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미타사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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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울 미타사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서울 미타사 금보암에 봉안된 높이 35cm의 금동관음보살상이다. 이 불상은 왼쪽 다리를 접고 오른쪽 무릎을 세운 윤왕좌(輪王坐)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보관과 영락 장식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1862년 개금 발원문에 따르면 종남산 미타사 백련암에 봉안되었으며, 1933년 조선총독부 관보에 '철제도금' 보살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불화와는 다른 특징, 1443년 북경 법해사 관음보살도와의 유사성을 통해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관음보살좌상과 함께 조선 전기 윤왕좌 보살상을 대표하는 유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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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미타사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미타사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 |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서울특별시 |
유형 | 유형문화재 |
지정 번호 | 417 |
지정일 | 2017년 10월 12일 |
주소 | 서울특별시 성동구 독서당로40길 21 (옥수동, 미타사) |
시대 | 조선시대 |
수량 | 1점 |
2. 역사
1824년 3월, 비구니 대원(大願) 스님이 무량수전을 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입적하자 상좌인 환신(幻信, 또는 幻順) 스님이 공사를 마쳐 절의 모습을 일신하였다.[1] 현재 미타사는 대승암, 칠성암, 금보암, 금수암, 정수암, 용운암, 관음암, 토굴암의 8개의 암자로 구성되어 있다.[1]
금보암에 봉안된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전체적으로 손상된 곳이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1] 보살상은 왼쪽 다리를 접어 안쪽으로 당기고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는데, 이러한 자세를 윤왕좌(輪王坐, Rajalilasana)라 한다.[1] 이 자세는 중국 송대와 원대에 크게 유행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불상과 불화로 제작되었다.[1]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발원문이 남아있지 않지만, 관음보살과 관련된 문헌은 보살상 내에서 발견된 개금발원문과 일제강점기 미타사 재산대장이 전한다.[1] 1862년(철종 13년) 개금 당시 작성된 발원문에 따르면, 이 보살상은 종남산 미타사 백련암에 봉안되어 있었다.[1] 따라서 보살상은 최소한 19세기 중반부터 미타사에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1]
1933년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된 재산대장에는 ‘철제도금’으로 크기가 120분(分)과 150분(分)인 보살상 2구가 기록되어 있다.[1] 금보암 보살상의 크기가 35㎝인 것을 보면 120분의 보살상이 해당한다.[1]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고려불화에 보이는 윤왕좌보살좌상과 다르고, 보관의 형태, 팔찌와 귀걸이 모습, 가슴 앞에서 세 줄로 늘어져 다시 배 앞에서 다리로 내려오는 영락 장식, 영락에 묶인 가는 띠 등이 1443년에 완성된 북경 법해사 관음보살도와 유사하여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
2. 1. 제작 및 봉안
1824년 3월, 비구니 대원(大願) 스님이 무량수전을 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입적하자 상좌인 환신(幻信, 또는 幻順) 스님이 공사를 마쳐 절의 모습을 일신하였다.[1] 현재 미타사는 대승암, 칠성암, 금보암, 금수암, 정수암, 용운암, 관음암, 토굴암의 8개의 암자로 구성되어 있다.[1]금보암에 봉안된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전체적으로 손상된 곳이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1] 보살상은 왼쪽 다리를 접어 안쪽으로 당기고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는데, 이러한 자세를 윤왕좌(輪王坐, Rajalilasana)라 한다.[1] 이 자세는 중국 송대와 원대에 크게 유행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불상과 불화로 제작되었다.[1]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조성 시기를 알려주는 발원문이 남아있지 않지만, 관음보살과 관련된 문헌은 보살상 내에서 발견된 개금발원문과 일제강점기 미타사 재산대장이 전한다.[1] 1862년(철종 13년) 개금 당시 작성된 발원문에 따르면, 이 보살상은 종남산 미타사 백련암에 봉안되어 있었다.[1] 따라서 보살상은 최소한 19세기 중반부터 미타사에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1]
1933년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재된 재산대장에는 ‘철제도금’으로 크기가 120분(分)과 150분(分)인 보살상 2구가 기록되어 있다.[1] 금보암 보살상의 크기가 35㎝인 것을 보면 120분의 보살상이 해당한다.[1]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은 고려불화에 보이는 윤왕좌보살좌상과 다르고, 보관의 형태, 팔찌와 귀걸이 모습, 가슴 앞에서 세 줄로 늘어져 다시 배 앞에서 다리로 내려오는 영락 장식, 영락에 묶인 가는 띠 등이 1443년에 완성된 북경 법해사 관음보살도와 유사하여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
3. 특징
금보암에 봉안된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높이 35cm의 소형 불상이다. 보살상은 보관을 비롯하여 천의와 영락 장식 등이 전체적으로 손상된 곳이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1] 이 보살상의 특징은 독특한 자세, 화려한 보관, 그리고 전신을 덮은 영락 장식 등이다.[1]
== 윤왕좌 ==
보살상은 왼쪽 다리를 접어 안쪽으로 당기고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는데, 이러한 자세를 윤왕좌(輪王坐, 라잘릴라사나/Rajalilasana영어)라 한다.[1] 이 자세는 전륜선왕의 자세를 일컫는 것으로 윤가(輪跏) 또는 윤왕가(輪王跏)라고도 부른다.[1] 편안한 자세로 앉아 왼손은 몸 뒤로 땅에 대고, 오른팔은 뻗어 오른쪽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두었다.[1] 윤왕좌의 관음보살은 중국 송대와 원대에 크게 유행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후기와 조선전기에 불상과 불화로 제작되었다.[1]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다리를 최대한 벌리고 앉은 자세가 고려불화에 보이는 윤왕좌보살좌상과 다르고, 보관의 형태, 팔찌와 귀걸이 모습, 가슴 앞에서 세 줄로 늘어져 다시 배 앞에서 다리로 내려오는 영락 장식, 영락에 묶인 가는 띠 등이 1443년에 완성된 북경 법해사 관음보살도와 유사하여 조선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
서울 미타사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드문 윤왕좌의 보살상이다.[1] 현재 윤왕좌의 보살좌상은 전남 강진 고성사 청동보살좌상(보물 1841호), 전남 해남 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1547호), 호암미술관 소장 금동관음보살좌상, 북한 금강산 내강리출토 금동관음보살좌상, 국립중앙박물관의 금동관음보살좌상 등이 있을 뿐이다.[1]
== 장식 ==
보관을 비롯하여 천의와 영락 장식 등이 전체적으로 손상된 곳이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1] 삼각형의 화려한 보관 중앙에는 선정인을 취한 입상의 화불(化佛)이 배치되어 있고, 보관의 끝은 둥근 보주로 장식하였다.[1] 보관의 양 옆으로 관대(冠帶)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으며, 귀에는 원반형의 커다란 원반형 귀걸이를 하고 있다.[1]
양 어깨에 걸친 천의는 숄처럼 두르고 나머지 자락은 팔을 휘감았다.[1] 화려한 영락에는 두 가닥의 가는 띠가 걸려 있는데, 영락에 묶여 천의자락과 함께 늘어져 있다.[1] 이와 같은 가는 띠는 티베트계 명대 보살상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1443년에 완성한 중국 북경 법해사 수월관음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1] 가는 띠와 함께 전신을 덮은 화려한 영락 장식 역시 이 보살상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1] 이처럼 화불이 있는 보관에 꽃모양의 커다란 귀걸이, 영락으로 뒤덮인 신체 등 기본적으로 티베트 불상의 영향이 반영되어 조선전기에 유행한 요소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관음보살좌상에서도 볼 수 있다.[1] 전신을 장식한 영락은 중국에서는 티베트 불상의 영향을 받은 원대 보살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본격적인 유행은 명 영락제(1402-1424 재위) 이후이다.[1] 또한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로 사선으로 조백(條帛)이 둘려져 있다.[1] 물론 조백 역시 당대 보살상에서 시작된 착의형식이지만, 이후 남송부터 명대까지 보살상에서 애용되었던 형식 가운데 하나이다.[1] 유사한 모양의 조백은 1466년에 조성된 강원 평창 상원사 문수동자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1]
== 도상적 특징 ==
서울 미타사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높이 35cm의 소형 불상으로, 보관, 천의, 영락 장식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1] 보살상은 왼쪽 다리를 접고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윤왕좌(輪王坐, 라잘릴라사나/Rajalilasana영어)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 송대와 원대에 유행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불상과 불화로 제작되었다.[1]
삼각형의 화려한 보관 중앙에는 선정인을 취한 입상의 화불(化佛)이 있고, 보관 끝은 둥근 보주로 장식되어 있다.[1] 보관 양옆으로 관대(冠帶)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으며, 귀에는 원반형의 큰 귀걸이가 있다.[1] 양 어깨에 걸친 천의는 숄처럼 두르고 나머지 자락은 팔을 휘감았으며, 화려한 영락에는 두 가닥의 가는 띠가 걸려 천의 자락과 함께 늘어져 있다.[1] 이러한 가는 띠는 티베트계 명대 보살상의 특징 중 하나로, 1443년에 완성된 중국 북경 법해사 수월관음도에서도 볼 수 있다.[1]
전신을 덮은 화려한 영락 장식,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로 두른 사선의 조백(條帛) 역시 이 보살상의 중요한 특징이다.[1] 조백은 당대 보살상에서 시작되어 남송부터 명대까지 보살상에서 애용된 형식으로, 1466년에 조성된 강원 평창 상원사 문수동자상에서도 유사한 형태를 볼 수 있다.[1]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다리를 최대한 벌리고 앉은 자세가 고려불화에 보이는 윤왕좌보살좌상과 다르고, 보관의 형태, 팔찌와 귀걸이 모습, 가슴 앞에서 세 줄로 늘어져 다시 배 앞에서 다리로 내려오는 영락 장식, 영락에 묶인 가는 띠 등이 1443년에 완성된 북경 법해사 관음보살도와 유사하여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
미타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손상된 곳 없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고,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드문 윤왕좌의 보살상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관음보살좌상과 함께 조선 전기 윤왕좌보살상을 대표하는 유물이다.[1]
3. 1. 윤왕좌
보살상은 왼쪽 다리를 접어 안쪽으로 당기고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는데, 이러한 자세를 윤왕좌(輪王坐, Rajalilasana)라 한다.[1] 이 자세는 전륜선왕의 자세를 일컫는 것으로 윤가(輪跏) 또는 윤왕가(輪王跏)라고도 부른다.[1] 편안한 자세로 앉아 왼손은 몸 뒤로 땅에 대고, 오른팔은 뻗어 오른쪽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두었다.[1] 윤왕좌의 관음보살은 중국 송대와 원대에 크게 유행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후기와 조선전기에 불상과 불화로 제작되었다.[1]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다리를 최대한 벌리고 앉은 자세가 고려불화에 보이는 윤왕좌보살좌상과 다르고, 보관의 형태, 팔찌와 귀걸이 모습, 가슴 앞에서 세 줄로 늘어져 다시 배 앞에서 다리로 내려오는 영락 장식, 영락에 묶인 가는 띠 등이 1443년에 완성된 북경 법해사 관음보살도와 유사하여 조선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
서울 미타사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드문 윤왕좌의 보살상이다.[1] 현재 윤왕좌의 보살좌상은 전남 강진 고성사 청동보살좌상(보물 1841호), 전남 해남 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1547호), 호암미술관 소장 금동관음보살좌상, 북한 금강산 내강리출토 금동관음보살좌상, 국립중앙박물관의 금동관음보살좌상 등이 있을 뿐이다.[1]
3. 2. 장식
보살상은 보관을 비롯하여 천의와 영락 장식 등이 전체적으로 손상된 곳이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1] 삼각형의 화려한 보관 중앙에는 선정인을 취한 입상의 화불(化佛)이 배치되어 있고, 보관의 끝은 둥근 보주로 장식하였다.[1] 보관의 양 옆으로 관대(冠帶)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으며, 귀에는 원반형의 커다란 원반형 귀걸이를 하고 있다.[1]양 어깨에 걸친 천의는 숄처럼 두르고 나머지 자락은 팔을 휘감았다.[1] 화려한 영락에는 두 가닥의 가는 띠가 걸려 있는데, 영락에 묶여 천의자락과 함께 늘어져 있다.[1] 이와 같은 가는 띠는 티베트계 명대 보살상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1443년에 완성한 중국 북경 법해사 수월관음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1] 가는 띠와 함께 전신을 덮은 화려한 영락 장식 역시 이 보살상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1] 이처럼 화불이 있는 보관에 꽃모양의 커다란 귀걸이, 영락으로 뒤덮인 신체 등 기본적으로 티베트 불상의 영향이 반영되어 조선전기에 유행한 요소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관음보살좌상에서도 볼 수 있다.[1] 전신을 장식한 영락은 중국에서는 티베트 불상의 영향을 받은 원대 보살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본격적인 유행은 명 영락제(1402-1424 재위) 이후이다.[1] 또한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로 사선으로 조백(條帛)이 둘려져 있다.[1] 물론 조백 역시 당대 보살상에서 시작된 착의형식이지만, 이후 남송부터 명대까지 보살상에서 애용되었던 형식 가운데 하나이다.[1] 유사한 모양의 조백은 1466년에 조성된 강원 평창 상원사 문수동자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1]
3. 3. 도상적 특징
서울 미타사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높이 35cm의 소형 불상으로, 보관, 천의, 영락 장식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1] 보살상은 왼쪽 다리를 접고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윤왕좌(輪王坐, Rajalilasana)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 송대와 원대에 유행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불상과 불화로 제작되었다.[1]삼각형의 화려한 보관 중앙에는 선정인을 취한 입상의 화불(化佛)이 있고, 보관 끝은 둥근 보주로 장식되어 있다.[1] 보관 양옆으로 관대(冠帶)가 어깨까지 늘어져 있으며, 귀에는 원반형의 큰 귀걸이가 있다.[1] 양 어깨에 걸친 천의는 숄처럼 두르고 나머지 자락은 팔을 휘감았으며, 화려한 영락에는 두 가닥의 가는 띠가 걸려 천의 자락과 함께 늘어져 있다.[1] 이러한 가는 띠는 티베트계 명대 보살상의 특징 중 하나로, 1443년에 완성된 중국 북경 법해사 수월관음도에서도 볼 수 있다.[1]
전신을 덮은 화려한 영락 장식,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로 두른 사선의 조백(條帛) 역시 이 보살상의 중요한 특징이다.[1] 조백은 당대 보살상에서 시작되어 남송부터 명대까지 보살상에서 애용된 형식으로, 1466년에 조성된 강원 평창 상원사 문수동자상에서도 유사한 형태를 볼 수 있다.[1]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다리를 최대한 벌리고 앉은 자세가 고려불화에 보이는 윤왕좌보살좌상과 다르고, 보관의 형태, 팔찌와 귀걸이 모습, 가슴 앞에서 세 줄로 늘어져 다시 배 앞에서 다리로 내려오는 영락 장식, 영락에 묶인 가는 띠 등이 1443년에 완성된 북경 법해사 관음보살도와 유사하여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
미타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손상된 곳 없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고,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드문 윤왕좌의 보살상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관음보살좌상과 함께 조선 전기 윤왕좌보살상을 대표하는 유물이다.[1]
4. 가치 및 의의
서울 미타사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우리나라에 드문 윤왕좌(輪王坐) 보살상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1] 윤왕좌는 전륜성왕의 자세를 의미하며, 중국 송대와 원대에 유행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불상과 불화로 제작되었다.[1]
이 보살상은 다리를 최대한 벌리고 앉은 자세가 고려불화에 보이는 윤왕좌 보살좌상과 다르다.[1] 보관 형태, 팔찌와 귀걸이 모습, 가슴 앞에서 세 줄로 늘어져 다시 배 앞에서 다리로 내려오는 영락 장식, 영락에 묶인 가는 띠 등이 1443년에 완성된 북경 법해사 관음보살도와 유사하여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
현재 윤왕좌 보살좌상은 전남 《강진 고성사 청동보살좌상》(보물 제1841호), 전남 《해남 대흥사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제1547호), 호암미술관 소장 금동관음보살좌상, 북한 금강산 내강리 출토 금동관음보살좌상, 국립중앙박물관 금동관음보살좌상 등이 남아있다.[1]
특히 미타사 보살상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관음보살좌상과 함께 조선 전기 윤왕좌 보살상을 대표하는 유물로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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