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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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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분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고제를 섬기면서 관직에 진출하여 태자태부, 구경을 거쳐 제후상까지 역임했다. 그는 공손하고 신중한 성품으로, 아들 넷이 모두 이천석의 관직에 오르자 '만석군'으로 불렸다. 석분은 96세로 사망했으며, 그의 가문은 효와 공손함을 중시하는 가풍으로 널리 알려졌다.

2. 생애

석분은 고제항우를 치기 위해 하내를 지날 때 고제를 섬겨, 문제 때 태중대부가 되었다. 경제구경에 이르렀으나, 지나치게 공손하여 제후국의 으로 전출되었다.

경제는 석분의 아들 4명이 모두 이천석 관료가 된 것을 칭찬하며, 석분을 만석군(萬石君)이라 불렀다. 석분은 경제 말년에 은퇴하여 상대부의 녹을 받으며 조정 행사에 참여했다. 무제 건원 2년(기원전 139년), 태황태후 두씨는 석분의 장남 석건을 낭중령, 막내 석경내사로 임명했다.

원삭 5년(기원전 124년), 석분은 96세[1]로 사망했다. 아들 석건은 아버지의 죽음을 애통해하다 이듬해에 죽었고, 석경은 후에 승상이 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석분은 고제항우를 치기 위해 하내를 지날 때, 열다섯 살의 나이로 고제를 섬기기 시작했다. 고제는 석분의 공손함을 마음에 들어하여 중연(中涓)에 임명하고, 그의 누이는 미인(美人)으로 삼았다.[2] 석분은 공로를 쌓아 문제 때 태중대부가 되었다. 학문은 부족했지만, 공손하고 신중한 면모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문제 때 태자태부 장상여가 면직되자, 주변의 추천으로 석분이 태자태부에 임명되었다. 경제 즉위 후에는 구경에 이르렀으나, 지나치게 공손한 성격 탓에 제후국의 으로 전출되었다.

석분의 네 아들 (석건, 석경 포함)들은 모두 품행이 바르고 신중하여 관직이 이천석에 이르렀다. 경제는 이를 칭찬하며 "신하로서의 존귀함과 총애가 한 집안에 모였다"라고 말했고, 이때부터 석분은 만석군(萬石君)이라 불렸다.

경제 말년에 석분은 은퇴하여 상대부의 녹을 받으며 조정 행사에 참여했다. 그는 자손에게 과실이 있으면 직접 꾸짖는 대신 식사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르쳤다. 자손들은 서로 책망하고, 장로의 주선으로 속옷을 벗고 사죄한 후에야 용서받을 수 있었다. 황제가 음식을 하사하면 마치 황제 앞에 있는 것처럼 머리를 숙여 예를 갖추고 식사했다. 이러한 석분 가문의 효행과 공손함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져, 제나라와 노나라의 유학자들조차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무제 건원 2년(기원전 139년), 낭중령 왕장이 실각하자, 태황태후 두씨는 석분의 장남 석건을 낭중령, 막내 석경내사로 임명했다.

원삭 5년(기원전 124년)에 사망했다. 향년 96세.[1]

2. 2. 태자태부와 구경 시절

문제 때 태자태부 장상여가 면직되자, 석분은 주변의 추천을 받아 태자태부에 임명되었고, 경제 때에는 구경에 이르렀다.[2] 그러나 사람됨이 너무 공손하여 가까이 지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제후국의 으로 전출되었다.

석분의 맏아들 석건, 막내아들 석경을 비롯한 네 아들들이 모두 품행이 바르고 신중하여 관직이 이천석에 이르렀다. 경제는 "석군(石君)과 네 아들이 모두 이천석의 지위에 있으니, 신하된 자로서의 존귀함과 총애가 한 집안에 모였구나."라고 말하였다. 이때부터 석분은 '''만석군'''(萬石君)이라고 불렸다.[2]

2. 3. 만석군으로 불리다

경제는 석분의 아들 4명이 모두 효행과 공손함으로 이천석의 관료가 된 것을 칭찬하며 "석군과 4명의 아들은 모두 이천석이 되었다. 인신의 존총이 석가의 문에 집합했다"라고 말했다.[2] 이천석이 5명이 되었기 때문에, 석분은 만석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경제 말년에 석분은 노령으로 은퇴하여 상대부의 녹을 지급받고 조정의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자손에게 과실이 있으면 직접 책망하지 않고 식사를 하지 않았으며, 이에 자손들이 서로 책망하고 장로의 주선으로 속옷을 벗고 사죄해야 겨우 용서받았다. 자손 중에 관을 쓰는 사람이 있으면 연회에서도 관을 썼다. 황제가 음식을 하사하면 마치 황제 앞에 있는 것처럼 반드시 머리를 숙여 평복하고 식사했다. 장례식을 거행할 때는 매우 슬퍼했으며, 자손들도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 만석군의 집의 효행과 공손함은 전국에서도 유명해져, 제나라와 노나라의 유학자조차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무제 건원 2년(기원전 139년), 유학자인 낭중령 왕장이 실각하자, 태황태후 두씨는 실질 없는 유학자보다 말하지 않고 실행하는 만석군이 더 낫다고 생각하여, 석분의 장남 석건을 낭중령, 막내 석경내사로 삼았다.

석건도 머리가 희어질 나이였지만, 석분은 병도 없이 건강했다. 석분은 무릉의 능리로 이주했다. 어느 날, 내사 석경이 술에 취해 귀가할 때 차에서 내리지 않고 외문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들은 석분은 식사를 하지 않았고, 석경이 속옷을 벗고 사죄해도 용서받지 못했으며, 형 석건과 일족 모두가 속옷을 벗고 사죄했다. 석분은 "내사는 귀인이며, 마을에 들어가면 마을의 장로도 모두 도망가는 것인데, 내사가 차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괜찮은 것인가!"라고 질책했다. 이후, 석경들은 마을 문을 지나갈 때, 종종걸음으로 집까지 가게 되었다.

원삭 5년(기원전 124년)에 사망했다. 향년 96세.[1] 석건도 통곡하며 지팡이를 짚고 겨우 걸을 정도로 슬픔에 잠겼다. 1년여 후에 석건도 사망했다. 석경은 후에 승상에 이르렀다.

2. 4. 만년과 죽음

원삭 5년(기원전 124년)에 석분은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 맏아들 석건은 아버지의 죽음을 애통해하다가 이듬해에 죽었다. 막내 아들 석경은 후에 승상에 이르렀다.

참조

[1] 서적 『漢書』斉召南注・洪亮吉注・王先謙注
[2] 문서 후궁 (중국)|후궁의 등급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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