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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코곤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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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코곤 천황은 1352년부터 1371년까지 재위한 북조의 제4대 천황이다. 그는 고곤 천황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남북조 시대에 교토의 치안 불안정 속에서 즉위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지지를 받아 즉위했지만, 남조의 공격으로 여러 번 피난해야 했다. 1370년 아들 고엔유 천황에게 양위하고 법황으로 정치에 관여하다가 1374년에 사망했다. 재위 기간 동안 정도흥행을 추진했으나, 막부의 영향력과 재정난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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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코곤 천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고코곤 천황
고코곤 천황상 (궁내청 소장 『천자섭관어영』에서)
이야히토 (弥仁)
유칭니노미야
산노미야
시바노미야
법명고융 (光融)
릉묘후카쿠사 북릉
신상 정보
출생일1338년 3월 23일
사망일1374년 3월 12일
사망지야나기하라 전
아버지고곤 천황
어머니오기마치산조 히데코
재위 정보
즉위1352년 9월 25일
퇴위1371년 4월 9일
즉위례1354년 1월 21일
대嘗祭1354년 11월 30일
시대무로마치 시대
남북조 시대
연호간노
분나
엔분
고안
조지
오안
수도교토
정치 정보
관백니조 요시모토
구조 쓰네노리
고노에 미치쓰구
니조 요시모토
다카쓰카사 후유미치
니조 모로요시
정이대장군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아시카가 요시미쓰
기타 정보
명명무로마치 막부 제3대 정이대장군아시카가 요시미쓰의 명명자
추증고코곤인 (후에 고코곤 천황)

2. 생애

1352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남조에 화의를 청하면서 황통이 일시적으로 남조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남조가 교토를 공격하면서 평화가 깨졌다. 남조는 고곤 천황, 고묘 천황, 스코 천황, 황태자, 나오히토 친왕(고곤 천황의 아들)을 요시노로 데려가 교토에서 천황으로 즉위할 인물을 없애려 했다.[2]

천황이 없자 교토의 공무가 마비되었고, 이야히토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등의 추대로 고코곤 천황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남조의 빈번한 교토 점령으로 고코곤 천황은 여러 차례 오미국 등으로 피신해야 했다.

1370년 고코곤 천황은 아들 오미토 친왕에게 양위하겠다는 뜻을 막부에 전했다. 형 스코 천황이 아들 요시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세우려 하자 갈등이 빚어졌으나, 막부는 고코곤 천황의 손을 들어주었다. 고코곤 천황은 이듬해 양위했고 1374년 병으로 죽었다.[2]

고코곤 천황의 재위 기간은 1352년 9월 25일부터 1371년 4월 9일까지였다.[2] 남북조 시대에는 두 왕조 간 대립으로 교토의 치안이 매우 어지러웠다. 남조는 교토를 반복적으로 탈환했고, 고코곤 천황은 오미국 등지로 피신해야 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쇼군이 된 1368년 무렵 남조 세력이 약해지고 교토에 질서가 회복되었으며, 이 무렵부터 천황의 권위가 약해졌다.

1371년 4월 9일, 고코곤 천황은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상황이 되었다. 이 아들이 고엔유 천황이다. 그는 1374년 3월 12일 병사할 때까지 법황으로서 정치에 계속 개입했다. 그는 후카쿠사 북릉에 다른 천황들과 함께 합장되었다.

정평일통으로 북조가 붕괴된 후, 무로마치 막부와 화평을 파기한 남조는 북조의 주요 황족들을 납치했다. 고코곤(삼궁)은 납치를 면해 막부의 요청으로 급히 즉위했다. 이때 삼종신기는 남조에 징수되어 계승할 수 없었고, 신기 없는 즉위에 필요한 태상천황의 조선도 없어 계체천황의 선례가 참고되었다.

재위 중 고코곤 천황은 재정난과 인재난에 시달려 정무가 정체되었다. 남조의 거듭된 교토 침공으로 세 차례나 도읍을 떠났고, 귀경한 아버지 광엄법황과 지명원통의 전통을 두고 대립했다. 그럼에도 정평일통 이후 침체되었던 조의를 재흥시키고 두 차례 칙선와가집 편찬을 진행했다. 니조 요스키의 『토쿠하집』은 고코곤의 준칙선 연가집에 해당한다.

고코곤 천황은 20년 가까이 재위한 후 황자에게 양위하려 했다. 형인 숭광상황이 황자 영인 친왕의 황위 계승을 주장해 고코곤과 숭광 사이에 대립이 발생했다. 고코곤은 막부의 지지를 얻어 1371년 3월 황자 오인 친왕(고엔유 천황)에게 양위를 강행했다.

양위 후 고코곤은 치천의 군으로서 원정을 베풀고, 공가 소송법인 『응안법』을 제정하는 등 정무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흥복사 중도의 아소 발생으로 측근들이 방씨 처분되고 신제의 즉위례도 연기되었다. 고코곤은 스스로 해결하려 했고 중도와 격렬히 대립했다. 그러던 중 1374년 1월 천연두로 붕어했다. 향년 37세.

2. 1. 유년기

1338년 3월 2일(음력), 광엄상황(光厳上皇)의 황자로 태어났다.[1] 어머니는 정친정삼조수자(正親町三条秀子)이며, 고인 친왕(興仁親王)(스코 천황)의 이복동생이다. 광엄상황의 정비인 수자내친왕(寿子内親王)(휘안문원(徽安門院))을 준모(准母)로 삼았다.[1]

출생 직후부터 지명원통(持明院統)의 중신인 히노스케나(日野資名)에게 맡겨졌고, 히노스케나 사후에는 안거원(安居院) 芝|시바일본어 지역에서 히노스케나의 후실인 시바젠니(芝禅尼)에게 양육되었다.[6] 二宮|이궁일본어 또는 三宮|삼궁일본어이라고 불렸다.[2] 광엄상황은 종제인 나카토 친왕에게 황위 계승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궁은 묘법원(妙法院)에 입실할 예정이었다.[8]

2. 2. 즉위와 북조 재건

1352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남조에 화의를 청하여 둘로 나뉘었던 황통이 잠시 남조 쪽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352년 남조가 교토로 진격하면서 평화가 깨졌다. 남조는 북조의 고곤 천황, 고묘 천황, 스코 천황과 황태자, 황자 나오히토(고곤 천황의 아들)를 교토에서 요시노로 이송하여, 교토에서 천황으로 즉위할 만한 인물을 없애려 했다.[2]

천황이 사라지자 교토의 공무는 마비되었고, 이야히토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등의 추대로 고코곤 천황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남조의 빈번한 교토 점령으로 고코곤 천황은 몇 번이나 오미국 등으로 도피해야 했다.

고코곤 천황의 재위 기간은 1352년 9월 25일부터 1371년 4월 9일까지였다.[2]

1351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잠시 남조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남조가 잠시나마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1352년 4월에 깨졌다. 이때 남조는 고곤 천황, 고묘 천황, 스코 천황과 태자 다다히토 친왕을 교토에서 남조의 근거지였던 아나우로 납치했다. 이로 인해 교토에는 천황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이야히토 친왕이 1352년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지지 아래 천황이 되었다.[2]

이 시기 남북조 시대에는 두 경쟁 왕조 간의 대립으로 교토의 치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남조는 교토를 반복적으로 탈환했고, 고코곤 천황은 교토에서 오미국 등 다른 곳으로 끊임없이 피신해야 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쇼군이 된 무렵(1368년) 남조의 세력이 약해지고 교토에 질서가 회복되었다. 또한 이 무렵부터 천황의 권위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무로마치 막부 초대 장군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남조에 귀순하고, 1351년 11월 7일, 남조의 고무라카미 천황에 의해 스코 천황이 폐위되었으며, 고곤 상황의 원정이 중단되었다. (정평일통) 그러나 이듬해 1352년 윤2월 19일, 남조는 화평을 파기하고 교토에 침공했다. 정평일통은 붕괴되었고, 아시카가 요시아키(후의 막부 제2대 장군)는 오미 국으로 패주했다. 3월 15일 요시아키는 교토를 탈환했지만, 남조는 후퇴하는 과정에서 북조의 고곤 상황, 코묘 상황, 스코 상황, 나카히토 친왕을 연행하여 이후 카나나에에 유폐했다. 4월 2일에는 삼궁(고코곤 천황)의 연행설이 돌았으나, 이때 상경에 많은 무사들이 집결하여 삼궁은 화를 면했다.

교토 탈환전의 혼란으로 북조가 멸망한 후에도 약간 지속되었던 신사의 제사도 중단되었고, 도성에서는 거의 모든 조의가 중단되었다. 장기간 천황의 공위로 인한 인사의 정체도 심각했고, 조정·막부·사찰의 요직은 잇달아 공석이 되었다. 야마토 국에서는 가스가야마의 산림이 고갈되어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했지만, 가가쿠를 행하여 신의 뜻을 달래려 해도, 후지씨 장자가 공석이어서 할 수 없었다. 또한, 막부의 인사를 사찰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등의 사태가 발생했고, 아직도 구 다카우지 세력이 활개치는 가운데, 막부는 천황 대 천황의 대립 구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6월 3일, 요시아키의 뜻을 받은 사사키 도요히는 북조의 중신인 칸슈지 쓰네아키에게 삼궁의 즉위와 삼궁의 조모인 코우기몬인의 집정을 청했다. 코우기몬인은 요시아키가 삼상황과 폐태자를 남조에 넘긴 것에 대해 원망하여 요구를 거절했지만,[9] 막부의 거듭된 설득으로 겨우 승낙했다. 6월 25일, 코우기몬인은 막부의 지지를 받고 있던 니조 요스모토를 관백으로 임명했고, 27일에는 령지를 내려 관위연호를 정평일통 이전으로 되돌렸다.

삼궁의 즉위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고, 카잔 천황 출가 당시의 선례를 바탕으로 카나나에에 있는 상황의 "여재의 의"로 양국조서를 작성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도인 공현이 선례로서 적절하지 않다고 거절했다. 결국, 전 관백 이치조 쓰네미치가 진언한, 廷臣에 의해 옹립되어 즉위한 고대의 케이타이 천황의 선례(군신의립)를 참고하게 되었다. 즉위 직전에 거행된 원복 의식에서 삼궁의 이름은 "이야히토"(いやひと)로 정해졌고, 1352년 8월 17일, 이야히토는 토미가타 동동원전에서 즉위했다. (이하 "고코곤 천황"으로 한다) 삼종의 신기는 정평일통 당시 남조에 넘어갔기 때문에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신경이 들어 있던 당궤가 고곤 등이 처음 유폐되었던 이시키미즈 하치만궁에 남아 있어, 이것을 신경의 대용으로 했다(『고츠키 마사토오 스쿠네키』).[11] 신기 없이 즉위한 고코곤 천황은 이후 불완전한 천황이라는 콤플렉스가 따라다녔다.[13]

2. 3. 치세

1352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남조에 화의를 청해 잠시 황통이 남조로 통일되었으나, 같은 해 남조가 교토를 공격하면서 평화가 깨졌다. 남조는 북조의 고곤 천황, 고묘 천황, 스코 천황과 황태자, 황자 나오히토(고곤 천황의 아들)를 교토에서 요시노로 데려가, 교토에서 천황으로 즉위할 인물을 없애려 했다.[2]

천황이 없어 교토의 공무가 마비되자, 이야히토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등의 추대로 고코곤 천황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남조가 자주 교토를 점령하여 고코곤 천황은 여러 차례 오미 등으로 피신해야 했다.[16]

1370년 고코곤 천황은 아들 오미토 친왕에게 양위하겠다는 뜻을 막부에 전했다. 이 과정에서 형 스코 천황이 자신의 아들 요시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세우려 해 갈등이 빚어졌으나, 막부는 고코곤 천황의 편을 들었다. 고코곤 천황은 이듬해 양위했고, 1374년 병으로 사망했다.

고코곤 천황의 재위 기간은 1352년 9월 25일부터 1371년 4월 9일까지였다.[2] 이 시기 남북조 시대의 대립으로 교토의 치안은 매우 어지러웠다. 남조는 반복적으로 교토를 탈환했고, 고코곤 천황은 오미국 등지로 피신해야 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쇼군이 된 1368년 무렵 남조의 세력이 약해지고 교토에 질서가 회복되었으며, 이 무렵부터 천황의 권위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1371년 4월 9일, 고코곤 천황은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상황이 되었다. 이 아들이 고엔유 천황이다. 그는 1374년 3월 12일 사망할 때까지 법황으로서 정치에 계속 개입했다. 그는 후카쿠사 북릉에 다른 천황들과 함께 합장되었다.

정평일통으로 북조가 붕괴된 후, 무로마치 막부와의 화평을 파기한 남조는 북조의 주요 황족들을 납치했다. 삼궁(三宮, 후광엄)은 납치를 면했기에 막부의 요청에 따라 급히 즉위하게 되었다. 이때, 삼종신기는 남조에 의해 징수되었기에 계승할 수 없었고, 신기가 없는 경우 즉위에 필요한 태상천황의 조선(詔宣)도 없었기에 계체천황의 선례가 참고되었다.

재위 중에는 재정난과 인재난에 시달리며 정무가 정체되었다. 또한, 남조의 거듭된 교토 침공으로 세 차례나 도읍을 떠나야 했고, 귀경한 아버지 광엄법황(光嚴法皇)과 지명원통의 전통을 두고 대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평일통 이후 침체되었던 조의를 재흥시키고 두 차례에 걸쳐 칙선와가집 편찬을 진행시켰다. 니조 요스키(二条良基)의 『토쿠하집』(菟玖波集) 또한 후광엄의 준칙선 연가집(準勅撰連歌集)에 해당한다.

20년 가까이 재위한 후, 후광엄은 자신의 황자에게 양위할 것을 희망했다. 형인 숭광상황(崇光上皇)이 자신의 황자 영인 친왕(榮仁親王)의 황위 계승을 주장했기에 후광엄과 숭광 사이에 대립이 발생했다. 그래서 후광엄은 막부의 지지를 얻어 1371년 3월에 황자 오인 친왕(후엔유 천황)에게 양위를 강행한다.

양위 후에는 치천의 군으로서 원정을 베풀고, 공가 소송법인 『응안법』(応安法)을 제정하는 등 정무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흥복사 중도의 아소가 발생하자 후광엄의 측근들은 방씨(放氏)로 처벌되었고, 신제의 즉위례도 연기되었다. 후광엄은 스스로 해결을 시도하려 했고, 중도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그런 가운데 후광엄은 천연두를 앓고 1374년 1월에 붕어했다. 향년 37세.

2. 4. 양위와 황위 계승 문제

1370년 고코곤 천황은 아들 오미토 친왕에게 양위하겠다는 의사를 막부 측에 전달했고, 이 과정에서 형 스코 천황이 자신의 아들인 요시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세우고 싶어해 갈등이 빚어졌으나 막부는 고코곤 천황의 손을 들어주었다.[2] 고코곤 천황은 이듬해 양위하였고 1374년 병으로 죽었다.

고코곤 천황은 둘째 황자에게 양위할 뜻을 품게 된다. 황위 계승에서는 형인 스코 천황의 황자 영인이 1368년 1월 21일에 친왕선하되었던 데 비해, 고코곤 천황의 둘째 황자는 아직 친왕 선하를 받지 못하는 등 뒤처져 있었다. 1370년 8월에 고코곤 천황은 가장 신뢰하는 측근인 히노 타다미츠를 파견하여 둘째 황자에게 양위하는 문제를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를 감독하는 관령 호소카와 요리유키에게 자문했다. 결과는 고코곤 천황이 "마음속으로 기뻐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받아 스코 천황은 측근인 히노 노리미츠를 막부에 파견했지만, 막부는 방침을 바꾸지 않고, "먼저 성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가는 더 이상 시비를 묻지 않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같은 해 9월 18일에 고코곤 천황은 요시키에게도 양위 건을 상의하여 지지를 얻었다. 같은 달 24일에 스코 천황은 고코곤 천황에게 변명하려고 칙사를 파견하려 했지만, 칙사를 부탁받은 요시키와 간슈지 츠네아키는 모두 고사했다. 같은 해 11월 9일에 고코곤 천황은 은밀히 친필 간원문을 가스가·이시즈미·가모·히요시·키타노의 5사에 봉납하고 양위 및 립태자를 기원했다.[22]

1371년 3월 21일, 둘째 황자는 "오히토"(緒仁)라는 이름으로 친왕 선하를 받고, 3월 23일, 고코곤 천황은 오히토 친왕에게 양위했다(고엔유 천황). 동시에 고코곤 상황은 원정을 베풀었다. 고코곤 천황과 스코 천황은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지지만, 곧 사이가 나빠져서 측근 신하들도 마음대로 봉사하지 못했다고 하며, 이 일로 고코곤 천황과 스코 천황은 절교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2. 5. 실의의 붕어

고코곤 천황은 1374년 천연두로 37세의 나이에 붕어했다.[2] 붕어 직전, 흥복사 중도와의 갈등이 있었고, 중도는 고코곤 천황의 측근들을 방씨(放氏) 처분하기도 했다.[22] 이러한 상황에서 고코곤 천황의 죽음은 가스가 명신(春日明神)의 신벌이라는 소문이 돌았다.[22]

고코곤 천황의 장례식은 1374년 2월 2일에 센류지(泉涌寺)에서 거행되었으며,[32] 이후 막말까지 천황가의 장례식은 기본적으로 센류지에서 치러지게 되었다. 고코곤 천황에게는 후광엄원(後光厳院)이라는 추호가 올려졌는데,[33] 이는 고곤 천황의 정통 후계자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3. 정치

1352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남조에 화의를 청하면서 황통이 남조로 잠시 통일되었으나, 같은 해 남조가 교토를 공격하면서 평화가 깨졌다. 남조는 북조의 고곤 천황, 고묘 천황, 스코 천황, 황태자와 황자 나오히토(고곤 천황의 아들)를 요시노로 데려갔다. 이로 인해 교토에는 천황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지지 아래 이야히토 친왕이 고코곤 천황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남조가 교토를 자주 점령하면서 고코곤 천황은 여러 차례 오미 등으로 피신해야 했다.

1371년 고코곤 천황은 아들 고엔유 천황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상황이 되었고, 1374년 사망할 때까지 법황으로서 정치에 계속 개입했다. 고코곤 원정에서는 소송 제도가 정비되었고, 응안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고코곤 천황의 치세와 원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고코곤 천황의 치세와 원정
시기주요 사건 및 특징
1352년 - 1371년 (치세)
1371년 - 1374년 (원정)


3. 1. 고코곤 친정

1352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남조에 화의를 청하면서 황통이 남조로 잠시 통일되었으나, 같은 해 남조가 교토를 공격하면서 평화가 깨졌다. 남조는 북조의 고곤 천황, 고묘 천황, 스코 천황, 황태자와 황자 나오히토(고곤 천황의 아들)를 요시노로 데려갔다. 이는 교토에서 천황으로 즉위할 인물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

천황이 부재하자 교토의 공무는 마비되었고, 이야히토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등의 추대로 고코곤 천황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남조가 교토를 자주 점령하면서 고코곤 천황은 여러 차례 오미 등으로 피신해야 했다.

광의문원(広義門院)에게는 남성적인 치텐노킨(治天の君)과 같은 지도력을 기대할 수 없었고, 후견인이 될 아버지와 형도 남조에 유폐되어 있었기 때문에, 잡소(雑訴)를 비롯한 북조의 정무는 정체되었고, 형식적으로 고코곤 천황(後光厳)이 친정을 시작하는 데에도 2년이 걸렸다.[16] --

1353년 여름, 남조군이 교토에 압박해왔고, 6월 13일, 남조군에게 대패한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詮)과 함께 고코곤 천황은 미노국고지마(小島)로 행행했다. 이때 봉행한 것은 사이온지 사네토시(西園寺実俊)·만리코지 나카후사(万里小路仲房)·와시오 타카유키(鷲尾隆右)·히노 도키미츠(日野時光) 등 몇 명뿐이었지만, 후에 요스케와 코노에 미치쓰구(近衛道嗣)도 달려왔다. 남조는 고코곤 천황을 “가짜 주권자”, “가짜 조정”이라고 부르며 고코곤 천황 즉위식에 출사한 자와 고코곤 천황의 고지마 행행 봉행자를 처벌했지만, 한편으로 고코곤 천황도 봉행하지 않은 廷臣의 영지를 몰수했다. 고지마에서의 체류 중, 달려온 요스케에게 “지금까지 와준 이상, 자리를 굳힐 것을 약속하고, 더 이상 바뀌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관백직을 안도했다. 7월 20일에는 이세 신궁에 宸翰의 원문을 봉납했다. 7월 26일에 요시아키가 교토를 탈환하고, 9월 21일에 궁궐로 환행했다.

귀경 후 10월 28일에 귀간의정(鬼間議定)을 시작하고, 12월 27일에 즉위례를 거행하고, 다음해 1354년 11월 16일에 대전제(大嘗祭)를 거행했다. 같은 해 12월에 다시 남조군이 교토에 압박해왔고, 24일에 고코곤 천황은 요시아키와 함께 오미국 무사지(武佐寺)로 피난했지만, 다음해 1355년 3월 28일에 궁궐로 환행했다.

1356년 6월 11일, 18번째 칙선와카슈(勅撰和歌集)인 『신천재와카슈(新千載和歌集)』의 선진을 니조 요사다(二条為定)에게 명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의 칙주(執奏)이며, 무가 칙주에 의한 명령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같은 해 윤7월 11일, 『토쿠하슈(菟玖波集)』를 역사상 최초의 준칙선련가슈(准勅撰連歌集)로 한다. 이것은 다카우지의 칙주였지만, 사사키 도요히로(佐々木道誉)의 공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 12월에 다시 남조군이 압박해왔기 때문에 오미국으로 피난했지만, 다음해 2월 10일에 귀경했다. 또한, 귀경 이전인 1월 17일에도 이세 신궁에 원문을 봉납하고 천하태평을 기원했다.

남조의 유력한 세력이었던 다이나이씨(大内氏)·야마나씨(山名氏)가 무로마치 막부에 귀순하고, 전황이 진정된 정지(貞治) 연간(1362년 - 1368년) 전후, 고코곤 친정에서는 “공사흥행(公事興行)”의 기운이 높아졌다. 1361년에는 15년 만에 최승강(最勝講)이 거행되었고, 1363년 2월에는 재위 중 두 번째 칙선집인 『신집유와카슈(新拾遺和歌集)』의 편찬이 명령되었다. 5월 11일에는 궁궐에서 재위 첫 청의축국(晴儀蹴鞠)이 행해졌고, 10월 29일에는 요스케의 노력으로 중전(中殿)작문(作文)이 개최되었다. 1364년 12월에 춘일신목(春日神木)이 입락하여 3년간 재락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북조의 조의가 정체되었지만, 1366년 8월에 귀좌했다. 1367년 3월 29일에 중전가회가 열렸다. 이 회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쇼군(요시아키)의 참가가 실현되었다. 고코곤 천황의 어제(御製)는 다음과 같다.

1368년에는 “희대의 어흥선(御興善)”이라고 평가되는 고후시미인(後伏見院) 삼십삼회기 궁중참법강(宮中懺法講)이 행해졌다. 1370년 7월 3일에 행해진 고다이고인(光厳院) 칠회기의 신필법화팔강(宸筆法華八講)도 약의(略儀)하지 않고 무사히 행해졌고, 12월 22일에는 경관조목(京官除目)이 행해졌다. 정지 연간 전후의 “공사흥행”의 기운 속에서 연중 행사에 참가하는 공경의 수도 점차 회복되었다.

북조의 연중 행사에 참가한 공경의 수[17]
연대인원
1347년 - 1351년44
1352년 - 1356년19
1357년 - 1361년26
1362년 - 1366년28
1367년 - 1371년40



이 “공사흥행”에 대해 고코곤 천황 자신도 “공무흥행의 시절”이라고 말했고, 『태평기(太平記)』에서도 “총체적으로 이 군주가 치천(治天)하는 동안 끊어진 것을 잇고 폐지된 것을 일으키신 현려(叡慮)이다”라고 평가되고 있다.

의정(원정에서는 원평정), 잡소사태(잡소의정), 기록소(원정에서는 문전)를 두었다. 기록소에서는 광엄원정과 마찬가지로 정중도 열렸다. 의정에서는 신사나 천궁, 고려로부터의 이국첩장 등의 심의도 행해졌다.

그러나 고코곤 천황의 즉위 경위, 광의문원・광엄법황・숭광상황의 존재, 무로마치 막부의 약진 등, 광엄원정 이상으로 여러 가지 제약이 따랐다. 잡소사태는 6일・16일・26일의 월 3회로 광엄원정과 같은 빈도로 개최되었지만, 기록소 정중도 같은 날 개최되었으며, 중세사 연구자인 미카와 케이는 소송 기관으로서 통합・축소되었다고 말한다. 잡소사태・정중・월소는 연기・중지를 반복하여, 소송을 수리・심의하는 전주나 기록소 기인의 태만으로 개정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 고코곤 천황 자신도, 량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후광엄원기』 - 동산어문고 소장. 기록 기간은 1365년부터 1371년.
  • 『후광엄원어백수』 - 봄, 여름, 가을, 겨울, 연애, 잡가로 구성됨. 연문백수 중 하나.

3. 2. 고코곤 원정

1351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잠시 남조에 충성을 바치면서 남조가 일시적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1352년 4월에 깨졌다. 이때 남조는 고곤 상황, 고묘 상황, 스코 상황과 태자를 교토에서 남조의 근거지였던 요시노로 납치했다.[2] 이로 인해 교토에는 천황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지지 아래 이야히토 친왕이 1352년 고코곤 천황으로 즉위했다.[2]

이 시기 남북조 시대에는 두 왕조 간의 대립으로 교토의 치안이 매우 어지러웠다. 남조는 교토를 반복적으로 탈환했고, 고코곤 천황은 교토에서 오미 국 등 다른 곳으로 계속 피신해야 했다.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쇼군이 된 1368년 무렵 남조의 세력이 약해지고 교토에 질서가 회복되었다. 이 무렵부터 천황의 권위도 약해지기 시작했다.

1371년 4월 9일, 고코곤 천황은 아들 고엔유 천황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상황이 되었다. 1374년 3월 12일,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법황으로서 정치에 계속 개입했다. 그는 후카쿠사 북릉에 다른 천황들과 함께 합장되었다.

고코곤 천황은 양위 후 지천의 군으로서 원정을 펼치고, 공가 소송법인 응안법을 제정하는 등 정무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흥복사 중도(衆徒)의 아소(嗷訴) 발생으로 고코곤 천황의 측근들은 방씨(放氏)로 처벌되었고, 신제(新帝)의 즉위례도 연기되었다. 고코곤 천황은 스스로 해결을 시도하며 중도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그러던 중 천연두를 앓고 응안 7년(1374년) 1월에 붕어했다. 향년 37세였다.

모리 시게아키는 고코곤 원정의 성격을, 다소 규모는 작지만 광엄 원정의 전통을 계승하고, 법 제정에 있어서는 후시미 원정·후후시미 원정을 계승한 것이었다고 평가한다.[22]

4. 인물

고코곤 천황은 1338년광엄상황의 황자로 태어났다.[1] 황위 계승과는 인연이 없어, 묘법원에 들어갈 예정이었다.[8]

정평일통(正平一統)으로 북조가 붕괴된 후, 남조는 북조의 주요 황족들을 납치했다. 삼궁(三宮)은 납치를 면해 막부의 요청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이때 삼종신기는 남조에 징수되었기에 계승할 수 없었고, 신기가 없는 즉위에 필요한 태상천황의 조선(詔宣)도 없었기에 계체 천황의 선례가 참고되었다.[1]

재위 중에는 재정난과 인재난에 시달렸고, 남조의 침공으로 세 차례나 도읍을 떠나야 했다. 아버지 광엄법황과 지명원통의 전통을 두고 대립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평일통 이후 침체되었던 조의(朝儀)를 재흥시키고 두 차례에 걸쳐 칙선와카집을 편찬했다. 니조 요스키의 『토쿠하집』은 고코곤 천황의 준칙선 연가집(準勅撰連歌集)에 해당한다.[1]

20년 가까이 재위한 후, 자신의 황자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형인 숭광상황이 자신의 황자 영인 친왕의 황위 계승을 주장하여 대립했다. 막부의 지지를 얻어 1371년에 황자 오인 친왕에게 양위를 강행했다.[1]

양위 후에는 치천의 군으로서 원정(院政)을 베풀고, 공가 소송법인 『응안법』(応安法)을 제정하는 등 적극적으로 정무에 임했다. 그러나 흥복사 중도(衆徒)의 아소(嗷訴)로 측근들이 처벌받고, 신제(新帝)의 즉위례도 연기되었다. 1374년 천연두를 앓고 붕어했다.[1]

장례식은 센류지(泉涌寺)에서 거행되었고, 이후 막말까지 천황가의 장례식은 기본적으로 센류지에서 치러지게 되었다.[1]


  • 학문을 좋아하고 와카(和歌)에도 뛰어났으며, 칙선집(勅撰集)에 45수가 수록되었다.[24]
  • 뛰어난 서예가로 꼽힌다.[25]
  • 역병 유행 시 반야심경을 사경했다.[26]
  • 광엄법황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그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며 렴암(諒闇)을 행하였다.[1]
  • 숭광상황과는 한때 절교 상태였지만, 광엄원의 연기 법요(年忌法要)에 함께 참석하는 등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1]

5. 연호


  • 간노 3년 8월 17일 (1352년 9월 25일)
  • 분나 5년 3월 28일 (1356년 4월 29일)
  • 엔분 6년 3월 29일 (1361년 5월 4일)
  • 고안 2년 9월 23일 (1362년 10월 11일)
  • 조지 7년 2월 18일 (1368년 3월 7일)
  • 오안 4년 3월 23일 (1371년 4월 9일)

6. 가계도

텐지|てんじ일본어 스켄몬인(崇賢門院) 히로하시(후지와라) 나카코(廣橋(藤原) 仲子) (1339-1427) - 젠호지 마사키요(善法寺 通清)의 딸이자 히로하시 카네츠나(広橋 兼綱)의 양녀


  • 제2황자 : 오오히토 친왕(緒仁 親王) - (고엔유 천황)
  • 제6황자 : 에이죠 법친왕(永助 法親王) 또는 히토나가 친왕(煕永 親王) (1362-1437)
  • 제7황자 : 교닌 법친왕(尭仁 法親王) (1363-1430)
  • 제13황자 : 교세이 법친왕(尭性 法親王) (1371-1388)
  • 궁인 : 우에몬사노 츠보네(右衛門佐局) 후지와라씨(藤原氏)
  • 제1황자 : 타츠사다 친왕(尊貞 親王) 또는 료닌 법친왕(亮仁 法親王) (1355-1370)
  • 제3황자 : 히토히라 친왕(煕平 親王) 또는 코죠 법친왕(行助 法親王) (1360-1386)
  • 제4황자 : ? (1361-1369)
  • 제8황자 : 카쿠죠 법친왕(覚增 法親王) (1363-1390)
  • 궁인 : 호키노 츠보네(伯耆局) 후지와라씨(藤原氏) - 승려 호겐(法印) 쵸카이(長快)의 딸이자 오기마치산죠 사네츠구(正親町三条 実継)의 양녀
  • 제1황녀 : 준삼후(准三后) 나오코(치시) 내친왕(治子 内親王) (?-1390)
  • 제5황자 : 아리히토 친왕(新仁 親王) 또는 카쿠에 법친왕(覚叡 法親王) (1361-1377)
  • 제9황자 : 히사타츠 친왕(久尊 親王) 또는 토엔 법친왕(道円 法親王) (1364-1385)
  • 제12황자 : 쇼죠 법친왕(聖助 法親王) (1371-?)
  • 궁인 : 쇼나곤노나이시|しょうなごんのないし일본어(少納言内侍) 타치바나 시게코(한시)(橘繁子) - 타치바나 모테시게(橘 以繁)의 딸
  • 제11황자 : 묘쇼 법친왕(明承 法親王) (1367-1396)
  • 생모불명
  • 제10황자 : 칸슈 법친왕(寛守 法親王) (1366-1401)
  • 제14황자 : 미치노부 친왕(道信 親王) 또는 칸쿄 법친왕(寛教 法親王) (1373-1405)
  • 제2황녀 : 미코(겐시) 내친왕(見子 内親王)
  • 제15황자 : ?
  • 제3황녀 : 슈닌 여왕(秀仁 女王)

7. 남조의 경쟁자

고코곤 천황은 남북조 시대에 고무라카미 천황, 조케이 천황 등 남조의 경쟁자들과 대립하였다.

참조

[1]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2]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Stanford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貞治5年12月7日(13660120070) 1条 https://wwwap.hi.u-t[...]
[4] 서적 尊皇攘夷―水戸学の四百年― 新潮社
[5] 웹사이트 後光厳天皇 2023-01-13
[6] 웹사이트 安居院 https://kotobank.jp/[...] 2024-03-18
[7] 웹사이트 芝大宮町 https://kotobank.jp/[...] 2024-03-18
[8] 서적 日本の歴史11 太平記の時代 講談社学術文庫
[9] 서적 日本の歴史9 南北朝の動乱 新装版 中公文庫
[10] 웹사이트 後光厳天皇 https://kotobank.jp/[...] 2024-03-18
[11] 서적 南北朝史論
[12] 논문 神鏡不在の内侍所御神楽 https://niigata-u.re[...] 新潟大学人文学部
[13] 서적 日本の歴史12 室町人の精神 講談社学術文庫
[14] 웹사이트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文和元年11月15日(13520110150) 1条 https://ap.hi.u-toky[...]
[15] 웹사이트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文和元年11月15日(13520110150) 2条 https://ap.hi.u-toky[...]
[16] 웹사이트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文和2年6月13日(13530060130) 1条 https://ap.hi.u-toky[...]
[17] 웹사이트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文和2年7月20日(13530070200) 1条 https://ap.hi.u-toky[...]
[18] 서적 中世の天皇と音楽
[19] 웹사이트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貞治元年2月10日(13620020100) 1条 https://ap.hi.u-toky[...]
[20] 웹사이트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貞治元年1月17日(13620010170) 1条 https://ap.hi.u-toky[...]
[21] 웹사이트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応安3年12月22日(13700120220) 1条 https://ap.hi.u-toky[...]
[22] 웹사이트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応安3年11月9日(13700110090) 1条 https://ap.hi.u-toky[...]
[23] 논문 公家訴訟における文書の機能論的考察
[24] 웹사이트 後光厳天皇 https://kotobank.jp/[...] 2024-03-17
[25] 웹사이트 後光厳天皇宸翰書状 https://search.homma[...] 2023-05-21
[26] 웹사이트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康安元年6月6日(13610060060) 1条 https://ap.hi.u-toky[...]
[27] 서적 歴代御製集 3 https://dl.ndl.go.jp[...] 芙蓉会
[28] 웹사이트 所蔵史料目録データベース https://ap.hi.u-toky[...]
[29] 서적 古記録入門(増補改訂版) 吉川弘文館
[30] 서적 列聖全集  御撰解題 https://dl.ndl.go.jp[...] 列聖全集編纂会
[31] 서적 新編纂図本朝尊卑分脈系譜雑類要集(6) https://dl.ndl.go.jp[...] 吉川弘文館
[32] 웹사이트 大日本史料総合データベース、応安7年2月2日(13740020020) 1条 https://ap.hi.u-toky[...]
[33] 서적
[34] 서적 陵墓要覧 昭和9年11月調 https://dl.ndl.go.jp[...]
[35] 서적 陵墓要覧 昭和9年11月調 https://dl.ndl.g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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