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곶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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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살곶이다리는 청계천, 중랑천, 한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석교이다.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를 위해 다리 건설이 시도되었으나, 세종 대에 중단되었다가 성종 때 완공되었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큰 규모의 장석판교로, 64개의 돌기둥으로 지어졌다. 1913년 콘크리트 보수, 1925년 홍수로 인한 유실, 1938년 성동교 가설 등으로 훼손되었으며, 1972년 복원 과정에서 콘크리트 교량이 증설되었다. 2009년 발굴 조사를 거쳐 복원 사업이 추진되었으며, 보물 제1738호로 지정되어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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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곶이다리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서울 살곶이 다리 |
한자 표기 | 서울 箭串橋 |
유형 | 보물 사적 |
지정 번호 | 1738 (보물) 160 (사적) |
지정일 | 2011년 12월 23일 (보물) 1967년 12월 15일 (사적) |
해제일 | 2011년 12월 23일 (사적 해제) |
주소 |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1동 58번지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 | 국유 |
면적 | 10,232m2 |
설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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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살곶이다리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가장 큰 규모의 다리였다. 가로 4열, 세로 16열, 총 64개의 돌기둥으로 만들어졌다. 다리 높이는 하상(河上)으로부터 약 3.05m 내외이며 기둥의 높이는 약 1.22m 가량이다. 좌우 교안(橋岸)을 장대석(長臺石)으로 쌓고 네모난 돌기둥 교각 16개소를 세웠다. 교각 간격은 대략 약 3.35m~약 3.96m 정도이며, 돌기둥 위에 3장의 장대석을 건너지른 다음 그 위에 다시 귀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한 구조이다. 기둥돌 아래에는 물밑의 받침돌이 네모난 주춧돌을 지탱하고 있으며, 주춧돌 사이에는 포석을 깔아 기초를 단단히 하였다. 물이 줄 때는 이 포석 면이 드러나 마치 지금의 잠수교와 같아 ‘이층다리’라고도 불렀다. 돌기둥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만들었으며, 큰 혹띠기로 표면을 가공하였다. 조립할 때 잔돌을 많이 사용하여 뜬 곳을 메꾸었으며 돌난간은 없다.[1]
2. 1. 건설 배경
살곶이는 청계천이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역으로, 한양대학교에서 내려다보이는 개울 부근이다. 이곳은 넓고 풀과 버들이 무성하여 조선 초부터 국가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 또는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된 곳이기도 하였다.이곳에 다리를 만든 것은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이었다. 세종 즉위 후 태종은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즐기고, 살곶이에 있는 낙천정과 풍양이궁에 수시로 행차하였다. 따라서 이곳의 하천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하여 다리를 놓게 되었다고 한다.[1]
2. 2. 건설 과정
세종 2년(1420) 5월, 태종은 영의정 유정현과 박자청에게 돌다리 건설을 명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였다. 세종 4년(1422)에 태종이 사망하자 다리 건설은 중단되었다. 이는 도성 안 개천과 제방 축조 공사로 인해 도성 밖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1]그러나 이 길을 이용하는 백성들로 인해 살곶이다리를 건설할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었고, 성종 6년(1475) 9월 양주목에 살곶이다리 완공을 지시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考)》에 따르면 성종 13년(1482) 한 승려가 방법을 고안하여 다리를 완공하자, 왕이 이를 치하하고 다리가 집과 같이 평평하여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 하여 ‘제반교(濟盤橋)’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1]
2. 3. 조선 후기 ~ 근대
고종 때 경복궁을 다시 지으면서 살곶이다리의 일부를 건축 자재로 썼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1] 1913년에 다리 윗면을 콘크리트로 보수하였다.[1] 1925년 서울 지방에 큰 홍수(을축년 대홍수)가 나서 다리 일부가 물에 떠내려갔다.[1] 그 후 1938년 5월에 이 다리 옆에 성동교가 만들어지면서 살곶이다리는 방치되었다.[1]2. 4. 현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다리 일부가 유실된 후 방치되었다. 1938년 5월에 이 다리 옆에 성동교가 가설되면서 더욱 방치되었다. 1972년 서울시가 무너진 다리를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려 했으나, 하천 폭이 넓어져 다리 동쪽에 27m 정도의 콘크리트 교량을 잇대어 증설하여 원래 모습과 차이가 나게 되었다. 2009년 12월 서울시 성동구는 발굴조사를 거쳐 살곶이다리 복원 계획을 발표하였다.[1]3. 구조 및 특징
살곶이다리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장석판교(長石板橋) 중 가장 큰 규모의 다리이다. 가로 4열, 세로 16열, 총 64개의 돌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리 높이는 하상(河上)으로부터 약 10척, 기둥 높이는 약 4척이다. 좌우 교안(橋岸)은 장대석(長臺石)으로 쌓았고, 네모난 돌기둥 교각 16개소를 세웠다. 교각 간격은 약 11~13척이며, 돌기둥 위에 3장의 장대석을 건너지른 다음 그 위에 귀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한 구조이다.
기둥돌 아래에는 물밑 받침돌이 네모난 주춧돌을 지탱하고 있으며, 주춧돌 사이에는 포석을 깔아 기초를 단단히 하였다. 물이 줄면 이 포석 면이 드러나 마치 잠수교와 같아 ‘이층다리’라고도 불렸다. 돌기둥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만들었다. 큰 혹띠기로 표면을 가공하였고 조립할 때 잔돌을 많이 사용하여 뜬 곳을 메꾸었으며, 돌난간은 없다.[1]
4. 명칭 유래
살곶이(箭串)는 '화살이 꽂힌 곳'이라는 뜻으로, 태조 이성계와 그의 아들 이방원 간의 갈등과 관련된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제반교(濟盤橋)는 성종이 다리 완공 후 "다리가 집과 같이 평평하여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붙인 이름이다.[1]
5. 문화재적 가치
살곶이다리는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다리 중 가장 긴 다리로, 당시의 토목 기술과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다리는 가로 4열, 세로 16열, 총 64개의 돌기둥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하상(河上)으로부터 10척 내외, 기둥 높이는 4척 가량이다. 교각 간격은 약 11~13척 정도이며, 돌기둥 아래에는 물밑 받침돌이 주춧돌을 지탱하고, 주춧돌 사이에는 포석을 깔아 기초를 단단히 하였다. 물이 줄면 포석 면이 드러나 잠수교와 비슷하여 '이층다리'라고도 불렸다. 돌기둥은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만들어졌다.[1]
살곶이다리는 2011년 12월 23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38호로 지정되었다.[1]
6. 복원 및 관리
1972년 서울시가 무너진 다리를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하천 폭이 원래보다 넓어져, 다리 동쪽에 27m 정도의 콘크리트 교량을 잇대어 증설하여 원래의 모양과는 다소 차이가 나게 되었다.[1] 2009년 12월 서울시 성동구는 발굴조사를 거쳐 살곶이다리 복원에 나선다고 밝혔다.[1]
참조
[1]
뉴스
현존 조선다리중 가장 긴 살곶이다리 복원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10-05-12
[2]
뉴스
12일자 B11면 ‘돌아온 청계천…’
https://news.naver.c[...]
동아일보(네이버)
2010-05-12
[3]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해제 및 보물 지정
문화재청장
2011-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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