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지구전투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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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남지구전투사령부는 1951년 9월 16일 조선인민유격대 토벌, 아군 보급로 경비, 주변 지역 치안 유지를 위해 경주에서 창설되었다. 1955년 6월 모든 빨치산 토벌 작전이 종료됨에 따라 해체되었으며, 주요 작전으로 빨치산 토벌 작전, 노장대 전투, 지리산-덕유산 공비토벌작전 등이 있었다. 1952년 8월에는 남부지구경비사령부로 개편되기도 했다. 초대 사령관은 김용배였으며, 송요찬, 이용문 등이 지휘관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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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남지구전투사령부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서남지구전투사령부 |
| 활동 기간 | 1950년 ~ 1955년 7월 1일 |
| 소속 | 육군본부 치안본부 |
| 병과 | 육군: 보병 경찰: 전투경찰순경 |
| 종류 | 합동사령부 |
| 역할 | 대유격전 |
| 규모 | 사단 |
| 참전 | 6.25 전쟁 |
2. 역사
조선인민유격대 호남지구대에 대한 토벌 작전이 종료된 후, 잔당 소탕, 아군 보급로 경비, 주변 지역 치안 유지를 위해 1951년 9월 16일 경상북도 경주에서 창설되었다.[1] 1951년 11월에는 백야전사령부로 전속되었다.[1]
1952년 3월 14일, 수도사단이 빨치산 소탕 작전 권한을 넘기고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백야전전투사령부의 역할은 마무리되었다.[1] 1952년 11월 1일, 치안국 전방사령부 예하에 3개 경찰대대로 편성된 전북, 전남, 경남, 함양 전방지휘소가 창설되었다.[1]
1953년 12월 1일, 지리산, 백마산, 덕유산에서의 작전을 위해 남원에 사령부가 설치되었다.[2][3]
1955년 6월 1일 모든 빨치산 토벌 작전을 마친 뒤, 7월 1일에 사령부는 해체되고 경찰기동대가 창설되었다.[2][3]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 산하 전투경찰사령부 중심의 유격대 토벌 작전은 1953년 1월에 시작되어 한국 전쟁이 끝난 1953년 12월에 종료되었다.[2][3]
2. 1. 창설 배경
조선인민유격대 호남지구대에 대한 토벌 작전이 종료된 후, 잔당 소탕, 아군 보급로 경비, 주변 지역 치안 유지를 위해 1951년 9월 16일 경상북도 경주에서 창설되었다.[1] 1951년 11월에는 백야전사령부로 전속되었다.[1] 1952년 3월 14일, 수도사단이 빨치산 소탕 작전 권한을 넘기고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백야전전투사령부의 역할은 마무리되었다.[1] 1952년 11월 1일, 치안국 전방사령부 예하에 3개 경찰대대로 편성된 전북, 전남, 경남, 함양 전방지휘소가 창설되었다.[1] 1953년 12월 1일, 지리산, 백마산, 덕유산에서의 작전을 위해 남원에 사령부가 설치되었다.[2][3] 1955년 6월 1일 모든 빨치산 토벌 작전을 마친 뒤, 7월 1일에 사령부는 해체되고 경찰기동대가 창설되었다.[2][3]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 산하 전투경찰사령부 중심의 유격대 토벌 작전은 1953년 1월에 시작되어 한국 전쟁이 끝난 1953년 12월에 종료되었다.[2][3]2. 2. 주요 작전
서남지구전투사령부는 초기에는 빨치산 토벌 작전을 주로 수행하였다.[5] 1951년 11월에는 백야전사령부에 전속되어 지리산, 백마산, 덕유산 등지에서 작전을 수행하였다. 1951년 노장대 전투에 참여하였다.[5] 1951년 11월 25일부터 1952년 3월 15일까지 지리산-덕유산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1952년 3월, 수도사단으로부터 빨치산 소탕 작전 권한을 이양받았다. 1953년에는 쥐잡이 작전을 통해 빨치산 소탕에 주력하였다. 9·2대공세 작전에도 참여하였다.2. 3. 부대 개편
1952년 8월 14일, 남부지구경비사령부로 개편되었다.[4] 1952년 11월, 치안국 전방사령부 예하에 전북, 전남, 경남, 함양 전방지휘소가 설치되었다. 1953년 5월 1일, 서남지구전투경찰대로 개편되었다.[4]2. 4. 해체
1955년 6월 1일, 모든 빨치산 토벌 작전이 종료됨에 따라 서남지구전투사령부는 7월 1일에 해체되었다.[2][3] 사후 대책으로 경찰기동대가 창설되었다.[2][3]3. 주요 지휘관
wikitext
| # | 계급 | 성명 | 취임일 | 이임일 | 비고 |
|---|---|---|---|---|---|
| 초대 | 육군 준장 | 김용배(金容培) | 1951년 9월 16일 | ||
| 2대 | 육군 대령 | 윤춘근(尹春根) | |||
| 3대 | 육군 소장 | 송요찬(宋堯讚) | 1952년 8월 14일 | 남부지구 경비사령부로 재편성됨. 유임됨. |
| # | 계급 | 성명 | 취임일 | 이임일 | 비고 |
|---|---|---|---|---|---|
| 초대 | 육군 소장 | 송요찬(宋堯讚) | 1952년 8월 15일 | 1952년 10월 10일 | 서남지구 전투사령부, 사령관에서 유임됨. |
| 2대 | 육군 소장 | 이용문(李龍文) | 1952년 10월 20일 | 1953년 5월 24일 | 운봉고개 근처 북방 3km 지점에서 항공사고로 순직. |
| 3대 | 육군 준장 | 이정석(李貞錫) | |||
| 4대 | 육군 준장 | 유해준(兪海濬) | 부대 폐지 |
3. 1. 서남지구전투사령부
초대 사령관은 육군 준장 김용배(金容培)가 1951년 9월 16일에 취임하였다. 2대 사령관은 육군 대령 윤춘근(尹春根)이었다. 3대 사령관은 육군 소장 송요찬(宋堯讚)이었다. 1952년 8월 14일, 서남지구전투사령부는 남부지구 경비사령부로 재편성되었고, 송요찬이 유임되었다.3. 2. 남부지구경비사령부
남부지구경비사령부는 1952년 8월 15일 서남지구전투사령부의 뒤를 이어 재편성되었다. 초대 사령관은 서남지구전투사령관이었던 송요찬(육군 소장)이 유임되었고, 1952년 10월 20일에 이용문(육군 소장)이 2대 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이용문 장군은 1953년 5월 24일 운봉고개 근처 북방 3km 지점에서 항공사고로 순직하였다. 이후 이정석(육군 준장), 유해준(육군 준장)이 각각 3대, 4대 사령관을 역임하였다.4. 부대 편성
4. 1. 1953년 12월 기준
1953년 12월, 대한민국 국군은 북부, 중부, 남부지구전투사령부를 운영하였다. 치안국은 지리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를 1952년 9월에 해체하고, 제203경찰연대와 제205경찰연대를 운영하였다.4. 2. 쥐잡이 작전
경무관 신상묵이 서남지구전투사령부의 사령관이었다. 사령부 예하에는 제203경찰연대(총경 조석원), 제205경찰연대(총경 김원용), 제18경찰연대(경감 차일혁, 이병선), 제36경찰연대(경감 김석완), 칠보경찰대대(경감 이학희, 최송기)가 있었다. 또한 치안국 전방사령부가 남원에 있었고, 전북, 전남, 경남, 함양에 각각 전방지휘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제56경찰연대는 함양에, 지휘소는 장수리에 있었다. 그 외 제103경찰연대(1952년 11월 2일 해체), 제107경찰연대, 제110경찰연대, 제117예비연대, 제1경비대대, 제2경비대대, 제9경비대대가 있었다.5. 논란 및 비판
5. 1. 민간인 학살
5. 2. 함양, 산청 민간인 학살
6. 같이 보기
참조
[1]
웹인용
"[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82) 이현상의 죽음"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2020-10-19
[2]
웹인용
청사연혁
https://www.jnpolice[...]
곡성경찰서
2020-10-19
[3]
웹인용
서남지구전투경찰대설치법
https://www.law.go.k[...]
국가법령정보센터
2020-10-19
[4]
서적
[5]
웹인용
노장대 전투
http://hamyang.grand[...]
한국학중앙연구원
202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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