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조 이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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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조 이즈코는 1371년 오히토 친왕(훗날의 고엔유 천황)의 죠로뇨보로 입궁한 여성이다. 고와 3년(1383년) 고엔유 상황과 아시카가 요시미츠와의 불화에 휘말려 고엔유 상황에게 칼등으로 맞는 사건을 겪었다. 고코마츠 천황 즉위 후 종2위, 준삼궁을 거쳐 원호를 받았으며, 1406년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고코마츠 천황에게 두 번의 상복을 입히는 것을 꺼려 그의 아내를 준모로 세웠다. 이즈코는 고엔유 천황과의 불화와 아시카가 요시미츠와의 관계, 고코마츠 천황의 생모 의혹 등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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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조 이즈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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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칭호 | 통양문원 |
이름 | 산조 이즈코/타카코 |
작위 | 준삼궁 여원 |
출생일 | 간노 2년 (1351년) |
사망일 | 오에이 13년 음력 12월 27일 (1407년 2월 14일) (향년 56세) |
아버지 | 산조 킨타다/산조 기미타다 |
배우자 | 고엔유 천황 |
자녀 | 고코마쓰 천황 겐시 내친왕 |
2. 생애
겐토쿠 2년(1371년), 오히토 친왕(훗날의 고엔유 천황)의 죠로뇨보(女房|뇨보일본어)로 입궁하였다. 이후 고와 3년(1383년)에는 고엔유 상황과 아시카가 요시미츠 사이의 정치적 갈등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아들 고코마츠 천황이 즉위한 후, 고와 3년(1383년) 11월에 종2위에 올랐고, 오에이 2년(1395년) 4월에는 준삼궁이 되었으며, 오에이 3년(1396년) 7월 24일에는 원호(院号)를 받아 '''츠요몬인'''(通陽門院)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오에이 13년(1406년) 12월 27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고코마츠 천황이 상복을 두 번 입는 것을 피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아내 히노 야스코를 천황의 준모로 삼는 조치를 취했다.
2. 1. 출생과 입궁
겐토쿠 2년 (1371년), 오히토 친왕 (훗날의 고엔유 천황)의 죠로뇨보(女房)로 입궁했다. 산죠 킨타다의 기록인 『후우매기(後愚昧記)』에 따르면, 고와 3년 (1383년)에 고엔유 상황과 아시카가 요시미츠 사이의 불화에 휘말렸다. 같은 해 2월 1일, 출산을 마치고 중궁으로 돌아오던 길에 고엔유 상황에게 칼등으로 맞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친정인 산죠 가문으로 도망쳤다.2. 2. 고엔유 천황과의 관계
겐토쿠 2년 (1371년), 오히토 친왕 (훗날의 고엔유 천황)의 죠로뇨보(女房|뇨보일본어, 궁녀의 직책 중 하나)로 입궁하였다.고와 3년 (1383년), 당시 상황(上皇|죠코일본어)이었던 고엔유 상황과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 사이에 불화가 있었는데, 이즈코는 이 정치적 갈등에 휘말리게 되었다. 같은 해 2월 1일, 이즈코는 출산을 마치고 중궁(中宮|추구일본어)으로 돌아오던 중 고엔유 상황에게 칼등으로 맞는 폭행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즈코는 친정인 산죠 가문으로 피신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사건의 기록은 산죠 킨타다의 일기 『후우매기』(後愚昧記|고구마이키일본어)에 남아있다.
2. 3. 아시카가 요시미츠와의 관계
고와 3년 (1383년), 당시 상황이었던 고엔유 상황과 아시카가 요시미츠 사이에 불화가 발생했을 때 이즈코가 그 사이에 휘말리는 사건이 있었다. 산죠 킨타다의 일기 『후우매기』에 따르면, 그해 2월 1일 출산 후 중궁으로 돌아오던 이즈코를 고엔유 상황이 칼등으로 내리쳤고, 이즈코는 친정인 산죠 가문으로 도망쳤다. 이는 고엔유 상황이 이즈코와 요시미츠의 관계를 의심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로 여겨진다.이즈코는 오에이 13년 (1406년) 12월 27일에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가 사망했을 때,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고코마츠 천황이 한 세대에 두 번 상복을 입는 것은 불길하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의 아내 히노 야스코를 고코마츠 천황의 준모로 삼도록 하여, 천황이 이즈코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상복을 입는 것을 피하게 했다. 이는 당시의 관례를 고려할 때 이례적인 조치로, 요시미츠가 이즈코와의 관계를 각별하게 여겼음을 시사한다.
2. 4. 고코마츠 천황의 생모
겐토쿠 2년(1371년), 오히토 친왕(훗날의 고엔유 천황)의 죠로뇨보(上臈女房, 상급 궁녀)로 입시하였다. 산죠 킨타다의 일기 『후우매기(後愚昧記)』에 따르면, 고와 3년(1383년)에는 고엔유 상황과 아시카가 요시미츠 사이의 불화에 휘말렸다. 그해 2월 1일, 출산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오던 중 고엔유 상황에게 칼등으로 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친정인 산죠 가문으로 도망쳤다.아들인 고코마츠 천황이 즉위한 후, 이즈코의 지위는 점차 높아졌다. 고와 3년(1383년) 11월에는 종2위에 올랐고, 오에이 2년(1395년) 4월에는 준삼궁(准三宮)의 지위를 받았다. 이어 오에이 3년(1396년) 7월 24일에는 원호(院号) 선하를 받아 '''츠요몬인'''(通陽門院)이라는 원호를 받게 되었다.
오에이 13년(1406년) 12월 27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즈코가 사망하자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천황 한 대에 두 번 상복을 입는 것(료안, 천자가 부모의 상을 치르는 일)은 불길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의 아내인 히노 야스코를 고코마츠 천황의 준모(准母)로 삼아, 천황이 다시 상복을 입는 것을 피하도록 조치했다.
2. 5. 사망
오에이 13년(1406년) 12월 27일, 56세로 훙거했다. 이즈코가 훙거하자,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천황 한 대에 두 번 상복을 입는 것(료안, 천자가 부모의 상을 치르는 일)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처 히노 야스코를 고코마츠 천황의 준모로 세워 이를 회피하게 했다.3. 상해 사건
에이토쿠 3년(1383년) 2월 1일, 고엔유 천황이 자신의 아내인 산조 이즈코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당시 치천의 군이었던 고엔유 천황과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 사이의 정치적 갈등 심화, 그리고 고엔유 천황 개인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건 당일, 고엔유 천황은 이즈코에게 목욕 시중을 명했으나 준비 미비를 이유로 거절당하자 격분하여 칼등으로 그녀를 심하게 구타했다. 이 폭행으로 이즈코는 중상을 입고 친정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아야 했다. 고엔유 천황은 이 사건 이후 할복을 시도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동을 보였고, 이는 그의 정치적 권위를 크게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고엔유 천황이 아시카가 요시미츠와 이즈코의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하여 폭력을 행사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러한 의심은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과거 행실과 맞물려, 훗날 고코마츠 천황의 출생에 대한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 1. 배경
에이토쿠 2년(1382년) 8월, 이즈코의 아버지 산죠 킨타다는 교토 시내의 토지를 얻고자 했다. 당시 교토 토지 배분권은 치천의 군이었던 고엔유 천황에게 있었다. 킨타다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에게 중개를 의뢰하여, 킨타다에게 토지를 지급해달라는 부케싯소(武家執奏)를 고엔유 천황에게 전달하게 했다.그러나 고엔유 천황은 이를 불쾌하게 여겨 처음에는 요청을 거절했다가, 이후 태도를 바꿔 "부케싯소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 땅은 주겠지만, 대신 딸 이즈코를 궁에서 내쫓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킨타다는 원래 원했던 토지를 포기하고 다른 토지를 받는 것으로 타협했지만, 이 일로 고엔유 천황과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같은 해 11월, 고엔유 천황은 킨타다에게 "지급한 토지를 반납하지 않으면 이즈코를 벌하겠다"고 압박했고, 이즈코의 권유에 따라 킨타다는 토지를 반납해야 했다.
연말에는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정월 의식 비용을 보냈으나, 고엔유 천황은 이를 돌려보내며 "이제 살아 있어도 소용없다"고 말할 정도로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를 보였다. 또한, 당시 출산한 지 겨우 20일이 지나 산후 조리 중이던 이즈코를 갑자기 불러들였는데, 이는 아버지 킨타다가 "너무 가혹하다"며 분노할 정도로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건 발생 이틀 전에는 선대 천황인 고코곤 천황의 기일에 고엔유 천황이 불사를 열었으나,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눈치를 본 전상인들이 아무도 참석하지 않아 그의 정치적 고립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상황이 발생했다.
3. 2. 사건 당일
2월 1일, 고엔유 천황은 이즈코에게 목욕 시중을 들라고 명했다. 하지만 당시 귀족의 목욕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고, 하카마와 유마키(湯巻)를 착용한 궁녀들의 봉사가 필요했다. 이즈코는 이러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고엔유 천황의 명령을 거절했다.이에 격분한 고엔유 천황은 이즈코의 방으로 가서 칼등으로 이즈코를 여러 차례 심하게 때렸다. 이후 고엔유 천황의 생모인 히로하시 나카코가 방문하여 아들을 달래는 한편, 이즈코가 치료를 위해 친정인 산조가로 갈 수 있도록 주선했다. 이즈코는 친정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고, 아시카가 요시미츠도 의사를 보냈지만, 다음 날까지 출혈이 멎지 않았고 여러 차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이 폭행 사건의 동기로 고엔유 천황이 아시카가 요시미츠와 이즈코 사이의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했다는 설이 있다.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이전에도 황족인 미츠히토 왕의 첩이나 자신의 동생 아시카가 미츠아키라의 아내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의 처첩을 자신의 첩으로 삼은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에, 고엔유 천황의 의심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1]
3. 3. 사건 이후
폭행 사건 이후, 고엔유의 생모인 히로하시 나카코가 방문하여 아들에게 술을 권하며 달래는 한편, 이즈코가 치료를 위해 친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손을 썼다. 이즈코는 친정인 산죠 가문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고, 요시미츠 또한 의사를 파견하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즈코의 출혈은 다음 날까지 멈추지 않았고, 그 사이 여러 차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이 사건의 배경에는 고엔유가 요시미츠와 이즈코의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요시미츠는 이전에도 남의 아내나 첩을 자신의 여자로 삼은 경우가 많았는데, 황족인 미츠히토 왕의 첩이나 심지어 자신의 동생인 아시카가 미츠아키라의 아내까지 빼앗은 전력이 있었다. 이러한 요시미츠의 행실 때문에 고엔유가 이즈코와의 관계를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시각이 있다[1]。 실제로 고엔유는 이 사건이 있고 3일 뒤, 자신의 또 다른 측실인 아사츠보네를 요시미츠와 밀통했다는 혐의로 출가시켜 추방하기도 했다.
한편, 고엔유는 이즈코 폭행 사건 2주 뒤에 할복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치는 소동을 벌였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행동들은 당시 최고 권력자인 치천의 군으로서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건 이후 고엔유는 사실상 정치적인 영향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훗날 작가 카이온지 쵸고로는 이즈코가 아들(고코마츠 천황)을 낳은 뒤 다시는 고엔유의 거처로 돌아가지 않은 점, 그리고 요시미츠의 이후 행동들을 근거로 고코마츠 천황이 사실은 요시미츠의 아들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폭행 사건은 고코마츠 천황의 출생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4. 평가 및 의혹
2월 1일, 고엔유는 이즈코에게 목욕 시중을 들라고 명했으나, 이즈코는 목욕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당시 목욕은 자주 하는 행사가 아니었고, 귀인의 목욕에는 격식을 갖춘 시녀들의 봉사가 필요했다. 이즈코의 거절에 격분한 고엔유는 이즈코의 방으로 들어가 칼등으로 여러 차례 폭행했다.
이후 고엔유의 생모 히로하시 나카코가 고엔유를 달래는 한편, 이즈코가 치료를 위해 친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이즈코는 친정인 산죠 가문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고, 요시미츠도 의사를 보냈으나, 이즈코는 다음 날까지 출혈이 멎지 않고 여러 차례 의식을 잃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이 폭행 사건의 배경에는 고엔유가 요시미츠와 이즈코의 관계를 의심했다는 설이 있다. 요시미츠는 이전에도 황족인 미츠히토 왕의 첩이나 동생 아시카가 미츠아키라의 아내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의 처첩을 자신의 첩으로 삼은 전력이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에, 고엔유의 의심에는 근거가 있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이 사건 사흘 뒤, 고엔유는 후궁 안사츠노츠보네를 요시미츠와의 밀통 혐의로 출가시키고 추방했다.
이즈코가 출산 후 고쇼로 돌아오지 않은 점과 요시미츠의 이후 행동들을 근거로, 작가 카이온지 쵸고로는 고코마츠 천황이 실제로는 요시미츠의 아들이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 폭행 사건 2주 후, 고엔유는 할복을 시도하다 미수에 그쳤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상황(治天の君)으로서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이후 정치적인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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