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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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립은 조선 선조 때의 무신으로, 1567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삼도 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충주 탄금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기병 운용의 불리함과 일본군의 신식 무기에 밀려 패배하고 자결했다. 그는 북방에서의 무공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임진왜란에서의 패배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충장의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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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567년(선조 즉위년) 2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진주판관 시절 진주목사 양응정(梁應鼎)의 권유로 글공부를 시작했다. 1583년 은성부사로 재직 중 여진족 니탕개(尼湯介)의 침입을 격퇴하여 명성을 얻었다.[1] 1584년에는 선조가 습진 행사의 대장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비변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3]
1587년 흥양(興陽)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로 토벌에 나섰으나, 왜구가 이미 철수한 뒤였다. 이후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복직했으나, 졸병을 참살한 죄로 중추부동지사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
1590년(선조 23년)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에 임명되었고,[4]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거쳤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삼도 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선조(宣祖)에게 검(劍)을 하사받고 김여물(金汝杖)과 함께 충주로 향했다.
임진왜란 초기, 부산 방어 시설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신립은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충주로 파견되어 8,000명의 기병을 모았다. 그러나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병력은 일본군 진격 소식에 대부분 흩어졌다.
신립은 일본군이 북상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조령(鳥嶺) 고개를 막는 대신, 기병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충주에 남아 평지에서 일본군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이는 중요한 요충지를 방어하지 못하게 하여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의 북상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신립은 탄금대(탄금대|탕킨다이일본어)를 전투 장소로 선택했는데, 이곳은 한쪽에는 산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굽이쳐 흐르는 강이 있어 접근 가능한 길이 제한적이었다. 신립은 보병 위주의 일본군에 대항하여 기병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 분석가들은 신립이 전투 중 도망치는 조선군 상황을 고려하여,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 사생결단의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전투력을 높이려 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당시 신립은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신립이 경험하지 못한 총기인 아르케부스(arquebus)를 장착하고 있었고, 병력 수도 조선 기병의 2배 이상(18,700명 대 8,000명)이었다. 신립의 기병은 대부분 훈련이 부족한 신병과 남쪽에서 패퇴한 잔여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592년 6월 6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신립의 군대를 섬멸하기 위해 진격했다. 일본군은 두 좁은 입구를 봉쇄하고 사격수와 궁수들을 보내 조선군에게 총탄과 화살을 퍼부었다. 전술적 불리함을 깨달은 많은 조선군은 흩어져 좁은 길 중 한 곳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일본군에게 베이거나 강에 빠져 죽었다. 일부는 일본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도망쳤다. 신립과 장교들은 탈출했지만, 일본군의 포로가 되는 대신 자결하였다.
신립은 탄금대에서 김여물과 함께 적진에 돌진해 싸우다 힘이 다하여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이때 신립 장군의 나이는 향년 47세였다.
2. 1. 출생과 가계
신립은 명종 원년(1546년) 10월 23일 평산 신씨 화국과 부인 파평 윤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시조 신숭겸은 고려 왕건의 개국공신이었고, 조선 전기 문신 신개는 조선 건국 이후 좌의정을 지내고 문희공의 시호를 받았다. 신개는 신립의 5대조였다.[1]고조 신자준은 음보로 기용되어 세종 27년(1445) 장령이 되고, 세조 원년(1455) 판종부시사로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세조 3년 첨지중추원사, 세조 6년 형조참의, 세조 7년 예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좌참찬에 증직되었으며, 증조 신말평은 장악원 주부로 예조판서 성현의 명을 받아 장악원 제조 류자광, 전악 반곡과 김복근을 도와 「악학궤범」 편찬에 공헌하였다. 연산군 때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다.[1]
할아버지 신상은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관찰사와 형조판서(정2품)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절이다. 신상은 타고난 성격이 용맹한 것에 비해 화평하고 용서를 잘 하였으며 또한 관리의 재간이 있었다. 아버지 신화국은 성균 생원으로 전설, 별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후에 아들이 공신이 됨으로 평주부원군 영의정으로 증직되었다.[1] 신립과 신흠은 12촌 당숙 사이였으나, 각자의 자녀를 통해 선조의 인척이 되었다.[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