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축년 대홍수
1. 개요
을축년 대홍수는 1925년에 한반도를 강타한 대규모 홍수 사태이다. 7월 초부터 9월 초까지 4차례에 걸쳐 발생한 이 홍수는 태풍과 저기압의 영향으로 한강, 금강, 낙동강, 압록강 등 한반도 전역의 강 유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647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가옥이 유실 또는 붕괴되었으며, 농경지가 침수되는 등 재산 피해액이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달하는 1억 300만원에 이르렀다. 홍수 이후, 조선총독부는 제방 공사를 시행하고, 풍납토성 및 암사동 선사주거지 등의 유적이 발견되는 등의 사회적, 학술적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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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7월 -
스콥스 재판
스콥스 재판은 1925년 테네시주에서 진화론 교육 금지법 위반으로 기소된 존 스콥스 사건으로, 진화론과 창조론 논쟁을 심화시키고 과학, 종교, 학문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유명 변호사들의 참여와 라디오 생중계로 미국 역사상 중요한 문화적, 법적 사건이 되었다. -
1925년 7월 -
1925년 7월 20일 일식
1925년 7월 20일 일식은 18년 11일 주기로 반복되는 사로스 125 주기의 금환 일식이다. -
1925년 9월 -
1925년 전조선농구전
1925년 전조선농구전은 경성운동장 등에서 개최된 농구 대회로, 중앙청년회 농구단이 황성기독교청년회학관 농구단을 꺾고 우승하였다. -
1925년 9월 -
1925년 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대회
1925년 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대회는 경성운동장에서 개최되어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포함한 여러 학교 육상팀이 참가했으며, 남자 100m는 김용근, 200m는 김성집, 400m는 강태규가 우승하고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가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
1925년 한국 -
조선사편수회
조선사편수회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산하 기관으로, 식민사관에 입각해 한국사를 왜곡하고 일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조선사》 등의 역사서를 편찬했고 친일 인사들이 참여했다. -
1925년 한국 -
1925년 전국체육대회
1925년 전국체육대회는 육상, 축구, 야구, 정구 등의 종목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종목별 소학부, 중학부, 전문부, 청년부 우승팀을 가리는 대회이다.
2. 을축년 대홍수 발생
1925년 7월부터 9월까지 한반도에는 네 차례의 큰 홍수가 발생했다. 7월 초에는 대만 부근에서 발생한 태풍이 한반도 중부를 지나가면서 한강, 금강, 낙동강, 만경강 등이 범람했다. 7월 중순에는 또 다른 태풍이 중부 지방을 강타하여 한강 수위가 최고조에 달했고, 용산 일대가 물에 잠기는 등 큰 피해가 발생했다. 낙동강 유역 또한 대저도가 큰 피해를 입는 등 피해가 막심했다. 8월 초에는 장강에서 발달한 저기압의 영향으로 관서 지방에 호우가 내려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이 범람했다. 9월 초에는 마리아나 제도에서 발생한 열대성저기압이 남부 지방을 지나가면서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 등이 범람하여 다시 한번 피해를 입혔다.
2.1. 1차 홍수 (7월 초)
1925년 7월 7일 대만 부근에서 발생한 태풍(2559)이 11일과 12일에 한국 중부를 지나갔다. 이로 인해 한강과 금강, 낙동강, 만경강 등 한반도 중·남부 지역의 강들이 범람하였다. 황해도 이남 지역에 300~500mm의 호우가 내려 한강은 구룡산에서 10.57m의 수위를 나타냈고, 한강, 금강, 만경강, 낙동강 등이 범람하였다.
2.2. 2차 홍수 (7월 중순)
1차 홍수의 물이 채 빠져나가기도 전인 7월 14일, 타이완 부근에서 다시 태풍(2560)이 생성되어 중부 지방을 지나갔는데, 7월 15일부터 7월 18일까지 4일 동안 650mm 이상의 많은 비가 내렸다. 연이은 홍수로 한강의 수위는 최고를 기록했고, 제방이 무너지고 범람하여 용산 일대가 물에 잠겼으며 숭례문 앞까지 물이 차올랐다. 서울 시내의 교통과 통신 또한 마비되었다. 당시 익사자만 400여 명에 1만 2천여 호의 가옥이 물에 쓸려 떠내려갔다. 전곶교도 이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홍수로 여러 가지 유적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는데, 백제의 풍납토성과 암사동 선사주거지가 이때 발견되었다. 7월 18일 한강은 뚝섬에서 13.59m, 한강대교에서 11.66m, 구룡산에서 12.47m의 수위를 나타냈다. 당시 용산의 철도청 관사는 1층 천장까지 물이 찼고, 용산역의 열차도 물에 잠겼다. 또한 뚝섬에 샛강이 생겨 신천(新川)이라는 지명이 생겼고, 지금은 사라진 피수대(避水臺)의 느티나무 윗가지까지 물이 찼다. 가장 피해가 심했던 곳은 제방이 설치되지 않았던 동부이촌동, 뚝섬, 송파, 잠실리, 신천리, 풍납리 등이었다.
낙동강의 피해도 매우 컸다. 대저도는 거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고, 200구의 시체가 섬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7월 12일에 밀양과 김제에서 제방이 무너져 2,000명이 행방불명되었고, 7월 15일에는 창원에서 제방이 무너져 6,000명이 고립되거나 실종되었다.
2.3. 3차 홍수 (8월 초)
장강에서 발달한 저기압이 일본과 중화민국의 국경을 지나 간도로 빠져나가면서 8월 초에 관서 지방에 호우가 내렸고, 이로 인해 대동강, 청천강, 압록강이 범람하였다.
2.4. 4차 홍수 (9월 초)
마리아나 제도에서 열대성저기압이 발달하여 북상하였고 1925년 9월 6일에는 제주도와 목포, 대구를 거쳐서 동해로 빠져나갔는데, 남부 지방의 호우로 낙동강, 영산강, 섬진강 등이 범람하였다. 사망자와 실종자를 합쳐 63명을 기록하였다.
3. 피해 규모
네 차례의 홍수로 전국에 걸쳐 큰 피해가 발생했다. 인명 피해는 사망 및 실종 647명, 가옥 유실 6천여 호, 붕괴 1만 7천여 호, 침수 4만 6천 호였다. 논 3만 2천 단보와 밭 6만 7천 단보가 유실되었다. 피해액은 103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달했다.
조선총독부는 군대를 동원해 복구에 나섰고, 한강 본류와 안양천, 중랑천, 청계천 등 지류에 대대적인 제방 공사를 벌였다. 한강 유역 대부분이 물에 잠기면서 송파동 일대가 침수되었고, 이 과정에서 풍납토성과 암사동 선사주거지가 발견되었다. 한편,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직원 가지야마는 이 홍수를 계기로 가지야마 공식을 만들었다.
3.1. 인명 피해
4차례의 홍수로 전국에서 647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6천여 호의 가옥이 유실되었으며, 1만 7천여 호의 가옥이 붕괴되고 4만 6천 호의 가옥이 침수되었다.
3.2. 재산 피해
4차례의 홍수로 전국에서 6천여 호의 가옥이 유실되고, 1만 7천여 호의 가옥이 붕괴되었으며, 4만 6천 호의 가옥이 침수되었다. 3만 2천 단보의 논과 6만 7천 단보의 밭이 유실되었다. 홍수로 인한 피해액만 103에 달하였는데,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3.3. 경제적 피해
4차례의 홍수로 전국에서 647명이 사망하고, 가옥 6천여 호가 유실, 1만 7천여 호가 붕괴, 4만 6천 호가 침수되었다. 논 3만 2천 단보와 밭 6만 7천 단보가 유실되었다. 홍수 피해액은 103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4. 을축년 대홍수의 영향
1925년 을축년 대홍수는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이 홍수로 풍납토성과 암사동 선사주거지가 발견되는 긍정적인 영향도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647명이 사망하고 가옥 6천여 호가 유실되는 등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홍수 복구를 위해 군대를 동원하고, 한강과 지류에 대대적인 제방 공사를 실시했으며, 가지야마 공식을 만들어냈다.
4.1. 사회적 영향
1925년 을축년 대홍수는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이 홍수로 풍납토성과 암사동 선사주거지가 발견되는 긍정적인 영향도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647명이 사망하고 가옥 6천여 호가 유실되는 등 막대한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4.1.2. 부정적 영향
4차례의 홍수로 전국에서 647명이 사망하고, 가옥 6천여 호가 유실되었으며, 1만 7천여 호가 붕괴되고 4만 6천 호가 침수되었다. 논 3만 2천 단보와 밭 6만 7천 단보가 유실되었다. 홍수 피해액은 103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8%에 달하는 금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