호리 테이키치와 더불어 아키야마를 일본 제국 해군 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으로 꼽았다.
아키야마는 뛰어난 문장가로도 알려져 있다. 일본해 해전 당시 발신한 간결하고 명료한 전문 "오늘 날씨 맑으나 파고 높음"(本日天気晴朗ナレドモ浪高シ|혼지츠 텐키 세이로 나레도모 나미 타카시일본어)은 유명하다. 또한, 러시아 함대 항복 시 포격 중지를 건의하며 "장관, 무사의 자비입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32]나, 러일전쟁 후 연합함대 해산식에서 도고가 낭독한 훈시문의 초안을 작성한 것 등은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일본해 해전 직전 Z깃발과 함께 올린 "황국의 흥폐, 이 일전에 달렸으니 각자 한층 분발 노력하라"(皇国ノ興廃此ノ一戦ニ在リ、各員一層奮励努力セヨ|코코쿠노 코하이 코노 잇센니 아리, 카쿠인 잇소 훈레이 도료쿠세요일본어)는 신호문 역시 그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당시 참모장이었던 가토 도모사부로가 작성했다는 설도 존재한다.[31]
전쟁 이후에는 후진 양성에도 힘썼으나, 점차 영적, 종교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전쟁 경험을 통해 "인지 밖의 힘"을 느꼈다고 술회하며[13], 말년에는 일련종 귀의, 신토(神道) 연구, 오모토와 같은 신흥 종교 탐구 등에 몰두했다. 야마모토 에이스케 대장은 이를 두고 아키야마의 이성적인 면모가 오히려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종교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을 것이라 분석했다.
그의 업적은 오랫동안 크게 조명받지 못했으나, 전후 시마다 킨지의 연구와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1972)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형 아키야마 요코는 동생의 장례식에서 "아우는 잠시라도 '국가를 위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고 회고했다.[33]
4. 1. 해군 교육 혁신
1897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합중국 해군대학교에서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에게 배우며 병술 이론을 연구한 경험을 바탕으로, 1900년 귀국 후 해군성 군무국 제1과원, 상비함대 참모 등을 거쳐 1902년 해군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해군 소좌였던 아키야마는 해군대학교의 교육 프로그램을 실전 중심으로 개편하는 데 힘썼다. 그는 34세의 젊은 나이였고, 생도 대부분이 그와 동년배이거나 연장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뛰어난 인품과 전문 지식 덕분에 생도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다.4. 2. 국제 정세 인식과 외교 활동
해군성 군무국장 시절 아키야마는 순양함 오토와 (방호순양함)에 승선하여 상하이 등 중국 현지를 시찰하고, 유학생 수용 등을 제언했다. 그는 이누즈카 신타로, 고이케 조조 등과 함께 쑨원과 교류하며[11] 위안스카이의 제정(帝政) 복고 움직임에 반대하는 혁명 운동을 비공식적으로 지원했다. 이를 위해 '고이케 방(小池部屋)'을 결성하고 구하라 후사노스케 등 재계 인사들에게 자금 지원을 호소하기도 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성립되었고,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황제로 추대되자 중국 내 반발과 더불어 일본 등 외국 정부의 항의도 있었다. 이 시기 아키야마는 가와시마 나니와 등 대륙낭인 및 참모본부 차장 타나카 기이치가 주도한 제2차 몽고 독립 운동에도 고이케 조조와 함께 관여했다.해군 참모본부 근무 시절에는 순양함 ''오토와''를 상하이에 상시 배치하여, 중국 각지에서 교환 학생으로 위장 활동하는 정보원들의 네트워크 구축을 지원했다. 또한 쑨원과 비밀리에 서신을 교환하며 위안스카이의 제정 복고 시도를 저지하기 위한 노력을 물적으로 지원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인 1916년 3월에는 유럽 시찰길에 올랐다. 한반도에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이용하여 러시아, 핀란드 등 동유럽을 시찰한 후 5월 영국에 도착했다. 영국에서는 일본해 해전 당시 관전했던 영국 해군의 윌리엄 파켄햄 중장과 함대 사령장관 존 제리코 제독 등의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영국 국왕 조지 5세로부터 세인트 마이클과 세인트 조지 훈장 기사 작위(K.C.M.G.)를 수여받았다. 이는 일본 황족 외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영국 군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은 사례로 알려져 있다.[8] 이후 프랑스, 이탈리아에 체류한 뒤 9월 미국을 경유하여 10월에 귀국했다.
당시 총리였던 하라 다카시는 자신의 일기(1916년 7월 9일 자)에서 외무성의 고이케, 육군의 후쿠다, 해군의 아키야마 등이 연합하여 '나라를 그르치는 소책동(小策)'을 꾸미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기록했다.[34]
한편 러일전쟁 이후 아키야마는 일본의 국력을 냉정하게 분석하여 잠수함과 공군력 강화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동시에, 미국과의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비전론(非戦論)을 펼치기도 했다.[33]
4. 3. 한국과의 관계 (한국의 관점)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 연합함대의 작전 참모로서, 특히 쓰시마 해전의 작전 계획을 입안한 핵심 인물이다.[30] 당시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는 그의 작전 능력을 智謀湧くが如し|지모 와쿠가 고토시일본어(지모가 샘솟는 듯하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아키야마가 세운 작전과 이를 통한 일본의 승리는 결과적으로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국권 피탈을 가속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쓰시마 해전 당시 사용된 유명한 Z기 신호문 皇国ノ興廃此ノ一戦ニ在リ、各員一層奮励努力セヨ|코코쿠노 코하이 코노 잇센니 아리, 카쿠인 잇소 훈레이 도료쿠세요일본어(황국의 흥폐 이 일전에 달렸으니, 각원 더욱 분려노력하라)는 아키야마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가토 도모사부로가 만들었다는 설도 존재한다.[31] 이 신호는 일본의 승리에 대한 강한 결의를 보여주는 동시에, 제국주의적 팽창 의지를 명백히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러일전쟁 이후 아키야마는 일본 해군 내에서 중장까지 승진하며 영향력을 유지했다.[33] 전쟁 후에는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고 잠수함과 공군력 강화를 주장하기도 했으나[33], 그의 군사적 성공은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군사적 업적은 일본의 관점에서는 영웅적 행위로 평가될 수 있으나, 침략을 당한 한국의 입장에서는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5. 평가와 유산
러일전쟁 당시 일본 연합함대의 핵심 참모로서 쓰시마 해전의 작전을 입안하여 일본의 승리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33] 그러나 하라 다카시와 같은 동시대 인물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으며, 기행에 가까운 개인적 면모와 러일전쟁 이후 보인 정신적 모습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34][35] 러일전쟁 이후에는 잠수함과 공군력 강화, 미국과의 전쟁 회피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33] 그의 생애는 시마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을 비롯한 여러 작품과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5. 1. 긍정적 평가
(내용 없음)5. 2. 부정적 평가 (한국의 관점)
하라 다카시는 1916년 7월 9일 자신의 일기에서 아키야마 사네유키가 외무성의 코이케, 육군의 후쿠다와 함께 "소책국을 그르치는" 기획을 했다고 비판적으로 기록했다.[34]개인적인 면모에 있어서도 기행에 가까운 일화들이 전해진다. 군복 소매로 콧물을 닦거나 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하면 며칠 동안 목욕을 하지 않는 등 외모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며, 사람들 앞에서 방귀를 뀌거나 소변을 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아키야마의 참모였던 이이다 히사츠네 소좌는 이러한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은 머리가 좋아서 명참모이지만, 보통 사람이었다면 변태다"라고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전쟁에서 목격한 참상으로 인해 정신적인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출가를 원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포기했으며, 말년에는 오모토쿄에 입교하는 등 여러 종교 단체와 관계를 맺으며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는 평가도 있다.[35] 다만 그의 장남인 아키야마 히로시는 아버지가 종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5. 3. 유산
어린 시절 이름인 준고로(淳五郎)와 본명인 사네유키(真之)는 후한의 문인 장형(張衡)의 『사현부(思玄賦)』에 나오는 “하도진지순수혜(何道真之淳粋兮)”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어린 시절에는 장난이 심하고 거친 아이였으며, 여러 아이를 이끌고 전쟁놀이를 하거나 책을 참고하여 불꽃놀이를 만들어 쏘아 올리기도 했다. 어머니 사다(貞)가 “너도 죽이고 나도 죽겠다”며 울 정도로 장난이 심했다고 한다. 그림, 수영, 달리기(かけっこ)에도 능했으며, 와카에도 소질을 보였다. 아침에 화장실 가기가 귀찮아 창문으로 소변을 보며 “눈 오는 날 북쪽 창문을 열고 소변을 보니 추위에 성기가 오그라든다”라고 읊기도 했다.
해군병학교 시절에는 학교에 야구 팀을 만들어 일본 해군 야구의 창시자가 되었다. 사관 후보생 시절, 한 후배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 같지 않은데 왜 항상 성적이 최상위권이냐”고 묻자, 사네유키는 “과거 시험 문제를 참고하고 교관의 버릇을 파악한다. 또한 필요한 부분을 여러 번 설명하는 것을 통해 시험 문제를 예측할 수 있다”고 답했다.
볶은 콩을 좋아하여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자주 먹었다. 1904년(메이지 37년) 11월 23일 자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가 좋아한 콩은 완두와 잠두 두 종류였다. 군복 소매로 콧물을 닦거나 작전을 세우기 시작하면 며칠 동안 목욕을 하지 않는 등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사람들 앞에서 방귀나 소변을 보는 일도 있었다고 하며, 당시 사네유키의 참모였던 이이다 히사츠네(飯田久恒) 소좌는 “머리는 좋아서 명참모이지만, 보통 사람이었다면 변태”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귀국하던 중 도박 사기에 휘말린 적이 있다. 사기임을 간파한 사네유키는 주동자인 남자를 방으로 불러들여 “이대로 두면 잘못을 모를 것이다. 이는 사무라이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다. 돈을 돌려달라”고 단도를 뽑아 위협했고, 겁먹은 남자는 돈을 돌려주고 도망쳤다고 한다.
일본 해 해전에서 승리한 후에도 냉정하게 국력을 분석하여 잠수함과 공군력 강화, 미국과의 전쟁 회피론을 주장했다.[33]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는 “한 글자 이름”, “기억하고 쓰기 쉬울 것”, “대칭”이라는 세 가지 규칙을 정했다.[35]
러일 전쟁 후에는 전쟁에서 희생된 양측 병사들을 보며 출가를 원했으나 친구의 만류로 포기했다. 대신 장남인 아키야마 히로시(秋山大)에게 승려가 되도록 교육시켰다.[36] 말년에는 오모토교에 입교하는 등 여러 종교 단체와 관계를 맺으며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35] 그러나 장남 히로시는 아버지가 종교에 부정적이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 관련 작품 ===
아키야마 사네유키는 여러 문학 및 미디어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 시마 료타로, 『언덕 위의 구름』 (분슌문고, 전 8권) - 아키야마 형제를 중심으로 메이지 시대를 그린 역사 소설.
- 시마 료타로, 『역사 속의 만남 4: 마사오카 시키, 아키야마 요시후루·사네유키 ~어느 메이지 서민~』 (주오코론신샤, 2007년; 주코문고, 2011년) - 메이지 시대 인물들에 대한 단편 모음.
- 에가와 타츠야, 『일로전쟁 이야기』 (쇼가쿠칸 빅 코믹스) - 러일 전쟁을 다룬 만화.
- 신카와 타케토시, 『아키야마 사네유키 전설의 참모』 (PHP문고)
- 요시오카 히라이, 『금성의 Z기』 (소노라마 문고) - 사망한 아키야마가 화성에 환생하여 금성에서 활약한다는 내용의 SF 소설.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의 금성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 작품이다.
=== 관련 연구 및 전기 ===
아키야마 사네유키에 대한 연구와 전기는 다수 출간되었다.
- 사쿠라이 마사키요, 『아키야마 사네유키』 (아키야마 사네유키회(비매품), 1933년)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링크)
- 복각판: 마츠노 서점, 2009년. (외부 링크)
- 사쿠라이 마사키요, 『제독 아키야마 사네유키』 (이와나미 쇼텐, 1934년)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링크) - 위 비매품 서적을 간략화하여 일반 간행한 것.
- 아키야마 사네유키회 편, 『날씨 맑음에도 불구하고 파고 높음 : 「제독 아키야마 사네유키」와 「일본해 해전지」』 (마이니치 원즈, 2009년, ISBN 978-4-901622-45-5) - 『제독 아키야마 사네유키』(1934)와 사네유키의 유고로 여겨지는 『일본해 해전지』(『주오코론』 쇼와 19년 5월호 수록)를 복각한 책. (외부 링크)
- 『아키야마 사네유키의 모든 것』 (신진부쓰오라이샤, 1987년; 신판 2005년; 신진부쓰문고, 2009년)
- 마에사카 토시유키 편해설, 『군담 아키야마 사네유키의 러일전쟁 회고록』 (신진부쓰문고, 2010년, ISBN 9784404038098)
- 이시마루 준야, 『백년째의 파도 지혜의 제독 아키야마 사네유키의 생애』 (고진샤)
- 칸가와 타케토시, 『전설의 명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 (PHP문고)
- 야마나시 카츠노신, 『역사와 명장: 전사에 보이는 리더십의 조건』 (마이니치 신문사, 1981년)
- 시마다 킨지, 『러시아 전쟁 전야의 아키야마 사네유키』 (아사히 신문사, 1990년)
- 시마다 킨지, 『미국에 있어서의 아키야마 사네유키』 (아사히 신문사; 신판 아사히 센쇼(상하); 아사히 문고(상중하), 2009년)
- 타나카 히로미, 『아키야마 사네유키 인물총서』 (요시카와코분칸, 2004년)
- 하타 이쿠히코 편저, 『일본 육해군 종합사전 제2판』 (도쿄대학 출판회, 2005년)
- 하뉴 미치히데, 『아키야마 사네유키 일본해 해전의 명참모』 (가켄 M문고)
- 마쓰모토 켄이치, 『신의 함정: 아사노 와사부로, 근대 지성의 비극』 (신초샤, 1989년, ISBN 4-10-368402-X)
- 미우라 야스유키, 『소생하는 아키야마 사네유키』 (상·하) (웨지, 2008년, ISBN 978-4-86310-028-2, ISBN 978-4-86310-029-9)
6. 대중문화
시바 료타로의 소설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사카노 우에노 쿠모일본어)은 아키야마 사네유키를 주요 인물로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NHK에서 드라마 《사카노우에노쿠모》(坂の上の雲|사카노 우에노 쿠모일본어)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얻었다. 아키야마 사네유키와 그의 형 아키야마 요시후루, 그리고 친구 마사오카 시키는 이 소설과 드라마의 주인공들이다.
아키야마 형제의 출생지인 마쓰야마는 이 작품들의 영향으로 관광 명소가 되었다.
7. 연보
- 1868년 4월 12일: 에히메현 마쓰야마(伊予松山)에서 이요마쓰야마번 하급 무사 아키야마 히사타카(秋山久敬)의 다섯째 아들로 출생.[9]
- 1883년 9월: 상경하여 시험 준비를 위해 교립학교(현: 가이세이 중학교·고등학교)에서 영어를 배움.
- 1884년 9월: 대학예비문(현: 도쿄대학교 교양학부) 합격.
- 1886년 10월 30일: 해군병학교 입교(17기).
- 1890년
- * 7월 17일: 해군병학교(17기) 수석 졸업. 소위후보생 임명. 해방함 「히에이」 승함.
- * 10월 5일: 「히에이」 승함 중 에르투르르 호 난파 사건 생존자 송환을 위해 오스만 제국으로 출항.
- * 12월 19일: 부친 히사타카(久敬) 사망 (마사유키는 「히에이」 승함 중).
- 1891년
- * 1월 2일: 오스만 제국 수도 이스탄불 도착.
- * 6월 4일: 순양함 「타카치호」 승함으로 이동.
- 1892년
- * 4월 25일: 순양함 「마쓰시마」 항해사가 됨.
- * 5월 23일: 해군 소위 임관. 포술연습함 「류죠」 분대사가 됨.
- 1894년 4월 23일: 통보함 「치쿠시」 항해사가 됨. 청일전쟁 발발 후 동함에 승선하여 정찰 등 후방 지원 활동 참가.
- 1895년 11월 18일: 포함 「오오시마」 항해사 겸 분대사가 됨.
- 1896년
- * 1월 4일: 요코스카의 해군 수뢰술 연습소(해군 수뢰학교) 학생이 됨.
- * 5월 11일: 요코스카 수뢰단 제2수뢰대 부속이 됨.
- * 7월 7일: 보지함 「야에야마」 승함.
- * 10월 24일: 해군 대위 진급, 「야에야마」 분대장이 됨.
- 1897년 6월 26일: 미국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어 유학 시작.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에게 사사하고 미서 전쟁을 관전.
- 1899년 말: 영국 주재 명령 받아 시찰.
- 1900년
- * 8월 14일: 귀국하여 해군성 군무국 제1과원이 됨.
- * 10월 31일: 상비함대 참모로 이동. 기함 「토키와」 승함.
- 1901년 10월 1일: 해군 소좌 진급.
- 1902년 7월 17일: 해군대학교 교관(전술 담당)으로 이동.
- 1903년
- * 6월 2일: 이나오 스에코(稲生季子)와 결혼.
- * 10월 27일: 상비함대 참모 겸 제1함대 참모로 이동.
- 1904년
- * 2월 6일: 러일전쟁 발발 직전, 연합함대 기함 「미카사」에 작전 담당 참모로 승함.
- * 2월 10일: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 뤼순항 공격 및 폐쇄 작전 등 입안.
- * 9월 1일: 해군 중좌 진급.
- 1905년
- * 5월 27일: 쓰시마 해전에서 작전 입안으로 승리에 기여.
- * 6월 14일: 연합함대 참모로 이동.
- * 6월 19일: 모친 사다(貞) 사망.
- * 11월 25일: 연합함대 해산 후 해군대학교 전술교관으로 복귀.
- 1908년
- * 2월 20일: 「미카사」 부장으로 이동.
- * 8월 28일: 순양함 「아키쓰시마」 함장으로 승진.
- * 9월 25일: 해군 대좌 진급.
- * 12월 1일: 순양함 「오토와」 함장으로 이동.
- * 12월 11일: 종5위(従五位) 서임.
- 1909년 12월 1일: 순양함 「하시다테」 함장으로 이동.
- 1910년
- * 4월 9일: 순양함 「이즈모」 함장으로 이동.
- * 12월 1일: 순양함 「이부키」 함장으로 이동.
- 1911년 3월 11일: 제1함대 참모장으로 이동.
- 1912년 12월 1일: 군령부 제1반장 겸 해군대학교 교관으로 이동.
- 1913년 12월 1일: 해군 소장 진급.
- 1914년 4월 17일: 해군성 군무국장 겸 해군장관회의 의원으로 이동. 지멘스 사건 조사위원으로 활동.
- 1916년
- * 2월 21일: 군령부 출사(出仕)로 이동.
- * 3월: 제1차 세계 대전 시찰을 위해 유럽으로 파견. 러시아, 핀란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방문.
- * 10월: 미국 경유 후 귀국.
- * 12월 1일: 제2수뢰전대 사령관으로 이동.
- 1917년
- * 7월 16일: 해군장관회의 의원으로 재임.
- * 12월 1일: 해군 중장 진급. 동시에 대기 발령.
- 1918년 2월 4일: 맹장염 악화로 인한 복막염으로 오다와라의 별장에서 49세의 나이로 사망.
8. 훈장 및 서훈
; 위계
날짜 | 위계 |
---|---|
1892년 7월 5일 | 정팔위[14] |
1896년 12월 21일 | 종칠위[15] |
1898년 3월 8일 | 정칠위[16] |
1901년 12월 17일 | 종육위[17] |
1904년 10월 6일 | 정육위[18] |
1908년 12월 11일 | 종오위[19] |
1914년 1월 30일 | 정오위[20] |
1918년 2월 4일 | 종사위 (사후 추서)[21] |
; 훈장 등
날짜 | 훈장 및 기장 |
---|---|
1895년 11월 18일 | 훈육등단광욱일장[22] |
1905년 5월 30일 | 훈사등수보장 (쓰시마 해전 공로)[23] |
1906년 4월 1일 | 공삼급금치훈장・훈삼등욱일중수장・메이지 37, 38년 종군기장[24] |
1915년 11월 7일 | 훈이등욱일중광장・다이쇼 3, 4년 종군기장[25] |
1918년 2월 4일 | 전승기장[26]・다이쇼 3년 내지 9년 전역 종군기장[27] |
; 외국 훈장 수여 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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