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은 적 지상군 격파 및 영토 점령, 자국 영토 보존을 주요 임무로 하는 군대의 한 종류이다. 공군, 해군과 협력하여 최종적인 승리를 확정짓는 역할을 수행하며, 역사적으로는 십왕 전투, 마우리아 제국, 로마 군대, 중세 유럽의 기사 사회 등을 거치며 발전해 왔다. 현대 육군은 정보 시스템, 기동·타격 시스템, 화력 시스템, 통신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며, 병과, 부대 편성은 시대와 국가에 따라 다양하다. 또한, 인건비 문제로 예비역을 활용하거나 민병 조직이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으며, 공군 독립 이전에는 항공기를 운용하기도 했다. 육군은 병과, 부대 단위로 구성되며, 각국의 육군은 역사적, 지리적 배경에 따라 다양한 특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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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 병역 병역은 국가가 국민에게 부과하는 국방의 의무로, 군 복무를 포함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징병제, 모병제, 민병제 등의 제도를 통해 부과되고 국가별로 제도 운영 방식에 차이가 있으며, 미래 병역 제도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육군 - 대포 대포는 고대 투석기부터 현대 정밀 유도 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가지며, 용도, 구조, 발사각 등에 따라 분류되고, 포신, 포가, 포탄 등의 구성 요소를 통해 야전, 곡사, 대공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운용된다.
군사에 관한 - 중대 중대는 군대의 기본 전술 및 행정 단위로, 역사적으로 다양한 규모와 구성을 거쳐 현대에는 100~250명 규모로 유지되며 소대, 중대 본부 등으로 구성되고 대위가 지휘한다.
군사에 관한 - 분대 분대는 군대에서 공식 편제상 가장 작은 병력 단위이며, 육군에서는 소대의 하급 부대로 분대장이 지휘하고, 인원은 6명에서 12명 사이이며, 해군, 헌병, 경찰, 소방대 등에서도 유사한 단위로 존재한다.
군사에 관한 - 국가 헌병 국가 헌병은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군사 조직 기반의 민간 치안 담당 제도로, 평시에는 치안 유지 및 테러 진압, 전시에는 전투 임무를 수행하며, 국방부 또는 내무부의 통제를 받는다.
군사에 관한 - 순찰 순찰은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감시하거나 경계하는 행위로, 군사, 법 집행 기관, 민간 분야에서 각기 다른 목적과 방법으로 수행된다.
육군의 공세적 임무는 적의 지상군을 격파하고 적의 영토를 점령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인 수세적 임무는 자국 영토를 침공한 적 지상군을 격퇴하여 자국의 영토를 보존하는 것이다.[25]
공군 및 해군도 이와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고 육군과 협력하지만, 최종적으로 승리를 확정짓는 것은 육군의 임무이다. 1991년의 걸프 전쟁에서는 공군 및 주로 미국 해군 항공대의 폭격으로 다국적군이 전황을 쉽게 풀어나갔다.[25] 반면, 1999년코소보 전쟁에서는 NATO와 미국이 공습을 통해 초반에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을 굴복시키려 하였으나 예상 외로 유고슬라비아의 저항이 거세어 공습만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지상군 투입을 머뭇거리는 사이에 결국 러시아 등과 외교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25]2001년아프가니스탄 전쟁 및 2003년이라크 전쟁에서는 결국 다시 지상군이 전면에 투입되었다.[25]
2. 1. 공세적 임무
2. 2. 수세적 임무
3. 역사
십왕 전투에서 수다스라는 인도-아리아인 왕이 10명의 왕과 그들을 지지하는 수장들의 연합군을 패배시켰다. 철기 시대에 마우리아 제국과 난다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군대 중 하나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정점에는 보병 60만 명 이상, 기병 3만 명, 전차 8천 대, 전투 코끼리 9천 마리가 넘었으며, 이는 속국 동맹군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이다.[2][3][4][5]굽타 제국 시대에는 침입하는 기병궁수 군대를 막기 위해 장궁병이 많은 대규모 군대가 모집되었다. 코끼리, 창병, 기병도 주요 병력이었다.[6]
전국시대(기원전 475-221년)에 대량 생산된 청동 쇠뇌 방아쇠 장치와 엉덩이판
춘추전국시대 이전부터 중국의 여러 나라는 최소 1000년 이상 군대를 유지해왔다.[7] 전국 시대가 되면서 쇠뇌는 어떤 갑옷도 관통할 수 있는 청동촉을 사용하여 군사 기밀이 될 정도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국가의 정치적 권력은 군대와 그 조직에 달려 있었다. 중국은 한, 위, 초, 연, 조, 제 등 여러 나라의 정치적 통합을 거쳐 기원전 221년 진나라의 시황제가 절대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중국의 첫 번째 황제인 그는 병마용을 만들어 서안에 있는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했으며, 반란, 침략 및 침입으로부터 제국을 강화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재정비했다.
손자의 ''손자병법''은 2000년이나 된 책이지만 여전히 중국의 칠서 중 하나로 남아 있다.[8] 군대 없이는 어떤 정치 지도자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 유능한 지도자만이 군대를 통제할 수 있도록 조치가 취해졌다.[9] 국가의 생산력과 군사력을 통제하기 위해 관료 계층이 등장했다.[10]
청동으로 제작된 고대 그리스 전사, 리아체 청동상, 기원전 450년경
스파르타 군대는 가장 초기의 전문 군대 중 하나였다. 소년들은 7세 또는 8세에 막사로 보내져 군인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30세가 되면 막사에서 풀려나 결혼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그 후 남성들은 60세에 은퇴할 때까지 평생을 전쟁에 바쳤다. 스파르타 군대는 대부분 호플리테로 구성되었으며, 거의 동일한 무기와 갑옷을 갖추고 있었다. 각 호플리테는 스파르타 문장과 진홍색 군복을 착용했다. 이 갑옷의 주요 부분은 둥근 방패, 창, 투구였다.
2세기 트라야누스 기둥의 로마 병사 묘사
로마 군대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시민 군대에서 유래했으며, 로마를 위해 의무 복무를 수행하는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공화정이 끝날 때까지 징병은 로마가 병력을 모집하는 주된 방법으로 남아 있었다.[11] 군대는 결국 대부분 시민으로 구성된 전문 조직이 되었고, 25년간 지속적으로 복무한 후 제대하였다.[12]
로마인들은 또한 보조군을 활용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들은 로마인이 아닌 자들로 군단에서 복무하며 기존 로마 군대가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던 역할, 예를 들어 경보병과 중기병을 담당했다. 군 복무 후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았고, 그들의 자녀 또한 시민이 되었다. 또한 로마에 정착할 땅과 돈을 받았다. 서로마 제국 시대에는 이러한 보조군이 외국 용병들과 함께 로마군의 핵심이 되었고, 서로마 제국 시대가 되자 서고트족과 같은 부족들이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중세 유럽의 군대
유럽 중심으로 육군의 역사적 계보를 개관할 경우, 출발점으로 근동 지역의 육군 상황을 참조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 형성된 육군은 투창, 곤봉, 도검, 궁으로 무장한 보병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이 부대는 농노 출신 징집병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지휘관인 특권 계급은 전차를 타고 기동 부대로 싸웠다. 이러한 육군의 모습은 고대 인도, 고대 중국, 이집트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에서는 육군의 주력 부대가 도시 국가 내 제한된 자유 시민으로 조직되었고, 더 나아가 고가의 갑옷을 착용한 보병인 파랑크스가 등장했다. 파랑크스는 충분히 훈련된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밀집 대형을 형성하여 싸우는 전투 교리를 확립했으며, 이는 알렉산드로스 3세(대왕)가 지휘하는 육군이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성공적으로 실천했다. 파랑크스에서 확립된 대형 전투의 개념은 고대 로마의 육군에도 계승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군사학자 베게티우스는 『고대 로마의 군제』에서 그 부대 편제 등을 분석하고 있으며, 밀집 대형의 보병 중대를 횡대의 형태로 등간격으로 배치한 다음 기병과 투석기로 이를 지원하는 레기온이 확립되었다. 육군사에서 레기온의 교리는 장기간 사용되었고, 로마 제국이 해체되고, 민족 대이동에 의해 봉건적인 기사 사회가 성립될 때까지 실천되었다. 이 기사 사회에서 육군은 반드시 확립된 군사 제도는 아니었고, 많은 병사들이 각자의 영지에서 생활했다.
3. 1. 고대
십왕 전투에서 수다스라는 인도-아리아인 왕이 10명의 왕과 그들을 지지하는 수장들의 연합군을 패배시켰다. 철기 시대에 마우리아 제국과 난다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군대 중 하나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정점에는 보병 60만 명 이상, 기병 3만 명, 전차 8천 대, 전투 코끼리 9천 마리가 넘었으며, 이는 속국 동맹군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이다.[2][3][4][5]굽타 제국 시대에는 침입하는 기병궁수 군대를 막기 위해 장궁병이 많은 대규모 군대가 모집되었다. 코끼리, 창병, 기병도 주요 병력이었다.[6]
춘추전국시대 이전부터 중국의 여러 나라는 최소 1000년 이상 군대를 유지해왔다.[7] 전국 시대가 되면서 쇠뇌는 어떤 갑옷도 관통할 수 있는 청동촉을 사용하여 군사 기밀이 될 정도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국가의 정치적 권력은 군대와 그 조직에 달려 있었다. 중국은 한, 위, 초, 연, 조, 제 등 여러 나라의 정치적 통합을 거쳐 기원전 221년 진나라의 시황제가 절대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중국의 첫 번째 황제인 그는 병마용을 만들어 서안에 있는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했으며, 반란, 침략 및 침입으로부터 제국을 강화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재정비했다.
손자의 ''손자병법''은 2000년이나 된 책이지만 여전히 중국의 칠서 중 하나로 남아 있다.[8] 군대 없이는 어떤 정치 지도자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 유능한 지도자만이 군대를 통제할 수 있도록 조치가 취해졌다.[9] 국가의 생산력과 군사력을 통제하기 위해 관료 계층이 등장했다.[10]
스파르타 군대는 가장 초기의 전문 군대 중 하나였다. 소년들은 7세 또는 8세에 막사로 보내져 군인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30세가 되면 막사에서 풀려나 결혼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그 후 남성들은 60세에 은퇴할 때까지 평생을 전쟁에 바쳤다. 스파르타 군대는 대부분 호플리테로 구성되었으며, 거의 동일한 무기와 갑옷을 갖추고 있었다. 각 호플리테는 스파르타 문장과 진홍색 군복을 착용했다. 이 갑옷의 주요 부분은 둥근 방패, 창, 투구였다.
로마 군대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시민 군대에서 유래했으며, 로마를 위해 의무 복무를 수행하는 시민들로 구성되었다. 공화정이 끝날 때까지 징병은 로마가 병력을 모집하는 주된 방법으로 남아 있었다.[11] 군대는 결국 대부분 시민으로 구성된 전문 조직이 되었고, 25년간 지속적으로 복무한 후 제대하였다.[12]
로마인들은 또한 보조군을 활용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들은 로마인이 아닌 자들로 군단에서 복무하며 기존 로마 군대가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던 역할, 예를 들어 경보병과 중기병을 담당했다. 군 복무 후 로마 시민권을 부여받았고, 그들의 자녀 또한 시민이 되었다. 또한 로마에 정착할 땅과 돈을 받았다. 서로마 제국 시대에는 이러한 보조군이 외국 용병들과 함께 로마군의 핵심이 되었고, 서로마 제국 시대가 되자 서고트족과 같은 부족들이 용병으로 고용되었다.
유럽 중심으로 육군의 역사적 계보를 개관할 경우, 출발점으로 근동 지역의 육군 상황을 참조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 형성된 육군은 투창, 곤봉, 도검, 궁으로 무장한 보병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이 부대는 농노 출신 징집병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지휘관인 특권 계급은 전차를 타고 기동 부대로 싸웠다. 이러한 육군의 모습은 고대 인도, 고대 중국, 이집트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에서는 육군의 주력 부대가 도시 국가 내 제한된 자유 시민으로 조직되었고, 더 나아가 고가의 갑옷을 착용한 보병인 파랑크스가 등장했다. 파랑크스는 충분히 훈련된 병사들이 질서정연하게 밀집 대형을 형성하여 싸우는 전투 교리를 확립했으며, 이는 알렉산드로스 3세(대왕)가 지휘하는 육군이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성공적으로 실천했다. 파랑크스에서 확립된 대형 전투의 개념은 고대 로마의 육군에도 계승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군사학자 베게티우스는 『고대 로마의 군제』에서 그 부대 편제 등을 분석하고 있으며, 밀집 대형의 보병 중대를 횡대의 형태로 등간격으로 배치한 다음 기병과 투석기로 이를 지원하는 레기온이 확립되었다. 육군사에서 레기온의 교리는 장기간 사용되었고, 로마 제국이 해체되고, 민족 대이동에 의해 봉건적인 기사 사회가 성립될 때까지 실천되었다. 이 기사 사회에서 육군은 반드시 확립된 군사 제도는 아니었고, 많은 병사들이 각자의 영지에서 생활했다.
3. 2. 중세 유럽
초기 중세에는 모든 귀족이 자신의 장비, 궁수, 보병을 가지고 전투에 응하는 것이 의무였다. 이러한 분권화된 시스템은 당시의 사회 질서 때문에 필요했지만, 훈련, 장비 및 능력이 다양한 잡다한 병력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13] 처음에는 기사와 귀족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 바꿔 사용되었다. 귀족들은 말을 타고 싸웠지만, 대부분의 경우 영주의 참전 기간 동안 단기 고용을 했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는 유일한 목적을 가진 하층 시민들 – 용병들과 범죄자들 –의 지원을 받았다.[13]
중세가 진행되고 봉건제가 합법적인 사회 경제 시스템으로 발전함에 따라 기사들은 작은 단서가 있기는 했지만 자신들만의 계급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전히 영주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더 이상 경제적 필요에 의해 주도되지 않고 새로 설립된 봉신 계급은 대신 충성과 기사도에 의해 주도되었다.
중앙 정부의 권력이 커짐에 따라 고전 시대의 시민 군대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고, 농민의 중앙 징집이 중앙 모병 도구가 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는 중세에서 가장 중앙 집중화된 국가 중 하나였으며, 백년 전쟁에서 싸운 군대는 주로 유급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이론적으로 모든 영국인은 40일 동안 복무할 의무가 있었다. 40일은 특히 대륙에서의 전쟁에는 캠페인 기간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14] 따라서 세금 면제가 도입되어 대부분의 영국인이 봉사를 피하기 위해 돈을 지불했고, 이 돈은 상비군을 창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거의 모든 고 중세 군대는 많은 유급 핵심 군대로 구성되었으며, 적어도 12세기 초부터 유럽에 대규모 용병 시장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중세가 진행됨에 따라 이탈리아 도시들은 이 지역의 초기 및 고 중세 시대에 지배적이었던 민병대가 아니라 주로 용병에 의존하여 싸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정해진 비율로 지급받는 직업 군인 집단이었다. 용병들은 특히 상비군과 결합했을 때 효과적인 군인이 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도시 국가의 군대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을 상비군보다 훨씬 덜 신뢰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탈리아의 용병 간 전쟁은 또한 전투만큼 기동에 의존하는 비교적 피비린내 나지 않는 캠페인으로 이어졌다.
1439년 프랑스 의회인 삼부회(프랑스어: ''états généraux'')는 군사 모집과 훈련을 국왕에게만 제한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새로운 왕실 군대에 자금을 제공하기 위한 ''조세''로 알려진 새로운 세금이 부과될 예정이었다. 용병 회사들은 영구적으로 ''compagnies d'ordonnance''로 왕실 군대에 합류하거나, 거부하면 사냥당하고 파괴될 선택권을 받았다. 프랑스는 약 6,000명의 상비군을 확보했으며, 이들은 남은 용병들을 점진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새로운 상비군은 이전의 군대보다 더 엄격하고 전문적인 전쟁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1440년대의 개혁은 결국 1453년 카스티용 전투에서 프랑스의 승리와 백년 전쟁의 종식으로 이어졌다. 1450년까지 이 회사들은 ''grande ordonnance''로 알려진 야전군과 ''petite ordonnance''로 알려진 수비대 군대로 나뉘었다.[15]
3. 3. 근대
마리냐노 전투(1515년)에서 명예와 명성, 그리고 돈을 위해 싸우는 스위스 용병과 독일 란츠크네히트. 르네상스 시대 군대의 대부분은 용병으로 구성되었다.
초기 국가들은 상비군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전시에는 용병을 고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용병들은 전쟁이 끝나면 주로 모집되었다.
따라서 베테랑 군인들은 다른 직업을 찾았고, 종종 용병이 되었다. 자유 기병대는 종종 동원된 민병대에서는 제공할 수 없는 장기간의 훈련이 필요한 전투 방식을 전문으로 했다.
1650년대 후반까지 대부분의 군대는 용병이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대부분의 국가들은 더 엄격한 규율과 정치적으로 더 신뢰할 수 있는 상비군에 투자했다. 한동안 용병들은 훈련관과 관리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곧 이러한 임무도 국가가 맡게 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군대는 많은 지원 관리 인력을 필요로 했다.
새롭게 중앙 집권화된 국가들은 이러한 군대를 관리하기 위해 방대한 조직화된 관료 체제를 구축해야 했는데, 일부 역사가들은 이것이 현대 관료 국가의 기초라고 주장한다. 세금 증가와 정부 기능의 중앙 집권화 증가의 결합은 프랑스의 프롱드와 잉글랜드 내전과 같은 유럽 전역에서 일련의 반란을 일으켰다.
많은 국가에서 이러한 갈등의 해결책은 절대 군주제의 부상이었다.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만 대의 정부가 대안으로 발전했다. 17세기 후반부터 국가들은 국영 은행 기관으로부터 장기 저금리 대출을 통해 전쟁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 과정을 가장 먼저 마스터한 국가는 네덜란드 공화국이었다. 유럽 군대의 이러한 변화는 큰 사회적 영향을 미쳤다. 이제 국가의 방위는 귀족이 아닌 평민들에게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고위 지휘부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근세 군대의 장교단을 독점한 채였다. 게다가, 인민 봉기는 귀족이나 지주 계급의 지원과 후원이 없으면 거의 항상 실패했다. 막대한 비용 때문에 새로운 군대는 또한 세금과 상업 계급에 의존했으며, 그들은 또한 사회에서 더 큰 역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와 영국의 강력한 상업 국가들은 훨씬 더 큰 국가들과 군사력에서 맞섰다.
어떤 남자라도 소총 사용법을 빠르게 훈련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군대를 형성하는 것이 훨씬 쉬워졌다. 무기의 부정확성으로 인해 대규모 병력이 필요해졌다. 이것은 군대 규모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졌다. 처음으로 고도로 숙련된 전문가가 아닌 인구의 막대한 다수가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국가 전역에서 사람들을 조직된 부대로 끌어들임으로써 국가 통합과 애국심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현대적인 국가 개념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 혁명 전쟁 이후에야 분명해질 것이다. 이때 ''레베 앙 마스''와 징병이 현대전의 결정적인 패러다임이 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대부분의 국가 군대가 실제로 여러 국적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스페인 군대는 스페인, 이탈리아, 왈롱(왈롱 근위대) 및 독일을 포함한 모든 스페인 유럽 영토에서 모집되었다. 프랑스는 독일, 스위스뿐만 아니라 피에몬테에서도 일부 병사들을 모집했다. 영국은 18세기 후반까지 헤세와 하노버 선제후국 군대를 모집했다.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은 많은 가톨릭 유럽 국가의 군대에서 직업을 가졌다.
영국의 잉글랜드 내전 이전에 군주는 근위병과 왕실 귀족 근위대 또는 "귀족 연금 수령자"로 구성된 개인 경호원과 트위드 강가의 버윅이나 포츠머스(또는 1558년 프랑스에 의해 탈환되기 전의 칼레)와 같은 중요한 지역을 주둔시키기 위한 소규모 지역 부대를 유지했다.
해외 원정을 위한 군대는 임시로 모집되었다. 귀족과 전문 정규 병사는 군주로부터 군대를 공급하라는 임무를 받았고, 다양한 출처에서 계약서를 통해 할당량을 충족했다. 1661년 1월 26일 찰스 2세는 영국 육군이 될 것의 기원을 만든 왕실 영장을 발표했지만, 스코틀랜드와 영국 군대는 1707년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통합까지 두 개의 별도 조직으로 남아 있었다. 소규모 부대는 몇 개의 연대로만 구성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 이후 대륙군은 상비군에 대한 미국인들의 불신의 일환으로 신속하게 해산되었고, 불규칙적인 주 방위군이 웨스트포인트의 무기고를 지키는 하나의 포병대를 제외하고는 미국의 유일한 지상군이 되었다. 그 후 1784년 제1 미국 연대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인해 훈련된 상비군을 편성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 중 첫 번째인 미합중국 군단은 1791년에 설립되었다.
1733년까지 프로이센 군대의 일반 병사들은 주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에서 모집되거나 강제로 징집된 농민으로 구성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웃 국가로 도망쳤다.[17] 이러한 추세를 막기 위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로이센을 연대 칸톤으로 나누었다.[18] 모든 청년은 매년 3개월 동안 이러한 모병 지역에서 병사로 복무해야 했는데, 이는 농업적 요구를 충족하고 정규군을 강화하기 위한 추가 병력을 추가했다.[18]
러시아 차르들은 표트르 1세 이전에 매우 불신뢰하고 훈련이 안 된 전문적인 세습 사수 부대(스트렐치(러시아어))를 유지했다. 전시에는 무장 세력에 농민들이 증강되었다. 표트르 1세는 독일식 모델을 기반으로 하지만 새로운 측면이 있는 현대 정규군을 도입했다. 재능 있는 평민들에게 장교 계급에 도달하면 결국 귀족 작위가 포함된 승진이 주어졌다. 농민과 도시 사람들의 징병은 정착지별 할당량 시스템을 기반으로 했다. 처음에는 가구 수를 기반으로 했고, 나중에는 인구 수를 기반으로 했다.[20] 18세기의 복무 기간은 평생이었다.[20] 1793년에는 25년으로 단축되었고, 1834년에는 20년에 예비역 5년을 더해, 1855년에는 12년에 예비역 3년을 더했다.[20]
최초의 오스만 상비군은 예니체리였다. 그들은 충성심과 사기를 항상 신뢰할 수 없는 부족 전사(''가지'')로 주로 구성된 부대를 대체했다. 최초의 예니체리 부대는 전쟁 포로와 노예로 구성되었는데, 아마도 술탄이 전통적인 군대 전리품의 5분의 1을 현금이 아닌 현물로 가져갔기 때문일 것이다.
1380년대부터 그들의 계급은 ''데브시르메'' 시스템하에 채워졌는데, 이 시스템에서 봉건적 세금은 술탄에 대한 봉사로 지불되었다. "신병"은 대부분 기독교 청년이었고, 맘루크를 연상시켰다.
중국은 17세기 초에 만주족을 팔기군으로 조직했다. 탈주한 명 군대는 녹영을 형성했다. 이 군대는 자발적으로 장기간 복무했다.
육군의 역사적 전환점을 맞이하려면 르네상스 시대까지 기다려야 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문예뿐 아니라 군사도 부흥되었고,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고대 로마의 군제를 바탕으로 한 '''상비군 창설'''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통해 부대가 조직적인 대형 전투를 수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육군의 모습을 유럽에서 가장 먼저 재현한 것은 스위스 자유 농민에 의해 조직된 전투 집단이었다. 그들은 장창을 갖추고 밀집 대형을 유지하며, 각 부대가 전술적으로 기동하는 '''레기온'''의 교리(독트린)을 실천해 보였다.
스페인 육군은 이러한 군사적 르네상스를 배경으로 하면서 당시 발명되었던 화기를 통합하여, 밀집한 보병 대형을 화승총으로 엄호하는 '''테르시오'''라는 전투 교리(Battle Doctrine)를 확립했다. 스페인 육군이 유럽 열강의 육군에 승리를 거듭하자, 테르시오는 널리 보급되었다.
스페인 육군에 피해를 입은 네덜란드 육군에서는 오라녜 공'''마우리츠'''를 중심으로 테르시오를 연구하고, 군사 훈련의 기본 훈련을 정비하며, 야전포와 용기병의 도입, 반전 행진 사격의 고안 등의 성과를 남겼다.
네덜란드 육군의 이러한 혁신을 받아들인 스웨덴 육군은 이를 응용하면서 발전시켰다. 구스타프 아돌프 국왕은 보병의 소총 사격, 기병의 抜刀突撃(발도 돌격), 포병의 전투 지원을 연계하여, 근대 육군의 기본적인 전투 교리인 '''삼병전술'''을 완성했다.
나폴레옹 전쟁기 군대
삼병전술의 유효성은 프랑스 육군의 나폴레옹(나폴레옹 1세)에 의해 증명되었다. 나폴레옹은 탁월한 전술적 운용으로 결정적 지점에 우세한 전력을 집중시켜 적을 격파할 뿐만 아니라 철저한 추격을 실천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기관총이 전투 진지에 배치됨에 따라, 장갑을 갖춘 전차가 기병을 대신하여 돌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항공기와 전차 부대의 연계에 의한 '''전격전'''이 성공하여, 육군에서 전차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3. 4. 현대
징병제는 프랑스 공화국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무장한 국민"이라고 불렀던 ''그랑 아르메''를 편성할 수 있게 했으며, 이는 유럽의 전문적인 군대와 성공적으로 싸웠다. 징병제는 특히 징집병들이 국가 안보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해외 전쟁에 파병될 때 민주주의 국가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정치적으로 논란이 많았다.
선진국에서는 기술적인 화력과 더 잘 훈련된 전투 부대에 대한 강조가 증가함에 따라 가까운 미래에 대규모 징병제가 시행될 가능성은 낮다. 러시아를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주로 징병제 군대를 유지하고 있다. 스위스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은 매우 드문 ''시민 군대''도 있다(스위스 군. 참조).
전후 육군은 대체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전격전에서 실증된 기갑부대를 사용하여 한국 전쟁, 인도차이나 전쟁, 중동 전쟁 등에서 전과를 올렸으며, 유럽에서는 전격전의 위력을 높인 '''에어랜드 독트린'''이라는 전투 교리가 고안되었다. 그러나 육군은 대전차 미사일의 발명, 그리고 베트남 전쟁과 같은 게릴라전, 항공전력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육군의 모습은 변화하고 있다.
기갑부대는 냉전 이후의 걸프 전쟁에서 큰 효과를 거두었지만, 이 전쟁에서 육군은 공정부대와 공중기동부대도 투입하여 에어랜드 독트린의 구상을 실천하였다. 게다가 전차는 전시 중보다 훨씬 사격 능력, 기동 능력, 통신 기능, 방호 성능을 향상시킨 주력 전차의 형태로 변화하였고, 개별 보병 부대도 항공기와 헬리콥터로 신속하게 수송될 수 있게 되었다. 최말단 부대에 이르기까지 지휘통제 또한 전령이나 구두 명령뿐만 아니라 컴퓨터 네트워크에 기반한 C4I 시스템에 의해 종합적으로 관리되었다. 과거에는 시가전이나 산림에서 조직적인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군사 혁명을 배경으로 이에 대처하는 능력을 얻기 위해 개인 보병이 정보 시스템으로 통합되는 것이 고안되고 있다. 이러한 전투 교리는 육군에 대게릴라 작전 및 대테러 작전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4. 구성 및 편제
또는 전역(域)
1,000,000 ~ 10,000,000 명
일반적인 부대 편제는 집단군(Army group, 集團軍) - 야전군(Field army, 野戰軍) - 군단(Corps, 軍團) - 사단(Division, 師團) - 여단(Brigade, 旅團) - 연대(Regiment, 聯隊) - 대대(Battalion, 大隊) - 중대 (Company, 中隊) - 소대 (Platoon, 小隊) - 분대(squad, 分隊) 등이다.[21] 하지만, 이 편제가 모든 군대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특전사는 중대가 최하위 부대 단위이며, 중대-지역대-대대-여단-사령부 구조를 갖는다. 영국 육군은 연대 밑에 대대가 없이 바로 중대 편제가 존재하는데, 이는 영국 육군의 연대가 중세 시대 봉건 영주들의 사병 집단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에서는 집단군과 같은 대규모 편제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현대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나 러시아 등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들이 군관구제를 채택하여 유지하고 있다.
냉전 종식 후, 많은 선진국들이 군비를 감축하면서 대규모 기갑전보다는 지역 분쟁 및 저강도 분쟁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규모로 군대를 축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도 국방개혁 2020을 통해 이러한 추세에 맞춰 군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26]
육군은 NH90 헬리콥터로 병력을 수송하는 이탈리아 육군 제7군 항공연대 "베가"처럼 공중 또는 해상 지원을 제공하는 특수 부대를 포함할 수도 있다.
특정 육군은 일반적인 육군과 구분하기 위해 이름이나 번호가 붙을 수 있다. (예: 미국 제1군, 북버지니아군) 영국 육군에서는 육군의 서수를 철자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예: 제1군), 하위 부대는 숫자를 사용한다(예: 제1사단). 육군(군집 및 전구)은 규모, 구성 및 책임 범위가 군대마다 크게 다를 수 있다.
소비에트 적군과 소비에트 공군에서 "군"은 규모가 다를 수 있었지만, 전시에는 군집 규모의 "전선"에 종속되었다. 평시에는 소비에트 육군이 일반적으로 군관구에 종속되었다. 빅터 수보로프의 『소비에트 육군 내부』는 냉전 시대 소비에트 군관구가 실제로 행정 및 기만('마스키로비카')을 위해 공동으로 위치한 전선 사령부와 군관구 사령부로 구성되었는지 설명한다.
많은 국가, 특히 유럽이나 북미에서는 군대가 다음과 같이 세분화되는 경우가 많다.
야전군: 야전군은 사령부, 군 병력, 일반적으로 3~4개의 군단, 그리고 3~4개의 사단으로 구성된다. 야전군급 전투에서는 중요 지점에서 적에게 압력을 높이기 위해 한 군단에서 다른 군단으로 사단과 증원부대를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야전군은 장군 또는 중장이 지휘한다.
군단: 군단은 일반적으로 2개 이상의 사단으로 구성되며, 중장이 지휘한다.
사단: 각 사단은 소장이 지휘하며, 보통 보병, 포병, 공병, 통신부대를 포함한 3개의 여단과 독립적인 작전을 유지하기 위한 군수(보급 및 지원) 지원 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산악지역에서 작전하는 사단을 제외하고, 모든 사단은 적어도 1개 이상의 기갑부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기능에 따라 더 많은 부대를 보유하기도 한다. 모든 지상군 전투 부대의 기본 구성 요소는 보병사단이다.
여단: 여단은 준장 또는 준장이 지휘하며, 때로는 대령이 지휘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기능에 따라 3개 이상의 다양한 부대 대대(예: 포병, 보병, 기갑 대대 등)로 구성된다. 독립 여단은 주로 포병, 보병, 기갑 부대와 작전 지원을 위한 군수 부대를 포함하고 있으며, 사단에 속하지 않고 군단의 직접 지휘를 받는 부대이다.
대대: 각 대대는 약 500~750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대령 또는 때로는 중령이 지휘한다. 이 숫자는 연대의 기능에 따라 다릅니다. 대대는 3~5개의 중대(소총 중대 3개, 화력 지원 중대 1개, 본부 중대 1개) 또는 포대(포병)나 소대(기갑 및 기병)와 같은 기능적 등가물로 구성되며, 각각 소령이 지휘한다. 중대는 분대 또는 소대로 다시 나눌 수 있다.[21]
병력은 현역과 예비역 등의 병과로 구성되며, 역할에 따라 장교, 부사관, 병사로 나뉜다. 전투 병과에는 보병, 포병, 전차병, 방공병, 공병, 항공 등이 있으며, 후방 지원을 위한 통신병, 무기, 보급품, 의무, 화생방, 주계, 헌병, 군악 등의 부서도 존재한다.
부대 편성은 장비와 병과에 따라 분대, 소대, 중대, 대대, 연대 등으로 구성되거나, 다양한 병과와 장비가 혼합된 여단이나 사단으로 편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편성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필요에 따라 연대 전투단과 같은 편성 부대나 합동 부대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계급, 병과, 부대 편성은 국가와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하므로, 자세한 내용은 '''군의 계급''', '''병과''', '''군의 편성'''을 참조하는 것이 좋다.
육군은 인적 의존도가 높아 인건비가 높은 선진국에서는 예산 유지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 스위스, 키프로스처럼 최소한의 현역 부대에 대규모 예비역을 갖춰 비용을 절감하는 국가도 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민병 조직이 육군의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들은 장비, 사기, 도덕성 부족으로 인해 전쟁 범죄나 인권 침해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국가에서 공군이 독립하기 전까지 육군이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제외한 모든 무기로서의 항공기를 운용했으며, 21세기 초에도 헬리콥터를 비롯한 일부 항공기는 육군(육군항공대)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으로 육군은 보병 부대에서 출발하여, 로마군 제도에서 기병과 포병, 공병이라는 기본적인 육군의 병과가 형성되었다. 근대적인 육군은 구스타프 아돌프에 의해 삼군전술이 도입된 데서 시작하여, 육상 작전에서 보병, 기병, 포병의 조직적인 연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사단 제도가 개발되었고 현대 육군에 이르기까지 사단 제도가 계속 사용되고 있다. 화포의 기술 혁신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차와 항공기의 발명, 보병의 기계화 등으로 전격전이 행해지게 되면서, 기갑사단이 육군의 핵심 전력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항공기의 성능이 개선되면서 공수사단이나 공중기동사단이 편성되고, 비행기와 헬리콥터가 육군의 장비로 채택되었다.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게릴라전에 대응하기 위해 특수부대를 편성하는 것이 추진되었다.
현대의 지상 전투에는 매우 다양한 무기와 부대를 운용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제하기 위한 각종 시스템은 선진국의 육군에서 일반적으로 도입되어 있다.
'''정보 시스템''':적 부대와 지형에 관한 정보 자료를 수집하고, 그 자료를 지휘소 등에 전달하여 분석하는 일련의 시스템을 가리킨다. 정확한 지휘통제와 부대 지휘, 해당 정보가 필요한 부대에 대한 전달을 위한 것이다. 그 수단으로, 인공위성이나 레이더 등에 의한 영상이나 전자파 등의 각종 센서에서 얻는 방법이 있다. 최근에는 통신 기술의 발달과 관련하여 더욱 실시간 정보가 요구되고 있으며, 이 시스템의 정비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기동·타격 시스템''':부대가 적 부대에 대해 우위에 서기 위해 이동하고, 전투력을 발휘하기 위한 일련의 시스템을 가리킨다. 이 시스템이 적절하다면 신속하고 효율적인 선제 공격의 가능성을 얻고, 전투력의 정확한 운용을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육상에서의 기동 타격의 핵심 전력은 전차 부대이며, APC, 자주포, 공병 차량 등이 결합되어 전장에서 운용된다.
'''화력 시스템''':포병이나 개인 휴대 화기 등 각종 화력으로 적의 전투 부대나 시설을 정확하게 타격하는 일련의 시스템을 가리킨다. 포병 부대의 사격 능력도 최근 기술 발전으로 실시간화, 정밀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목표의 탐지에서부터 화기의 사거리와 목표까지의 거리, 기후, 지형 등 여러 정보의 처리, 포병의 사격 제어, 지휘 통제 등의 시스템이 종합적으로 향상되고 있다.
'''통신 시스템''':모든 시스템의 정보 수집과 전달을 뒷받침하는 기본적인 시스템이다. 가장 원시적인 통신 수단으로는 봉화나 수기 신호 등이 있으며, 현대의 기술로는 광통신이나 전파를 이용한 통신이 있다. 많은 선진국에서는 이 시스템을 중시하고 있으며, 종종 일부 기능이 중복된 통신 시스템을 보유하고, 작전 기획과 부대 운용, 군수 관리, 다른 군종이나 외국과의 연계 등 폭넓은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육군은 해군이나 공군에 비해 후방 지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육군은 다양한 병기와 많은 병력을 보유하여 식량, 물, 연료, 탄약, 포탄, 의약품 등 광범위한 물자를 대량으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해군은 함정 자체가 물자 수송 수단이며, 공군의 경우 항공기는 기동성이 높아 기지와의 연계가 강해 보급이 비교적 용이하다. 육상 전력이 종종 더딘 이유는 육군 조직이 후방 지원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독자적인 야외 전개가 가능한 후방 지원 조직을 갖춘 육군은, 항만, 공항에 의존해야 하는 해군, 공군에 비해 항구성이 높다. 항공기는 공항이 파괴되면 즉시 활동 불능이 되고, 해군도 시간적 여유는 있지만 곧 활동할 수 없게 된다. 반면, 육군도 보급처와 같은 취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존재는 항만이나 공항과 달리 대체 가능한 보편적인 조직이다.
역사적으로 육군은 보병 부대에서 출발하여, 로마군 제도에서 기병과 포병, 공병이라는 기본적인 육군의 병과가 형성되었다. 근대적인 육군은 구스타프 아돌프에 의해 삼군전술이 도입된 데서 시작하여, 육상 작전에서 보병, 기병, 포병의 조직적인 연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사단 제도가 개발되었고 현대 육군에 이르기까지 사단 제도가 계속 사용되고 있다. 화포의 기술 혁신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전차와 항공기의 발명, 보병의 기계화 등으로 전격전이 행해지게 되면서, 기갑사단이 육군의 핵심 전력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항공기의 성능이 개선되면서 공수사단이나 공중기동사단이 편성되고, 비행기와 헬리콥터가 육군의 장비로 채택되었다. 냉전 시대를 거치면서 게릴라전에 대응하기 위해 특수부대를 편성하는 것이 추진되었다.
4. 2. 부대 단위
frameless
일반적인 부대 편제는 집단군(Army group, 集團軍) - 야전군(Field army, 野戰軍) - 군단(Corps, 軍團) - 사단(Division, 師團) - 여단(Brigade, 旅團) - 연대(Regiment, 聯隊) - 대대(Battalion, 大隊) - 중대 (Company, 中隊) - 소대 (Platoon, 小隊) - 분대(squad, 分隊) 등이다.[21] 하지만, 이 편제가 모든 군대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의 특전사는 중대가 최하위 부대 단위이며, 중대-지역대-대대-여단-사령부 구조를 갖는다. 영국 육군은 연대 밑에 대대가 없이 바로 중대 편제가 존재하는데, 이는 영국 육군의 연대가 중세 시대 봉건 영주들의 사병 집단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에서는 집단군과 같은 대규모 편제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현대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나 러시아 등 넓은 영토를 가진 국가들이 군관구제를 채택하여 유지하고 있다.
냉전 종식 후, 많은 선진국들이 군비를 감축하면서 대규모 기갑전보다는 지역 분쟁 및 저강도 분쟁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규모로 군대를 축소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대한민국도 국방개혁 2020을 통해 이러한 추세에 맞춰 군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26]
특정 육군은 일반적인 육군과 구분하기 위해 이름이나 번호가 붙을 수 있다. (예: 미국 제1군, 북버지니아군) 영국 육군에서는 육군의 서수를 철자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예: 제1군), 하위 부대는 숫자를 사용한다(예: 제1사단). 육군(군집 및 전구)은 규모, 구성 및 책임 범위가 군대마다 크게 다를 수 있다.
소비에트 적군과 소비에트 공군에서 "군"은 규모가 다를 수 있었지만, 전시에는 군집 규모의 "전선"에 종속되었다. 평시에는 소비에트 육군이 일반적으로 군관구에 종속되었다. 빅터 수보로프의 『소비에트 육군 내부』는 냉전 시대 소비에트 군관구가 실제로 행정 및 기만('마스키로비카')을 위해 공동으로 위치한 전선 사령부와 군관구 사령부로 구성되었는지 설명한다.
많은 국가, 특히 유럽이나 북미에서는 군대가 다음과 같이 세분화되는 경우가 많다.
야전군: 야전군은 사령부, 군 병력, 일반적으로 3~4개의 군단, 그리고 3~4개의 사단으로 구성된다. 야전군급 전투에서는 중요 지점에서 적에게 압력을 높이기 위해 한 군단에서 다른 군단으로 사단과 증원부대를 이동시키는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야전군은 장군 또는 중장이 지휘한다.
군단: 군단은 일반적으로 2개 이상의 사단으로 구성되며, 중장이 지휘한다.
사단: 각 사단은 소장이 지휘하며, 보통 보병, 포병, 공병, 통신부대를 포함한 3개의 여단과 독립적인 작전을 유지하기 위한 군수(보급 및 지원) 지원 부대를 보유하고 있다. 산악지역에서 작전하는 사단을 제외하고, 모든 사단은 적어도 1개 이상의 기갑부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기능에 따라 더 많은 부대를 보유하기도 한다. 모든 지상군 전투 부대의 기본 구성 요소는 보병사단이다.
여단: 여단은 준장 또는 준장이 지휘하며, 때로는 대령이 지휘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기능에 따라 3개 이상의 다양한 부대 대대(예: 포병, 보병, 기갑 대대 등)로 구성된다. 독립 여단은 주로 포병, 보병, 기갑 부대와 작전 지원을 위한 군수 부대를 포함하고 있으며, 사단에 속하지 않고 군단의 직접 지휘를 받는 부대이다.
대대: 각 대대는 약 500~750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대령 또는 때로는 중령이 지휘한다. 이 숫자는 연대의 기능에 따라 다릅니다. 대대는 3~5개의 중대(소총 중대 3개, 화력 지원 중대 1개, 본부 중대 1개) 또는 포대(포병)나 소대(기갑 및 기병)와 같은 기능적 등가물로 구성되며, 각각 소령이 지휘한다. 중대는 분대 또는 소대로 다시 나눌 수 있다.[21]
병력은 현역과 예비역 등의 병과로 구성되며, 역할에 따라 장교, 부사관, 병사로 나뉜다. 전투 병과에는 보병, 포병, 전차병, 방공병, 공병, 항공 등이 있으며, 후방 지원을 위한 통신병, 무기, 보급품, 의무, 화생방, 주계, 헌병, 군악 등의 부서도 존재한다.
부대 편성은 장비와 병과에 따라 분대, 소대, 중대, 대대, 연대 등으로 구성되거나, 다양한 병과와 장비가 혼합된 여단이나 사단으로 편성된다. 하지만 이러한 편성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필요에 따라 연대 전투단과 같은 편성 부대나 합동 부대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계급, 병과, 부대 편성은 국가와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하므로, 자세한 내용은 '''군의 계급''', '''병과''', '''군의 편성'''을 참조하는 것이 좋다.
육군은 인적 의존도가 높아 인건비가 높은 선진국에서는 예산 유지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 스위스, 키프로스처럼 최소한의 현역 부대에 대규모 예비역을 갖춰 비용을 절감하는 국가도 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민병 조직이 육군의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들은 장비, 사기, 도덕성 부족으로 인해 전쟁 범죄나 인권 침해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국가에서 공군이 독립하기 전까지 육군이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제외한 모든 무기로서의 항공기를 운용했으며, 21세기 초에도 헬리콥터를 비롯한 일부 항공기는 육군(육군항공대)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4. 3. 장비 시스템 (일본어 문서)
현대의 지상 전투에는 매우 다양한 무기와 부대를 운용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제하기 위한 각종 시스템은 선진국의 육군에서 일반적으로 도입되어 있다.
'''정보 시스템''':적 부대와 지형에 관한 정보 자료를 수집하고, 그 자료를 지휘소 등에 전달하여 분석하는 일련의 시스템을 가리킨다. 정확한 지휘통제와 부대 지휘, 해당 정보가 필요한 부대에 대한 전달을 위한 것이다. 그 수단으로, 인공위성이나 레이더 등에 의한 영상이나 전자파 등의 각종 센서에서 얻는 방법이 있다. 최근에는 통신 기술의 발달과 관련하여 더욱 실시간 정보가 요구되고 있으며, 이 시스템의 정비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기동·타격 시스템''':부대가 적 부대에 대해 우위에 서기 위해 이동하고, 전투력을 발휘하기 위한 일련의 시스템을 가리킨다. 이 시스템이 적절하다면 신속하고 효율적인 선제 공격의 가능성을 얻고, 전투력의 정확한 운용을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육상에서의 기동 타격의 핵심 전력은 전차 부대이며, APC, 자주포, 공병 차량 등이 결합되어 전장에서 운용된다.
'''화력 시스템''':포병이나 개인 휴대 화기 등 각종 화력으로 적의 전투 부대나 시설을 정확하게 타격하는 일련의 시스템을 가리킨다. 포병 부대의 사격 능력도 최근 기술 발전으로 실시간화, 정밀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목표의 탐지에서부터 화기의 사거리와 목표까지의 거리, 기후, 지형 등 여러 정보의 처리, 포병의 사격 제어, 지휘 통제 등의 시스템이 종합적으로 향상되고 있다.
'''통신 시스템''':모든 시스템의 정보 수집과 전달을 뒷받침하는 기본적인 시스템이다. 가장 원시적인 통신 수단으로는 봉화나 수기 신호 등이 있으며, 현대의 기술로는 광통신이나 전파를 이용한 통신이 있다. 많은 선진국에서는 이 시스템을 중시하고 있으며, 종종 일부 기능이 중복된 통신 시스템을 보유하고, 작전 기획과 부대 운용, 군수 관리, 다른 군종이나 외국과의 연계 등 폭넓은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4. 4. 병참 기능 (일본어 문서)
육군은 해군이나 공군에 비해 후방 지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육군은 다양한 병기와 많은 병력을 보유하여 식량, 물, 연료, 탄약, 포탄, 의약품 등 광범위한 물자를 대량으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해군은 함정 자체가 물자 수송 수단이며, 공군의 경우 항공기는 기동성이 높아 기지와의 연계가 강해 보급이 비교적 용이하다. 육상 전력이 종종 더딘 이유는 육군 조직이 후방 지원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독자적인 야외 전개가 가능한 후방 지원 조직을 갖춘 육군은, 항만, 공항에 의존해야 하는 해군, 공군에 비해 항구성이 높다. 항공기는 공항이 파괴되면 즉시 활동 불능이 되고, 해군도 시간적 여유는 있지만 곧 활동할 수 없게 된다. 반면, 육군도 보급처와 같은 취약점을 가지고 있지만, 그 존재는 항만이나 공항과 달리 대체 가능한 보편적인 조직이다.
춘추시대 이전부터 중국의 여러 나라는 최소 1000년 이상 군대를 유지해왔다.[7] 전국 시대가 되면서 쇠뇌는 어떤 갑옷도 관통할 수 있는 청동촉을 사용하여 군사 기밀이 될 정도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국가의 정치적 권력은 군대와 그 조직에 달려 있었다. 중국은 한(韓), 위(魏), 초(楚), 연(燕), 조(趙), 제(齊) 등 여러 나라의 정치적 통합을 거쳐 기원전 221년 진나라의 시황제(秦始皇帝)가 절대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중국의 첫 번째 황제인 그는 병마용을 만들어 서안(西安)에 있는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했으며, 반란, 침략 및 침입으로부터 제국을 강화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재정비했다.
손자(孫子)의 ''손자병법''은 2000년이나 된 책이지만 여전히 중국의 칠서 중 하나로 남아 있다.[8] 군대 없이는 어떤 정치 지도자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 유능한 지도자만이 군대를 통제할 수 있도록 조치가 취해졌다.[9] 국가의 생산력과 군사력을 통제하기 위해 관료(士大夫) 계층이 등장했다.[10]
십왕 전투에서 수다스라는 인도-아리아인 왕이 10명의 왕과 그들을 지지하는 수장들의 연합군을 패배시켰다. 철기 시대에 난다 제국과 마우리아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군대 중 하나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정점에는 보병 60만 명 이상, 기병 3만 명, 전차 8천 대, 전투 코끼리 9천 마리가 넘었으며, 이는 속국 동맹군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이다.[2][3][4][5]굽타 제국 시대에는 침입하는 기병궁수 군대를 막기 위해 장궁병이 많은 대규모 군대가 모집되었다. 코끼리, 창병, 기병도 주요 병력이었다.[6]
아프리카의 육군은 역사적 경위로 보아 구 종주국의 식민지 수비대, 식민지 독립 운동의 군사 부문, 반정부 세력의 민병 부대 중 하나를 기원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로디지아군 - 로디지아 공화국 해체와 동시에 폐지되었다.
우간다 국민방위군 - 과거 반정부 세력인 국민저항운동의 군사 부문인 국민저항군이 정권 탈취와 동시에 국군화된 것이다. 한동안은 구 국군을 대신하여 국민저항군이 국방군으로 존재했으나, 정군 분리의 필요성으로 인해 명칭을 변경했다.
세이셸 국민방위군 - 1977년 르네 전 대통령파에 의한 군사 쿠데타를 계기로 창설되었다. 동파의 민병을 기원으로 하며, 쿠데타에 협력한 탄자니아가 한동안 동군의 육성·지원을 실시했다.
카탕가 헌병대 - 콩고 동란 당시 "독립"한 카탕가의 국군이었다. 실태는 백인 용병 부대였다고 알려져 있다.
5. 1. 아시아
춘추시대 이전부터 중국의 여러 나라는 최소 1000년 이상 군대를 유지해왔다.[7] 전국 시대가 되면서 쇠뇌는 어떤 갑옷도 관통할 수 있는 청동촉을 사용하여 군사 기밀이 될 정도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국가의 정치적 권력은 군대와 그 조직에 달려 있었다. 중국은 한(韓), 위(魏), 초(楚), 연(燕), 조(趙), 제(齊) 등 여러 나라의 정치적 통합을 거쳐 기원전 221년 진나라의 시황제(秦始皇帝)가 절대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중국의 첫 번째 황제인 그는 병마용을 만들어 서안(西安)에 있는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했으며, 반란, 침략 및 침입으로부터 제국을 강화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재정비했다.
손자(孫子)의 ''손자병법''은 2000년이나 된 책이지만 여전히 중국의 칠서 중 하나로 남아 있다.[8] 군대 없이는 어떤 정치 지도자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 유능한 지도자만이 군대를 통제할 수 있도록 조치가 취해졌다.[9] 국가의 생산력과 군사력을 통제하기 위해 관료(士大夫) 계층이 등장했다.[10]
십왕 전투에서 수다스라는 인도-아리아인 왕이 10명의 왕과 그들을 지지하는 수장들의 연합군을 패배시켰다. 철기 시대에 난다 제국과 마우리아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군대 중 하나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정점에는 보병 60만 명 이상, 기병 3만 명, 전차 8천 대, 전투 코끼리 9천 마리가 넘었으며, 이는 속국 동맹군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이다.[2][3][4][5]굽타 제국 시대에는 침입하는 기병궁수 군대를 막기 위해 장궁병이 많은 대규모 군대가 모집되었다. 코끼리, 창병, 기병도 주요 병력이었다.[6]
춘추시대 이전부터 중국의 여러 나라는 최소 1000년 이상 군대를 유지해왔다.[7] 전국 시대가 되면서 쇠뇌는 어떤 갑옷도 관통할 수 있는 청동촉을 사용하여 군사 기밀이 될 정도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국가의 정치적 권력은 군대와 그 조직에 달려 있었다. 중국은 한(韓), 위(魏), 초(楚), 연(燕), 조(趙), 제(齊) 등 여러 나라의 정치적 통합을 거쳐 기원전 221년 진나라의 시황제(秦始皇帝)가 절대 권력을 획득하게 된다. 중국의 첫 번째 황제인 그는 병마용을 만들어 서안(西安)에 있는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했으며, 반란, 침략 및 침입으로부터 제국을 강화하기 위해 만리장성(Great Wall of China)을 재정비했다.
손자(孫子)의 ''손자병법''은 2000년이나 된 책이지만 여전히 중국의 칠서 중 하나로 남아 있다.[8] 군대 없이는 어떤 정치 지도자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 유능한 지도자만이 군대를 통제할 수 있도록 조치가 취해졌다.[9] 국가의 생산력과 군사력을 통제하기 위해 관료(士大夫) 계층이 등장했다.[10]
십왕 전투에서 수다스라는 인도-아리아인 왕이 10명의 왕과 그들을 지지하는 수장들의 연합군을 패배시켰다. 철기 시대에 난다 제국과 마우리아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군대 중 하나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정점에는 보병 60만 명 이상, 기병 3만 명, 전차 8천 대, 전투 코끼리 9천 마리가 넘었으며, 이는 속국 동맹군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이다.[2][3][4][5]굽타 제국 시대에는 침입하는 기병궁수 군대를 막기 위해 장궁병이 많은 대규모 군대가 모집되었다. 코끼리, 창병, 기병도 주요 병력이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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