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산대잡극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본문

산대잡극(山臺雜劇)은 고려 및 조선시대에 걸쳐 국가 행사 등에서 채붕(綵棚)이라는 임시 가설 무대를 설치하고 그 위나 앞에서 펼쳐진 연희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주요 내용:


  • 명칭: 산대잡극은 '산대'라는 무대 구조물 앞에서 연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외에도 백희(百戱), 가무백희(歌舞百戱), 잡희(雜戱), 산대희(山臺戱), 나례(儺禮), 나희(儺戱)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 기원: 삼국시대에 중국과 서역으로부터 유입된 산악백희(散樂百戱)가 그 기원으로, 고려시대에 크게 성행하였습니다.
  • 형태:
  • 봉래산 모양의 산대를 꾸미고, 그 위에서 인형 잡상(雜像)을 설치하여 신선 이야기를 재현했습니다.
  • 처용무, 춤, 노래, 악기 연주, 장대타기, 불꽃놀이, 곡예 등 다양한 종목이 연행되었습니다.
  • 가면을 쓰고 연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 장소: 연등회, 팔관회와 같은 국가적 행사, 왕의 행차나 환궁,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행사 등에서 주로 공연되었습니다.
  • 시대별 특징:
  • 고려시대: 이색(李穡)의 시 <산대잡극>을 통해 당시 산대잡극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팔관회와 연등회에서 채산(彩山) 또는 채붕(彩棚)이라는 무대 구조물을 설치하고 가무백희를 연행했습니다.
  • 조선시대: 나례도감(儺禮都監)이나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산대놀이를 주관했습니다. 18세기 중엽에는 본산대놀이가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725년 이전에는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서 소형 산대 앞에서 대접 돌리기, 물구나무서기, 줄타기와 함께 가면극도 행해졌습니다.
  • 쇠퇴와 영향: 1634년(인조 12) 산대도감이 폐지되면서, 연희자들은 서울 근교 민간에서 공연하며 산대놀이를 이어갔습니다. 이들은 지방 순회공연을 통해 각 지방의 가면극 형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현대적 의의:

  • 오늘날 전승되는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등은 산대놀이의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 탈춤, 죽방울 돌리기, 솟대타기, 풍물, 남사당패의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에서 산대잡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산대잡극
산대잡극
산대잡극
분야무용, 음악, 연극
유형정재, 가무악, 탈춤
연행 시기고려 시대 ~ 조선 시대
특징궁중 연회 및 사대부 연회에서 공연되던 종합 예술
상세 내용
정의산대를 설치하고 여러 종류의 놀이를 섞어 공연하던 잡희
기원고려 시대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
내용정재
가무악
탈춤
연행 장소궁중 연회
사대부 연회
주요 등장인물처용
광대
기녀
전승 현황현재는 전승이 단절됨
역사
고려 시대송나라잡기가 유입되어 산대잡극의 기원이 됨
조선 시대궁중 연회에서 주요 공연으로 자리 잡음
사대부 연회에서도 향유됨
조선 후기서민층에도 확산되어 탈춤 등의 형태로 발전
구성 요소
정재궁중 무용의 일종으로, 다양한 춤사위와 음악으로 구성됨
가무악노래, 춤, 악기 연주가 어우러진 종합 예술
탈춤탈을 쓰고 연기하는 공연으로, 서민들의 생활상과 풍자를 담음
의의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