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케베츠 불곰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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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케베츠 불곰 사건은 1915년 12월 홋카이도 산케베츠 지역에서 발생한 불곰의 습격 사건이다. 메이지 시대 홋카이도 개척 과정에서 인간과 야생동물의 충돌이 잦았으며, 이 사건으로 7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었다. 1915년 12월 9일, 곰은 오타 가를 습격하여 2명을 살해하고, 다음 날 장례식에 난입하여 공포를 조성했다. 이후 곰은 미야우케 가와 사이토 가를 잇따라 공격하여 추가 사상자를 냈다. 12월 14일, 곰은 사냥꾼 야마모토 헤이키치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 사건은 소설, 영화, 만화 등 다양한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곰의 습성,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교훈을 남겼다. 사건 현장에는 복원 현지가 조성되었으며, 100주년 추도 법요가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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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년 12월 - 사리카미스 전투
제1차 세계 대전 중 캅카스 전역에서 벌어진 사리카미스 전투는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군을 포위하여 카르스와 바투미를 탈환하려 했으나, 추위, 보급 부족, 러시아군의 저항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배하여 캅카스 전역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산케베츠 불곰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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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명칭 | 산케베츠 불곰 사건 |
다른 명칭 | 로쿠센사와 곰 습격 사건 도마마에 불곰 사건 |
발생 장소 | 홋카이도 도마마에군 도마마에촌 오아자 치카리시베쓰무라 산케베츠 로쿠센사와 |
좌표 | 44°8′1.3″N 141°47′52.1″E |
발생 날짜 | 1915년 12월 9일 - 12월 14일 |
사건 개요 | 체중 340kg, 코에서 뒷발꿈치까지 길이 2.7m의 에조불곰이 수차례에 걸쳐 민가를 습격함. |
원인 | 불명 |
수단 | 곰의 공격 |
사망자 | 7명 |
부상자 | 3명 |
관련자 | 불곰 |
결과 | 사살 |
배경 | |
배경 | 1915년, 홋카이도 도마마에 산케베츠 지역에서 발생한 일본 역사상 최악의 곰 습격 사건 |
추가 정보 | |
관련 정보 | "곰을 만나면 죽은 척 하라"는 도시 전설이 탄생한 계기가 된 사건 |
2. 사건의 배경
19세기 말, 메이지 정부는 홋카이도 개척을 본격화했다. 산케베츠 지역도 이 시기에 개척된 곳 중 하나이다. 개척민들은 원시림을 개간하고 농지를 조성했지만, 야생동물과의 충돌이 잦았다.
1915년 11월 중순 새벽, 에조 불곰 한 마리가 홋카이도 서부 해안에서 내륙으로 약 11km 떨어진 데시오 국의 작은 개척 마을인 산케베츠 로쿠센-자와의 이케다 가에 나타났다. 이 예상치 못한 만남에 이케다 가의 말이 크게 놀랐지만, 곰은 수확한 옥수수만 가져간 채 도망쳤다. 당시 산케베츠는 새로 정착된 곳이었기에 야생동물의 침범은 흔한 일이었다.
1915년 11월 20일, 곰이 다시 나타났다. 말의 안전을 걱정한 이케다 가의 가장은 둘째 아들 카메타로와 자신의 마을 및 인근 마을에서 온 마타기 2명을 불렀다.
11월 30일, 곰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들은 곰에게 총을 쐈지만 죽이는 데 실패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곰의 발자국을 따라갔고, 이는 오니시카 산을 향했다. 수렵대는 길을 따라 혈흔을 발견했지만, 눈보라 때문에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혈흔을 통해 수렵대는 부상당한 곰이 더 이상 정착촌을 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2. 1. 홋카이도의 개척
19세기 말, 메이지 정부는 홋카이도 개척을 본격화했다. 산케베츠 지역도 이 시기에 개척된 곳 중 하나이다. 개척민들은 원시림을 개간하고 농지를 조성했지만, 야생동물과의 충돌이 잦았다.1915년 11월 중순 새벽, 에조 불곰 한 마리가 홋카이도 서부 해안에서 내륙으로 약 11km 떨어진 데시오 국의 작은 개척 마을인 산케베츠 로쿠센-자와의 이케다 가에 나타났다. 이 예상치 못한 만남에 이케다 가의 말이 크게 놀랐지만, 곰은 수확한 옥수수만 가져간 채 도망쳤다. 당시 산케베츠는 새로 정착된 곳이었기에 야생동물의 침범은 흔한 일이었다.
1915년 11월 20일, 곰이 다시 나타났다. 말의 안전을 걱정한 이케다 가의 가장은 둘째 아들 카메타로와 자신의 마을 및 인근 마을에서 온 마타기 2명을 불렀다.
11월 30일, 곰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들은 곰에게 총을 쐈지만 죽이는 데 실패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곰의 발자국을 따라갔고, 이는 오니시카 산을 향했다. 수렵대는 길을 따라 혈흔을 발견했지만, 눈보라 때문에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혈흔을 통해 수렵대는 부상당한 곰이 더 이상 정착촌을 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2. 2. 산케베츠 지역
산케베츠(三毛別)는 아이누어로 "강 아래로 흘러가는 강"을 의미하는 "산케・페츠(サンケ・ペツ)"에서 유래되었다.[10][11] 비슷한 지명으로는 가모에나이촌의 "산나이(珊内)"[12][13], 도카치 지청의 우페페산케 산[14], 아오모리현 아오모리시 교외의 산나이(三内)[15] 등이 있다. 산케베츠는 홋카이도 북서부, 데시오 산맥 기슭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2. 3. 곰의 출현
1915년 11월 중순 새벽, 에조 불곰 한 마리가 홋카이도 서부 해안에서 내륙으로 약 11km 떨어진 데시오 국의 작은 개척 마을인 산케베츠 로쿠센-자와의 이케다 가에 나타났다. 이 예상치 못한 만남에 이케다 가의 말이 크게 놀랐지만, 곰은 수확한 옥수수만 가져간 채 도망쳤다.[16] 당시 산케베츠는 새로 정착된 곳이었기에 야생동물의 침범은 흔한 일이었다. 육선택이라고 불렸던 개척 마을은 현재 루페슈페나이 강 상류에 위치해 있었으며, 도마마에 중심부에서 30킬로미터 정도 남동쪽에 있었으며, 15채의 가옥이 있었다.11월 20일 미명, 곰이 다시 나타났지만, 피해는 없었다. 곰의 위협을 가까이 느낀 이케다 토미조는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불안감을 더했다.[17] 말의 안전을 걱정한 이케다 가의 가장은 둘째 아들 카메타로와 자신의 마을 및 인근 마을에서 온 마타기 2명을 불렀다.
11월 30일, 마타기 두명에게 잠복을 부탁했고 불곰이 나타났지만, 상처만 입혔을 뿐 놓치고 말았다.[18] 다음 날 아침, 그들은 곰의 발자국을 따라갔고, 이는 오니시카 산을 향했다. 수렵대는 길을 따라 혈흔을 발견했지만, 눈보라 때문에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혈흔을 통해 수렵대는 부상당한 곰이 더 이상 정착촌을 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3. 사건 발생
1915년 12월 9일 오전 10시 30분, 거대한 불곰이 오타 가의 집에 나타났다. 농부의 아내인 아베 마유와 마유가 돌보고 있던 아기 하스미 미키오가 집에 있었다. 미키오는 머리를 물려 사망했다.[19] 마유는 장작을 던지는 등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탈출을 시도했지만, 곰에게 붙잡혀 산케베츠 제국 산림으로 끌려갔다. 당시 묘사에 따르면, 그 광경은 마치 도살장과 같았으며, 농가 바닥에는 피가 고여 있었다.[20] [21]
오타 사부로가 집에 남아있던 사실혼 관계의 아내 아베 마유와 양자로 삼을 예정이었던 하스미 미키오(당시 6세)가 불곰에게 습격당했다. 사부로는 산에서 작업 중이라 부재 중이었지만, 귀가했을 때 이로리(화로)에 앉아 있는 미키오를 발견했다. 미키오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19] 불곰은 마유의 시신을 끌고 토간(흙바닥)을 지나 창문으로 밖으로 나간 듯, 창틀에는 마유의 것으로 보이는 수십 가닥의 머리카락이 얽혀 있었다.[20] [21]
가해 곰을 추적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이 날은 해질녘이 다가오면서 주민들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21] 불곰은 인간의 고기 맛을 알게 되었고, 마유의 시신을 눈 속에 숨기려 한 것은 저장 식품으로 만들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른 아침, 사이토 이시고로와 미요케 야스타로는 심부름을 위해 마을을 나섰다. 한편, 갈색 곰을 잡고 마유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30명의 수색대가 조직되었다.[22] 150m도 채 들어가지 않아 수색대는 곰과 마주쳤다. 다섯 명이 총을 쐈지만, 한 발만 명중했다. 분노한 곰은 물러났고, 사람들은 부상을 면했다. 곰이 달아난 후, 사냥꾼들은 그 지역을 수색하다가 사할린 가문비나무 밑 눈 위에서 말라붙은 피를 발견했다. 눈 아래에는 머리와 다리 일부만 남은 마유의 시체가 있었다. 곰은 마유의 시체를 보존하고 청소 동물로부터 숨기기 위해 눈 속에 숨겨 놓았는데, 이는 이 갈색 곰이 공격의 범인이라는 증거였다.
마을 사람들은 일단 곰이 사람의 살점을 맛보면 반드시 다시 마을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마을 사람들은 총을 들고 오타 가의 집으로 모였다. 그날 밤 8시쯤, 곰이 다시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은 곰이 돌아올 것을 예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의 출현에 당황했다. 한 남자가 곰을 향해 총을 쐈다. 300m 떨어진 옆집 미요케 가에 배치된 50명의 경비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곰은 숲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경비대는 다시 집결하여 곰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곳을 따라 하류로 향했다.[22][23][24]
같은 날 밤, 오타 저택에서 간오와 마유의 장례식이 거행되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곰의 습격에 두려움을 느껴 참석한 사람은 로쿠센자와에서 3명, 미케베츠에서 2명, 간오의 부모와 그 지인, 상주인 오타 사부로를 합쳐 9명뿐이었다. 오후 8시 30분쯤, 곰이 난입했다. 램프가 꺼지고 관이 뒤집혀 유해는 흩어졌으며, 공포에 질린 참석자들은 보에 올라가거나 밖으로 뛰쳐나가는 등, 우왕좌왕하는 대혼란이 벌어졌다.[23] 호리구치 세이사쿠는 실내에 머물렀지만, 하야사토 렌미 카시치는 재빨리 아내 치세를 밟고 다락방의 보로 올라갔고, 밟힌 치세는 호리구치의 도움을 받아 겨우 천장의 보로 피신했다. 카시치는 죽을 때까지 치세에게 머리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 300m 떨어진 집에서 식사를 하던 50명이 달려왔지만, 곰은 이때는 모습을 감췄다. 희생자가 나오지 않은 것에 안도한 일행은 일단 명경가로 대피하려고 하류로 향했다.[24]
오타 가에 대한 공격 소식이 전해진 후, 미야우케 야스타로의 아내 야요는 넷째 아들 우메키치를 업고 늦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곰이 창문을 부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난로 위의 냄비가 뒤집히고 등유 램프가 꺼져 집 안은 어둠에 잠겼다.[26] 야요는 도망치려 했지만, 둘째 아들 유지로가 다리에 매달려 실패했다. 곰은 야요와 우메키치를 공격했다.
오도는 유일한 보디가드로 집에 남아 있었다. 그가 문으로 달려가자 곰은 그를 쫓기 위해 야요와 우메키치를 놓아주었다. 야요는 아이들과 함께 탈출했다. 오도는 가구 뒤에 숨으려 했지만, 등에 발톱 자국이 남았다. 곰은 미야우케 가의 셋째 아들 킨조와 사이토 가의 넷째 아들 하루요시를 살해하고, 사이토 가의 셋째 아들 이와오에게 중상을 입혔다.[27] 다음 표적은 사이토 이시고로의 임신한 아내 타케였다. 타케는 곰에게 배를 건드리지 말고 머리를 먹어달라고 애원했지만, 상반신부터 먹혀 살해되었다.[27]
곰을 추격하던 경비병들은 곰의 흔적을 잘못 따라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정착지로 돌아왔을 때, 심하게 부상당한 야요가 미야우케 가에서 벌어진 공격 소식을 전했다. 경비대는 생존자를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 곰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였다고 믿은 일부 경비병은 집에 불을 지르자고 제안했지만, 야요는 아이들 중 일부가 살아 있기를 바라며 이를 금지했다.
경비병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한 그룹은 문에서 경비를 섰고, 다른 그룹은 집 뒤로 갔다. 신호와 함께 뒤에 있던 그룹이 소란을 피우자, 곰이 앞문에 나타났다. 선두 경비병의 총이 오발되면서 사격선이 막혔고, 곰은 밤으로 도망쳤다. 자작나무 껍질 횃불을 들고 집 안에 들어간 그들은 공격의 결과를 확인했다.[27]
타케의 배는 찢어져 태아가 끌려 나왔지만, 곧 사망했다.[28][29] 이와오는 어머니 타케의 참사를 모른 채 "엄마! 곰 잡아줘!"라고 헛소리를 하며 물을 찾다가 20분 후 숨을 거두었다.[30]
이 날의 습격으로 타케, 킨조, 이와오, 하루요시, 타케의 태아 5명이 살해되었고, 야요, 우메키치, 요시키치 3명이 중상을 입었다.[31] 리키조와 히사노는 생존했다.[28] 유지로는 어머니 야요와 동생 우메키치가 중상을 입었음에도 함께 탈출하여 무사했다.[31]
3. 1. 첫 번째 습격 (12월 9일)
1915년 12월 9일 오전 10시 30분, 거대한 불곰이 오타 가의 집에 나타났다. 농부의 아내인 아베 마유와 마유가 돌보고 있던 아기 하스미 미키오가 집에 있었다. 미키오는 머리를 물려 사망했다.[19] 마유는 장작을 던지는 등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탈출을 시도했지만, 곰에게 붙잡혀 산케베츠 제국 산림으로 끌려갔다. 당시 묘사에 따르면, 그 광경은 마치 도살장과 같았으며, 농가 바닥에는 피가 고여 있었다.[20] [21]오타 사부로가 집에 남아있던 사실혼 관계의 아내 아베 마유와 양자로 삼을 예정이었던 하스미 미키오(당시 6세)가 불곰에게 습격당했다. 사부로는 산에서 작업 중이라 부재 중이었지만, 귀가했을 때 이로리(화로)에 앉아 있는 미키오를 발견했다. 미키오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19] 불곰은 마유의 시신을 끌고 토간(흙바닥)을 지나 창문으로 밖으로 나간 듯, 창틀에는 마유의 것으로 보이는 수십 가닥의 머리카락이 얽혀 있었다.[20] [21]
가해 곰을 추적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고, 이 날은 해질녘이 다가오면서 주민들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21] 불곰은 인간의 고기 맛을 알게 되었고, 마유의 시신을 눈 속에 숨기려 한 것은 저장 식품으로 만들기 위한 행동이었다.
3. 2. 수색과 곰의 재출현 (12월 10일)
이른 아침, 사이토 이시고로와 미요케 야스타로는 심부름을 위해 마을을 나섰다. 한편, 갈색 곰을 잡고 마유의 유해를 수습하기 위해 30명의 수색대가 조직되었다.[22] 150m도 채 들어가지 않아 수색대는 곰과 마주쳤다. 다섯 명이 총을 쐈지만, 한 발만 명중했다. 분노한 곰은 물러났고, 사람들은 부상을 면했다. 곰이 달아난 후, 사냥꾼들은 그 지역을 수색하다가 사할린 가문비나무 밑 눈 위에서 말라붙은 피를 발견했다. 눈 아래에는 머리와 다리 일부만 남은 마유의 시체가 있었다. 곰은 마유의 시체를 보존하고 청소 동물로부터 숨기기 위해 눈 속에 숨겨 놓았는데, 이는 이 갈색 곰이 공격의 범인이라는 증거였다.마을 사람들은 일단 곰이 사람의 살점을 맛보면 반드시 다시 마을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다. 마을 사람들은 총을 들고 오타 가의 집으로 모였다. 그날 밤 8시쯤, 곰이 다시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은 곰이 돌아올 것을 예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곰의 출현에 당황했다. 한 남자가 곰을 향해 총을 쐈다. 300m 떨어진 옆집 미요케 가에 배치된 50명의 경비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곰은 숲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경비대는 다시 집결하여 곰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곳을 따라 하류로 향했다.[22][23][24]
같은 날 밤, 오타 저택에서 간오와 마유의 장례식이 거행되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곰의 습격에 두려움을 느껴 참석한 사람은 로쿠센자와에서 3명, 미케베츠에서 2명, 간오의 부모와 그 지인, 상주인 오타 사부로를 합쳐 9명뿐이었다. 오후 8시 30분쯤, 곰이 난입했다. 램프가 꺼지고 관이 뒤집혀 유해는 흩어졌으며, 공포에 질린 참석자들은 보에 올라가거나 밖으로 뛰쳐나가는 등, 우왕좌왕하는 대혼란이 벌어졌다.[23] 호리구치 세이사쿠는 실내에 머물렀지만, 하야사토 렌미 카시치는 재빨리 아내 치세를 밟고 다락방의 보로 올라갔고, 밟힌 치세는 호리구치의 도움을 받아 겨우 천장의 보로 피신했다. 카시치는 죽을 때까지 치세에게 머리를 들지 못했다고 한다. 300m 떨어진 집에서 식사를 하던 50명이 달려왔지만, 곰은 이때는 모습을 감췄다. 희생자가 나오지 않은 것에 안도한 일행은 일단 명경가로 대피하려고 하류로 향했다.[24]
3. 3. 두 번째 습격 (12월 10일 밤)
오타 가에 대한 공격 소식이 전해진 후, 미야우케 야스타로의 아내 야요는 넷째 아들 우메키치를 업고 늦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곰이 창문을 부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난로 위의 냄비가 뒤집히고 등유 램프가 꺼져 집 안은 어둠에 잠겼다.[26] 야요는 도망치려 했지만, 둘째 아들 유지로가 다리에 매달려 실패했다. 곰은 야요와 우메키치를 공격했다.오도는 유일한 보디가드로 집에 남아 있었다. 그가 문으로 달려가자 곰은 그를 쫓기 위해 야요와 우메키치를 놓아주었다. 야요는 아이들과 함께 탈출했다. 오도는 가구 뒤에 숨으려 했지만, 등에 발톱 자국이 남았다. 곰은 미야우케 가의 셋째 아들 킨조와 사이토 가의 넷째 아들 하루요시를 살해하고, 사이토 가의 셋째 아들 이와오에게 중상을 입혔다.[27] 다음 표적은 사이토 이시고로의 임신한 아내 타케였다. 타케는 곰에게 배를 건드리지 말고 머리를 먹어달라고 애원했지만, 상반신부터 먹혀 살해되었다.[27]
곰을 추격하던 경비병들은 곰의 흔적을 잘못 따라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정착지로 돌아왔을 때, 심하게 부상당한 야요가 미야우케 가에서 벌어진 공격 소식을 전했다. 경비대는 생존자를 구하기 위해 달려갔다. 곰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였다고 믿은 일부 경비병은 집에 불을 지르자고 제안했지만, 야요는 아이들 중 일부가 살아 있기를 바라며 이를 금지했다.
경비병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한 그룹은 문에서 경비를 섰고, 다른 그룹은 집 뒤로 갔다. 신호와 함께 뒤에 있던 그룹이 소란을 피우자, 곰이 앞문에 나타났다. 선두 경비병의 총이 오발되면서 사격선이 막혔고, 곰은 밤으로 도망쳤다. 자작나무 껍질 횃불을 들고 집 안에 들어간 그들은 공격의 결과를 확인했다.[27]
타케의 배는 찢어져 태아가 끌려 나왔지만, 곧 사망했다.[28][29] 이와오는 어머니 타케의 참사를 모른 채 "엄마! 곰 잡아줘!"라고 헛소리를 하며 물을 찾다가 20분 후 숨을 거두었다.[30]
이 날의 습격으로 타케, 킨조, 이와오, 하루요시, 타케의 태아 5명이 살해되었고, 야요, 우메키치, 요시키치 3명이 중상을 입었다.[31] 리키조와 히사노는 생존했다.[28] 유지로는 어머니 야요와 동생 우메키치가 중상을 입었음에도 함께 탈출하여 무사했다.[31]
4. 곰 토벌 과정
4. 1. 토벌대 조직
산케베츠에서 곰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홋카이도청에 전해지자, 하보로 분서의 지휘 아래 저격수 팀이 조직되었다.[28] 총기와 팀에 합류할 자원자는 인근 마을에서 모였으며, 산림청의 허가를 받아 그날 저녁 산케베츠로 향했다. 12월 12일, 홋카이도청 경찰부(현재의 홋카이도 경찰)는 하보로 분서장 스가 미츠구에게 토벌대 조직을 지시했고, 토벌대 본부는 미케베츠 지구장 오카와 코조키치 자택에 설치되었다.[28]곰은 먹이를 되찾으려는 습성이 있어, 이를 이용하여 곰을 유인하는 작전이 제안되었다.[28] 스가 대장은 이 안을 채택하여 유족과 주민에게 설명했고, 희생자의 유해를 미끼로 사용하여 곰을 유인하는 작전이 채택되었다.[33] 작전은 즉시 실행되었지만, 곰은 집 앞에서 멈춰 서서 안을 경계하다가 숲으로 돌아갔고, 결국 사살하지 못했다.[33]
4. 2. 야마모토 헤이키치
미요케 야스타로는 곰 사냥 전문가로 알려진 야마모토 헤이키치의 집을 방문했다. 야마모토는 문제의 곰이 과거 인근 마을에서 여성 3명을 살해한 "케사가케(袈裟懸け)" 또는 "어깨에서 사선으로 내려오는 칼자국"이라는 별명을 가진 곰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야마모토 헤이키치는 이미 술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총을 전당포에 맡긴 상태였기 때문에 미요케의 도움 요청을 거절했다.4. 3. 곰 사살 (12월 14일)
다음 날 아침, 수색대는 강둑에서 곰의 발자국과 혈흔을 발견했다. 케사게케(불곰의 별명)가 부상을 입었고 눈보라가 임박했기에, 곰을 추적하여 사살할 기회라고 판단했다. 야마모토 헤이키치와 안내인 이케다 카메지로는 2인 1조로 곰을 추적했다.[6]야마모토는 케사게케의 행동을 파악하여 곰을 추적, 참느릅나무 근처에서 쉬고 있는 곰을 발견했다. 20미터까지 접근하여 사격을 가했고, 첫 번째 총알은 곰의 심장을, 두 번째 총알은 머리를 맞혀 곰을 사살했다.[6]
곰은 몸무게 340kg, 키 2.7m의 수컷 불곰이었다.[7] 곰의 위장에서는 희생자들의 유해가 발견되었다.[44] 마을 사람들은 곰을 해체하여 삶아 먹으며 희생자들에 대한 복수를 했다고 한다.[45] 곰의 두개골과 털 일부는 보관되었지만, 이후 분실되었다.[47]
5. 사건의 여파
사건 직후 며칠 동안 루모이와 소야 지역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고, 주민들은 이를 라고 불렀는데, 이는 이 사건을 소재로 한 많은 소설과 영화의 제목이 되었다.
공격으로 머리에 부상을 입은 야요는 완전히 회복했지만, 어머니 등에 업혀 곰에게 물린 미요케 우메키치는 3년도 채 안 되어 상처로 사망했다. 오도는 부상에서 회복하여 직장으로 복귀했지만, 이듬해 봄 강에 빠져 사망했다.
일부 사람들은 곰을 요괴로 믿기 시작했다. 공격 이후, 로쿠센사와 마을 주민 대부분은 곧 떠났고, 1946년 오사카에서 6가구가 전후 부흥을 위해 이 지역에 정착할 때까지 급속도로 유령 도시로 변했다. 1990년에 현장이 복원되었다.
사건 당시 6세였던 오카와 하루요시는 산케베츠 촌장 오카와 요사키치의 아들이었는데, 훗날 곰 사냥꾼이 되었다. 그는 공격의 모든 희생자에게 10마리의 곰을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62세가 되었을 때 그는 102마리의 곰을 죽였다. 그 후 은퇴하여 1977년 7월 5일, 죽은 마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사당인 를 세웠다.
오카와 하루요시의 장남 오카와 타카요시는 1980년 5월 6일, 8년간의 추적 끝에 500kg 수컷 불곰을 사냥했는데, 이 곰은 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토마마에 지역 박물관에 박제되어 전시되어 있다.
5. 1. 피해자
총 7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망자는 아베 마유, 하스미 미키오, 사이토 타케, 사이토 이와오, 미요케 킨조, 미요케 하루요시, 타케의 태아이다.공격으로 머리에 부상을 입은 야요는 완전히 회복했지만, 어머니 등에 업혀 곰에게 물린 미요케 우메키치는 3년도 채 안 되어 상처로 사망했다. 오도는 부상에서 회복하여 직장으로 복귀했지만, 이듬해 봄 강에 빠져 사망했다.
5. 2. 주민들의 이주
공격으로 머리에 부상을 입은 야요는 완전히 회복했지만, 어머니 등에 업혀 곰에게 물린 미요케 우메키치는 3년도 채 안 되어 상처로 사망했다. 오도는 부상에서 회복하여 직장으로 복귀했지만, 이듬해 봄 강에 빠져 사망했다.사건 이후, 로쿠센사와 마을 주민 대부분은 곧 떠났고, 1946년 오사카에서 6가구가 전후 부흥을 위해 이 지역에 정착할 때까지 급속도로 유령 도시로 변했다. 1990년에 현장이 복원되었다.
5. 3. 사건의 기록과 분석
1961년, 기무라 모리타케는 사건에 대한 영구적인 기록을 남기기 위해 조사를 시작했다. 이미 46년이나 흘러 공식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기에, 기무라는 당시 산케베츠에 살았던 사람들을 추적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이미 사망했고, 생존자 대부분이 끔찍한 사건 때문에 협조적이지 않아, 사건의 전체적인 그림을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51] 기무라의 사건 기록은 1980년에 재판되었고, 1994년에는 쿄도 분카샤에서 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52]사람들은 곰이 배고픔 때문에 겨울잠에서 일찍 깨어나 공격을 감행했다고 믿었다. 일본에서는 아나모타즈/穴持たず일본어라는 용어가 겨울잠 실패를 의미한다. 이로 인해 곰의 흉폭함이 증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곰은 실제로 누군가에게 총을 맞기 전까지는 어떠한 인간도 공격하지 않았다.
에도 시대 말부터 개척자들은 청어를 비료로 가공하기 위해 땔감을 사용하여 이 지역의 산림을 훼손했으며, 메이지 시대 초부터 내륙 지역을 개간했다. 산림 벌채와 정착지의 증가는 인간과 곰의 거리를 가깝게 만들었다. 산림 벌채와 인간의 약탈로 인한 자연 먹이 부족은 불곰과 같은 야생 동물들이 인간 거주지 근처에서 먹이를 찾는 흔한 이유이다.[53] 이 사건은 1878년에 불곰이 3명을 살해한 삿포로 오카다마 사건[48]의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있는것과는 대조적으로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졌다. 다카쿠라 신이치로도 저서에서 이 사건을 크게 다루는 한편, 산케베츠 불곰 사건은 보충적인 채록에 그치고, 피해 상황 등에도 오류가 발견된다.[49][50]
6. 사건의 교훈 및 기억
1990년 7월, 육선택 현장 부근에 주변 주민들에 의해 사건을 후세에 남기기 위한 "삼모베츠 불곰 사건 복원 현지"가 만들어졌다. 또한, 도마에정립 향토 자료관에서도 사건에 관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63]
사건 100주년이 되는 2015년 10월 15일에 복원지에서 지역 유지들에 의한 100주기 추도 법요가 거행되었다[63]。
1973년에 시작되어, 담당자 감소 등으로 2007년에 휴지된 후, 2017년에 부활하여 가을의 시민 무대 발표회에서 상연되고 있다. 일반적인 사자춤 대신, 두 사람이 연기하는 불곰이 등장한다.[16]
6. 1. 교훈
일반적으로 야생 동물은 불을 무서워한다는 풍설이 있지만, 산케베쓰 불곰 사건에서 불곰은 횃불이나 모닥불에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56] 사건 발생 후, 마을 사람들은 불을 피워 불곰을 피하려 했고, 메이케이(明景)가[54]와 분교장으로 대피할 때 많은 모닥불이 지펴졌다.[55] 그러나 불곰은 오타(太田)·메이케이(明景) 양가를 습격할 때 등불이나 모닥불에 개의치 않았다.[56]불곰은 옥수수를 여러 번 노리거나, 이전에 여러 명의 여성을 잡아먹었던 불곰이 산케베쓰(三毛別)에서도 여성의 의류 등에 이상한 집착을 보이는 등 끈질긴 집착을 보였다.[57] 아베 마유(阿部マユ)를 잡아먹었을 때 먹다 남은 것을 눈 속에 숨기고,[58] 오타(太田)가에 여러 번 출몰한 것[59]도 이러한 특성에 기인한다. 반면, 말에 대한 피해는 전혀 없었다.[60]
메이케이 야요(明景ヤヨ) 등은 불곰이 도망가는 요시키치(要吉)에게 정신이 팔린 덕분에 살아남았다. 이처럼 불곰은 도망가는 것을 반사적으로 쫓아가는 경향이 있다.[61]
메이케이 히사노(明景ヒサノ)와 태아가 불곰에게 공격받지 않은 것은, 불곰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습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시 다른 먹을 것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62]

6. 2. 기념
로쿠센사와(六線沢)에는 공격이 발생한 곳에 현재 산케베츠 불곰 사건 복원 현지/三毛別羆事件復元現地일본어라는 신사가 있다.[6] 이 신사는 산케베츠 강을 가로지르는 우치도메 다리 근처의 작은 공터에 위치해 있으며, 이 지역의 전형적인 복원된 집과 사건을 설명하는 표지판이 있다. 집 밖에는 큰 불곰 조각상도 있다. 신사는 239번 국도의 코탄베츠 교차로에서 홋카이도도 1049번을 따라 남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홋카이도도 1049번은 곰 길이라고 불리며, 곰의 만화 같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많은 표지판이 있다. 이러한 표지판은 길가와 입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자세는 야생 동물과 인간의 공생을 표현하는 것으로 제안되나, 그곳을 방문하는 수많은 관광객들은 이 지역의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를 아이러니하거나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1990년 7월, 육선택 현장 부근에 주변 주민들에 의해 사건을 후세에 남기기 위한 "삼모베츠 불곰 사건 복원 현지"가 만들어졌다. 도마에정립 향토 자료관에서도 사건에 관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63]
사건 100주년이 되는 2015년 10월 15일에 복원지에서 지역 유지들에 의한 100주기 추도 법요가 거행되었다. 1973년에 시작되어 담당자 감소 등으로 2007년에 휴지된 후, 2017년에 부활하여 가을의 시민 무대 발표회에서 상연되고 있는 곰 사자춤은 일반적인 사자춤 대신, 두 사람이 연기하는 불곰이 등장한다.[16]
7.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
- 소설
:* 토가와 유키오 저, 『영주』(올요미모노 1964년 5월호 초출).
:* 토가와 유키오 저, 『불곰 바람』(소설 신초 1965년 8월호 초출).
:* 토가와 유키오 저, 『분페이와 그 동료들 제4화 불곰 횡행』(홋카이 타임스 1975년 1월 25일 - 4월 21일 연재).
:* 토가와 유키오 저, 『마왕』(오분샤 1978년): 『불곰 바람』을 소년용으로 다시 쓴 것.
:* 요시무라 아키라 저, 『불곰 폭풍』(신초샤・1977년, 신초 문고・1982년)
- 만화
:* 『야생 전설 불곰 바람』(토가와 유키오 작 / 야구치 타카오 그림): 『월간 빅 골드』 1996년 8월호 - 1997년 12월호에 연재. 토가와 유키오의 『불곰 바람』을 원작으로 하지만, 키무라 모리타케를 취재하여 원작에 없는 장면도 그리고 있다[64]。빅 골드 코믹스 『야생 전설』 제3 - 5권(쇼가쿠칸, 1997 - 1998년)수록. 이후, 고단샤 만화 문고 (2003년, 전 3권), 야마케이 문고(야마토케이코쿠샤, 2018년, 전 1권)에서 재간행.
- 영화
:* 『리메인즈 아름다운 용자들』(치바 신이치 감독 / 사나다 히로유키, 무라마츠 미카, 스가와라 분타 외 출연 / 1990년)
- 텔레비전 드라마
:* 목요 골든 드라마 『공포! 패닉!! 식인 곰 사상 최대의 참극 불곰 폭풍』(1980년 11월 27일 방송, 요미우리 TV・토에이, 감독: 후리하타 야스오)
-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 『다크 사이드 미스터리 "홋카이도 산케베츠 불곰 습격 사건의 수수께끼에 다가선다"』(NHK / 첫 방송 2019년 8월 1일)
- 소설
:* 『샤툰 불곰의 숲』(마스다 토시야 저 / 다카라지마사 / 2007년)
- 만화
:* 『샤툰 불곰의 숲』전 3권(마스다 토시야 작 / 오쿠타니 미치노리 화 / 2008년 - 2009년)
:** 상기 동명 작품의 만화판. 스토리는 본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 『더 fable』전 22권 (미나미 카츠히사 작 / 2014년 - 2019년)
:** 스토리는 본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 라디오 드라마
:* 『사람을 잡아먹는 큰 곰과 화승총 소녀』(NHK-FM 청춘 어드벤처 / 오카모토 쿠니히코 작 / 2015년)
7. 1. 소설
1965년 토가와 유키오는 쿠마 카제/羆風일본어를 발표했고, 1977년에는 요시무라 아키라가 쿠마 아라시/羆嵐일본어를 발표했다. 토가와 유키오는 『영주』(올요미모노 1964년 5월호 초출), 『불곰 바람』(소설 신초 1965년 8월호 초출), 『분페이와 그 동료들 제4화 불곰 횡행』(홋카이 타임스 1975년 1월 25일 - 4월 21일 연재), 『마왕』(오분샤 1978년, 『불곰 바람』을 소년용으로 리라이트)을 발표했다. 요시무라 아키라의 『불곰 폭풍』은 신초샤에서 1977년에 출판되었고, 신초 문고에서 1982년에 출판되었다. 마스다 토시야는 2007년 『샤툰 불곰의 숲』을 발표하였다.7. 2. 만화
야구치 타카오의 작품 『야생 전설』 제3 - 5권에 산케베츠 불곰 사건을 다룬 「불곰 바람」이 수록되어 있다.[64] 이 작품은 토가와 유키오의 소설 『불곰 바람』을 원작으로 하지만, 키무라 모리타케를 취재하여 원작에 없는 장면도 그려졌다.[64] 「불곰 바람」은 쇼가쿠칸의 빅 골드 코믹스(1997 - 1998년), 고단샤 만화 문고 (2003년, 전 3권), 야마케이 문고(야마토케이코쿠샤, 2018년, 전 1권)에서 재간행되었다.7. 3. 영화
1990년 치바 신이치 감독, 사나다 히로유키, 무라마츠 미카, 스가와라 분타 등이 출연한 영화 "리메인즈 아름다운 용자들"이 제작되었다.7. 4. 텔레비전 드라마
1980년 11월 27일에 요미우리 TV (토에이)에서 제작한 목요 골든 드라마 "공포! 패닉!! 식인 곰 사상 최대의 참극 불곰 폭풍"이 방송되었다. 감독은 후리하타 야스오였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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