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모토 이소로쿠
1. 개요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으로, 연합함대 사령장관을 역임했으며, 진주만 공격을 계획하고 지휘했다. 1884년 출생하여 일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참전했으며, 해군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후 항공 전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군 항공대 육성에 힘썼으며,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 참여하여 군축 조약에 반대했다. 1939년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취임하여 태평양 전쟁을 지휘했으나,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 이후 과달카날 전투 등을 겪었다. 1943년 부건빌 섬 상공에서 미군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으며, 사후 해군 원수 직위가 추서되었다. 그는 생전에 항공 전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진주만 공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나, 미드웨이 해전 이후의 전략적 실패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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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야마모토 이소로쿠 |
|---|---|
| 출생일 | 1884년 4월 4일 |
| 사망일 | 1943년 4월 18일 |
| 출생지 | 니가타현나가오카시 |
| 사망지 | 솔로몬 제도부건빌섬 인근 |
| 묘지 | 다마 묘지, 도쿄 |
| 로마자 표기 | Yamamoto Isoroku |
| 소속 | 일본 제국 해군 |
|---|---|
| 복무 기간 | 1904년–1943년 |
| 최종 계급 | 원수 해군 대장 (사후 추서) |
| 주요 지휘 | 순양함 이스즈 항공모함 아카기 제1항공전대 해군 항공 본부 제1함대 연합 함대 제1전함전대 |
| 러일 전쟁 | 쓰시마 해전 (부상) |
|---|---|
| 제2차 세계 대전 | 태평양 전쟁 진주만 공격 미드웨이 해전 뉴기니 전역 이호 작전 솔로몬 제도 전역 과달카날 전역 케호 작전 이호 작전 벤전스 작전 (전사) |
| 일본 | 국화장 대훈위 (사후 추서) |
|---|---|
| 독일 | 백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 |
| 모교 | 일본 해군병학교 하버드 대학교 |
|---|
| 배우자 | 미하시 레이코(1918년 결혼) |
|---|---|
| 자녀 | 야마모토 요시마사(장남) |
| 친척 | 다카노 사다키치(아버지) 노무라 사다(숙부) 사이토 마사히사 (해군 군인)(사위) 오카베 도루(사위) |
| 해군 차관 | 일본 해군성 차관 역임 |
|---|
| 묘소 | 다마 묘원 조코지 (나가오카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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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암살된 사람 -
김영달 (역사가)
김영달은 일본에서 활동한 재일 한국인 역사학자이자 인권 운동가로, 창씨개명 및 현대 한국사를 연구하고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활동했으나 2000년 피살당했으며 그의 연구 자료는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 보관되어 있다. -
미카와 야마모토씨 -
야마모토 간스케
야마모토 간스케는 센고쿠 시대의 외눈에 다리를 저는 불구의 몸이었음에도 뛰어난 전략가로 이름을 날린 다케다 신겐의 군사로,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실존 여부에 대한 논쟁 속에서 고문서 발견을 통해 존재를 뒷받침하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
일본의 도박사 -
시미즈노 지로쵸
시미즈노 지로쵸는 일본의 야쿠자 두목이자 사회 운동가로, 야쿠자의 세계에 발을 들여 시미즈 항을 근거지로 세력을 확장하고, 시대 변화 속에서 혁명군 협력, 항구 현대화 기여, 자선 활동 등 긍정적인 면모와 불법 행위, 도박 혐의 등 부정적인 면모를 동시에 보이며 영화 및 드라마의 소재가 되었다.
2. 생애
1914년 해군대학교 갑종 14기로 입학했다. 동기생으로는 아부 기요시, 아리마 히로시 등이 있다. 재학 중이던 1915년, 마키노 다다아쓰의 주선으로 구 나가오카 번 가로 가문인 야마모토가를 상속받았다. 1916년 해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제2함대 참모로 임명되었으나, 부임 직후 장티푸스에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장티푸스 요양 중 맹장염이 악화되어 대수술을 받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후 고향 나가오카에서 1917년 6월경까지 요양했다. 회복 후, 해군성 군무국원을 거쳐 해군교육본부 제1근무가 되었다. 이 무렵, 미하시 레이코와 결혼했다.
1919년 4월 5일부터 1921년 5월 5일까지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 유학했다. 미국 내를 시찰하며 유전, 자동차 산업, 항공 산업과 그 공급망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미국의 대량 생산 및 유통 시스템에 충격을 받았으며, 훗날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참석차 미국에 체류 중 "가능한 한 (가상 적인) 미국의 물자를 사용해 주겠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1921년 귀국 후, 경순양함 기타카미 부장을 거쳐 해군대학교 교관(군정학 담당)으로 전직하였다. 1922년에는 이데 겐지 대장과 함께 유럽·미국을 시찰하였다. 영국 런던 체류 중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인은 위대한 민족이며, 이전보다 훌륭하게 부흥할 것이다"라며 주위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1924년 가스미가우라 해군 항공대 부속이 되고, 12월에 교두 겸 부장으로 보충되었다. 미와 기유에게서 항공기 조종을 배우고, 이후 일본 해군의 항공 발전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시로 에이이치로 대위는 야마모토에 대해 공사 분별, 조종 감각, 적재적소, 정의감이 두텁다고 평가했다. 야마모토는 부장 겸 교두로 직책을 고치고, 군기 풍기를 쇄신하며 탈영자 순찰을 솔선수범했다.
1925년, 일본 최초의 항공모함 호쇼가 완성되자, 야마모토는 우수한 인력 배치보다는 중급자를 활용한 훈련 개선을 주장했다.
1939년 8월 30일, 제26대 연합함대 사령장관(겸 제1함대 사령장관)에 취임했다. 이는 삼국 동맹에 반대하는 야마모토가 암살될 가능성을 우려한 미나이 미쓰마사의 조치였다. 야마모토는 연합함대 사령장관 임관을 거부하고, 요시다 젠고 해군대신 밑에서 차관으로 재임하며 미일 개전을 막고자 했다.
야마모토는 미국과의 전쟁이 무모함을 알면서도 전략을 세우고, 후쿠토메 시게루에게 진주만 공격을 언급했다. 영식 함상 전투기와 일식 육상 공격기 각 1,000기 증산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야마토급 전함 3, 4번함 건조 중단과 이토 세이이치 연합함대 참모장 임명을 통해 항공기 우선 생산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수평폭격 폐지론에 대해서는 "내가 연합함대 사령장관인 한 수평폭격은 폐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940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일본은 독일과의 접근을 강화했고, 해군도 친독 성향을 강화했다. 야마모토는 삼국 동맹에 대해 우려하면서도 "일본이 아시아의 진정한 리더가 되려면 20~30년이 걸린다"고 말했다.
해군성과 군령부 회의에서 삼국 동맹 체결이 결정되자, 야마모토는 오이가와 고시로에게 설득당해 찬성했다. 조약이 미일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지적하며 육상 공격기 배비 수를 2배로 늘릴 것을 요구했다. 호리 테이키치에게 "내전은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지만, 전쟁은 나라를 멸망시킨다"고 말했다. 1940년 9월 27일,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을 맺었다. 야마모토는 하라다 구마오에게 "광기의 소행이다. 나는 기함 나가토 위에서 전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가 미일 전쟁 전망을 묻자 "반드시 하라면 처음 반년이나 1년은 날뛰어 보이겠지만, 2, 3년 후는 확신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노우에 시게미는 이 발언이 고노에에게 오판을 낳게 했다고 비판했다. 야마모토는 시마다 시게타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노에나 마쓰오카 요스케 외상을 신뢰해 해군이 경솔하게 행동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1940년 11월 10일, 기원 2600년 기념행사에 불참했다.
1941년 1월 7일, 오이가와 고시로에게 보낸 서한에서 진주만 공격 구상을 밝히고, 자신을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으로 강등시켜 직접 지휘하고 싶다고 했다. 미나이 미쓰마사를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기대했다.
1941년 1월, 오니시 다키지로에게 편지를 보내 하와이 공격을 연구하게 했다. 겐다 미노루에게 계획안을 만들게 했고, 3월 초 야마모토에게 제출했다. 진주만의 수심 때문에 뇌격이 불가능하면 공습을 포기하려 했으나, 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전함에 대한 수평폭격과 뇌격을 병행하는 안이 되었다.
1941년 1월 24일, 사사카와 료이치에게 "미일 개전 시 목표는 워싱턴, 백악관"이라고 말했다. 4월, 전국 도도부현 장관, 지사들을 기함 "나가토"에 초대해 연설했다. 6월, 자신을 "쇼와의 사가미타로"에 비유하며 독일의 대작전을 칭찬했다. 9월 12일, 고노에에게 다시 미일 전쟁 전망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비행기나 잠수함을 타고 1년에서 1년 반은 날뛰어 보이겠다고 말했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1884년 4월 4일, 니가타현 나가오카시에서 구 나가오카 번의 중급 무사였던 다카노 사다요시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소로쿠'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56세에 낳은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초등학생 시절 "뭐든지 먹지만 연필은 무리겠지"라고 놀리자, 그 자리에서 연필을 먹어 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나가오카 정립 사카노우에 보통소학교, 구제 니가타현립 나가오카 중학교를 졸업했다. 중학생 시절, 10살 위인 조카 다카노 쓰요시(高野力)가 병사했는데, 부모가 "이소로쿠가 쓰요시를 대신하여 훌륭한 무사(군인)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한다.
1901년 해군병학교에 200명 중 2등으로 입교하였다. 동기생으로는 호리 테이키치, 시오자와 코이치, 시마다 시게타로, 요시다 젠고 등이 있다.
러일전쟁 중인 1904년 해군병학교를 졸업(32기)하고 소위 후보생으로 장갑순양함 닛신에 배속되었다. 1905년 쓰시마 해전에 참전하여 왼쪽 검지와 중지를 잃는 부상을 입었다.
1916년 해군대학교를 졸업하고, 구 나가오카 번 가로 야마모토 가문에 입적되어 야마모토 이소로쿠로 개명했다. 이는 아들이 없는 무사 가문이 가문의 이름과 지위, 수입을 잇기 위해 젊은 남성을 입양하는 일반적인 관례였다.
2.2. 해군 장교 시절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거함거포주의가 주류였던 시대에 일찍부터 항공 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는 해군 항공대 육성과 전술 능력 배양에 힘썼으며, 이는 태평양 전쟁에서 항공모함 간 항공전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정착시키는데 기여했다.
1919년, 야마모토는 하버드 대학교에 유학하여 미국의 산업력과 군사력을 직접 경험했다. 1925년에는 주미 일본 대사관 무관으로 다시 미국에 체류하며 미국의 군사력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는 미국 근무 기간 동안 미국 전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미국의 관습과 사업 관행을 연구했다.
귀국 후, 야마모토는 해군 항공 본부 기술부장, 제1항공전대 사령관 등을 역임하며 항공 전력 강화에 힘썼다.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 차석 수행원으로 참가하여 군축 조약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1935년 중장으로 런던 해군 군축 회의에 참가했다.
1936년, 야마모토는 해군 차관에 취임하여 독일, 이탈리아와의 삼국 동맹 체결에 반대했다. 그는 요나이 미쓰마사, 이노우에 시게요시와 함께 해군 내 조약파(좌파) 삼인방으로 불렸다. 당시 일본 육군과 내무성의 합의로 일본 내에서 삼국동맹 찬성과 반(反)영국, 미국 여론이 조직적으로 고조되었다.
2.3. 연합함대 사령장관 시절
1939년 8월 30일,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제26대 연합함대 사령장관(겸 제1함대 사령장관)에 취임했다. 야마모토는 이 인사를 거부하고 요시다 젠고가 해군대신에 내정되었을 때, 그 밑에서 차관으로 재임하며 미일 개전을 막고자 미나이 미쓰마사에게 인사 철회를 강력히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인사는 지휘 능력보다는 삼국 동맹에 반대하는 야마모토가 군부 내 동맹 찬성파와 우익 세력에 의해 암살될 가능성을 우려한 미나이가 그를 해군 중앙에서 일시적으로 멀리하기 위해 단행한 것이었다.
야마모토는 후임 차관 스미야마 토쿠타로에게 "해군 정책은 대신이나 차관이 바뀐다고 변하지 않는다. 스미야마가 와도 마찬가지이며, 그 모범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택에서 기자들 앞에서 술을 마시며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의 각오를 밝혔지만, 이는 본심이 아니었다. 훗날 병학교 동기생 모임에서 "공을 세워 칭찬받더라도 차관 시절의 공적에 비할 바 못 된다"고 말했다.
야마모토는 미국과의 전쟁이 무모함을 알면서도 해군 군인이자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미국을 가상 적국으로 한 전략을 세웠다. 연합함대 참모장 후쿠토메 시게루에게 하와이 기습 작전을 언급하고, 영식 함상 전투기와 일식 육상 공격기 각 1,000기의 증산을 요구했지만 군령부 제1부장 우가키 마토메에게 거부당했다. 후쿠토메에 따르면, 야마토급 전함 3, 4번함 건조를 중단하고 이토 세이이치를 연합함대 참모장, 후쿠토메를 군령부 제1부장으로 하는 인사를 통해 항공기 우선 생산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당시 수평폭격 폐지론이 유력했지만, 야마모토는 "내가 연합함대 사령장관인 한 수평폭격은 폐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초반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일본은 독일과의 접근을 강화했고, 해군도 친독 성향을 강화했다. 야마모토는 삼국 동맹에 대해 우려하면서도 "일본이 아시아의 진정한 리더가 되려면 20~30년이 걸린다"고 말했다.
해군성과 군령부 회의에서 삼국 동맹 체결이 결정되자, 야마모토는 해군대신 오이가와 고시로에게 설득당해 찬성했다. 그는 조약이 미일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지적하며 육상 공격기 배비 수를 2배로 늘릴 것을 요구했다. 그는 호리 테이키치에게 "내전은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지만, 전쟁은 나라를 멸망시킨다. 내전을 피하려 전쟁에 기대는 것은 주객전도"라고 말했다. 1940년 9월 27일,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을 맺었다. 야마모토는 친구 하라다 쿠마오에게 "광기의 소행이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나는 기함 나가토 위에서 전사할 것이고, 도쿄는 여러 번 파괴될 것"이라고 말했다.
삼국 동맹 체결과 일본의 하이난섬 점령,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로 일본과 미국, 영국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가 미일 전쟁 전망을 묻자 야마모토는 "반드시 하라면 처음 반년이나 1년은 날뛰어 보이겠지만, 2, 3년 후는 확신할 수 없다"고 답했다.
이노우에 시게미는 야마모토의 발언이 고노에에게 해군이 1년은 싸울 수 있다는 오판을 낳게 했다고 비판했다. 야마모토는 시마다 시로타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노에가 해군 대신과 차관에게 불평했다고 언급하며, 고노에나 마쓰오카 요스케 외상을 신뢰해 해군이 경솔하게 행동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느꼈다고 했다. 그는 한타마치 에이이치에게 가을에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1940년 11월 10일, 장제스의 중국군으로부터 미야기를 공습받는 것을 막는다는 이유로 기원 2600년 기념행사에 불참했다.
1941년 1월 7일, 야마모토는 오이가와 고시로에게 보낸 서한에서 진주만 공격 구상을 밝히고, 자신을 제1항공함대 사령장관으로 강등시켜 직접 지휘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미나이 미쓰마사를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기대했으며, 기자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 오이가와는 미나이의 연합함대 사령장관 인사에 동의했지만, 이노우에 시게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41년 1월, 야마모토는 제11항공함대 참모장 오니시 다키지로에게 편지를 보내 하와이 공격을 연구하게 했다. 오니시는 제1항공전대 참모 겐다 미노루에게 계획안을 만들게 했고, 3월 초 야마모토에게 제출했다. 야마모토는 진주만의 수심 때문에 뇌격이 불가능하면 공습을 포기하려 했으나, 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전함에 대한 수평폭격과 뇌격을 병행하는 안이 되었다.
(왼쪽부터 우가키 마토메 참모장, 야마모토, 후지이 시게루, 와타나베 안지)
1941년 1월 24일, 야마모토는 사사카와 료이치에게 "미일 개전 시 목표는 괌, 필리핀, 하와이, 샌프란시스코가 아니라 워싱턴, 백악관"이라고 말했다. 4월, 전국 도도부현 장관, 지사들을 기함 "나가토"에 초대해 "수평선 너머 적 함대의 연기가 보이기 전에 섬멸하겠다", "나는 항상 함대 최선두 기함 함교에서 지휘한다"고 연설했다. 6월, 자신을 "쇼와의 사가미타로"에 비유하며 독일의 대작전을 칭찬했다. 9월 12일, 고노에에게 다시 미일 전쟁 전망을 이야기하며, 자신이 비행기나 잠수함을 타고 1년에서 1년 반은 날뛰어 보이겠다고 말했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진주만 공격은 야마모토의 발안으로 알려져 있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을 지휘했다.
1943년 4월 18일, 솔로몬 제도 부건빌섬 시찰 중 라바울에서 출발한 야마모토의 탑승기가 미군 P-38 라이트닝 편대에 격추되어 사망했다. (해군 갑 사건).
2.4. 사망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는 부건빌섬의 일본군 전선을 시찰하기 위해 라바울에서 1식함상 폭격기를 타고 출발했다. 그러나 미군 측이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야마모토를 포함한 승조원들은 알지 못했다.
당시 미군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군의 암호를 모두 해독하고 있었고, 야마모토의 전선 시찰도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 육군 항공대(당시는 공군이 독립하기 전임)는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P-38 라이트닝 전투기로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은 야마모토를 가장 두려워했으며, 암호 해독 사실을 숨기기 위해 시찰 며칠 전부터 P-38 편대를 라바울 상공으로 출격시켰다. 이는 일상적인 전투 초계 활동 중 우연히 야마모토를 격추시킨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작전이었고, 이 작전은 성공했다.
미군 편대는 호위기를 공격할 편대와 야마모토 탑승기를 공격할 공격조로 나뉘어 출격했다. 호위조가 일본군 호위기들과 전투를 벌이는 사이, 공격조는 호위기의 엄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 야마모토의 탑승기에 명중탄을 날렸고, 탑승기는 추락했다. 야마모토의 시신은 일본군이 수습했으며, 기체는 1990년대까지 격추된 장소에 남아 있었다.
일본군은 야마모토 제독의 죽음을 한동안 비밀에 부치고 "해군갑사건(:ja:海軍甲事件)"이라고만 부르다가, 약 한 달 뒤에야 야마모토의 죽음을 공표하고 도쿄에서 성대한 국장을 치렀다. 사후 해군 원수 직위가 추서되었다. 미국도 암호 해독 사실이 드러나 일본군이 암호를 모두 변경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한동안 야마모토 제독의 사살을 공표하지 않았다. 전후 작전에 참가한 미군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누가 야마모토를 격추시켰는가 하는 문제로 법정 공방까지 벌어졌다.
과달카날 해전에서의 패배 이후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야마모토는 남태평양 전역을 시찰하기로 결정했다. 이 시찰 중 미국 당국은 그를 사살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했다. 1943년 4월 14일, "매직(Magic)"이라는 암호명으로 진행된 미국의 해군 정보 활동은 야마모토의 시찰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 도착 및 출발 시간과 장소, 그리고 그를 수송하고 호위할 항공기의 수와 종류 등을 담은 메시지를 가로채 해독했다. 일정표에 따르면 야마모토는 1943년 4월 18일 아침 라바울에서 부겐빌 섬 근처 섬의 발랄레 비행장(Balalae Airfield)으로 비행할 예정이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에게 야마모토를 제거하도록 허가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명령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녹스는 체스터 W. 니미츠 제독에게 결정을 맡겼다. 니미츠는 먼저 남태평양 사령관인 윌리엄 홀시 주니어 제독과 상의한 후 4월 17일 야마모토의 비행을 도중에 요격하고 격추시키는 임무를 승인했다. 충분한 항속거리를 가진 유일한 기종이었던 미국 육군 항공대의 P-38 라이트닝 전투기 편대가 이 임무를 맡았다. 세 개 부대에서 선발된 조종사들에게는 구체적인 이름 없이 "중요한 고위 장교"를 요격한다는 정보만 전달되었다.
4월 18일 아침, 매복을 우려하여 현지 사령관들이 여행 취소를 촉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폭탄을 탑재하지 않은 고속 수송기로 사용된 야마모토의 미쓰비시 G4M 폭격기 2대는 예정대로 라바울을 출발하여 약 507km의 여정을 시작했다. 부겐빌 상공에서 16대의 P-38이 비행대를 요격했고, 그들과 6대의 미쓰비시 A6M 제로 전투기 사이에 공중전이 벌어졌다. 렉스 T. 바버 중위는 두 대의 일본 수송기 중 첫 번째, 즉 야마모토가 탑승한 T1-323기를 공격했다. 그는 항공기가 왼쪽 엔진에서 연기를 내뿜기 시작할 때까지 사격을 계속했다. 바버는 다른 수송기를 공격하기 위해 방향을 돌렸고, 야마모토의 항공기는 정글에 추락했다.
야마모토의 시신과 추락 현장은 다음날 하마스나 츠요시 중위가 이끄는 일본 수색 구조대에 의해 부겐빌 섬 정글에서 발견되었다. 하마스나에 따르면 야마모토는 비행기 잔해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카타나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으며, 나무 아래 의자에 앉은 채 똑바로 서 있었다. 하마스나의 증언에 따르면 야마모토는 마치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어 즉시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부검 결과 야마모토는 왼쪽 어깨 뒤쪽과 아래턱 왼쪽에 약 1.27cm 총탄 두 발을 맞았고, 아래턱에 박힌 총탄이 오른쪽 눈 위로 빠져나왔다. 시신을 검사한 일본 해군 의사는 머리에 입은 상처가 야마모토의 사망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야마모토의 죽음에 대한 더욱 잔혹한 세부 사항은 일본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전기 작가 아가와 히로유키에 따르면, 의료 보고서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변경되었다.
야마모토의 죽음은 일본군의 사기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의 참모들은 파푸아뉴기니의 부인에서 그의 유해를 화장했고, 그의 유골은 그의 마지막 기함이었던 무사시 전함에 실려 도쿄로 돌아왔다. 그는 1943년 6월 5일 국장을 치렀고, 사후에 원수 제독(Gensui)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욱일장(1등급)을 수여받았다. 또한 나치 독일의 철십자 훈장(떡갈잎, 검) 기사십자장을 받았다. 그의 유골 중 일부는 도쿄 다마 묘원(多摩霊園)에, 나머지는 니가타현 나가오카시(長岡市)의 중고지(中興寺) 사찰의 그의 선조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고가 미네이치 제독에 의해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 계승되었다.
3. 평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대함거포주의가 주류였던 시대에 항공 전력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해군 항공대 육성에 힘쓴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미국의 국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도조 히데키를 필두로 한 육군 강경파에 맞서 미일 전쟁에 반대했으나, 전쟁 발발 후에는 진주만 공격을 성공시키는 등 군인으로서의 능력도 인정받았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하버드 대학교에서, 그리고 워싱턴 D.C.에서 두 차례 해군 무관으로 파견되어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게 되면서 미국과의 전쟁에도 반대했다. 미국 근무 기간 동안 미국 전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미국 관습과 사업 관행을 연구했다.
하지만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와 이후 소모전으로 인해 전략가로서의 능력에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부하들을 아끼고 격려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도 보였으며, 바둑, 장기, 당구, 브리지, 마작, 포커 등 다양한 취미를 가졌다. 특히 도박을 즐겨 모나코로 이주하여 자신의 카지노를 시작하겠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4. 기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서예를 즐겼으며, 바둑, 쇼기, 당구, 브리지, 마작, 포커 등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도박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모나코의 카지노에서 출입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 그는 "도박은 1달러라면 1달러를 내고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도박을 하지 않는 남자는 제대로 된 사내가 아니다"와 같은 말을 남기며 도박에 대한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단 음식을 좋아해 양갱(특히 토라야 양갱), 물만두(술만두를 차갑게 식혀 설탕을 뿌린 것), 과일(일본에서는 감, 남쪽 지방에서는 파파야) 등을 즐겨 먹었다. 토라야의 양갱은 부관에게 항상 넉넉히 준비해두도록 지시할 정도로 좋아했다.
다음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취미 및 기호와 관련된 내용을 정리한 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