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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에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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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자에몬 사건은 1199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망 후 권력 교체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기반이 약했던 시기, 교토에서 정변에 대한 불안감 속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은 요리토모의 매형인 이치조 요시야스의 심복들이 교토의 권세가 쓰치미카도 미치치카를 제거하려 한 시도로, 막부는 사태 진정에 힘썼고, 고토바 천황은 관련자들을 사면했다. 이 사건으로 이치조 가문은 황실에 충성하게 되었으며, 권력 교체기의 혼란 속에서 기득권 세력과 신진 세력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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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자에몬 사건
사건 개요
사건명산자에몬 사건 (三左衛門事件)
발생 시기겐로쿠 15년 (1702년)
발생 장소미마사카국 오카야마번
관련 인물이나바 마사미치
쓰다 산자에몬
오카다 모토스케
오카다 시치로자에몬
다카야마 곤베에
배경
오카야마 번 내부 갈등겐로쿠 10년 (1697년), 이나바 마사미치가 미노국 아오야마 번에서 미마사카국 오카야마 번으로 이봉된 후 번 내부의 갈등 심화
가로 직무 대행 임명겐로쿠 13년 (1700년), 이나바 마사미치가 병으로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자, 쓰다 산자에몬, 오카다 모토스케, 다카야마 곤베에를 가로 직무 대행으로 임명
가로 파벌 형성가로 직무 대행 임명 후, 쓰다 산자에몬과 오카다 모토스케 사이에 파벌 형성 및 대립 심화
사건 발생
겐로쿠 15년 (1702년) 3월 1일오카다 모토스케가 쓰다 산자에몬과 다카야마 곤베에를 탄핵하는 내용의 봉서를 이나바 마사미치에게 제출
겐로쿠 15년 (1702년) 3월 2일쓰다 산자에몬이 오카다 모토스케를 살해
오카다 모토스케의 아들오카다 시치로자에몬이 쓰다 산자에몬을 살해
추가 처벌다카야마 곤베에는 유배, 오카다 시치로자에몬은 할복
영향
번 정치 혼란 심화사건 이후 오카야마 번의 정치가 더욱 혼란해짐
가문 단절쓰다 산자에몬의 가문은 단절됨
같이 보기

2. 사건의 경과

이 사건의 경과는 주로 주나곤(中納言) 후지와라노 사다이에(藤原定家)의 일기인 『명월기』(明月記)의 기록을 따른다.[16][1]

1199년 1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위독 소식이 교토에 전해지자[16][1] 정국 불안 속에서 쓰치미카도 미치치카는 자신의 관위를 높이고 요리토모의 아들 요리이에에게 관직을 주는 등 권력 장악을 시도했다. 곧이어 교토에는 정변 소문이 퍼지며[18][3] 긴장이 고조되었고, 미치치카는 신변 위협을 느껴 외출을 삼가는 등[19][2] 경계 태세가 강화되었다[20].

2월 11일, 사마노카미(左馬頭) 미나모토노 다카야스(源隆保)의 모반 혐의가 고변되었고, 가마쿠라 막부가 미치치카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1] 관련자들에 대한 체포와 조사가 시작되었다. 고토 모토키요(後藤基清), 나카하라 마사쓰네(中原政経), 오노 요시시게(小野義成) 등 3명의 사에몬노조(左衛門尉)가 체포되었고[1], 이후 사이온지 긴쓰네(西園寺公経), 시묘인 야스이에(持明院保家), 미나모토노 다카야스, 승려 분가쿠(文覚) 등도 처벌 대상이 되었다[21].

2월 26일, 막부 중신 나카하라 지카요시(中原親能)가 교토로 파견되어 사태를 수습했다[22][4]. 체포된 사에몬노조 3명은 막부의 인도 거부로 교토로 송환되었으며, 모토키요는 사누키국 슈고직 해임, 긴쓰네와 야스이에는 칩거, 다카야스는 토사국 유배, 분가쿠는 사도국 유배 등의 처벌을 받았다.

처벌 대상자들은 분가쿠를 제외하면 대부분 요리토모의 매제이자 전 교토 슈고였던 이치조 요시야스(一条能保, 사건 2년 전 사망)와 관련된 인물들이었다[5]. 『어관초』에 따르면, 요시야스와 요리토모의 연이은 죽음으로 가문의 위상이 약화될 것을 우려한 이치조 가문 측근들이 미치치카를 제거하여 새 쇼군 요리이에에게 공을 세우려 한 것이 사건의 배경으로 추정된다[6].

막부는 오에노 히로모토 등을 중심으로 사태 진정을 도모했고[7], 미치치카는 막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공고히 했다[7][24]. 고토바 상황의 개입으로 관련자들에 대한 사면이 비교적 빠르게 이루어졌고, 유배자들도 미치치카 사후 복권되었다[8][25]. 위기에 몰렸던 이치조 가문 역시 고토바 상황에 의해 복권되어, 요시야스의 아들 노부요시(信能)와 요시야스의 장남 다카요시(高能)의 아들 요리우지(頼氏) 등이 상황의 측근으로 등용되면서 황실에 충성하는 가문으로 변화하였다.

2. 1. 요리토모의 낙마와 교토의 혼란

1199년 1월 11일,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낙마 사고를 당해 위독하다는 소식이 일주일 뒤인 18일 교토에 전해졌다.[16][1] 당시 막부의 기반은 아직 견고하지 못했고, 수도 교토에서는 차기 권력 구도에 대한 관심과 함께 정변 발생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이 감돌았다.[17]

이러한 혼란 속에서, 전년에 외손자인 쓰치미카도 천황을 옹립하며 권력을 장악했던 쓰치미카도 미치치카(土御門通親)는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요리토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이틀 뒤인 1월 20일(일부 기록에는 요리토모가 사망한 날로 기록됨), 임시 회의를 열어 스스로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将)에 오르고, 자신의 기존 관직이었던 좌중장(左中将) 자리는 요리토모의 장남 요리이에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정국은 안정되지 못했다. 22일부터 교토에는 "병력 이동 징후가 있다"[18], "교토에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3]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퍼지며 크고 작은 소동이 끊이지 않았다. 상황이 악화되자 미치치카는 "지금 밖에 나가면 살해될지도 모른다"[19][2]며 주민들의 외출을 금지시키는 등 사실상의 계엄령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 궁궐 경비 역시 "군진을 친 것처럼 하라"[20]는 명이 내려질 정도로 삼엄해졌다.

이러한 긴장 상태 속에서 2월 11일, 사마노카미(左馬頭) 미나모토노 다카야스(源隆保)가 자택에 무사들을 모아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다음 날인 12일에는 가마쿠라에서 막부의 사자가 도착하여 막부가 미치치카를 지지한다는 방침을 전달한 것으로 보이며, 이 소식이 알려지자 "드디어 우대장 미치치카가 나선다. 살생부에 이름이 오른 자가 많다더라"는 소문까지 돌며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2월 14일, 고토 모토키요(後藤基清), 나카하라 마사쓰네(中原政経), 오노 요시시게(小野義成) 등 세 명의 사에몬노조(左衛門尉)가 요리이에의 명을 받은 수사관들에게 체포되어 황궁 감옥으로 연행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사건 관련자로 지목된 인물들에 대한 체포와 조사가 본격화되었다. 17일에는 사이온지 긴쓰네(西園寺公経), 시묘인 야스이에(持明院保家), 미나모토노 다카야스가 관직을 박탈당했고, 요리토모와 가까웠던 고승 분가쿠(文覚)마저 검비위사(検非違使)[21]에 넘겨졌다.

혼란이 극에 달하자 가마쿠라 막부는 2월 26일, 중신 나카하라 지카요시(中原親能)를 교토로 보내 사건 수습에 나섰다. 지카요시의 개입으로 교토는 일단 표면적인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22][4]

(주: 이 섹션의 내용은 주로 후지와라노 사다이에(藤原定家)의 일기 『명월기』(明月記) 기록에 기반함)

2. 2. 모반 혐의와 체포

1199년 2월 11일, 사마노카미(左馬頭) 미나모토노 다카야스가 자택에 무사들을 모아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변이 들어왔다.[20][1] 당시 교토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망 이후 정세가 불안했으며, 쓰치미카도 미치치카가 권력을 장악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다음 날인 12일에는 가마쿠라 막부가 미치치카를 지지한다는 방침이 교토에 전해진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마침내 우대장(쓰치미카도 미치치카)가 나선다. 살생부에 적힌 사람이 많다더라'는 소문까지 돌며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결국 2월 14일,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측근들에 의해 고토 모토키요, 나카하라 마사쓰네, 오노 요시시게 등 3명의 사에몬노조(左衛門尉)들이 체포되어 황궁 감옥으로 연행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추궁과 고문이 시작되었다.

17일에는 사이온지 긴쓰네와 시묘인 야스이에, 그리고 모반 혐의의 당사자인 미나모토노 다카야스 등이 관직을 박탈당하거나 출사가 정지되었다. 또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귀의를 받았던 고승 분가쿠는 게비이시에게 신병이 인도되었다.[21]

26일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중신 나카하라 지카요시가 교토로 상경하여 사건의 뒷처리를 맡으면서, 교토는 일단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22][4]

2. 3. 가마쿠라 막부의 개입과 사건의 진정

1199년 2월 26일, 가마쿠라 막부의 중신 나카하라 지카요시(中原親能|나카하라 지카요시일본어)가 교토로 상경하여 사건의 뒷처리를 맡으면서 혼란스러웠던 교토는 일단 평정을 되찾았다[22][4].

앞서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수사관들에게 체포되었던 고토 모토키요(後藤基清|고토 모토키요일본어), 나카하라 마사쓰구(中原政経|나카하라 마사쓰구일본어), 오노 요시나리(小野義成|오노 요시나리일본어) 3명의 사에몬노조(左衛門尉)들은 가마쿠라로 호송되었으나, 막부는 이들의 신병 인도를 거부하여 다시 교토로 돌려보내졌다. 이후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졌다.

인물처벌 내용
고토 모토키요(後藤基清|고토 모토키요일본어)사누키국 슈고직 해임
나카하라 마사쓰구(中原政経|나카하라 마사쓰구일본어)처분 불명확
오노 요시나리(小野義成|오노 요시나리일본어)처분 불명확
사이온지 긴쓰네(西園寺公経|사이온지 긴쓰네일본어)관직 삭탈[21], 칩거
지묘인 야스이에(持明院保家|지묘인 야스이에일본어)관직 삭탈[21], 칩거
미나모토노 다카야스(源隆保|미나모토노 다카야스일본어)관직 삭탈[21], 토사국 유배
분가쿠(文覚|분가쿠일본어)게비이시(検非違使|게비이시일본어) 인도[21]사도국 유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의 권력 교체기에 발생한 이 사건의 파문을 진정시키기 위해, 막부는 오에노 히로모토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7]. 결과적으로 막부의 지지를 얻은 미치치카는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세력을 일소하고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 성공했다[7][24].

3. 사건의 배경과 관련 인물

1199년 1월 11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낙마 사고로 위중하다는 소식이 18일 교토에 전해지자[16], 아직 기반이 약했던 가마쿠라 막부의 후계 구도를 둘러싼 불안감과 함께 정변 발생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수도를 뒤덮었다[17].

요리토모 사망 소식이 전해진 1월 20일, 전년에 외손자인 쓰치미카도 천황을 옹립하며 권력을 잡았던 쓰치미카도 미치치카는 임시 회의를 열어 스스로 우근위대장에 오르고, 자신의 이전 관직인 좌중장(左中将)은 요리토모의 장남 요리이에에게 넘겨주며 권력 공백을 빠르게 메우려 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22일부터 교토에는 '병력 이동 징후가 있다'[18]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퍼지며 혼란이 가중되었다. 미치치카는 '밖에 나가면 살해될 것'[19]이라며 주민 외출을 통제하고, 궁궐 경비를 강화하는[20] 등 사실상의 계엄령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가마쿠라에서 막부 무사들이 도착하여 미치치카 지지를 선언하고 경비에 나섰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미치치카가 움직인다. 살생부에 오른 이가 많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러한 혼란은 단순히 요리토모 사후의 권력 공백 때문만이 아니라, 교토 조정 내 쓰치미카도 미치치카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이에 반발하는 세력, 그리고 가마쿠라 막부와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증폭되었다. 특히 요리토모 및 그의 매형이자 교토 슈고였던 이치조 요시야스의 죽음으로 정치적 입지가 불안정해진 세력들의 움직임과[6], 고토바 상황을 중심으로 한 황실의 견제 심리[25] 등이 사건의 주요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교토의 정세가 극도로 불안정한 가운데, 2월 11일 사마노카미(左馬頭) 미나모토노 다카야스가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이 들어오면서[3], 잠재되어 있던 갈등이 본격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3. 1. 이치조 가문과 미치치카 습격 미수

고토바 천황


체포된 고토 모토키요, 나카하라 마사쓰네, 오노 요시시게 등 3명의 사에몬노조는 이치조 요시야스의 심복들이었다. 요시야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매형이자 교토 슈고로서 가마쿠라 막부와 교토 조정 사이의 교섭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요시야스는 사건 발생 2년 전에 이미 병사하였고[6], 그의 후원자였던 요리토모마저 사망하면서 요리토모의 비호 아래 성장했던 이치조 가문은 막부와의 연결고리가 약해져 가문의 장래가 불투명해졌다. 『어관초』에 의하면,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치조 가문의 무사들이 당시 교토의 실권자였던 쓰치미카도 미치치카를 제거하여 새로운 쇼군이 될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에게 공을 세우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6].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인물 중 승려 분가쿠를 제외하면, 사이온지 긴쓰네는 요시야스의 사위였고, 지묘인 야스이에는 요시야스의 종형제이자 양자였으며, 미나모토노 다카야스는 요시야스의 발탁으로 사마노카미(左馬頭)에 임명된 인물[5]로, 모두 이치조 요시야스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23].

3. 2. 모리사다 친왕 옹립 구상

사건 발생 1년 전인 건구 9년(1198년) 정월, 미나모토노 미치치카는 외손인 쓰치미카도 천황의 즉위를 강행했다. 그러나 『교쿠요』 건구 9년 정월 6일, 7일 조 기록에는 새로운 천황 후보로 고토바 상황의 형인 니노미야(모리사다 친왕)와 산노미야(유이묘 친왕)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며, 막부 측에서는 어린 군주의 즉위에 난색을 표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엔쿄본 헤이케 이야기』에는 승려 분가쿠가 모리사다 친왕 옹립을 꾀하여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청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는 기술이 있다.

역사학자 카와치 요시스케는 요리토모가 지묘인가와 이치조가를 통해 모리사다 친왕 옹립을 지지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9] 이 관점에서 보면, 산자에몬 사건은 미치치카에 대한 모리사다 친왕 측근 세력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며, 요리토모 사후 막부 수뇌부가 고토바 상황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모리사다 친왕 측의 지묘인가, 이치조가, 분가쿠 등을 제거하려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에는 반론도 존재한다. 『교쿠요』나 『구칸쇼』에는 요리토모가 모리사다 친왕을 지지했다는 명확한 기록이 없으며, 요리토모가 황위 계승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정황이 뚜렷하지 않다는 점이 지적된다.[10] 또한 이치조가는 모리사다 친왕과 직접적인 관계가 깊지 않았고, 오히려 고토바 상황에 가까운 입장이었다는 점[11] 등을 고려할 때, 설령 모리사다 친왕 옹립 구상이 있었다 하더라도 요리토모나 이치조가가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12]

한편, 모리사다 친왕 옹립 구상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견해도 있다. 모리사다 친왕의 외척으로서 즉위 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이치조가나 지묘인가보다 분가쿠가 더 엄한 처벌을 받은 점, 분가쿠의 권진 사업으로 기부되었던 진고지 영지가 사건 후 고토바 상황에게 몰수되었다가 조큐의 난 이후 상황이 유배되자 막부를 통해 그 영지를 돌려받은 고타카쿠라인(모리사다 친왕)이 즉시 조카쿠(분가쿠의 제자)에게 반환한 점 등을 근거로 든다.[13]

이 문제의 배경에는 다카쿠라 천황의 네 황자가 사건 당시 아무도 출가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단노우라 전투에서 사망한 안토쿠 천황을 포함한 네 황자 모두 승려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는 주에이 2년(1183년) 헤이케가 교토를 떠날 때, 안토쿠 천황(당시 6세)과 니노미야(모리사다 친왕, 5세)는 데려갔지만, 산노미야(유이묘 친왕, 5세)와 시노미야(다카나리 친왕, 4세)는 데려가지 못한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교토에 남겨진 다카나리 친왕이 고시라카와 법황의 뜻에 따라 고토바 천황으로 즉위했지만, 서쪽으로 간 안토쿠 천황과 교토의 고토바 천황 모두 어렸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니노미야(모리사다)와 산노미야(유이묘)가 다음 황위 계승 후보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14]

2년 후 안토쿠 천황이 사망하고 니노미야(모리사다)가 교토로 송환된 뒤에도, 고토바 천황이 자식을 낳기까지 시간이 걸렸으므로 니노미야와 산노미야는 출가하지 않고 남게 되었다. 니노미야는 조사이몬인의, 산노미야는 시치조인의 유자(猶子, 양자와 비슷한 관계)로 정해졌고, 분지 5년(1189년) 11월에는 두 사람 모두에게 친왕 선하가 이루어졌다. 고토바 천황의 후궁에서는 건큐 6년(1195년)에 후일 쓰치미카도 천황이 되는 다메히토 친왕이 태어났고, 이후 4년간 준토쿠 천황이 되는 모리나리 친왕을 포함한 여러 황자가 태어났지만 모두 어렸다. 이 때문에 고토바 천황의 두 형, 즉 모리사다 친왕과 유이묘 친왕을 출가시켜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게 하는 최종 조치가 미뤄지고 있었다. 고토바 상황의 원정에 불만을 품은 세력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모리사다 친왕을 옹립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사건 이후에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두 친왕의 출가는 계속 미뤄졌다. 고토바 상황이 준토쿠 천황을 차기 치천의 군으로 확정하고 자신의 장남인 쓰치미카도 천황의 자손마저 황위 계승에서 배제하려는 방침을 보인 후인 조겐 5년(겐랴쿠 원년, 1211년) 2월에야 유이묘 친왕이 출가했고, 이듬해인 겐랴쿠 2년(1212년) 3월에는 모리사다 친왕이 출가하게 된다.[15]

4. 사건의 영향과 역사적 의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발생한 산자에몬 사건은 교토 정국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미나모토노 미치치카 암살 시도 소문과 관련자 처벌 등으로 일시적인 불안정이 있었으나[3], 결과적으로는 여러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 속에서 복잡한 영향을 미쳤다.

가마쿠라 막부요리이에로의 안정적인 권력 승계를 위해 개입하여 사태 수습에 나섰고[7], 이 과정에서 미치치카와 협력하여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7]. 한편, 고토바 상황은 막부와 미치치카를 견제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사건 관련자들을 조기에 사면하는 조치를 취했다[8]. 이로 인해 유배되었던 미나모토노 타카야스나 승려 분가쿠 등이 복권되었다[8].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이치조 가문은 이 사건을 계기로 큰 변화를 맞았다. 요리토모와 야스노 부자의 사망으로 정치적 기반을 잃고 위기에 처했으나[6], 고토바 상황의 개입으로 노부요시, 요리우지 등이 원 근신(院近臣)으로 발탁되면서 재기할 수 있었다[8]. 이후 이치조 가문은 막부 중심 노선에서 벗어나 황실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변모했다[8].

결론적으로 산자에몬 사건은 요리토모 사후 권력 공백기에 발생한 정치적 혼란이었지만, 막부의 권력 안정화, 미치치카의 세력 강화, 고토바 상황의 영향력 확대, 이치조 가문의 정치적 노선 변경 등 다양한 결과를 가져온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4. 1. 권력 승계의 원활화와 불만 세력 제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권력 교체기에 발생한 이 사건은 정치적 동요를 일으켰으나, 가마쿠라 막부요리이에로의 원만한 권력 이행을 위해 중신 오에노 히로모토를 중심으로 사태 수습에 주력했다[7]. 이 과정에서 이치조 가문 세력의 제거 대상이 되었던 미치치카는 막부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였고, 결과적으로 산자에몬 사건을 통해 자신에게 반대하는 불만 세력을 효과적으로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24][7].

4. 2. 고토바 상황의 권력 강화와 관련자 사면

고토바 상황은 미치치카와 막부를 견제하려는 의도에서[25]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사면을 비교적 이른 시기에 단행했다[8]. 이에 따라 유배되었던 다카야스와 승려 분가쿠는 미치치카가 사망한 후에 복권되어 교토로 돌아올 수 있었다[25][8].

또한, 사건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던 이치조 가문 역시 고토바 상황에 의해 복권되었다. 요시야스의 아들인 노부요시와 요시야스의 손자 요리우지 등이 상황의 측근(원 근신)으로 발탁되면서[25][8] 이치조 가문은 다시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이치조 가문은 기존의 막부 중심 입장에서 벗어나 황실에 충성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변경하였다[25]. 이후 이치조 가문은 보몬가나 타카쿠라가 등과 함께 고토바 상황의 정치 활동을 지지하는 주요 세력 중 하나가 되었다[8].

4. 3. 이치조 가문의 몰락과 황실 충성

이치조 요시야스(一条能保)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매형이자 교토 슈고로서 가마쿠라 막부와 교토 조정 사이의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했으나, 사건 발생 2년 전 병사했다. 1199년 요리토모마저 사망하자 이치조 가문은 막부와의 주요 후원자와 연결고리를 모두 잃고 가문의 장래가 불투명해지는 위기에 처했다[23][6]. 이러한 위기감 속에서 이치조 가문의 무사들이 교토의 권력자 쓰치미카도 미치치카(土御門通親)를 제거하여 새 쇼군 요리이에에게 공을 세우려 했던 것이 산자에몬 사건의 배경으로 여겨진다[6][23].

사건 이후 관련자들이 처벌받으면서 이치조 가문은 궁핍한 상태에 놓였다[25][8]. 그러나 막부와 쓰치미카도 미치치카를 견제하려 했던 고토바 상황에 의해 상황은 반전되었다. 고토바 상황은 사건 관계자들에 대한 사면령을 내렸고, 이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던 이치조 가문 역시 복권되었다[25][8]. 사망한 요시야스의 아들 노부요시(信能)와 요시야스의 장남 다카요시의 아들인 요리우지(頼氏) 등이 고토바 상황의 측근(院近臣)으로 등용되었다[25][8].

이를 계기로 이치조 가문은 기존의 가마쿠라 막부 중심 노선에서 벗어나 황실에 충성하는 가문으로 변모하게 되었고, 보몬가・타카쿠라가와 함께 고토바 상황의 원정(院政)을 지지하는 세력의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25][8].

4. 4. 한국사적 관점에서의 의의

정지 원년(1199년) 1월, 막부의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교토에 전해지면서 정세는 급격히 불안정해졌다.[1] 당시 외손자인 쓰치미카도 천황을 옹립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미나모토노 미치치카는 임시 제수(除授)를 서둘러 단행하여, 자신의 우근위대장 임명과 요리토모의 아들 요리에의 좌중장 승진 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직후 교토에는 "원중(院中, 상황 측)이 몰락하고, 위(上, 천황/막부)에 변고가 있어 병혁(兵革, 전쟁)의 의심이 있다", "교토 소동"과 같은 소문이 퍼지며 긴장이 고조되었고, 미치치카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지금 밖에 나가면 살해당할지도 모른다"[2]며 원 어소(院御所)에 틀어박히는 사태가 되었다.[3]

교토가 "원중 경고 군진과 같다"고 할 정도로 삼엄한 경계 태세에 들어간 가운데, 2월 11일 좌마두(左馬頭) 미나모토노 타카야스가 자택에 무사를 모아 모의를 꾸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2일에는 가마쿠라에서 온 급사가 막부가 미치치카를 지지한다는 방침을 전했고, "우대장(미치치카)이 위세를 떨칠 것이며, 손해 보고 망할 자들이 많을 것이다"라는 정보가 흘러나왔다. 곧이어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추궁이 시작되었다. 14일에는 고토 모토키요, 나카하라 마사쓰구, 오노 요시나리 3명이 요리에의 잡색(雑色)에게 붙잡혀 원 어소로 연행되었고, 17일에는 사이온지 킨츠네, 지묘인 야스이에, 미나모토노 타카야스가 출사 정지 처분을 받았으며, 요리토모의 신망이 두터웠던 승려 분가쿠 역시 검비위사(検非違使)에 신병이 인도되었다. 26일, 가마쿠라에서 파견된 나카하라 치카요시가 사건을 처리하면서 교토는 안정을 되찾았다.[4]

모토키요 등 세 사람은 가마쿠라로 보내졌으나, 막부가 신병 인수를 거부하여 교토로 돌려보내졌다. 모토키요는 사누키 수호(守護) 직에서 해임되었으나, 다른 두 명의 처분은 명확하지 않다. 킨츠네와 야스이에는 칩거하게 되었고, 타카야스는 토사, 분가쿠는 사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헤이케 이야기』는 분가쿠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던 로쿠다이 고젠(다이라노 고레모리의 아들)도 이때 처형되었다고 전하지만, 이는 사실 여부에 의문이 제기된다. 처벌받은 인물들은 대부분 요리토모의 매제이자 교토 슈고였던 이치조 야스노(2년 전 사망)와 관련된 인물들이었다. 킨츠네는 야스노의 사위, 야스이에는 야스노의 종형제이자 양자, 타카야스는 야스노에 의해 발탁된 인물이었고, 모토키요 등은 야스노의 낭당(郎党)이었다.[5]구칸쇼』에 따르면, 야스노와 그의 아들 타카야스가 잇따라 사망하고 최대 후원자였던 요리토모마저 잃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이치조 가문의 가신들이 세력 만회를 위해 미치치카 습격을 계획한 것으로 설명한다.[6]

요리토모의 죽음으로 촉발된 이 사건은 정치적 동요를 일으켰으나, 요리토모에서 요리에로의 순조로운 권력 이양을 원했던 막부는 오에노 히로모토를 중심으로 사태를 수습했다. 미치치카는 막부의 협조를 얻어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7]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사면은 고토바 상황의 의향에 따라 비교적 일찍 이루어졌으며, 유배되었던 타카야스와 분가쿠도 미치치카 사후 교토로 돌아왔다.[8] 한때 어려움을 겪었던 이치조 가문 역시 야스노의 아들 노부요시, 타카야스의 아들 요리우지 등이 원 근신(院近臣)으로 발탁되면서 안정을 되찾고, 이후 보몬 가문, 타카쿠라 가문과 함께 고토바 상황의 원정(院政)을 지원하는 세력이 된다.

참조

[1] 문서 怖畏逼迫の世か 明月記
[1] 문서 天下閑かならず 猪隈関白記
[2] 문서 只今マカリ出デバ殺サレ候ナンズ 愚管抄
[3] 문서 梶原景季가 襲撃の情報を通親に伝えた 愚管抄
[4] 문서 親能は頼朝次女・三幡の乳父
[5] 문서 隆保は村上源氏の傍流であるが母は熱田大宮司・藤原季範の娘であり、頼朝や坊門姫 (一条能保室)|坊門姫の従兄弟にあたる。
[6] 문서 其比不可思議ノ風聞アリキ。能保入道、高能卿ナドガ跡ノタメニムゲニアシカリケレバ
[7] 문서 大江広元が通親の「方人」(味方)であった 愚管抄 1191
[8] 문서 文覚は帰京してわずか1か月後に、今度は対馬国|対馬に配流されている 延慶本平家物語
[9] 문서 守貞親王は高倉天皇の第2皇子で、第4皇子の後鳥羽天皇の同母兄にあたる
[10] 문서 頼朝モ手ニアマリタル事カナトモヤ思ヒケン 愚管抄
[11] 문서 能保の娘・保子(花山院忠経の妻、母は坊門姫)は後鳥羽天皇の乳母、能保の後妻・信子(能円の娘、源在子|承明門院在子の姉妹)は土御門天皇の乳母である。
[12] 간행물 三左衛門事件と一条家
[13] 간행물 嘉禄~寛喜年間の神護寺復興事業と後高倉王家
[14] 문서 惟明親王は母親の身分が低かったとされているが、実際には守貞や尊成と同様の院近臣層を母に持つ
[15] 간행물 鎌倉期王家における皇統の断絶と在俗皇子
[16] 문서 1월 13일의 요리토모 서거 사실이 일주일 후인 20일 교토에 전해졌다고 하니 당시 가마쿠라 시대에 교토, 가마쿠라 간 연락망은 일주일의 시차를 갖고 있었다고 짐작되고 있다.
[17] 문서 공포핍박의 세상인가 明月記
[17] 문서 천하는 편할 틈이 없고 猪隈関白記(이노쿠마 캄파쿠기)
[18] 문서 院中物忩、上の辺り兵革の疑いあり
[19] 문서 只今マカリ出デバ殺サレ候ナンズ 愚管抄
[20] 문서 院中警固軍陣の如し
[21] 문서 검비위사(検非違使)
[22] 문서 나카하라노 지카요시는 요리토모의 차녀인 '산벤(三幡)'의 유부(乳父)이면서 산벤을 황실에 시집보내는 일에 대해 논의할 임무도 맡았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황실과의 혼사는 그 해 6월 산벤이 병사하면서 좌절된다.
[23] 문서 긴쓰네는 다카야스의 사위, 다카야스는 요시야스의 사촌이었고, 타카야스는 무라카미 겐지의 방계이나 모친이 아쓰다 신궁의 궁사인 후지와라노 스에노리(藤原季範)의 딸이었고, 요리토모의 사촌이었다.
[24] 문서 오오에노 히로모토가 미치치카에게 '한 편(方人-味方)'이라고 했던 대화 내용이 실려있다 愚管抄 1191
[25] 문서 단, 분가쿠는 복권되어 교토에 돌아온지 일개월 만에 쓰시마에 유배당하고 후일 처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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