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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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처용은 879년 신라 헌강왕이 울산 개운포에 행차했을 때 나타나 서라벌까지 따라온 인물이다. 급간 벼슬을 받고 춤과 노래를 하다가 사라졌으며, 처용무, 상염무와 관련된다. 한국 민간 전승과 무속 신앙에서 신으로 숭배받으며, 역신을 물리치는 설화가 전해진다. 호국룡 신앙, 아랍 또는 페르시아인 설, 민중의 영웅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며, 울산 지역을 중심으로 망해사, 처용암 등 유적과 처용문화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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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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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879년 왕이 울산 개운포(현재 울산화학공단과 온산화학공단 사이 외황강 하구 지역)에 행차했을 때, 이상한 생김새와 괴이한 의복을 입고 용왕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처용[2]이 왕 앞에 나타나 노래하고 춤추며 왕을 따라 서라벌까지 왔다.[1] 처용은 급간이라는 벼슬을 받고 달밤이면 나가 춤추고 노래하다가 마침내는 그 행방을 감추었다.[1] 《악부(樂府)》에 그의 춤이 “처용무”(處容舞) 또는 “상염무”(想髥舞)라고 전해지고 있다.[1][3] 1505년 조선 연산군 때는 내관 김처선이 처형당한 것을 연유로 공문서를 비롯한 모든 문서에서 “처(處)”자 사용을 엄금하여 이때는 처용을 '''풍두'''(豊頭)라고 하였다.[1]
처용은 한국 민간 전승과 무속 신앙에서 하나의 신으로 숭배한다.
처용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3. 처용 설화
전설에 따르면, 처용이 외부에 출타 중인 사이 역신(疫神: 질병을 전파하는 신)이 처용 아내와 동침하였다.[3] 처용은 이를 발견하였으나 분노하지 않고 향가인 〈처용가〉를 노래 부르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3] 그 인품에 감격한 역신은 처용이 있는 곳에 다시 나타나지 않겠다고 약조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고려 시대 이후 새해 초나 질병이 돌 때 문 앞에 처용 얼굴을 한 그림을 붙이면 질병이 전파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4. 해석
=== 호국룡 신앙 ===
불교 학자 고익진은 자신의 저서 《한국 고대불교 사상사》에서 처용 관련 내용이 신라 상대 말기와 중대 초기의 초전기 불교의 건전한 호국룡(護國龍) 신앙이 신라 하대에 타락하고 무속화하였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하였다.[4]
=== 아랍, 페르시아인 ===
처용을 아랍, 페르시아인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처용 설화의 배경인 울산 개운포가 통일 신라 시대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던 곳이며, 많은 아라비아 사람들이 개운포에 와서 신라와 국제 무역을 하였다고 주장한다.[5] 이들은 2010년 발견된 쿠쉬나메 내용을 주장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과 쿠쉬나메의 내용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에 알려져 있지 않던 쿠쉬나메 자료는 한양대 이희수 교수에 의해 확인됐다.[5] 2005년 당시 국무총리 이해찬이 오만을 방문했을 때 오만 문화부 장관은 처용을 오만 사람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5]
4. 1. 호국룡 신앙
불교 학자 고익진은 자신의 저서 《한국 고대불교 사상사》에서 처용 관련 내용이 신라 상대 말기와 중대 초기의 초전기 불교의 건전한 호국룡(護國龍) 신앙이 신라 하대에 타락하고 무속화하였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하였다.[4]
4. 2. 아랍, 페르시아인
처용을 아랍, 페르시아인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처용 설화의 배경인 울산 개운포가 통일 신라 시대 무역항으로 번성하였던 곳이며, 많은 아라비아 사람들이 개운포에 와서 신라와 국제 무역을 하였다고 주장한다.[5] 이들은 2010년 발견된 쿠쉬나메 내용을 주장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쿠쉬나메는 7세기 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후의 시대적, 정치적 상황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는 아랍권의 서사시이다. 쿠쉬나메의 내용에 따르면, 사산조 페르시아 멸망 후 페르시아 유민들은 중국, 신라로 망명하게 된다. 삼국유사에는 “개운포에서 자욱한 안개와 함께 헌강왕 앞에 나타난 자들이 동해 용왕과 일곱 아들이고 그 가운데 막내를 경주에 데려와 벼슬을 주고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도록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쿠쉬나메에서 아비틴이 페르시아 유민들과 함께 “신라로 기항해 항구에서 신라왕 타이후르의 아들 가람의 영접을 받았으며, 왕정을 보좌하고 왕과의 돈독한 사이를 유지! 신라의 공주 프라랑과 결혼한다”라는 내용과 유사하다. 그 동안 한국에 알려져 있지 않던 쿠쉬나메 자료는 한양대 이희수 교수에 의해 확인됐다.[5] 부적 모양을 보면 외국 사람처럼 생겼는데, 오만 문화부 장관은 '''처용'''을 '''오만'''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2005년 당시 국무총리 이해찬이 오만을 방문했을 때 오만 문화부 장관의 인삿말에서 나온 주장이다.
5. 처용과 관련된 유적 및 흔적
참조
[1]
백과사전
처용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
문서
처용의 기원에 대한 학계의 추측
[3]
백과사전
처용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4]
서적
한국 고대 불교 사상사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9
[5]
뉴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페르시아 왕자, 신라공주와 혼인했었다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1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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