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조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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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조 천황은 레이제이 천황의 차남으로, 1011년부터 1016년까지 재위한 일본의 67대 천황이다. 황태자 시절 이치조 천황보다 나이가 많아 '사카사노 모케노키미'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압력으로 장남이 아닌 이치조 천황의 차남이 황태자가 되었으며, 시력 감퇴로 40세의 나이에 양위했다. 42세에 출가 후 사망했으며, 묘소는 기타야마릉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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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보
레이제이 천황의 둘째 아들로 덴엔 4년(976년)에 태어났다.[6] 어머니 후지와라노 초시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레이제이 천황마저 정신 질환을 앓아, 외할아버지인 후지와라노 가네이에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다. 간나 2년(986년), 가잔 천황이 갑작스럽게 퇴위하고 어린 이치조 천황이 즉위하자, 11세의 나이로 황태자가 되었다. 이는 당시 레이제이 계통과 엔유 계통이 번갈아 황위를 잇는 양통질립의 관례와 외할아버지 가네이에의 정치적 영향력이 작용한 결과였다.[23] 하지만 황태자가 천황보다 나이가 많아 '거꾸로 된 황태자'라는 뜻의 '''사카사노 모케노키미'''(逆の儲けの君일본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산조 천황의 무덤은 교토시에 있는 '''기타야마노 미사사기'''(北山陵)로 비정되어 궁내청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1]
3. 생애
간코 8년(1011년) 6월, 이치조 천황이 병으로 양위하면서 36세의 나이로 마침내 황위에 올랐다.[11] 그러나 즉위 과정에서부터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외숙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강력한 입김이 작용하여, 자신의 장남 아쓰아키라 친왕 대신 미치나가의 외손자인 아쓰나리 친왕(훗날 고이치조 천황)을 황태자로 삼아야 했다.[14][21]
산조 천황은 직접 정치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으나, 재위 기간 내내 미치나가와의 갈등에 시달렸다. 조와 원년(1012년), 미치나가의 딸 후지와라노 겐시를 주고(中宮)로 맞이했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자신을 지지해 온 후지와라 세이시를 황후(皇后)로 책봉하면서 미치나가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21] 게다가 겐시가 황자를 낳지 못하자 미치나가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21]
조와 3년(1014년)부터는 심각한 안질을 앓기 시작하여 시력을 거의 잃게 되었고,[24] 내리(內裏, 황궁)가 두 차례나 큰 화재로 소실되는[25][15] 등 불운이 겹쳤다. 미치나가는 천황의 건강 악화를 빌미로 끊임없이 양위를 압박했다.
결국 조와 5년(1016년), 산조 천황은 자신의 아들 아쓰아키라 친왕을 다음 황태자로 세운다는 조건을 내걸고 미치나가의 압력에 굴복하여 고이치조 천황에게 양위했다.[16][17] 이듬해인 칸닌 원년(1017년) 출가하였으나,[9] 얼마 지나지 않아 42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5] 법명은 산조인(三条院일본어)이다.[5]
산조 천황 사후, 양위 조건이었던 아들 아쓰아키라 친왕의 황태자 지위는 미치나가의 압력으로 오래가지 못하고 스스로 사퇴하는 비운을 맞았다.[21] 이로써 레이제이-엔유 양통 첩립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산조 천황의 딸 테이시 내친왕이 훗날 고산조 천황을 낳으면서 그의 혈통은 황실 내에서 이어지게 되었다.
3. 1. 출생과 황태자 시절
레이제이 천황의 둘째 아들로, 덴엔 4년(976년)에 태어났다.[6] 즉위 전의 이름(휘)은 이야사다 친왕(居貞親王일본어)[4][5]이었으며, 스케사다 친왕(すけさだ しんのう일본어)[6] 또는 오키사다 친왕(おきさだ しんのう일본어)[7]으로도 불렸다. 어머니는 셋쇼 후지와라노 가네이에의 딸인 후지와라노 초시(藤原超子, ?-982)이다.[9] 이복 형으로는 가잔 천황이 있다.[8]
7세 때 어머니 초시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레이제이 천황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어[21] 후견이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후 외할아버지인 후지와라노 가네이에의 저택에서 자랐다. 『오카가미』에 따르면, 외모가 가네이에와 매우 닮아 그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간나 2년(986년) 6월 23일, 가잔 천황이 갑작스럽게 출가하여 7세의 이치조 천황(이야사다 친왕의 사촌)에게 양위했다. 같은 해 7월 16일, 11세의 이야사다 친왕은 외할아버지 가네이에의 강력한 후원을 받아 황태자(도궁)로 책봉되었다.[23] 이는 당시 레이제이 계통과 엔유 계통이 교대로 황위를 잇는 양통질립의 관례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황태자가 천황보다 4살이나 많았기 때문에 '거꾸로 된 황태자'라는 의미의 '''사카사노 모케노키미'''(逆の儲けの君)라는 별명을 얻었다. 가네이에가 레이제이 계통인 이야사다 친왕을 황태자로 세운 배경에는, 엔유 천황과의 불화, 자신의 딸 초시가 레이제이 천황과의 사이에서 3명의 아들을 낳은 점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21] 또한 손자인 이치조 천황이 즉위하고 자신이 섭정이 되면서, 또 다른 손자인 이야사다 친왕까지 황태자로 만들어 권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23]
황태자 시절, 그의 후궁에는 여러 여성이 들어왔다.
이치조 천황의 치세 동안 외조부 가네이에 사후에는 외삼촌인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형제가 차례로 정권을 장악하며 황태자 이야사다 친왕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3. 2. 즉위와 후지와라 가문의 압력
간코 8년(1011년) 6월 13일, 이치조 천황이 재위 25년 만에 병세가 위독해져 양위하자, 그의 사촌이자 황태자였던 이야사다 친왕이 36세의 나이로 즉위했다(산조 천황).[11] 하지만 황태자 자리에는 산조 천황의 장남 아쓰아키라 친왕이 아닌, 이치조 천황의 둘째 아들이자 당대 최고 권력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외손자인 아쓰나리 친왕(훗날 고이치조 천황)이 책봉되었다. 이는 미치나가의 강력한 압력 때문이었다.[14][21] 산조 천황 즉위 직후인 6월 22일에는 이치조 상황이 32세로 승하했고,[12] 같은 해 10월 24일에는 아버지 레이제이 상황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13]
산조 천황의 외조부 후지와라노 가네이에 사후, 외숙인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형제가 차례로 정권을 장악했다. 특히 미치나가는 이치조 천황 재위 기간부터 간파쿠(섭정)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자신의 외손자인 아쓰나리 친왕을 하루빨리 즉위시키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15] 그는 산조 천황의 치세에도 섭정 지위를 유지하며[9] 권력을 놓지 않으려 했고, 1011년 8월에는 수레를 타고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특권을 받기도 했다.[9]
산조 천황은 직접 정치를 하고자 했으나, 미치나가와의 관계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조와 원년(1012년), 산조 천황은 미치나가의 딸 후지와라노 겐시를 주고(중궁)로 삼았지만,[6] 동시에 오랜 기간 자신을 지지해 온 후지와라 세이시를 황후로 책봉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는 명백히 미치나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으나, 결과적으로 미치나가의 불만을 샀다. 게다가 겐시가 아들이 아닌 딸 테이시 내친왕만을 출산하면서[21] 미치나가와 산조 천황의 관계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21]
조와 3년(1014년), 산조 천황은 안질을 앓기 시작하여 시력을 거의 잃는 지경에 이르렀다.[24] 미치나가는 이를 기회로 삼아 천황의 건강 문제를 명분으로 끊임없이 양위를 강요했다. 설상가상으로 1014년과 1015년에 내리(황궁)가 연이어 화재로 소실되는[25][15] 불운까지 겹치면서, 병세 악화와 미치나가의 계속되는 압박 속에서 산조 천황은 결국 양위를 결심하게 된다.
조와 5년(1016년) 1월 29일, 산조 천황은 자신의 아들인 아쓰아키라 친왕을 황태자로 세운다는 조건을 내걸고 미치나가의 요구를 받아들여, 아쓰나리 친왕(고이치조 천황)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었다.[16][17]
3. 3. 잦은 화재와 질병
산조 천황의 재위 기간 중 황궁은 두 차례의 큰 화재를 겪었다.
또한, 산조 천황은 재위 말년에 건강 문제에 시달렸다.
3. 4. 양위와 죽음
조와 3년(1014년), 산조 천황은 안질을 앓기 시작했다. 일설에는 연단술의 일종인 선단(仙丹) 복용 직후 시력을 잃었다고도 한다.[24]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는 천황의 안질을 명분 삼아 끊임없이 양위를 압박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해와 다음 해에 내리(천황의 거처)가 연이어 화재로 소실되는[25][15] 등 불운이 겹쳤다.
병세가 악화되자, 조와 5년(1016년) 1월, 산조 천황은 황후 후지와라 세이시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아츠아키라 친왕을 황태자로 세운다는 조건을 받아내는 대신, 미치나가의 양위 요구를 수락했다.[16] 1016년 3월 10일 (조와 5년 1월 29일), 재위 6년 만인 40세의 나이로 사촌인 아츠나리 친왕(고이치조 천황)에게 양위하고 태상천황이 되었다.[17][16]
이듬해인 칸닌 원년(1017년) 5월 27일 (칸닌 1년 4월 29일), 산조 상황은 출가하여 불교 승려가 되었다.[9] 그러나 출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017년 6월 5일 (칸닌 1년 5월 9일), 42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5]
양위 후 머물렀던 궁의 이름을 따서 사후에 산조인(三条院일본어)이라는 법명을 얻었다.[5] 이후 메이지 시대에 '인(院)'이 '천황'으로 바뀌어 현재의 시호가 되었다. 그의 능묘는 교토에 있으며, 궁내청은 이곳을 '기타야마노 미사사기'(北山陵)로 공식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19][1]
산조 천황이 양위 조건으로 내걸었던 아츠아키라 친왕의 황태자 지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같은 해 8월 9일, 아츠아키라 친왕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무언의 압력을 받아 스스로 황태자 자리를 사퇴했다.[21] 이로 인해 레이제이 천황과 엔유 천황의 계통이 번갈아 즉위하던 양통 첩립은 종지부를 찍고, 황위는 엔유 천황의 직계 후손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산조 천황의 딸인 테이시 내친왕이 훗날 고산조 천황을 낳으면서, 산조 천황의 혈통 역시 황실 내에서 이어지게 되었다.
4. 가족 관계
( 性信入道親王|쇼신 뉴도신노일본어 )
(동궁 시절)
(동궁 시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