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모토노 요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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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는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아들로, 1182년에 태어나 1204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1199년 아버지의 사후 18세의 나이로 가마쿠라 막부의 2대 쇼군에 취임했으나, 호조 씨를 비롯한 유력 고케닌들의 견제를 받았다. 건강 악화와 측근 숙청 시도 등으로 인해 권력을 잃고 폐위되었으며, 23세에 암살당했다. 그의 사후, 자녀들 또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며 요리이에의 혈통은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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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요리이에 | |
---|---|
기본 정보 | |
이름 |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
로마자 표기 | Minamoto no Yoriie |
한자 표기 | 源 頼家 |
출생일 | 1182년 9월 11일 |
출생지 | 가마쿠라, 가나가와, 일본 |
사망일 | 1204년 8월 14일 |
묘소 | 후쿠치 산 슈젠지 경내의 시즈키가오카 |
칭호 | 가마쿠라 도노, 좌금오 |
계명 | 법화원전금오대선합 |
정치 경력 | |
직위 | 쇼군 |
재임 기간 | 1202년 - 1203년 |
군주 | 쓰치미카도 |
전임자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
후임자 |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
막부 | 가마쿠라 막부 제2대 가마쿠라 도노 (1199년 - 1203년), 제2대 정이대장군 (1202년 - 1203년) |
관위 | 좌위문독, 정이대장군, 정2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
어머니 | 호조 마사코 |
배우자 | 와카사노 쓰보네 |
자녀 | 미나모토노 이치만 구교 에이시쓰 젠교 다케노 고쇼 |
형제자매 | 센즈루마루? 오히메 요리이에 사다아키라 미하타 사네토모 |
기타 정보 | |
어린 시절 이름 | 만쥬 |
씨족 | 세이와 겐지, 요리노부 류 가와치 겐지 |
일본어 표기 | 源 頼家 |
음력 출생일 | 1182년 8월 12일 |
음력 사망일 | 1204년 7월 18일 |
향년 | 23세 (만 21세 몰) |
2. 생애
1182년(주에이 원년) 음력 8월 12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호조 마사코의 아들로 가마쿠라 히키가타니의 히키 요시카즈(比企能員) 저택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반슈(萬壽).[6] 아버지 요리토모가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의해 이즈에 유배됐던 시절 결혼해 둘 사이에는 이미 장녀 오오히메(大姬)가 있었다. 요리토모의 나이 36세, 가마쿠라에 개선한 지 3년 만에 얻은 첫 아들이었기에, 태어나면서부터 주위의 축복을 받았다. 요리토모는 마사코의 순산 기원을 위해 쓰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 와카미야대로(若宮大路) 정비를 지시했고, 직접 감독하에 겐지의 유력 고케닌(御家人)들이 흙과 돌을 옮겨 길을 닦을 정도로 집안의 기대가 컸다.[6] 요리토모의 유모였던 히키노아마(比企尼)의 양자 요시카즈가 대를 이어 요리이에의 유부(乳父)로 선택됐고, 히키노아마의 둘째 딸(가와고에 시게요리의 아내)과 카지와라 카게토키(梶原景時)의 아내 외에도, 히키노아마의 셋째 딸(히라가 요시노부의 아내), 요시카즈의 아내 등 히키 씨(比企氏) 집안 자체가 요리이에의 기반이 됐다.[6]
1193년(겐큐(建久) 4년) 음력 5월, 후지산에서 고케닌들과 사냥대회를 열었을 때, 12세의 요리이에가 사슴을 쏴 첫 사냥에 성공하자 요리토모는 기뻐하며 사람을 보내 아내에게 알렸다. 그러나 마사코는 "무장의 맏이라면 그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며 사자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일본 사학계에서는 요리이에의 사슴 사냥이 '신이 후계자로 그를 간택했음'을 부하들에게 각인시키는 정치적 함의를 갖는데, 마사코가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7] 덧붙여 이 사냥 때 소가 형제의 복수(曾我兄弟の仇討ち) 사건으로 요리토모와 가마쿠라 본부와의 연락이 끊어진 사이, 요리토모의 동생 미나모토노 노리요리(源範頼)가 형수에게 말실수를 해 모반 혐의로 유배되었다.[7]
1195년(겐큐(建久) 6년) 음력 2월, 요리토모는 부인 마사코와 두 자녀인 요리이에ㆍ오오히메를 데리고 교토로 상경한다. 어린 요리이에는 6월 3일과 6월 24일에 각각 입궐하여 요리토모의 후계자로서 선을 보였고, 2년 후인 1197년 16세에 성인 관례를 올리고 종5위상 우근위권소장(右近衛權少将)에 임명됐다.[9] 요리이에는 나이에 비해 우수한 무예로도 이름을 알렸었다고 한다.
1199년(겐큐(建久) 10년) 음력 1월 13일, 아버지 요리토모가 갑자기 서거하면서, 요리이에는 같은 달 20일에 좌중장이 되고, 26일에는 제2대 가마쿠라도노(쇼군)로 취임했다. 당시 18세였다. 즉위 직후, 호조씨를 비롯한 유력 고케닌들에 의해 13인의 합의제가 설치되면서 요리이에의 직접 소송 판결은 금지되었다.[10] 요리이에는 오가사와라 나가쓰네(小笠原長経), 히키 무네카즈(比企宗員), 히키 도키카즈(比企時員), 나카노 요시시게(中野能成) 등 젊은 측근 5명을 통해서만 자신을 알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고케닌들의 압력에 굴복해야 했다.
1200년(쇼지(正治) 2년) 1월 20일, 사무라이도코로(侍所) 장관이었던 카지와라 카게토키는 고케닌들의 탄핵을 받고 실각했다. 이후, 카게토키는 일족과 함께 교토로 상경하던 도중 고케닌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가와지라 카게토키의 변)[10] 1201년(겐닌(建仁) 원년) 정월부터 5월까지는 카게토키의 부하였던 조씨(城氏) 일족이 겐닌의 난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1202년 (겐닌 2년) 7월 22일, 요리이에는 종2위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将軍)에 임명되었다.
1203년(겐닌 3년) 3월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는 몸 상태에 이상이 생겼다.[24] 건강이 악화되는 와중에 신하들의 압박은 심해졌고, 요리이에는 5월에 숙부 아노 젠세이를 모반 혐의로 처형하고, 이모인 아와노 쓰보네(阿波局)까지 제거하려 했다.[25] 그러나 호조 마사코의 저지로 실패했다. 7월 중순, 병세가 더욱 심해져 8월 말에는 혼수상태를 반복했다.
요리이에가 생존해 있음에도, 9월 1일 고케닌들은 "요리이에가 병사하여 동생 사네토모가 뒤를 잇는다"는 보고를 교토에 올렸다. 이들은 세이이대장군 양위를 요청했으며, 이는 《메이게츠기(明月記)》 등 여러 사료에서 확인된다. 9월 2일 가마쿠라에서는 히키 씨 일족이 호조 씨에게 주살되었다.
고립된 요리이에는 사건을 뒤늦게 알고 격노하여 호조 씨 토벌을 명했으나, 이미 따르는 가문은 없었다. 9월 7일 교토에서 가독 교체 및 직위 전임 윤허가 떨어졌고, 요리이에는 막부의 모든 지위를 잃고 호조 씨가 실권을 장악했다.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요리이에의 병으로 맏아들 이치만이 일본국 총슈고직과 간토 28개국 총 지토우를, 동생 사네토모(센만)는 서일본 38개국 총 지토우를 맡는다는 교서가 발표되었다.(8월 27일 자) 히키 요시카즈는 사네토모와 호조 씨 토벌을 계획했고, 이를 엿들은 호조 마사코가 도키마사에게 알려 요시카즈를 죽이고 히키 일족을 멸했다.(9월 2일 자)
《구칸쇼(愚管抄)》는 요리이에가 요양 목적으로 출가하여 정무를 이치만과 히키 씨에게 맡기려 하자, 호조 도키마사가 히키 요시카즈를 모살하고 요리이에를 오오에노 히로모토의 집에 유폐한 뒤 히키 일족을 몰살시켰다고 기록한다. 이치만은 겨우 피신했으나, 11월에 호조 요시토키에게 잡혀 죽었다.
요리이에는 이즈국(伊豆国) 슈젠지(修善寺)에서 외조부 호조 도키마사에게 암살당했다.
요리토모의 측근과 정치적 후견인들은 요리토모가 선택했지만, 다음 세대는 히키 씨 중심이 될 것이 명백했다. 요리이에 정권의 권력 투쟁은 요리토모의 정치 노선과, 그 노선에서 벗어나게 될 호조 씨와의 대립이었다. 요리이에는 무단파 쇼군이었으나, 미숙함과 폭주를 보였다. 한편, 마사코는 요리이에의 권위를 실추시키려 했다. 요리이에는 실력 발휘 전에 마사코와 호조 씨에게 살해된 것으로 생각된다.
1204년(겐큐(元久) 원년) 7월 18일 이즈국 슈젠사에 유폐돼 있던 요리이에는 호조 도키마사의 명령으로 감시병들에 의해 살해됐다.[26] 향년 23세. 고케닌들에게 있어서도 작은 주군에게 칼을 댄 것은 스스로도 떳떳치 못했던 모양으로, 《아즈마카가미》에는 그 죽음에 대해서 그저 '전령(일본어:飛脚, 訓:히갸쿠)들이 요리이에의 죽음을 알려왔다'고만 간단히 적혀 있다(7월 19일 자 기록).[26] 《구칸쇼(愚管抄)》에는 요리이에가 목욕재계 중 습격을 받았고, 덩치가 컸던 요리이에가 격하게 저항하자 여러 명이 그의 목에 끈을 감고 급소를 눌러 제압 후 간신히 찔러 죽였다고 묘사돼 있다.[12] 남북조 시대의 사서인 『호력간기』에서는 목욕 중에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3]
2. 1. 가마쿠라도노의 적자
1182년(주에이 원년) 음력 8월 12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호조 마사코의 아들로 가마쿠라 히키가타니의 히키 요시카즈(比企能員) 저택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반슈(萬壽).[6] 아버지 요리토모가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의해 이즈에 유배됐던 시절 결혼해 둘 사이에는 이미 장녀 오오히메(大姬)가 있었다. 요리토모의 나이 36세, 가마쿠라에 개선한 지 3년 만에 얻은 첫 아들이었기에, 태어나면서부터 주위의 축복을 받았다. 요리토모는 마사코의 순산 기원을 위해 츠루가오카 하치만 궁(鶴岡八幡宮) 와카미야대로(若宮大路) 정비를 지시했고, 직접 감독하에 겐지의 유력 고케닌(御家人)들이 흙과 돌을 옮겨 길을 닦을 정도로 집안의 기대가 컸다.[6] 요리토모의 유모였던 히키노아마(比企尼)의 양자 요시카즈가 대를 이어 요리이에의 유부(乳父)로 선택됐고, 히키노아마의 둘째 딸(가와고에 시게요리의 아내)과 카지와라 카게토키(梶原景時)의 아내 외에도, 히키노아마의 셋째 딸(히라가 요시노부의 아내), 요시카즈의 아내 등 히키씨(比企氏) 집안 자체가 요리이에의 기반이 됐다.[6]1193년(겐큐(建久) 4년) 음력 5월, 후지산에서 고케닌들과 사냥대회를 열었을 때, 12세의 요리이에가 사슴을 쏴 첫 사냥에 성공하자 요리토모는 기뻐하며 사람을 보내 아내에게 알렸다. 그러나 마사코는 "무장의 맏이라면 그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며 사자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일본 사학계에서는 요리이에의 사슴 사냥이 '신이 후계자로 그를 간택했음'을 부하들에게 각인시키는 정치적 함의를 갖는데, 마사코가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7] 덧붙여 이 사냥 때 소가 형제의 복수(曾我兄弟の仇討ち) 사건으로 요리토모와 가마쿠라 본부와의 연락이 끊어진 사이, 요리토모의 동생 미나모토노 노리요리(源範頼)가 형수에게 말실수를 해 모반 혐의로 유배되었다.[7]
1195년(겐큐(建久) 6년) 음력 2월, 요리토모는 부인 마사코와 두 자녀인 요리이에ㆍ오오히메를 데리고 교토로 상경한다. 어린 요리이에는 6월 3일과 6월 24일에 각각 입궐하여 요리토모의 후계자로서 선을 보였고, 2년 후인 1197년 16세에 성인 관례를 올리고 종5위(従五位上)상 우근위권소장(右近衛權少将)에 임명됐다.[9] 요리이에는 나이에 비해 우수한 무예로도 이름을 알렸었다고 한다.
2. 2. 2대 쇼군 취임
1199년(겐큐(建久) 10년) 음력 1월 13일, 아버지 요리토모가 갑자기 서거하면서, 요리이에는 같은 달 20일에 좌중장이 되고, 26일에는 제2대 가마쿠라도노(쇼군)로 취임했다. 당시 18세였다. 즉위 직후, 호조씨를 비롯한 유력 고케닌들에 의해 13인의 합의제가 설치되면서 요리이에의 직접 소송 판결은 금지되었다.[10] 요리이에는 오가사와라 나가쓰네(小笠原長経), 히키 무네카즈(比企宗員), 히키 도키카즈(比企時員), 나카노 요시시게(中野能成) 등 젊은 측근 5명을 통해서만 자신을 알현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고케닌들의 압력에 굴복해야 했다.1200년(쇼지(正治) 2년) 1월 20일, 사무라이도코로(侍所) 장관이었던 카지와라 카게토키는 고케닌들의 탄핵을 받고 실각했다. 이후, 카게토키는 일족과 함께 교토로 상경하던 도중 고케닌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가와지라 카게토키의 변)[10] 1201년(겐닌(建仁) 원년) 정월부터 5월까지는 카게토키의 부하였던 조씨(城氏) 일족이 겐닌의 난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1202년 (겐닌 2년) 7월 22일, 요리이에는 종2위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将軍)에 임명되었다.
2. 3. 쇼군 폐위
1203년(겐닌 3년) 3월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는 몸 상태에 이상이 생겼다.[24] 건강이 악화되는 와중에 신하들의 압박은 심해졌고, 요리이에는 5월에 숙부 아노 젠세이를 모반 혐의로 처형하고, 이모인 아와노 쓰보네(阿波局)까지 제거하려 했다.[25] 그러나 호조 마사코의 저지로 실패했다. 7월 중순, 병세가 더욱 심해져 8월 말에는 혼수상태를 반복했다.요리이에가 생존해 있음에도, 9월 1일 고케닌들은 "요리이에가 병사하여 동생 사네토모가 뒤를 잇는다"는 보고를 교토에 올렸다. 이들은 세이이대장군 양위를 요청했으며, 이는 《메이게츠기(明月記)》 등 여러 사료에서 확인된다. 9월 2일 가마쿠라에서는 히키 씨 일족이 호조 씨에게 주살되었다.
고립된 요리이에는 사건을 뒤늦게 알고 격노하여 호조 씨 토벌을 명했으나, 이미 따르는 가문은 없었다. 9월 7일 교토에서 가독 교체 및 직위 전임 윤허가 떨어졌고, 요리이에는 막부의 모든 지위를 잃고 호조 씨가 실권을 장악했다.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요리이에의 병으로 맏아들 이치만이 일본국 총슈고직과 간토 28개국 총 지토우를, 동생 사네토모(센만)는 서일본 38개국 총 지토우를 맡는다는 교서가 발표되었다.(8월 27일 자) 히키 요시카즈는 사네토모와 호조 씨 토벌을 계획했고, 이를 엿들은 호조 마사코가 도키마사에게 알려 요시카즈를 죽이고 히키 일족을 멸했다.(9월 2일 자)
《구칸쇼(愚管抄)》는 요리이에가 요양 목적으로 출가하여 정무를 이치만과 히키 씨에게 맡기려 하자, 호조 도키마사가 히키 요시카즈를 모살하고 요리이에를 오오에노 히로모토의 집에 유폐한 뒤 히키 일족을 몰살시켰다고 기록한다. 이치만은 겨우 피신했으나, 11월에 호조 요시토키에게 잡혀 죽었다.
요리이에는 이즈국(伊豆国) 슈젠지(修善寺)에서 외조부 호조 도키마사에게 암살당했다.
요리토모의 측근과 정치적 후견인들은 요리토모가 선택했지만, 다음 세대는 히키 씨 중심이 될 것이 명백했다. 요리이에 정권의 권력 투쟁은 요리토모의 정치 노선과, 그 노선에서 벗어나게 될 호조 씨와의 대립이었다. 요리이에는 무단파 쇼군이었으나, 미숙함과 폭주를 보였다. 한편, 마사코는 요리이에의 권위를 실추시키려 했다. 요리이에는 실력 발휘 전에 마사코와 호조 씨에게 살해된 것으로 생각된다.
2. 4. 죽음
1204년(겐큐(元久) 원년) 7월 18일 이즈국 슈젠사에 유폐돼 있던 요리이에는 호조 도키마사의 명령으로 감시병들에 의해 살해됐다.[26] 향년 23세. 고케닌들에게 있어서도 작은 주군에게 칼을 댄 것은 스스로도 떳떳치 못했던 모양으로, 《아즈마카가미》에는 그 죽음에 대해서 그저 '전령(일본어:飛脚, 訓:히갸쿠)들이 요리이에의 죽음을 알려왔다'고만 간단히 적혀 있다(7월 19일 자 기록).[26] 《구칸쇼(愚管抄)》에는 요리이에가 목욕재계 중 습격을 받았고, 덩치가 컸던 요리이에가 격하게 저항하자 여러 명이 그의 목에 끈을 감고 급소를 눌러 제압 후 간신히 찔러 죽였다고 묘사돼 있다.[12] 남북조 시대의 사서인 『호력간기』에서는 목욕 중에 살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3]3. 묘소
1202년(겐닌 2년)에 요리이에가 쇼군이었던 당시 지시해 건립한 겐닌지에는 요리이에의 목상[27]이 안치되어 있다. 쇼군 자리에서 쫓겨나 유폐됐던 이즈 슈젠사에는 마사코가 요리이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지게츠덴이 남아 있고, 에도 시대에 건립된 요리이에의 공양탑 등도 함께 남아 있다. 요리이에는 유폐된 와중에도 동네 아이들과 함께 인근의 산을 돌아다니며 노는 등 아이들을 특히 좋아했다 전하며, 그의 사후 그를 그리워한 마을 주민들의 유지에 따라 '쇼군아이도-지죠-타루(將軍愛童地藏尊)[28]'가 세워져 그를 기리고 있다.
근처 미시마타이샤에는 1203년 요리이에가 와병 중, 자신의 쾌유를 빌며 손수 필사하여 봉납한 《반야심경》이 남아 있다.[29]
현재 시즈오카현 미시마시 슈젠지 온천 거리에서는 매년 7월마다 요리이에 마츠리가 열리고 있다.
4. 요리이에의 자식들
요리이에는 4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장남 이치만은 히키 요시카즈의 변 때 호조 씨들에 의해 살해되었고[30], 호조 마사코는 남은 세 아들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모두 승려로 출가시켰다. 셋째 아들 에이시쓰(榮實)는 생모가 미우라 다네요시(三浦 胤義)에게 재가했는데, 1215년 와다 씨가 주도한 이즈미 지카히라(泉親衡)의 난에서 쇼군으로 옹립되었다가 난 실패 후 자결했다. 승려였던 숙부 데이쿄(貞曉)에게 맡겨졌던 둘째 아들 구교는 1219년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삼촌 사네토모를 암살한 죄로 처형되었다.[5] 이때 넷째 아들 승려 젠쿄(禪曉)도 형의 범죄를 도왔다는 죄목으로 1220년 호조 씨들이 보낸 막부 무사들에 의해 교토에서 살해되었다.
외동딸 다케노 고쇼(竹御所)는 할머니 마사코가 길렀으며, 사네토모 사후 호조 씨가 옹립한 4대 쇼군 후지와라노 요리쓰네의 정실이 되었으나 출산 도중 사망했다. 다케노 고쇼의 죽음으로 요리이에의 혈통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5. 평가
호조 씨 집안이 편찬한 가마쿠라 막부의 정사 《아즈마카가미》에서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는 유흥에 빠져 가신의 애첩을 빼앗는 폭군으로 묘사된다.[15] 그러나 히키 요시카즈 멸망과 요리이에 추방에 관한 《아즈마카가미》의 기록은 교토 측 사료와 명확한 차이가 있으며, 요리이에를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기록은 호조씨의 정치적 조작으로 여겨진다.[15] 《구칸쇼》에서는 "옛부터 지금까지 그런 뛰어난 무예의 소유자는 없었다는 소문이 숨겨지지 않았다"라고, 《육대승사기》에서는 "백발백중의 기예에 능하여 무장 가운데 으뜸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리이에의 근신이었던 나카노 요시나리는 《아즈마카가미》에서는 요리이에와 연좌되어 영지를 몰수당하고 유배되었지만, 《시카와 문서》에 남아 있는 서장에서는 히키씨 멸망 직후인 1203년 9월 4일 호조 도키마사로부터 "히키 요시카즈의 불법으로 영지를 빼앗겼는데, 특별히 특별 대우를 해주겠다"는 영지 안도를 받고 있다.[14] 요시나리와 깊은 관계가 있던 도키마사의 아들 호조 도키후사도 요리이에의 축국 상대가 되었으며, 요리이에 주변에는 호조씨의 감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망 전후, 겐큐 7년의 정변과 삼좌위문제에 의해 조정의 반막부파가 공세를 강화했다. 13인의 합의제가 시행된 것은 요리이에가 요리토모의 뒤를 이은 지 불과 3개월 후였으며, 요리이에의 정치 능력 부족 때문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요리이에 배척은 호조씨의 음모만이 아니라, 막부 성립의 원동력이 된 도고쿠 무사들의 쇼군 독재에 대한 억눌린 불만이 배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요리이에는 정치가로서 거의 특징을 보이지 않은 채 죽었고, 이후 고케닌들에 의한 혼란스러운 권력 투쟁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수대에 걸쳐 유력 고케닌들이 합종연횡을 반복하여 멸망해 가는 가운데,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은 호조씨의 권력이 점차 두드러지게 된다.
6. 연표
일본 연호 | 서기 | 날짜 | 내용 |
---|---|---|---|
겐큐(建久) 8년 | 1197년 | 12월 15일 | 종5위상이 되고 우고노에노곤노쇼죠(右近衛權少將)에 임관(16세). |
겐큐 9년 | 1198년 | 1월 13일 | 사누키노곤노스케(讚岐權介)를 겸임(17세). |
11월 21일 | 관위가 정5위하로 승진.(나머지 직책은 예전대로) | ||
겐큐 10년 | 1199년 | 1월 | 가독(家督)을 상속받음(18세). |
1월 20일 | 사코노에츄조(左近衛中將)으로 옮겨감. | ||
쇼지(正治) 2년 | 1200년 | 1월 5일 | 관위가 종4위상으로 승진.(나머지는 예전대로) 이때 나이 19세. |
1월 8일 | 천황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색을 관복에 들이는 것을 허락받음. | ||
10月26일 |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로 옮겨감. | ||
겐닌(建仁) 2년 | 1202년 | 1월 23일 | 관위가 정3위로 승진.(나머지는 예전대로) 이때 나이 21세. |
7월 22일 | 관위가 종2위로 승진. 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 선하(宣下). 이때 사에몬노카미 자리는 예전대로 유지. | ||
겐닌 3년 | 1203년 | 1월 23일 | 관위가 정2위로 승진.(사에몬노카미 자리는 예전대로 유지) 이때 나이 22세. |
9월 7일 | 승려로서 출가 | ||
겐큐(元久) 원년 | 1204년 | 7월 18일 | 서거. 향년 23세(만21세). |
요리이가 쇼군이었던 해는 모두 하나의 연호인 '建仁(Kennin)' (1201~1204)에 속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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熊谷直実の出家と往生に関する史料について-『吾妻鏡』史料批判の一事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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