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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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주암은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장교로 복무한 뒤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한 인물이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제1사단 참모장, 헌병 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나, 군 부대 연탄 저장소 관리권 매각 혐의로 물의를 빚었다.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으며, 차남은 법학자 석광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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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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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석주암 |
본관 | 충주(忠州) |
출생일 | 1916년 6월 9일 |
사망일 | 1999년 7월 19일 (83세) |
출생지 | 일제강점기 함경북도 무산군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 108호 |
가족 | |
자녀 | 석광현(차남) |
군 경력 | |
소속 | 만주국군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만주국 육군 (1941년 ~ 1945년) 대한민국 육군 (1947년 ~ 1958년) |
최종 계급 | 만주국 육군 상위(대위) 대한민국 육군 소장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
지휘 | 육군본부 정보국 국장 육군본부 포병국 국장 육군본부 헌병참모부 부장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부장 |
기타 이력 | |
서훈 내역 | 자유민주연합 특임고문 |
2. 학력
- 만주국 봉천군관학교 제8기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제3기
- 대한민국 통위부 보병학교 졸업
3. 생애
석주암은 일제 강점기에 만주국 봉천군관학교 군관후보생 제8기로 만주군 장교로 임관하여 태평양 전쟁 종전 시점에 만주군 포병 대위로 복무하였다.[13] 일본 제국 패망 후 만주국이 소멸하자 미군정 지역으로 내려와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 육군사관학교 3기 임관 후 제7여단 참모장을 거쳐 1949년 제5사단 참모장을 지냈다.[13]
한국 전쟁 발발 시에는 백선엽의 제1사단 참모장으로,[14] 낙동강 전투와 1950년 10월 제1사단의 평양 탈환 작전에 참가했다. 1952년 준장으로 대한민국 육군 헌병사령관, 이후 육군 정보국장을 역임했다.
1951년 5월 1일 육군본부 전사감, 1951년 10월 26일 경상북도 지구 병사구 사령관,[6] 1952년 9월 10일 헌병 사령관(준장),[7] 1953년 5월 16일 소장으로 임명되었다.[8] 같은 해 8월 19일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지냈다. 1954년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을 졸업하고, 1955년 제29사단장, 1957년 8월 2일 제6관구 사령관을 지냈다.[9]
1958년 군 부대 연탄 저장소 관리권 독직 사건으로 육군 소장 계급으로 육군 중앙 규율 위원회에 회부되었다.[15] 1959년 3월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10] 이후, 1976년 대우중공업 고문을 지냈다.
2008년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군 부문에 포함되었다.[11]
3. 1. 일제 강점기 및 해방 직후
일제 강점기 만주국 펑톈의 봉천군관학교 군관후보생 제8기로 만주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 만주군 포병 대위였다.[13] 1940년 12월 만주국군 간부 양성소 중앙육군훈련처 제8기를 졸업하고, 견습 군관을 거쳐 1941년 4월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시점에는 포병 상위였다. 종전 후, 한교 보호를 위해 만주국군 조선인 군관을 중심으로 신경보안사령부(정일권 사령관)가 조직되자 경비대 교관을 맡았다.[2]일본 제국 패망으로 만주국이 소멸하자 미군정 지역으로 내려와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했다. 1946년 3월 미군정 하 한반도로 귀국,[3]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3기로 임관하였다. 1949년 제5사단이 백선엽 사단장의 지휘로 전라남도 화순군에 본부를 설치하고 조선인민유격대와 전투에 들어갔을 때 제5사단 참모장을 지냈다.[13] 같은 해 12월, 미군정 지역(후의 대한민국) 경비사관학교 제2기 졸업(군번 10222번)하였다. 1947년 12월 1일 제1여단 작전 참모(대위),[4] 1949년 1월 15일 제7여단 참모장(중령),[4] 같은 해 3월 15일 제5여단 참모장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발발 시점에 백선엽의 제1사단 참모장이었다.[14] 1950년 5월 제1사단 참모장(대령)을 지냈다. 낙동강 전투를 거쳐 1950년 10월 제1사단의 평양 탈환 작전에 참가했고, 1952년 준장으로 대한민국 육군 헌병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육군 정보국장을 거쳤다. 임진강 전투와 다부동 전투 등에 참가했으며, 1950년 10월 평양 진격 중 탑승했던 지프가 지뢰에 접촉하여 다리를 다쳐 후송되었다.[5]
1958년 군 부대 연탄 저장소 관리권을 팔아넘긴 독직 사건이 드러났다.[15] 당시 계급은 육군 소장이었다. 1957년 8월, 1년 동안 군 부대 연탄 저장소 관리권을 서울 석탄 회사에 대여하는 형식으로 500만원을 받고 매각한 혐의로 육군 중앙 규율 위원회에 회부되었다.
3. 2. 대한민국 국군 복무
일제 강점기 만주국 펑톈(봉천)에 있는 봉천군관학교 군관후보생 제8기로 만주군 장교로 임관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종전될 때 만주군 포병 대위로 복무 중이었다.[13]일본 제국 패망으로 만주국이 소멸하자 미군정 지역으로 내려와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했다. 육군사관학교 3기 임관 후 제7여단 참모장을 거쳐, 1949년 제5사단이 사단장 백선엽의 지휘로 전라남도 화순군에 본부를 설치하고 조선인민유격대와 전투에 들어갔을 때 제5사단 참모장을 지냈다.[13]
한국 전쟁 발발 시점에는 백선엽의 제1사단 참모장이었다.[14] 낙동강 전투를 거쳐 1950년 10월 제1사단의 평양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고, 1952년 준장으로 대한민국 육군 헌병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육군 정보국장을 거쳤다.
1958년 군 부대의 연탄 저장소 관리권을 팔아넘긴 독직 사건으로 처벌받았다.[15] 이때 계급은 육군 소장이었다.
3. 3. 군 복무 중 논란
1958년 육군 소장 시절, 군 부대의 연탄 저장소 관리권을 팔아넘긴 독직 사건으로 1957년 8월에 1년 동안 군 부대의 연탄 저장소 관리권을 서울 석탄 회사에 대여하는 형식으로 500만 환을 받고 매각한 부정 혐의로 육군 중앙 규율 위원회에 회부되었다.[15][11]4. 사후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군 부문에 선정되었다.
법학자 석광현이 석주암의 차남이다.
참조
[1]
웹사이트
"[충북의성씨를 찾아서]충주-홍주석씨(忠州-洪州石氏)"
https://www.ccdailyn[...]
2013-01-03
[2]
뉴스
중국인들 무자비한 한인보복살인 교민 자유 위해 보안사 설치-김홍일장군 권고따라 천신만고 끝에 귀국
http://news.joins.co[...]
1982-11-29
[3]
뉴스
"(3596) 제79화 제79화 육사졸업생들(49) 장창국"
http://news.joins.co[...]
1982-12-23
[4]
서적
제주4・3사건자료집5[군경자료편1]
http://43archives.or[...]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5]
서적
若き将軍の朝鮮戦争
[6]
서적
兵務行政史 上巻
兵務廳
[7]
뉴스
石主岩(석주암) 准將(준장) 新任(신임)
http://www.busan.com[...]
1952-09-13
[8]
뉴스
元 少將, 中將으로
http://www.busan.com[...]
1953-05-29
[9]
뉴스
陸軍 少將級 補職 發令
http://www.busan.com[...]
1957-08-04
[10]
뉴스
政府人事
http://www.busan.com[...]
1959-03-21
[11]
뉴스
[명단]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자 4776명
http://www.ohmynews.[...]
2008-04-29
[12]
뉴스
부음
조선일보
1999-07-20
[13]
뉴스
전남지역 제5사단 전투사령부의 활동 상황
호남신문
1949-11-13
[14]
뉴스
老兵이 걸어온 길 (25) - 부대 재편성
http://kookbang.dema[...]
국방일보
2008-06-18
[15]
뉴스
石主岩소장등 7명을 징계. 중앙특별징위에 회부키로
조선일보
1958-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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