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민유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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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인민유격대는 194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의해 창설된 무장 조직으로, 1946년 대구 10.1 사건 이후 산으로 들어간 좌파 인사들이 그 효시이다. 일제강점기 말 민족 해방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해방과 분단 이후 미군정 시기, 남로당의 폭력 노선 채택과 맞물려 조직되었다. 주로 지리산을 중심으로 호남, 태백산, 영남, 제주도 등지에서 유격 활동을 벌였으며, 한국 전쟁 발발 전후 제주 4.3 사건, 여수·순천 사건 등과 연계되어 한국 전쟁의 내전적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9년 창설 당시에는 3개 병단 체제로 운영되었으나, 한국 전쟁 중 남부군으로 재편되었고, 이후 8개 지대 체제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한국 전쟁 휴전 이후 토벌대의 공세와 내부 분열, 외부 지원 부족 등으로 인해 세력이 약화되어, 1963년 마지막 유격대원이 사살되면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조선인민유격대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모두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관련 기록과 예술 작품을 통해 그 역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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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로동당은 1946년 결성된 남한의 좌익 정당으로, 이승만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테러와 게릴라전을 전개하다가 대한민국에서 소멸했다.
조선인민유격대 | |
---|---|
기본 정보 | |
이름 | 조선인민유격대 |
원어 이름 | 조선인민유격대 |
로마자 표기 | Joseon Inmin Yugyeokdae |
활동 기간 | 1946년 ~ 1953년 |
![]() | |
이념 및 지도부 | |
이념 |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인민전쟁론 혁명적 사회주의 |
지도자 | 이현상 김선우 김달삼 남도부 김지회 |
조직 및 규모 | |
상위 단체 | 남조선로동당 |
병력 규모 | 1,700여명 |
활동 지역 | 전역 |
관계 | |
동맹 단체 | 조선인민군 |
적대 단체 | 대한민국 경찰 백야전사령부 미군 |
적대 국가 | |
기타 정보 | |
참전 | 한국전쟁 |
2. 배경
조선인민유격대는 빨치산(파르티잔의 음역), 남부군, 공산 게릴라 등으로 불렸으며, 공비(공산비적)라는 약칭으로도 알려졌다. 현재 '공비'라는 용어는 무장한 북한 침투자를 통칭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6]
1894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면서 일본 제국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이 커졌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조약을 통해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6]
1945년 일본 항복 이후,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같은 해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6] 1946년 미군정은 남한 내 좌익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은 불법화되었다.
1946년 3월, 김일성은 북한에서 대대적인 토지 개혁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같은 해 8월에는 북조선노동당이 창당되었다. 남한에서는 1946년 9월 23일 부산에서 시작된 철도 노동자 파업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10·1 대구 사건으로 이어져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진압했다. 1946년 11월 23일에는 남조선로동당이 창당되었으나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되었다.[6]
2. 1. 일제강점기 (1910-1945)
-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6]
- 1931년 일본은 만주 사변을 일으켰다.[6]
-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6]
- 1941년 일본은 진주만 공격을 감행했다.[6]
-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중화민국, 영국, 미국은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 것"을 결정했다.[6]
-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연합국은 일본에 대한 태평양 전쟁 참전 대가로 소련에 중국과 만주에서의 전후 우위를 보장했다.[6]
2. 2. 해방과 분단 (1945-1949)
1945년 일본 항복 이후,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같은 해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6] 1946년 미군정은 남한 내 좌익 세력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은 불법화되었다.[7]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남로당은 무장 투쟁 노선을 채택하고, 일부 좌익 인사들이 입산하여 유격 투쟁을 시작했다.야산대가 속속 입산하면서 1948년부터 여러 지역에서 자생적인 유격 지구가 형성되었는데, 주목할 만한 유격 지구는 다음과 같았다.[6]
지역 | 상세 |
---|---|
호남 유격 지구 | 전남의 나주군, 영광군, 함평군, 장흥군 평야 지역 |
지리산 유격 지구 | 지리산을 중심으로 남쪽의 백운산과 북쪽의 덕유산을 연결하는 전남, 경남, 전북의 산악 지대 |
태백산 유격 지구 | 태백산과 소백산 국망봉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안동군과 청송군에 이르는 강원 남부와 경북 북부의 산악 지대 |
영남 유격 지구 | 경북 경주군, 영천군, 영일군, 청도군 등 대구 주변과 경남 양산군, 울산군, 동래군 주변 지대 |
제주도 유격 지구 | 제주 4·3 사건의 여파로 형성된 제주도 한라산 일대 지역 |
이 가운데 자연 환경이 유리한 지리산 유격 지구가 나중에 조선인민유격대의 총본산이 되었다.
1949년 6월, 남로당과 북로당이 합당해 조선로동당을 결성하고 평양에서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이 발족했다. 조국전선은 성명서에서 무장 유격 투쟁의 가능성을 암시하며, 이승만 정부에 반대해 투쟁에 나선 대한민국 국민, 즉 유격대와의 연계를 핵심 과제 중 하나로 삼았다.[7]
조선로동당 창당을 분기점으로 유격전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발생 초기의 기층적이며 자발적인 성격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업 지원으로 외부적 요인에 압도되면서, 조직적 체계가 정비되었고 상층 지도부의 선도에 따르는 방향으로 변모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유격 부대를 일원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기구로 조선인민유격대를 1949년 7월에 창설했다. 지휘 계통은 남조선로동당의 박헌영과 리승엽에 속했다.
2. 3. 정세적 배경
미군정기인 1946년에 발생한 10·1 대구 사건으로 유혈 사태가 일어나면서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이 폭력 노선을 걷게 되었고, 불법화되는 과정에서 산으로 들어간 좌파 인사들이 조선인민유격대의 효시이다.[4] 이들 가운데 일부는 2·7 사건과 제주 4·3 사건 이후 전라남도 곡성군과 구례군 일대에서 '''야산대'''로 불리던 무장 유격대로 전환했고, 야산대 일부는 1948년 여수·순천 사건 이후 군 정규 부대에서 전환한 유격대에 흡수되어 본격적인 파르티잔 활동이 시작되었다.1946년부터 이미 조선인민유격대의 전신인 야산대가 탄생하여 한국 전쟁 발발 전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는 점은 한국 전쟁의 내전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5] 조선인민유격대는 제주 4·3 사건과 여수·순천 사건을 한국 전쟁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으며, 토벌대와의 전투 과정은 일종의 '작은 전쟁'이 되어 한국 전쟁의 전초전을 형성했다.

야산대가 속속 입산하면서 1948년부터 여러 지역에서 자생적인 유격 지구가 형성되었다. 주목할 만한 유격 지구는 다음 5군데였다.[6]
번호 | 유격 지구 | 설명 |
---|---|---|
1 | 호남 유격 지구 | 전남의 나주군, 영광군, 함평군, 장흥군 평야 지역. |
2 | 지리산 유격 지구 | 지리산을 중심으로 남쪽의 백운산과 북쪽의 덕유산을 연결하는 전남, 경남, 전북의 산악 지대. |
3 | 태백산 유격 지구 | 태백산과 소백산 국망봉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안동군과 청송군에 이르는 강원 남부와 경북 북부의 산악 지대. |
4 | 영남 유격 지구 | 경북 경주군, 영천군, 영일군, 청도군 등 대구 주변과 경남 양산군, 울산군, 동래군 주변 지대. |
5 | 제주도 유격 지구 | 제주 4·3 사건의 여파로 형성된 제주도 한라산 일대 지역. |
이 가운데 자연 환경이 유리한 지리산 유격 지구가 나중에 조선인민유격대의 총본산이 되었다.
남로당과 북로당이 합당해 조선로동당을 결성한 1949년 6월에 평양에서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이 발족했다. 조국전선이 출범하면서 채택한 성명서에는 무장 유격 투쟁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다음과 같은 선언이 담겨 있다.
조국전선 결성 대회에서는 지리산의 유격대에서 보내온 전갈도 소개되었다. 조국전선의 결성은 '남조선 애국인민'들의 국토 완정을 위한 투쟁의 새로운 계기로 평가되어 이승만 정부에 반대해 투쟁에 나선 대한민국 국민, 즉 유격대와의 연계가 핵심 과제 중 하나였다.[7]
조선로동당 창당을 분기점으로 유격전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발생 초기의 기층적이며 자발적인 성격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사업 지원으로 외부적 요인에 압도되면서, 조직적 체계가 정비되었고 상층 지도부의 선도에 따르는 방향으로 변모한 것이다.
2. 4. 유격 지구의 형성
1948년부터 자생적인 유격 지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조선인민유격대는 오대산 지구의 제1병단, 지리산 지구의 제2병단, 태백산 지구의 제3병단으로 편성되었다. 제1병단은 이호제, 제2병단은 이현상, 제3병단은 김달삼과 남도부가 각각 책임자가 되었다.[8] 이 중 지리산 유격 지구가 조선인민유격대의 총본산이 되었다.2. 5. 조선인민유격대의 창설
1949년 7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유격 부대를 통합 지휘하기 위해 조선인민유격대를 창설했다. 조선인민유격대는 남로당의 박헌영과 리승엽의 지휘 계통에 속했다.[6] 남로당과 북로당이 합당해 조선로동당을 결성한 1949년 6월 평양에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이 발족했고, 같은 해 7월 조선인민유격대가 창설되었다.[7]조선인민유격대의 초기 조직은 주로 오대산 부근에서 태백산맥 줄기를 따라 남하한 유격대원이 지방당에 합류하면서 생성되었고, 총사령관은 리승엽이 맡았다. 1949년 창설 당시 조선인민유격대는 오대산의 제1병단, 지리산 일대의 제2병단(동해여단), 태백산과 경북 동해안의 제3병단으로 구성되었다. 이현상이 이끄는 제2병단은 4개 연대로 조직되었으며, 제6, 7, 8, 9연대는 각각 지리산, 백운산, 조계산, 덕유산에 근거지를 두었다. 3개 병단 체제는 1949년 말부터 1950년 초까지 토벌대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어 거의 무력화되었다.[25]

3. 활동
조선인민유격대는 빨치산(파르티잔의 음역), 남부군, 공산비적(공비) 등으로 불렸다. 현재 '공비'라는 용어는 무장한 북한 침투자를 통칭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7]
조선로동당 창당 이후 유격전은 자발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원을 받으며 조직 체계를 갖추고 상층부의 지시를 따르는 형태로 변화했다. 1949년 7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유격 부대를 통합 지휘하기 위해 조선인민유격대를 창설했으며, 지휘 계통은 남조선로동당의 박헌영과 리승엽에게 속했다.
초기 조선인민유격대는 오대산 중심의 제1병단, 지리산 일대의 제2병단, 태백산과 경북 동해안의 제3병단으로 구성되었다. 이현상이 이끄는 제2병단은 4개 연대로 조직되어 지리산, 백운산, 조계산, 덕유산에 각각 근거지를 두었다. 이들은 '아성공격' 전략에 따라 대도시의 경찰서, 관공서 등을 습격했지만, 1949년 말부터 1950년 초까지 대한민국 정부의 토벌 작전으로 1950년 초부터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25]
3. 1. 한국전쟁 이전 (1948-1950)
조선로동당 창당을 기점으로 유격전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발생 초기에는 자발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조직 체계가 정비되고 상층 지도부의 지시에 따르는 방향으로 변모했다.[7]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유격 부대를 통합 지휘하기 위해 1949년 7월 조선인민유격대를 창설했다. 지휘 계통은 남조선로동당의 박헌영과 리승엽에게 속했다.
초기 조선인민유격대는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제1병단, 지리산 일대의 제2병단, 태백산과 경북 동해안의 제3병단으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이현상이 이끄는 제2병단은 4개 연대로 조직되어 지리산, 백운산, 조계산, 덕유산에 각각 근거지를 두었다.
이들은 '아성공격' 전략에 따라 대도시의 경찰서, 관공서 등을 습격하며 인명 피해를 야기했다. 그러나 3개 병단 체제는 1949년 말부터 1950년 초까지 대한민국 정부의 적극적인 토벌 작전으로 큰 타격을 입어 1950년 초부터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25]
3. 2. 한국전쟁 (1950-1953)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조선인민군 패잔병과 남한 내 좌익 세력이 산으로 들어가 유격대를 형성하면서 한국 전쟁의 '제2 전선'이 열렸다. 이 무렵 유격대 규모는 약 8만 명으로 추산되었으나, 북으로 돌아가거나 토벌되면서 대한민국 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한 1950년 10월 말경에는 약 2만 5천 명이 남았고, 그중 1만 5천 명은 전남 지역에 있었다.[11]
3. 2. 1. 전쟁 초기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지시로 북한군의 전면 남침이 시작되어 한국 전쟁이 발발했고, 3일 만에 대한민국 수도인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했다.[10] 김일성은 전쟁 발발 다음 날인 6월 26일 밤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남반부 남녀 빨치산에게!'로 시작되는 메시지를 전달하여 조선인민유격대의 임무를 알렸다. 이에 따르면 조선인민유격대는 당 조직을 재건하여 인민 봉기를 일으킴으로써 조선인민군의 남진을 돕는 중대한 역할을 맡을 것으로 기대되었다.[10]
전쟁 개시 소식을 들은 각 지역의 유격대는 대한민국 국군과 교전을 벌이거나 동리를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등 활동에 나섰다. 이 때문에 정부에 등록된 보도연맹원들이 후방 봉기를 일으키거나 군경 가족을 학살할 것을 우려한 국군과 경찰은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다. 조선인민유격대 창설 당시 제2병단을 이루었던 지리산의 이현상 부대를 포함하여 지리산 둘레와 전남 서해안, 경북 지역 등 여러 곳에서 활동하던 유격 부대가 동시다발적으로 조선인민군의 남진에 호응했다. 주요 활동은 지역당 조직 복구에 참여하고, 인민군과 협동하여 전투를 진행하며, 군경 가족 및 우익 인사를 숙청하는 것이었다.
전쟁 초반 대한민국 국군은 낙동강까지 밀렸으나, 낙동강 전선에서부터 시작된 반격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퇴각로가 차단된 조선인민군 패잔병과 우익인사 학살을 담당하던 지방 좌익들이 보복을 두려워하여 산속으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유격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계기로 지역 당은 비합법 조직인 지하당으로 개편되었고, 대한민국 영역에 남은 사람들에게는 지하당을 중심으로 유격대 활동을 펼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3. 2. 2. 지역별 유격대
1950년 10월 경, 조선인민유격대 전남총사령부가 발족되어 전라남도 지역의 유격대원을 총괄 지휘했다.[11] 1950년 9월에는 경상남도에서 조선인민유격대 조직이 결성되었으나, 1952년 1월 지리산 대성골 전투에서 전멸했다.[20] 경상북도, 전라북도, 충청남도 등지에서도 유격대가 조직되어 활동했으나, 1952년 이후에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했다.[19]3. 2. 3. 남부군
한국 전쟁 전부터 이현상이 지리산에서 지휘하던 부대는 여순반란 사건 관련자가 많이 참여하여 상대적으로 최신 장비와 전투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인천 상륙 작전 이후 강원도로 후퇴하던 이현상은 중공군 참전 이후 강원도에서 리승엽과 대면하여 확대된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후 대열을 정비하고 조선인민유격대 독립4지대라는 새 이름으로 남하를 시작했다. 남하 과정에서 기존 대원 외에 현지에서 합류자를 받아 부대가 확장되면서, 독립4지대 산하에 승리사단, 혁명지대, 인민여단, 사령부 직속 부대를 구성할 수 있는 규모가 되었다.[15]독립4지대는 11월 15일에 강원도 세포군을 출발하여 남하한 뒤 약 9개월 후에 지리산에 도착했고, 12월부터는 남조선인민유격대 또는 남부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소백산맥을 따라 내려오는 과정에서 충청북도 보은군의 갈평이라는 산골 마을에 머물다가, 1951년 5월 26일 새벽에 청주시를 공격하여 좌익 죄수들을 탈옥시키며 위세를 떨치기도 했다.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유격대가 일시적으로나마 단독으로 도청 소재지를 점거한 것은 남부군의 충청북도 청주 점령이 유일했다.[16]
남부군은 청주 습격 후 두 갈래로 분산되었다가 기백산에서 합류한 뒤 덕유산에 숨어들었다. 1951년 7월 덕유산에서는 전남북, 경남북, 충남북의 6개 도당 수뇌부 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대한민국 영역의 조선인민유격대를 전남과 경북도당만 제외하고 일원적으로 편성해 지리산을 거점으로 한 남부군 산하에 둔다는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17] 로명선이라는 가명으로 남부군 사령관에 취임한 이현상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통합된 조선인민유격대는 사단제로 재편되어 충남은 68사단, 전북 북부는 45사단, 전북 남부는 46사단과 53사단, 경남은 57사단, 남부군은 81사단, 92사단, 602사단으로 편제되었다. 각 사단은 《승리의 길》이라는 제호로 등사판 진중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18] 남부군의 사단 편제는 청주 점령의 예에서와 같은 대규모 정면 공격을 결행해 유격대의 활동을 정규전과 유사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전략이었으나, 김일성의 지원 기피로 장기적으로는 역량의 약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3. 3. 한국전쟁 휴전 이후 (1953-1963)
1953년 7월 27일 한국 전쟁 휴전 협정이 체결될 당시, 조선인민유격대는 여전히 대한민국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들을 외면하고 지원을 기피했다. 휴전 협정에서 조선인민유격대의 지위에 대한 언급은 없었으며, 유격대원들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였다.[33]1953년 8월, 박헌영, 리승엽 등 남로당계 간부들이 숙청되면서 조선인민유격대는 조직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33] 이는 1951년 9월 이후 유격대와 조선로동당 간의 통신 두절과 맞물려, 유격대의 활동에 큰 어려움을 초래했다.
1953년 9월, 이현상의 사망과 제5지구당 해체로 조선인민유격대는 사실상 와해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적극적인 토벌 의지와 미국의 지원,[33] 전염병 피해, 전향자들의 토벌대 보조, 보급로 단절, 불리한 자연조건[39]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조선인민유격대는 점차 소멸되어 갔다.
1963년 11월 12일, 마지막 빨치산으로 불린 정순덕이 생포되면서 조선인민유격대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4. 조직과 구성
조선인민유격대는 빨치산, 남부군, 베트콩과 유사한 의미인 공산비적(공비) 등으로 불렸다. 현재 '공비'라는 용어는 무장한 북한 침투자를 통칭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4. 1. 인원
조선인민유격대에 참여한 인원은 최소 수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전해지는 자료에 모순이 있어 정확한 파악은 어렵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국방부 자료에서도 산에 남아 있는 토벌 대상 조선인민유격대원의 규모를 추산할 때와 이들을 사살한 뒤 전공을 발표할 때 자릿수가 달라질 만큼 큰 차이를 보인다.[21]
1963년 11월 12일, 마지막으로 남은 두 명 중 남성은 사살되고 여성은 생포되면서 조선인민유격대 잔존 세력은 공식적으로 소멸되었다.
4. 2. 성분 구성
전체 유격대원 가운데 여성 비율은 3~11%였다. 이는 비전투원을 제외하고 조사한 자료이므로, 여성 대원 수는 적지 않은 편이었다. 연령별로는 20대가 절반 이상으로 가장 많았고, 30대가 그 뒤를 이었다. 김지회 부대에는 10대 유격대원도 15% 포함되어 있었다. 학력은 문맹이 거의 없었고, 소학교 졸업자가 가장 많았다. 전문대학 이상 졸업자는 극히 드물었다. 김지회 부대는 중학교 졸업 이상 고학력자가 20% 이상이었다.[22]조선인민유격대는 빈농 출신이 절대다수였다. 조사된 세 부대 모두 유격대원의 80%가 빈농 출신이었다. 노동자 출신이 그 다음으로 많았다. 중농이나 부농 출신은 거의 없었다. 가계가 아닌 유격대원 본인의 출신 성분 역시 빈농과 노동자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인천시당 산하 유격대는 공업 발달 지역 특성상 노동자 비율이 높아 노동자 출신이 빈농 출신보다 많았다. 김지회 부대는 학생 출신이 약 26%였다.[22]
이러한 분석 결과는 조선인민유격대가 전직 빈농 또는 노동자 등 무산 계급 출신이면서 상대적으로 학력이 높은 20대와 30대 남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한국 전쟁 회고에 자주 나오는 '인민위원회는 마을에서 지식 있는 사람들이 많이 맡았으며, 내무서 행동대원은 대부분 빈농 출신이었다.'[23], '글을 많이 배운 사람들 거의가 공산주의자였다.'[24]라는 증언과 일치한다.
4. 3. 조직
조선인민유격대의 조직은 시기에 따라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초기 (1949년 7월 ~ 1950년 6월): 오대산의 제1병단, 지리산 일대의 제2병단, 태백산과 경북 동해안의 제3병단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이현상이 이끄는 제2병단은 4개 연대로 조직되어 지리산, 백운산, 조계산, 덕유산에 각각 근거지를 두었다. 그러나 1949년 말부터 1950년 초까지 토벌대의 공격으로 3개 병단 체제는 거의 무력화되었다.[25]
- 한국 전쟁과 도당 조직 (1950년 6월 ~ 1950년 9월):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조선인민유격대는 인민군 점령 지역에서 조선로동당과 인민위원회 조직 재건에 참여했다. 1950년 9월 인천 상륙 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되자, 전남북과 경남북의 4개 도당은 유격대를 편성하여 입산했다. 전남도당은 백아산에서, 전북도당은 회문산에서, 경남도당은 지리산 인근 함양군에서, 경북도당은 경북 산악 지역과 동해안 지역에서 유격대를 편성했다. 이 시기 조선인민유격대 조직은 도당 조직을 그대로 산으로 옮긴 형태였다.
-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1950년 9월 ~ 1951년 12월): 인천 상륙 작전 이후, 이현상은 제2병단 잔존 세력을 이끌고 북상하다 조선인민유격대 독립4지대로 개편, 다시 남하하여 남부군이라는 이름으로 지리산에 새 거점을 설치했다. 남부군은 도당 군사부를 사단 체제로 개편하고 전투태세를 정비했다.[26]
- 8개 지대 재편성 명령 (1951년 1월): 1951년 1월, 조선인민유격대는 군사적 편제만을 갖춘 8개 지대로 재편성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이 명령은 10월에야 지리산에 도착하여 대한민국 남부 지역에서는 경북도당만이 재조직되었다.[27]
- 지구당 체제 전환 명령과 부대 개편 (1951년 8월 ~ 1952년 5월): 1951년 8월, 조선로동당 중앙정치위원회는 유격대를 지구당 체제로 전환하여 당사업을 조직하라는 94호 결정서를 채택했다. 이에 따라 낙동강 서쪽의 경남, 전남북 지역은 제5지구당에 속하게 되었다.
- 제5지구당 체제 (1952년 5월 ~ 1953년 9월): 1952년 5월, 지리산에서 제5지구당이 결성되어 위원장 이현상, 부위원장 박영발을 선출하고, 전북도당 위원장 박영발, 전남도당 부위원장 김선우, 경남도당 부위원장 김삼홍, 전북도당 부위원장 조병하가 조직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조선인민유격대 최후의 지도부였다.[28] 제5지구당 체제는 1953년 9월까지 계속되었다.
5. 해체
1953년 1월 박영발의 죽음, 동년 9월 제5지구당 해체와 이현상 사망, 1954년 1월 방준표의 자살 등으로 지도부를 거의 잃은 조선인민유격대는 사실상 해체 상태에 있었다. 1954년 4월 5일 백운산에서 김선우가 사망하여 전남총사령부가 붕괴하면서 공식 해체에 가까워졌다.
이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유격대원 대부분은 소탕되었고, 잔존 세력은 '잔비'(殘匪)로 불렸다. 1955년 4월 1일 지리산 입산 통제가 해제되었을 때 대한민국 영역에 남아 있던 유격대원은 59명이었으며, 1956년 12월 31일에는 43명으로 줄었다.
1963년 11월 12일, 경상남도 산청군 지리산 기슭에서 "최후의 빨치산" 이홍이가 사살되고 정순덕이 생포되면서 빨치산은 완전히 소멸했다.[31] 1964년 5월 중순에는 산청군에서 안원도, 강우형이라는 두 명의 망실공비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도피 중 삶의 희망을 잃고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을 마지막으로 조선인민유격대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32]
5. 1. 해체 과정
대한민국 내 조선인민유격대들은 북한이나 대한민국 어느 곳에서도 정규군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김일성은 6.25 전쟁 중에도 반대파 숙청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기에 새로운 반대파들의 입북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휴전협상이 종료될 때까지 북한은 대한민국 내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는 공산 유격대를 '군인으로 인정해 북송해달라'는 요구를 일절 하지 않았다.[29]오히려 대한민국 측이 조선인민유격대를 귀찮게 여겨 데려가라고 제안해도 북한 측은 응대하지 않았다. 대신 인민유격대원들에게 '하산해 도시로 들어가 지하활동을 계속하라'는 무전 지시만을 보냈다. 유격대원들은 대부분 거지꼴이어서 하산이 어려웠고, 경찰이 잔존 대원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있어 산을 벗어나도 갈 곳이 없었다. 즉, 산을 내려가라는 지시는 일부 간부들 외에는 '하루빨리 죽으라'는 소리와 다름없었다.[30]
1953년 1월 박영발의 죽음에 이어, 같은 해 9월 제5지구당 해체와 이현상 사망, 1954년 1월 방준표의 자살로 지도부를 거의 잃고 사실상 해체 상태에 있었다. 1954년 4월 5일에 전남총사령부 사령관 김선우가 백운산에서 사망하여 전남총사령부가 붕괴한 시점에서는 공식 해체에 가깝게 되었다.
이 무렵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유격대원은 대부분 소탕되어 잔존 세력은 남은 공비라는 의미로 ‘잔비’(殘匪)로 불렸다. 1955년 4월 1일부터는 지리산에 대한 입산 통제 조치도 해제되었다. 민간인이 지리산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대한민국 영역에 남아 있던 유격대원의 수는 59명으로 파악되었으며, 1956년 12월 31일에는 43명으로 줄어들었다.
1963년 11월 12일, 경상남도 산청군의 지리산 기슭에서 "최후의 빨치산" 이홍이가 사살되고 정순덕이 생포되면서 빨치산은 완전히 소멸했다.[31] 이후 반년이 지난 1964년 5월 중순에 산청군 생초면 고읍의 용수로 둑에서 안원도, 강우형이라는 이름의 두 망실공비가 총에 맞은 변사체로 발견되었는데, 이들의 시체 주변에는 38식 소총 두 자루와 빈 술단지가 있었다. 이들 변사체는 상당히 부패해 있었는데 사망 시각은 세 달 전인 1964년 2월경으로 추정되었고, 이들은 도피와 방황 끝에 삶의 희망을 잃고 술김에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따라서 정순덕과 이홍이는 "최후의 빨치산"은 아니었으며, 이로써 조선인민유격대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32]
5. 2. 해체 요인
대한민국과 미국은 공산주의와 공생할 수 없었기에 후방을 교란하는 불안 요소인 조선인민유격대 섬멸을 지상 과제로 삼아 적극적인 토벌 작전을 펼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립된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유격대의 궤멸은 필연적이었다.[33]
- '''대한민국의 토벌 의지''': 1953년 휴전 협정 체결과 함께 정전 체제가 굳어지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인민유격대 섬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 '''미국의 토벌 지원''': 미국은 조선인민유격대 섬멸을 위해 현대식 무기와 장비를 지원했다. 미국 제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는 조선인민유격대 토벌에 미군 병력을 투입하고 직접 작전을 지휘하기도 했다.[34]
- '''전염병 피해''': 1951년 봄부터 조선인민유격대에 '재귀열병'이라는 유행병이 돌면서 전투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재귀열병과의 투쟁은 조국을 위한 투쟁이다.'라는 구호가 나왔을 만큼 유격대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말라리아와 유사한 증상을 일으키는 이 병의 창궐에 대해서는 미국의 생물학 무기 실험 결과였다는 주장[35][36] 이 있으나,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 측은 이 같은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37]
- '''남조선로동당의 몰락''': 1951년 9월 이후 유격대와 조선로동당 간의 통신은 두절되었다. 1953년 3월부터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 계열이 숙청되면서 타격을 받았다.
- '''전향자의 토벌대 보조''': 체포된 전직 유격대원 가운데 전향자를 중심으로 한 보아라부대가 편성되어 대한민국 군경 토벌대를 보조했다.[38] 이들은 아지트 위치와 이동 경로 등 유격대의 행동반경을 알고 있어 큰 위협이 되었다.
- '''보급로 단절''': 조선인민유격대는 김일성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자체 보급에 의존했다. 초기에는 주민들의 지원을 받았으나, 단속 강화와 비인간적인 학살 작전으로 민심이 돌아서면서 보급품 조달이 어려워졌다.
- '''불리한 자연조건''': 험준한 지리산도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는 은신처를 마련하기 어려웠다. 혹한기의 추위와 눈 때문에 이동 자취가 드러나 대한민국 군경은 겨울철을 토벌의 최적기로 삼았다.[39] 조선인민유격대는 1951년 겨울부터 1952년 봄까지 수도사단과 8사단 중심의 1차 공격, 1953년 겨울부터 1954년 봄까지 5사단이 주도한 2차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40]
6. 주요 인물 및 장소
조선인민유격대는 빨치산(파르티잔의 음역), 남부군, 공산비적(공비) 등으로 불렸다. '공비'라는 용어는 현재 무장한 북한 침투자를 통칭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6. 1. 인물
조선인민유격대와 관련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구분 | 인물 | 출생-사망 | 주요 활동 및 특징 |
---|---|---|---|
조선인민유격대 측 | 이현상 | 1905년-1953년 | 남조선로동당 간부, 지리산 유격대 지휘, 남부군 사령관[41] |
김선우 | 1918년-1954년 | 전라남도 보성군 출신, 전남도당 군사 책임자, 유격대 사령관[42][43] | |
김달삼 | ? - ? | 제주 4·3 사건 주도, 태백산 유격대 지휘 | |
남도부 | 1921년-1955년 | 본명 하준수, 건국준비위원회 참여, 이현상과 함께 빨치산 지도[44] | |
김지회 | ? -1949년 | 여수·순천 사건 주도, 유격대 지휘[45] | |
정순덕 | 1933년- | “마지막 빨치산”[46][47][48] | |
리인모 | 1917년- ? | 조선인민군 종군기자 출신, 비전향 장기수[49] | |
대한민국 군경 토벌대 측 | 백선엽 | 1920년- ? | 만주국군 장교 출신, 1사단장, 백야전사령부 지휘[50] |
차일혁 | 1920년- ? | 조선의용대 출신, 경찰 간부,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51] |
6. 1. 1. 조선인민유격대 측
1905년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태어난 이현상은 학생 운동을 시작으로 1930년대 노동 운동 부문에서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주었으며, 일제 강점기 동안 총 네 차례 수감되었으나 전향하지 않고 경성콤그룹 조직을 보존했다. 광복 후 남조선로동당 결성에 핵심 역할을 하였고, 강동정치학원에서 특수 교육을 받은 뒤 남하하여 지리산에서 유격대를 이끌었다. 여러 지역에 편성되었던 조선인민유격대가 한국 전쟁 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본래 이현상 부대를 가리키는 남부군이 조선인민유격대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될 정도로 빨치산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1953년 9월에 지리산 빗점골에서 사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41]
전남 보성군 출생인 김선우는 일제 강점기 공무원으로 일제에 부역하다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42] 조선로동당 전남도당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오갔으나 군사 조직에서는 전남 지역 유격대 사령관으로서 유격전을 전담하였다. 이는 전남도당 위원장인 박영발이 과거에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을 때 고문을 받아 다리를 절었기 때문이다. 박영발의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 움직임이 민첩하지 못한 신체적인 한계 때문에 군사 작전을 김선우가 주로 맡게 되었다. 김선우는 구빨치 출신으로서 풍부한 유격전 경험을 갖추고 있었다.[43] 이현상과 박영발의 연이은 죽음 이후 조선인민유격대의 마지막 잔존 세력을 이끌던 중, 백운산 아지트에서 토벌대의 포위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김선우가 사망한 1954년 4월 5일을 조선인민유격대가 붕괴한 날로 보기도 할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다.
제주 출신인 김달삼은 일제 강점기부터 사회주의 운동가로 유명했던 강문석의 사위로, 제주도에서 교사로 재직한 지식인이었다. 남조선로동당 제주도당 책임자이자 군사부 책임자가 되어, 1948년 대한민국 제헌 국회 총선으로 단독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하며 봉기한 제주 4·3 사건을 총지휘했다. 태백산에서 유격대를 이끌다가 한국 전쟁 발발 전에 사살되었다고 알려졌다.
남도부의 본명은 하준수이며, 1921년에 경남 함양군의 천석꾼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주오 대학에 재학 중 태평양 전쟁 학병 징집을 거부하며 지리산에 은거하며 보광당을 결성하였으며 해방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였다.[44] 보광당은 조선인민유격대로 이어졌고 남도부는 이현상과 쌍벽을 이룬 빨치산 지도자가 되었다. 1954년 대구에서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다.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의 주인공이다.
- 김지회·조경순 부부
김지회는 여수·순천 사건 당시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서 반란을 주도했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가 김지회 부대로 불리는 유격 부대를 이끌었다.[45] 제1공화국 정부 수립 2개월 만에 발생한 이 사건은 전남 동부 지역을 순식간에 장악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당황하게 했고, 주변 지형에 익숙한 향토 게릴라가 정규군을 괴롭히는 전형적인 국면으로 들어섰다. 김지회는 홍순석과 함께 지리산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지휘하던 중, 1949년 4월 뱀사골 전투 후 사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간호사 출신인 김지회의 부인 조경순은 여성 유격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전향을 거부함으로써 그해 9월 사형에 처해졌다.
“마지막 빨치산”으로 알려진 정순덕은 1933년 경남 산청군에서 태어났다. 만 17세이던 1951년 2월에 조선인민유격대 대원인 남편을 찾기 위해 지리산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빨치산으로 활동하게 되었다.[46] 1963년 11월에 지리산 내원골에서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생포[47] 되었고,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 수감되어 1985년 풀려날 때까지 약 23년간 장기수로 옥살이를 했다.[48]
1917년 함경북도 풍산군에서 태어난 리인모는 조선인민군 종군기자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전쟁 중 낙오하여 지리산에서 조선인민유격대에 합류하면서 신빨치가 되었다가 1952년 체포되었다. 이후 총 34년 동안 복역하면서 전향하지 않고 비전향 장기수로 남았다.[49] 리인모는 인민군 출신이며 전쟁 중 붙잡혔다는 점 때문에 전쟁 포로로 대우하여 북송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장기 방북 형식을 빌려 송환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리인모를 “신념과 의지의 화신”이며 살아남아 끝까지 투쟁한 유격대원의 모범으로 높이 칭송하고 있다.
6. 1. 2. 대한민국 군경 토벌대 측
백선엽은 1920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만주국 간도특설대 소속 장교로 만주 지역 항일 무장 세력 토벌에 종사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미군정 하의 대한민국으로 월남하여 육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한국 전쟁 때 1사단을 이끌었고, 1951년 백야전사령부를 구성하여 '쥐잡이 작전'으로 불리는 무장 공비 토벌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 지리산의 유격대를 와해시켰다.[50] 조선인민유격대와 대척점에 있던 토벌대 측 시각을 담은 회고록을 남겼다.차일혁은 1920년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성계리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가 중앙군관학교 황포분교 정치과를 졸업한 뒤, 1938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의용대에 들어가 팔로군과 함께 항일 유격전 활동을 펼쳤다.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경찰에 특채되어 무장 공비 토벌을 위한 경찰 부대를 지휘하는 경찰 간부가 되었다.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으로 토벌대를 이끌었다. 갈 곳 없는 이현상의 시신을 화장해 주고 화엄사 소각 명령을 거부하는 등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다는 평가가 있다.[51]
6. 2. 장소

피아골은 전라남도 구례군에 있으며, 지리산 8경으로 꼽힐 만큼 단풍이 아름다운 계곡이다. 한국 전쟁 직후 조선인민유격대의 가장 큰 아지트로 토벌대와 유격대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진 곳이었다.[52] 본래 피를 재배한 피밭골에서 피아골이라는 이름이 나왔으나, 현대사의 비극이 응축된 곳이라 이곳에서 살해된 사람들이 흘린 피로 골짜기가 붉게 물들여져 피아골로 불리게 되었다는 민간어원설이 등장하기도 했다.
뱀사골은 지리산 북사면인 전라북도 남원시에 있는 계곡이다. 1949년 4월 여수·순천 사건의 주동자 김지회가 사살된 것을 시작으로 조선인민유격대와 토벌대 간의 격전지가 되었다. 조선로동당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의 아지트가 있었고, 토벌대의 포위 속에서 사망한 장소이다.[53]
대성골은 지리산 남부 능선의 서쪽 사면에 있는 깊고 큰 골짜기로 여러 물줄기가 모여드는 장소이다. 이곳에서 조선인민유격대 경상남도 조직이 1952년 1월에 전멸한 것을 비롯해 이현상이 사망한 빗점골도 가까이 있어 ‘빨치산 몰살지’이자 ‘피의 골짜기,’ ‘원한의 계곡’으로 알려져 있다.[54]

빗점골은 지리산 남부 능선 벽소령과 토끼봉 사이에 있는 계곡으로, 지리산 중앙부에 있으며 행정 구역으로는 경상남도 하동군에 속한다. 이곳 너덜 지대에서 이현상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벽송사는 목각 장승으로 유명한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의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이며, 칠선계곡 인근에 있다.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유격대의 야전 병원으로 사용되었다가 토벌대와의 교전을 거치며 전소되었다.[56]
법계사는 경상남도 산청군의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이며, 천왕봉에서 중산리로 내려가는 길에 있다. 남조선로동당 경남도당의 지휘본부가 있었다.
7. 평가 및 시각
6월 항쟁 이전까지 대한민국에서 조선인민유격대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되었으나, 이후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태의 《남부군》 출간과 생존자 증언을 통해 다양한 시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인민유격대를 둘러싼 시각은 여전히 극좌 모험주의 비판, 멸절 대상인 국가의 적으로 보는 관점, 온정적 시각 등이 혼재되어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경상남도 산청군의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 개관, '빨치산 추모제' 논란, 파주시 연화공원 묘역 파괴 사건 등은 이러한 논란을 보여주는 사례이다.[59][60][61][62][63][6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인민유격대를 ‘인민공화국의 전사’로 칭송하며 이현상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애국렬사 칭호와 조국통일상을 추서하는 등 공식적으로는 높이 평가했다.[65] 그러나 1951년 94호 결정서를 통해 “전쟁 이후의 빨치산 사업이 결정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을 질책하고, 박헌영 리승엽 숙청 사건을 통해 지도부를 미국의 간첩으로 결론 내리는 등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66]
7. 1. 대한민국
대한민국에서 조선인민유격대에 대한 언급은 6월 항쟁 이전까지는 금기시되었다. 전투사 연구 차원의 전적 정리만이 예외였다. 조선인민유격대를 포악한 모습으로 그린 반공영화 《피아골》(1955)도 검열에서 곤란을 겪었을 정도[57]였으며, 신동엽의 시 〈진달래 산천〉(1959년)에는 매우 암시적인 기법으로 등장한다. 이후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을 거치며 반공주의가 심화되어 다른 시각의 조명은 거의 불가능했다.학술적으로는 1984년에 나온 김남식의 《남로당 연구》가 최초로 냉전적 시각에서 벗어난 조선인민유격대 관련 연구로 평가된다.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제6공화국이 수립되고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이태의 수기 《남부군》이 호응을 얻은 것을 계기로 생존자의 증언이 회고 형태로 공개되면서 다양한 관점의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58]

냉전 체제 약화와 함께 등장한 온정적 시각은 조선인민유격대를 극좌 모험주의로 비판하거나 과거와 같이 멸절 대상인 국가의 적으로 보는 관점과 여전히 공존 중이다. 경상남도는 2001년 산청군에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을 개관하여 조선인민유격대의 아지트를 복원하여 실물 자료와 모형을 전시[59]하였는데, 전시관 명칭에 들어가는 ‘빨치산’, ‘공비’, ‘토벌’ 등의 용어를 둘러싸고 39사단 등 군 당국이 불쾌감을 표시하는 등 설립 과정에서 논란을 빚은 바 있다.[60] 이 사건은 대한민국 내에 조선인민유격대에 대한 여러 시각이 혼재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2006년에 열린 이른바 ‘빨치산 추모제’ 행사에 전라북도 지역의 한 교사가 중학생들을 인솔해 참석한 것을 계기로 다양한 견해가 충돌하기도 하였다. 이때 《조선일보》가 연이어 비판 기사를 싣자, 반대파에서는 이를 색깔론, 마녀 사냥으로 반박하여 논쟁이 인 바 있다.[61][62] 조선인민유격대원으로 활동했던 류낙진을 비롯해 비전향 장기수 6명을 안치한 파주시의 연화공원 묘역을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유린”한다는 지적[63] 끝에 2005년 파괴되어 유해가 이장된 사건도 비슷한 경우이다.[64]
7.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인민유격대를 ‘인민공화국의 전사’로 칭송하며 높이 평가했다. 이현상은 최초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애국렬사 칭호를 받았으며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65]그러나 조선인민유격대 지도부에 대해서는 1951년 8월 31일에 채택한 94호 결정서를 통해 “전쟁 이후의 빨치산 사업이 결정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을 질책하는 등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66] 이러한 관점은 김일성의 반대파 숙청 작업 중 하나로, 조선인민유격대의 최고 지도부를 박헌영과 함께 미국의 간첩이라고 결론 내린 박헌영 리승엽 숙청 사건의 결과로 더욱 확고해졌다. 분단으로 인해 자료 수집이 어려워 한국 전쟁 중 유격대 활동에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학술 연구는 북위 38도선 이북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8. 관련 기록과 예술 작품
다음은 대한민국의 조선인민유격대 관련 주요 문헌과 예술 작품들이다.
분류 | 제목 | 저자 및 출판사 |
---|---|---|
조선인민유격대 1차 자료 | 《빨치산자료집》 | 한림대아시아문화연구소, 1996 |
전투사 문헌 | 《공비토벌사》 | 대한민국 육군본부, 1954 |
《공비연혁》 | 대한민국 육군본부, 1971 | |
《대비정규전사》 | 대한민국 국방부, 1988 | |
토벌대 출신자의 수기 |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 | 차길진, 기린원, 1990 |
《지리산 공화국》 | 김두운, 신세대사, 1991 | |
《실록 지리산》 | 백선엽, 고려원, 1992 | |
유격대 출신자의 수기 또는 전기 | 《남부군》 | 이태, 두레, 1988 |
《여자 빨치산》 | 김산, 창작예술사, 1988 | |
《빨치산》 | 이영식, 행림출판, 1988 | |
《실록 정순덕》 | 정충제, 대제학, 1989 | |
《총과 백합꽃》 | 김영, 좋은책, 1989 | |
《젊은 혁명가의 초상》 | 최태환·박혜강, 공동체, 1989 | |
《빨치산의 딸》 | 정지아, 실천문학사, 1990 | |
《빨치산 철창수첩》 | 김영, 한겨레, 1990 | |
《비트》 | 김세원, 일과 놀이, 1993 | |
《끝나지 않은 여정》 |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증언반, 대동, 1996 | |
《이현상 평전》 | 안재성, 실천문학사, 2007 | |
소설 | 《지리산》 | 이병주, 세운문화사, 1978 |
《겨울골짜기》 | 김원일, 민음사, 1986 | |
《태백산맥》 | 조정래, 해냄, 1987 | |
《녹슬은 해방구》 | 권운상, 백산서당, 1989 | |
《남도부》 | 노가원, 월간 말, 1993 | |
《천둥소리》 | 김주영, 문이당, 2000 | |
《빨치산》 | 유기수, 한국문인협회, 2002 | |
《백두대간》 | 신진탁, 정은출판, 2005 | |
《남도빨치산》 | 정관호, 매직하우스, 2008 | |
만화 | 《꽃》 | 박건웅, 새만화책, 2004 |
시집 | 《지리산 갈대꽃》 | 오봉옥, 창작과비평사, 1988 |
《빨치산 편지》 | 이원규, 청사, 1990 | |
《아 삼팔선》 | 안도섭, 천우, 2007 | |
영화 | 《피아골》 | 이강천, 1955 |
《산불》 | 김수용, 1977 | |
《장마》 | 유현목, 1979 | |
《남부군》 | 정지영, 1990 | |
《태백산맥》 | 임권택, 1994 | |
《송환》 | 김동원, 2003 | |
《잊혀진 여전사》 | 김진열, 2004 | |
연극 | 《밥꽃수레》 | 놀이패 한두레, 2002 |
드라마 | 《여명의 눈동자》 | 문화방송, 1991~1992 |
문학 분야에서는 한국 전쟁 중 전쟁 문학의 일환으로 조선인민유격대의 투쟁을 그린 작품이 등장[67]한 이래 유격대원 출신으로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를 소재로 삼은 장편 소설까지 꾸준히 다루어지고 있다. 전자의 예로는 제주도를 “영웅의 섬,” 지리산을 “백절불굴의 전구”로 묘사한 임화의 시 〈기지로 도라가거든〉(1952년)을 들 수 있고,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 2002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지리산의 갈범》이 있다.[68]
평양에 건설된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에는 〈적후 인민유격대원들의 투쟁〉이라는 이름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군상 형태로 조성된 이 조형물은 유격대원으로 여성과 노인, 소년을 형상화하여 조선인민유격대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음을 강조했다.
1960년대 초반에 당시까지 지리산에 남아 있던 정순덕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와 가극이 제작 추진된 바 있다.[69] 다부작 예술 영화 《민족과 운명》 가운데 리인모의 한국 전쟁 중 활동과 수감 생활을 그린 리정모 편이 삼부작으로 만들어져 인기리에 상영되기도 했다.[70]
9. 명칭
조선인민유격대는 다음과 같은 명칭으로 불린다.
- '''빨치산'''(ppalchisan): 파르티잔의 음역이다.
- '''남부군'''(nambugun)
- '''공산비적'''(kongsan bijok): 베트콩과 같이, 공산주의(공산)는 communism을 의미한다.
- '''공비'''(kongbi): 공산비적의 약칭이다.
- '''공산 게릴라'''(communist guerrillas)
현재 공비라는 용어는 무장한 북한 침투자를 통칭하는 일반적인 용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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